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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으로 가는 감사패(感謝牌)
이원우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한 끝에 옛 전우를 찾았다. 하여튼 그가 여기저기 묻고 온갖 통신 수단 등을 동원하는 등 발버둥을 쳐 왔는데, 엉뚱한 데서 실마리를 찾게 된 거다. 그는 부르짖었다. 아, 드디어 난제 중의 난제를 해결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거짓 아니었어!
제대 반세기에 네댓 해를 보탠 예비역인 그가, 오래전 이승을 떠난 사단장에게 감사패를 직접(?) 전하려 하는 것이다. 일찍이 유례를 찾을 수 없었음은 물론 실로 기가 막히는 일이다. 그런데 실은 동행해야 할 단 한 명의 옛 전우의 연락처를 모른 채 헤맸었던 거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촌로’ 이건풍이다. 촌로! 마을 촌(村) 자를 써 버릇하다 보니 얼떨결에 튀어나오는 말버릇이다. 참, 그의 나이를 정확하게 밝히자. 공교롭게도 12월 마지막 날이 생일이라 연말에 만으로 일흔아홉이다. 그도 이제 여생이 쥐꼬리만 하다는 이야기가 제법 귀에 익어 있다. 그래도 그는 어느 정도 건강이 괜찮아, 이런저런 일로 가끔 서울을 찾는다.
이건풍은 영등포 구청 근처의 초등학교 앞에서 서예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불무리’란 현판이 붙어 있는….논설도 겸해 가르친다. 20년이 가까워지고 있으니, 지역사회에서도 어느 정도 그 존재가 알려져 있을 수밖에. 그의 실력? 성급하게 언급하지 말고 뒤로 미루자.
서예에 일가를 이루고 있는 사람은 고(故) 우죽 양진니(楊鎭尼) 선생은 알 것이다. 수십 년 전 어느 해,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적이 있는 대가(大家)다. 그가 5‧16 직후 삼랑진 초등학교에 잠시 몸을 담고 있을 때, 이건풍의 집에 자주 들렀다. 이건풍의 백형(伯兄)과 친구 사이여서다. 그게 인연이 되어 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이건풍이 서예를 시작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는 양진니 선생을 사사(私事)한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붓과 먹, 화선지에 매달린 결과, 그는 나중 국전에 특선을 두 번 했다. 한데 예서 우죽 선생의 유명한 말을 떠올리면 어떨까? 자기가 앞으로 오직 궁체에만 매달린다고 쳐도 일중(一中) 김충현 선생 흉내조차 못 낸다는….
물론 우죽 선생은 한글이 전문이 아니었다. 그만큼 일중 선생의 궁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는 뜻을 에둘러 말한 거다. 여기서 꼭 덧붙여야 하는 사실 하나. 노무현의 모교 진영 대창초등학교 맞은편 진영노인대학 2층 계단 벽면에 양진니 선생의 세필(細筆) 붓글씨 액자가 걸려 있다. 한글과 한자를 섞여서 쓴….이건풍은 그 앞에서 수도 없이 옷깃을 여몄다.
또 하나. 우죽 선생이 건풍의 선대인(先大人) 휘자(諱字) 이종탁 한학자께 써서 선물한 ‘경서각(耕書閣)’ 현판은 이 건풍이 아직 소중하게 보관해 있다. 낮에 밭에서 일하고 밤엔 학문과 벗한다는 당신의 아호 ‘경서’를, 피나무 널빤지에 양각(陽刻)한 말하자면 소중한 유품이다,
이건풍의 학원은 전체가 60평 안팎의 공간인데, 적당한 크기로 나누었다.
두 번째 15평은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아내가 초등과 중학교 학생들에게 노래(교과서 위주)를 지도하는 ‘불무리(건풍의 서예 학원 이름과 같다)음악학원’이다. 참 그의 아내는 중등학교 교사 출신임을 밝히자. 실용 음악이 하나의 대세여서 그런지, 학원을 찾는 문하생 중에는 대중가요 공부를 하는 친구고 있는 모양이더라. 건풍과 나이 차이가 많다. 일곱 살. 어쨌든 사람들은 입을 모아 부부에게 노익장 운운이라며 치켜세운다.
여기서 밝히자. 불무리? 붉은색 원과 노랑색 원이 교집합을 이루는 마크다. 해와 달을 형상화한 거다. 이건풍이 처남과 잠시 같이 복무한 부대는 보병제26사단사령부 본부중대(부관참모부와 경리참모부)였다. 이건풍은 거기서 사단장 표창장을 붓으로 쓰는 일을 하다 제대했다.
나머지 27-28평은 태권도를 처남 하청식의 ‘불무리Jhonson태권도학원’이다.
하청식은 우리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고단자(명예)다. 그의 아들이 그를 돕는다. 각기 명예관장과 관장으로 역할분담(?)을 하고. 공간이 조금 좁긴 하지만, 처남은 보병사단에서 태권도 시범조로 활약했고 월남에까지 가서 실력을 떨친 바 있어 주위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그에게도 ‘노익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수식어다.
존슨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그는 빨간 벽돌 두 장을 보조자의 손바닥 위에 세워 놓고 수 도(手刀)로 두 동강을 냄으로써, 우방 국가 원수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 주인공이다. 때는 1966년 10월 25일이었다. 많은 다른 격파도 있었지만 존슨은 하청식의 묘기와 괴력에 매료된 나머지, 그를 지휘대 위로 불러 올려 포옹까지 해 주었다는 얘기! 그 존슨 덕분에 26사단 태권도는 세계에 그 명성을 자자하게 할 수밖에.
존슨이 출국하고 난 뒤 사단장 문중섭 장군은, 태권도 시범 단원 중 특히 활약을 많이 한 부사관과 병사들에게 표창을 하게 된다. 그 중에 하청식이 끼었음은 물어보나마나. 이건풍이 직접 그 원안을 잡고 붓으로 일곱 장 모두를 써냈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했으랴.
이윽고 이건풍의 사수(선임)가 제대를 하게 되었다. 그 자리를 이건풍이 이어받게 되었음은 물어보나마나. 혼자서 너무나 바빠 그야말로 밤낮으로 땀을 흘리는 중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그날도 허탕 칠 생각을 하고, 보충 중대에 올라갔더니 연세대학교에 재학 중이라는 병사 하나가 전입해 있었다. 그를 데리고 내려와 시험 삼아 몇 자를 써 보게 했다. 뜻밖에도 합격 수준의 붓글씨를 선보이는 게 아닌가? 정통으로 서예 공부를 하다가 입대했다는 그의 말에 신뢰감이 갔다. 결점(?)이라면 너무 궁체에 천착해 있었다는 점.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표창장은 예술로 빚어내는 게 아니다. 어찌하겠는가? 그도 점점 속칭 ‘사무 글씨’에 익숙해져 갈밖에.
문중섭 사단장은 정말 신사였다. 문무를 겸했다는 말은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 무렵 이미 그는 한국 문단에서 중진의 자리에 있다는 소문도 자연히 날 수밖에. 전쟁문학회를 이끌고 있다는 소문도 들렸다. 그는 벌보다 상을 질책보다 칭찬으로 부대를 지휘 통솔했다. 누가 ‘견책’ 처분을 받을 만한 일을 했다 치자. 징계위원회에서의 회의록 등을 첨부해서 결재를 올려도 그는 곧잘 ‘불문(不問)’이라 쓰곤 글월 ‘文’이란 사인을 하고 서류를 부관참모부로 내려 보냈다. ‘개관 천선’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고.
그 극적인 예가 박홍수 대위의 미제(美製) 다이얼 세숫비누 사건이었다. 박홍수 대위는 군대 내에서도 유명한 스님 장교였는데 물론 미혼(未婚). 그가 어느 날 지프차로 그 비누 몇 상자를 운반하다가 헌병대에 적발된 것.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근신’ 처분으로 결정이 났는데, 사단장은 그 사건도 역시 눈감아 주었다. 요컨대 그 비누는 박홍수 대위가 부대 근처에서 돌봐 주고 있는 한센인들을 위해 미군 장교에게서 얻었다는 증언이 오히려 사단장을 감동시킨 것.
이제 이건풍(李健風)과 하청식(河淸植)이 어떻게 맺어진 인연인지 샅샅이 알아보아야 할 것 같다. 서두를 이렇게 장식해 보자. 1966년 6월 어느 날, 두 병사가 보병제26사단 사령부 본부 중대에 전입한다. 형제처럼 가까이 지내던 이건풍 (부관참모부), 하청식(경리참모부) 일병이었다. 둘은 처음 적응하느라 엄청나게 고생했다.
워낙 표창장 많이 주기로 이름난 문중섭 사단장이어서 이건풍도 격무에 시달렸는데, 하청식이 오히려 저 심했다 해야 할 것 같았다. 말하자면 본 업무는 경리부 병사지만, 태권도 시범이라는 가외 업무에 시달려야 했으니까.
둘은 나이 차이가 두 살이었다. 동향(同鄕)은 아니라도, 가까운 데서 태어났다. 이건풍은 삼랑진, 하청식은 김해 한림정이 안태 고향이었다. 초등학교는 다르지만 B중학교과 B고등학교는 동창이었다. 동기(同期)는 아니었고.
하청식을 기준으로 이야기하면 이렇다. 한림정역에서 경전남부선 통근 열차를 타면, 삼랑진역에서 기다리던 이건풍이 승차한다. 기차 통학을 하는 B중고등학교 학생이 더러 있었지만, 유달리 둘이 친했다. 이건풍의 외가가 한림정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이건풍은 B대학으로 진학했고, 하청식은 서울로 유학을 했다. 한동안 서로 소식이 거의 단절된 이유다.
그러다 둘이 해후(邂逅)한 것은 창원 훈련소에서였다. 졸업 후 중학교 교사로 임용되기 전에 결핵을 앓았기 때문에, 2년 늦게 군복을 입게 된 이건풍이었다. 일이 공교롭게 되려다 보니 하청식도 같은 날짜에 입대한 것이다. 이건풍 군번이 51021281, 하청식은 그보다 35번 뒤다. 훈련 수료 후 한림정을 거쳐 삼랑진역에서 서울 행 완행열차에 환승하여 동대구역 앞 허름한 여인숙에서 일박을 했다. 이튿날 각기 영천 부관학교와 경리학교로 가게 되었다.
거기서 소정의 교육을 거친 뒤 101보충대 경유하고 26사단에 전입한 거다. 사단사령부 부관참모부와 경리참모부에 배치를 받았던 둘은 서로 의지를 하면서 고된 졸병 생활을 했다.
하청식이 태권도 4단이라는 소문이 퍼지고 나서, 그를 탐내는 이가 있었으니 한국 최고의 격파 실력자라는 태권도 시범 단 선임하사 손삼(孫三) 중사였다. 국내 일반 선수 어느 누구도 그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소문이 날 정도의 실력자! 그가 꾸준히 본부대장(당시는 본부중대장이라 불렸음) 김영학 소령을 경유 경리참모들 설득한 거다. 드디어 결론이 났다. 하청식이 훈련에 합류하기로 말이다. 물론 소속은 경리참모부에 그대로 두고….
이건풍의 아내 하차숙은 하청식 동생이다. 하차숙이 26사단에 등장하는 데까지는 세월이 좀 걸리지만. 사단사령부 본부 중대 소속 병사들은 아침저녁은 물론 점심때도 만나기 마련이다. 같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기 때문이다. 부관참모부의 이건풍이 먼저 업무를 덮어 놓고 일어서 5분쯤 걸으면 하청식이 경리참모부 앞에서 기다린다. 확실히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심전심’은 단순한 사자성어가 아니라 만고불변의 진리? 그쯤 해 두자.
여자 친구가 없는 두 병사는 그럴수록 우정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하차숙이 가끔 면회를 온 것이다. 의정부에 사는 이모와 함께였다. 하차숙은 그때에 중학교 재학하고 있었다. 하청식의 어머니는 그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잠깐! 반세기 뒤인 지금 당시의 사령부 진입로에서 부관 참모부까지의 지형이나 구조물을 증언할 사람은 없다. 이건풍의 입을 빌어 보자. 위병소를 지나 영내에 들어서서 한참을 걸어오면 휴게실이 있었다. 음료수를 주로 팔지만 라면과 국수도 파는 곳이었어. 물론 빵이나 다른 대용 식품도 진열해 두었고….5분 거리에 경리참모부가 있었으며, 거기서 왼쪽으로 꺾으면 부관참모부가 자리 잡았던 것. 그 옛날 그 휴게실에서 넷이 만나 이야기꽃을 피웠던 거다.
휴게실 바로 뒤에 인공으로 만든 연못에 연을 심어 놓았기에, 넷은 가끔 그 꽃을 감상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차숙과 이모가 마련해 온 통닭이며 빵 등을 난간에 기대서서 먹는 즐거움 결코 만만치 않았고말고. 참, 연못 위로 목조(木造) 다리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이름 하여 세심교(洗心橋)! 사단장이 짓고 이건풍이 붓으로 쓴….
하차숙은 일찍, 그러니까 어머니를 암으로 여의어서 그런지 어딘지 모르게 얼굴에 그늘이 져 있었다. 그래서 이모 집에서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한림정의 자두 농장에서는 아버지 혼자 일한다는 얘기도 가끔 건풍은 들었다.
사실 사단장 문중섭 장군은 굉장한 매력이 넘치는 군인이자 문인(시인)이었다. 특히 대민 지원 사업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야말로 물심양면에 걸쳐서…. 주민들의 칭찬이 자자할밖에.
그는 그들 앞에 최대한 겸손한 자세를 취했다. 공병 대대에서 어떤 마을에 다리를 하나 놓아 준다 치자. 그는 지프차를 먼 거리에 세워 놓고 뚜벅뚜벅 걸어간다. 지휘봉은 등 뒤에 감추는가 하면, 모자를 벗어 옆구리에 끼고는 주민들에게 깍듯이 예를 표했다. 그는 입만 열면,
“민군의 유대 강화는 군 전투력의 근간이야.”
하는 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행주산성 승리 이야기를 들먹이기 일쑤였고.
사단에는 일반참모부가 다섯 개 있었다. 인사참모처 정보참모처, 작전참모처, 군수참모처, 민사(民事)참모처 등. 마지막 인사참모는 유일하게 소령이었는데도, 사단장은 그를 중용(重用)했다. 그래서 이건풍도 자연스럽게 아니 일 때문에 민사참모처에 들락거려야만 했다. 물론 그가 하는 일은 민간인에게 증정하는 감사장 업무였다.
사단장이 어느 민간 단체장(동장이나 학교장) 혹은 개인(병사들에게 친절한 식당 주인 등)에게 감사장을 증정한다 치자. 공적조서란 말이 어색하지만 어쨌든 그 서류를 이건풍이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감사장 원안도 작성하고 결재를 얻은 다음 다시 표창장 용지에다 붓글씨로 옮겨 쓴다.
지금까지 그의 머리에 남아 있는 대상자는 ‘과거를 묻지 마세요’의 나애심 가수였다. 나애심이 위문단을 이끌고 와서 공연을 한 것. 여담 하나. 정작 이건풍은 연병장에 나가지도 못하고 감사장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사단장실로 올라가는 언덕 길 아래에 부관참모부(참모실)가 있었다.
한참 붓을 잡고 땀을 흘리는데,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나서 잠시 밖으로 나와 봤더니 일단의 장교들이 장교 식당으로 실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운전교육대장이란 친구(대위)가 으스대는 게 가관이었다. 여자 단원들과 함께 움직이면서. 그가 큰소리치는데….
“내가 이래봬도 우리 사단 달구지 사령관이오. 차량 편의는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했으렷다? 새파란 대위의 허풍에 건풍은 차라리 연민의 정을 보냈다 하자. 어쨌든 장교 식당에서 증정을 했는데, 나애심이 글씨가 참 좋다고 해서 이건풍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질밖에.
사단장은 이건풍에게 나애심의 ‘과거를 묻지 마세요’를 한 번 불러 보라고 시키는 게 아닌가! 사단장은 그런 사람이었다.
이건풍은 문중섭 사단장에게서 그만큼 많은 걸 배웠다. 특히 표창장(상장 포함)이나 감사장을 두고서는 의기가 투합 되었다 할 정도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왜 척하면 삼척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 맞잡이라 해 두자. 표창장(상장)이나 감사장의 권위자(?) 사단장과 그걸 처음부터 혼을 넣듯 작업하는 둘은, 같은 장인(匠人) 정신으로 통했다 해도 괜찮으리라. 둘의 대화를 엿들어보자.
“이 상병, 감사장 말이야.”
“예, 상병 이건풍! 각하 말씀 하십시오.”
“타이틀을 제일 큰 글씨로 써야 하지? 그 다음엔 뭐야?”
“예, ‘공로표창장’이고, 다음이 각하의 함자(銜字)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약간 작은 글씨로 함자 앞에 보병제26사단장 육군소장이라 하구요. 수상자의 소속과 계급 및 이름의 크기는 조금 작아야 합니다. 본문은 또 더 작아야 하지요. 다만 감사장은, 각하와 받는 사람의 직함 소속 등의 글씨 크기가 같도록 씁니다. ‘섭’자가 힌복판에 오도록 관인도 잘 찍어야 합니다.”
“그래 맞지. 어때? 새로 온 조수(助手)는 일 제대로 배우고 있나?”
“예. 각하 저보다 훨씬 더 각하의 기대에 부응할 겁니다.”
국방부 시계는 그래도 돌아간다는 말이 있듯이 세월은 그렇게 흘러갔다. 그런데 월남전이 발발하고 국군 파병이 결정되었다. 이건풍은 부관참모부 필수 요원이라 미리부터 ‘해당사항 무’로 안도하고 있었지만, 하청식은 그 태권도 실력이 화근(?)이 되었다. 주월 한국군 사령부에서 그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는 오히려 반색을 하면서 건풍에게 말했다.
“형, 외국 바람도 쐴 겸, 자의반타의반으로 지원한 셈입니다. 가세가 기울었으니 차숙이도 걱정되고 나도 학비 마련이란 목적이 있으니 갔다 올게요.”
마침 그해 수도 사단 1연대 10중대장 강재구 대위의 장렬한 산화 소식이 있었다. 수류탄 투척 훈련을 지도하던 강재구 대위가 부하 병사가 잘못 던진 수류탄을 옴 몸으로 덮쳐 자기는 산산조각이 나서 즉사하고, 다른 전우들을 전부 살린 실로 온 국민의 가슴을 적신….그에게는 일계급 특진과 함께 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그 당시의 대대장이 박경석 중령(생도 2기)이었고 초대 재구대대장으로 명명되어 월남에 가서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우여곡절 끝에 하청식은 박경석 대대장의 휘하에 들어가서 비록 큰 전공은 못 세웠으나 최고로 존경하는 군인으로 박경석 장군과 채명신 장군을 가슴에 새기게 된다. 문중섭 장군인들 어찌 예외이랴!
이건풍은 68년 2월말에 드디어 군복을 벗게 된다.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사건으로 말미암아 몇 개월 늦어진 셈이다. 다행히 하청식도 그보다 조금 늦었지만 월남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여 제대하게 되었고. 그 사이에 차숙도 서너 달에 한 번씩 이건풍 면회를 왔기 때문에 하청식의 소식은 더러 듣던 참이었다.
어느 일요일 하차숙이 친구과 함께 면회를 와서 이런 이야기를 전해 준 거다.
“건풍 오빠, 청식 오빠의 대대장은 정말 대단한 분이시래요. 그분은 나이가 너무 어려 힘들게 생도 2기로 입학했답디다. 그런데 6 ‧ 25가 발발했대요. 부산에서 단기 교육을 받고 임관을 했는데, 열일곱 살. 소대장으로 40명의 소대원을 지휘하였나요? 선임하사가 열일곱 살 많아 그의 도움을 받았는데, 소대장이 포천 전투에서 중공군 수류탄 파편을 맞고 중상을 입었다는 거예요. 북한군 병사가 낌새를 차리고, 그를 끌고 북괴군 사단장한테 갔다고 합디다.”
“그러자 적군 사단장이 미소년 아니 앳된 군관을 보고 설득을 한 거야. 자기 수하에 들어오면 치료도 해 주고 좋은 자리에서 승승장구하도록 보장할 테니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지.”
“아니 오빠, 오빠는 그걸 어떻게 알아요?”
“박경석 장군은 워낙 유명한 분이시지. 적 사단장의 유혹을 한사코 뿌리치고 박 소위는 급한 치료를 대충 받고 남으로 발길을 돌려 부대에 복귀한 거야. 그런데 부대에서는 이미 부하들의 증언을 토대로 전사한 걸로 간주,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묘지를 조성하고 비석을 세운 거야.”
“저는 보기에 그 북괴군 사단장의 휴머니티도 대단한 것 같아요.”
“누가 아니라나? 처남 귀국하면 한 번 같이 한 번 안 가 볼래?”
“당연하지요. 살아 있는 장군의 묘지와 비석 앞에 선다니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요.”
어쨌거나 제대를 한 이건풍은 곧 입대 전에 근무했었던 중학교로 복직했다. 부끄러운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국민교육헌장을 전지에다 붓글씨로 쓰는 걸 몇 년이나 계속한 일도 하나의 기록으로 남는다. 초등학교에 비슷한 친구가 하나 있어 둘이서 심심하면 그 작업을 계속하여 각급학교에 나눠 주기도 하였고, 그 덕분에 일찌감치 둘은 교육감 표창도 받았다.
이념이나 사상을 떠나서 누구나가 인정하듯이 국민교육헌장은 명문이다. 그는 자부한다. 그 명문이 자신의 문학 생활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물론 이윽고 하청식도 학업을 마친 뒤 하청식도 세무 공무원으로서 세상에 첫발을 내디뎠다. 발령을 받은 곳이 영등포 세무서. 세월이 흘러 이건풍은 그동안 알게 모르게 사랑의 감정을 싹을 틔우던 차숙에게 면사포를 씌워 새 가정을 이루었다.
이건풍은 정말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남보다 조금 일찍부터 승진의 꿈을 키워나간다. 당시만 해도 드문 석사 학위도 얻었고, 교원대학교에 파견 나가는 등 몸부림을 쳐서 기반을 닦은 것. 국전 특선한 것도 연구 실적에 포함되었으니, 그의 출세(?)는 떼놓은 당상이었다 하자.
마흔 여섯에 교감이 되었다. 그야말로 파격이라는 소문이 회자되었다. 결실은 못 봤지만, 박사 학위 과정도 1학기까지 마쳤다. 그리고 쉰다섯에 교장 자격 연수를 받는다. 한데 이해찬이 교육부 장관 바람에 정년이 단축되어 자칫하면 예순 살을 넘기자마자 퇴임할 뻔했다. 도중에 다시 교육청 과장과 국장을 거침으로써 62세 정년퇴임이 가능했지만.
자 여기서 이건풍이 문중섭 장군의 철학을 학교 현장에서 접목시킨 일화 하나.
이건풍 교장은 학생들을 회초리로 다루지 않았다. 여간해서는 학생들을 처벌하지 않았고. 사랑의 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다. 모두 문중섭 장군의 영향이었음은 물어보나마나.
수학여행은 항상 폭탄을 안고 떠나는 행사라 교감 교장은 지레 겁을 먹었다. 사고가 잦았던 거다. 교감과 교장이 인솔 책임을 번갈아 지며 경주 불국사며 합천 해인사를 둘러보고 오는데 대개 2박3일 일정이었다. 그런데 버스 운전기사들이 난폭 운전을 일삼았다. 아찔아찔한 순간을 속절없이 보고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이건풍은 시즌이 되면 반드시 왕복 코스의 근처에 위치한 경찰서장에게 공문을 띄웠다. 붓으로 두루마리 화선지에 쓴 편지를 동봉해서….백차로 어디서 어디까지 에스코트해 달라는 간청이었다. 공문보다 편지가 경찰서장에게 감동을 주는 것 같았다.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떠나기 전 자신이 직접 표창장 용지에다 학생들의 안전을 위하여 어디에서 어디까지 최선을 다해 에스코트한 점을 높이 평가하고 공복(公僕)으로서의 그 정신을 기린다는 감사장을 써서 지니고 갔다. 호수(號數) 부여를 하고, 직인까지 찍은…. 물론 전 경찰관에게 다 증정하는 것은 아니다.
정말 소명 의식으로 자기 아들딸처럼 학생들을 지켜 주는 모범 경찰관이 그 대상이었다. 경위에서 순경이 이르기까지! 한 가지 결점이 있긴 했다. 받는 경찰관의 소속과 계급 성명을 선 채로 붓펜으로 써야 한다는 사실. 그래도 학생들의 우렁찬 박수를 보내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을 만끽하던 이건풍 교장이었다.
그 덕분에 승진한 경찰관이 더러 있다. 세 명? 그도 그럴 것이 경찰서장과 교장은 서기관 예우로 직급 상 동일하다. 하지만 이럴 때의 감사장은 경찰국장의 표창장보다 위력(?)이 있다 하자. 마침 <부산 매일>에서 이를 기사화 해 줌으로써 아직 우수 사례로 전해져 내려온다.
이건풍은 슬하의 2남 1녀 자식들이 전부 타처에 나가 사는 터였다. 장남은 전북 전주(全州)시 공무원이고 둘째는 일산의 중견 기업 사원이다. 막내(딸)이 처남의 중매로 영등포 구청 6급 주사와 결혼하는 바람에 부부가 막내와 합가해서 살게 된 것이다.
어느 날 성당에 갔다가 참으로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 전투복 어깨에 불무리 마크를 단 병사! 건풍은 돌아서 있는 병사를 불렀다.
“어이, 병사! 나 좀 보세.”
당황한 병사가 얼떨결에 경례를 올려붙였다.
다음 순간 건풍은 기절할 뻔했다. 가슴에 붙어 있는 ‘군종병사(軍宗兵士)’ 마크! 죄송하다는 말이 바로 튀어 나왔다. 군종 병사는 26사단 불무리 성당에서 복무한다고 했다. 외출했다가 미사 참예(參詣) 차 들렀다는 것.
이건풍이 제대할 무렵 터를 닦고 있었다는 말을 건넸더니 군종 병사는 성당 건물이 근사하게 지어진 지 반세기가 지났다고 했다. 부산에서 교직에 있다가 정년퇴임하고 지금은 딸집에 와 있다고 덧붙였고. 그러자 군종 병사는
“선생님, 저희 성당에 한 번 들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옛날 군 시절 이야기해 주시고요. 부활절에 ‘내 발을 씻기신 예수’ 그 성가 아시면 좀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
해서 이건풍은 청식과 함께 50년 만에 26사단 앞 백석 마을을 찾게 된다. 물론 목적지는 불무리 성당. 실로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제대하던 그해 말에 세숫비누 몇 상자를 부관참모부 전우들에게 보낸 적이 있어 그걸 나름 아름다운 추억으로 삼았다. 12*기보대대장과 군수참모와 부대에 들어가 부관참모부 인사과 사무실을 창으로 들여다볼 때 눈물이 났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몇 년 동안 박경석 장군의 묘소에 가보지 못했었던 게 늘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내친걸음이라 유성 온천에 있는 박경석 장군 댁의 주소를 알아 불원천리 거기 다녀왔다. 그분은 존경받는 군인이자 소설가다. 세종시 청사 곁을 스쳐 지나가서 그분 댁에서 두 시간 넘게 머물다가 왔다.
그분은 채명신 장군과의 인연이며 자신의 묘소 이야기를 들먹였다. 참 유익한 시간이었다. ‘한국전쟁문학상’ ‘한글문학상’ 등이 진열대를 장식하고 있었다.
다음 주에 둘은 서울역에서 합류하여 지하철을 타고 동작동 국립현충원까지 갔다. 지하도 밑에서 꽃을 사면 훨씬 싸다는 소문도 들었던 터, 마음씨 착해 보이는 아주머니한테 화환 세 개를 샀다. 채명신 장군 묘역에서 ‘전선 야곡’을 부르고 동영상으로 찍었다.
이윽고 박경석 장군 묘 앞에 섰다. 두 번째이지만 좀 찾기가 힘들었는데 사진을 찍고 그걸 스마트폰으로 박경석 장군에게 보냈더니, 그의 호탕한 목소리가 터졌다.
“허허, 이 하사가 내 심중(心中)을 아는구려. 하청식 전우랑 정말 고맙소.”
그리고 돌아서 지하철역으로 오는 길,
“처남, 내 조수가 참 그립소이다. 권흥규라고….한 번 만나는 게 소원이오. 문중섭 장군 다음 한무협 장군이 사단장이었는데, 권흥규 그 친구가 그분을 모셨고….”
“제가 찾을 수 있는데….개인 정보라 무리일지 모르지만 그만한 이유와 명분이 있으니까.”
하여튼 어쨌든 간에 며칠 안에 하청식은 이건풍에게 권흥규의 전화번호와 주소를 일려 주는 게 아닌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인사동에서 필방을 열고 서예학원도 운영한단다. 건풍은 권흥규에게 편지를 냈다. 지난 50년간의 기나긴 개인사를 붓이 아닌 네임카드 펜으로 궁체 흉내를 내면서 쓴….
우체국으로 떠나기 전, 그가 정말 존경하는 예비역 육군 대령 황재영 선배에게 전화를 내었던 사실을 빠뜨릴 수 없다. 다음 날 시간을 좀 내 주면 국립현충원에 같이 가고 싶다고 했다. 무슨 사연이 있느냐는 물음에 그는 대답했다.
“제가 모시던 사단장님 두 분이 거기 장군 묘역에 누워 계실 겁니다. 두 분께 엎드려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황재영 대령은 좋다고 화답했다. 이튿날 도중에 만나서 점심 식사를 하고 곧장 현충원으로 갔다. 휴게실에서 꽃다발 세 개를 샀다. 지하도의 그 아주머니가 없어서였다. 역시 비쌌다. 안내실에 들러 문중섭 장군과 한무협 장군의 묘소 참배를 왔다고 했더니, 친절하게 안내를 해 주었다. 약도를 보고 장군 묘역을 찾으라고 덧붙였다.
둘은 채명신 장군 묘소와 박경석 장군의 묘소(아주 가깝다)에 발걸음을 하고 거수경례로 예를 표한 뒤 한참 걸어 올라갔다. 도중에 건풍은 전설의 포병 김풍익 중령의 묘를 알아보려고 여기저기 전화를 해 봤으나 불가했다. 그분의 유해를 찾지 못했다는 게 아닌가! 까마득히 올려다 보이는 위패 밑에 서서 인증샷만 찍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드디어 장군 묘역에 들어섰다, 하지만 생각보다 두 분 묘소를 찾기 힘들었다. 안내하는 직원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문중섭 사단장의 묘소 앞에 설 수 있었다. 눈시울이 젖어왔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건풍 자신의 일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은인과 50여 년 만의 해후였으니까 말이다. 그분이 가톨릭 신자이었다는 사실도 묘비명을 통해서 알았다. 고맙게도 황재영 대령은 여러 번 셔터를 줄러 주었다. 50년 세월이 주마등이 되어 스쳐 지나갔다. 한참이나 그 자리에 그릴 듯이 서 있다가 발길을 돌려서 봉안당으로 내려왔다.
한무협 사단장의 유해는 너무나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부사관의 봉안당도 마로 눈높이에 있는데, 장군이 저렇게 푸대접(?)을 받나 싶어 의아해 한 것도 잠시뿐, 세상을 떠난 차례대로 모신다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꽃다발을 들고 사진만 찍은 뒤 돌아 나와야만 했다.
입구로 걸어 내려오면서 이건풍은 황재영 대령에게 말을 건넸다.
“형님!”
“왜 그러오?”
“며칠 새에 저는 다시 두 분을 찾아뵈어야겠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황재영 대령은 반문했다. 건풍은 두 사단장에게 감사패를 드리고 싶다는 대답을 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제게는 은인인 두 분이십니다. 특히 문중섭 장군님은….저승이 멀다 한들 제 가슴에서 우러나는 감사한 마음을 새겨 묘비 명 밑에 둠으로써 제 마음을 전하고 싶은 겁니다. 후손들이 온들 그걸 치우기야 하겠습니까?”
“아하, 과연 이 하사다운 생각이구려.”
“제 조수 권흥규의 주소와 전번을 일러 주었습니다. 그를 만나 의견 접근을 봐야지요.”
“그 친구가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면?”
“그럴 리가요. 만약 그렇다면 한무협 장군님 화환 값 5만원 제가 다 부담하지요. 그리고 또 하나 우리 둘이서 각기 붓으로 감사패 글씨를 써서 국방부 앞 가게에 들러 맡기면, 멋진 감사패를 만들어 주겠지요. 비나 눈에도 견딜 테고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겁니다.”
귀가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나지막한 건풍의 부르짖음에 되레 힘이 실렸다.
“저승으로 가는 감사패!”
73장(참고)
약력
추천 과정)부산 출생. ’76 <지우문예> 3회 수필 천료, ’77 <수필문학>(김승우 교수 발행, 차주환 서울대 교수 추천), ’83 <한국수필> 2회 천료(한국수필가협회 조경희 회장), ’97<한글문학> 소설 신인상(서울대 구인환 교수)
현)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한국소설가협회 이사,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한국문인협회 문인 복지위원,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원, 경기PEN운영위원, 한국전쟁문학회 자문위원, 경기문학인협회 회원, <문학과 비평> 작가회 회원, 대한가수협회 회원, <실버넷뉴스> 기자.
전) 부산명덕초등학교장, 덕성토요노인대학장(21년), 부산북구문인협회 창립회장 및 5대 회장, 3대 부산북구문화예술인협회장, UNESCO 부산시협회 사무총장 및 부회장, <부산일보> <국제신문> <부산매일> 칼럼니스트, 26사단 홍보대사
저서) 소설집 <역적의 딸 살아 있다><거기 나그네 방황 끝나는 곳><세종대왕 화내겠다><새끼넥타이를 목에다 건 교장(자전 소설)> 등 4권, 수필집 <밀려나는 새벽> 등 15권, 논픽션 1권, <내가 만난 이등병에서 대장까지의 전우들>(전자책) 1권, 기타 2권, 총23권
수상) 자랑스러운 부산시민상(봉사본상), KNN부산방송문화대상(사회), 화쟁포럼문화대상(문학), 자랑스러운 釜山敎大人상, 한국수필 청향문학상, 허균문학상, 경기PEN문학대상, 부산수필대상, <문예시대>문학대상, 부산가톨릭문학상, 부산북구문학상, 부산UNESCO공로패 1호, 쿠알라룸푸르 한인회장 감사패(아동도서 지원)
novellww6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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