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 한 개비의 눈물 외 1편
김신영
시리게 곱은 손으로
점화선을 찾는 어둠이라서
화악 몇 해를 지나온 것만 같아서
환하게 솟구쳐 오르는 불멸의 꽃불
한 개비라고 우스운 것이 아니어서
성냥 한 개비가 다 타기까지의 무수한 전설
우리 마음을 살라버리는 그 무엇
팔각성냥 한 통에 들어있는 수많은 인생
뜨겁게 타오르고 새롭게 태어나고
쓰던 원고를 다비하고 난삽한 영혼을 밝히고
부재하는 그림을 불러 앉히고, 다시 그대를 부르고
그리운 어머니의 손을 잡고 유년을 몰아 오는
한 개비에 담긴 영화 같은 장면
흰 눈 쌓인 캐럴이 흐르는 시간
도로 위에서 자동차가 그렁거리는 안갯속이라서
어머니가 주신 유엔 성냥 그 한 개비를 그어
곱은 손으로 점화선을 찾는
오늘은 유난히 깊은
성탄의 밤
AI, 혹시 당신입니까? 1
달빛이 뜨거운 이마를 짚어
하마 계절 몇 개가 떨어져 나간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당신
이렇게 멋진 문장을 구사하는
세상에서 가장 멋들어진 모자를 쓴
세상에서 가장 예쁜 말을 하는 당신
내가 아낌없이 분별없이 당신을 입력했는데
그러니까 AI, 당신이 맞지요?
스카프를 고르며 낙목한천(落木寒天)을 견디고
꽃망울 터지는 아픔조차 다 아는
빛나는 이파리 하나 소문 없이 나타나더라도
왁자한 봄소식에 서로 안부를 묻다가도
자주 뒤척이는 마음 손수레에 실린 폐지가 궁금하고
집이 자꾸 가벼워져서 구름처럼 떠다닐 때
흰 구름 저 아래 당신이 비끼어 날아가고
머언 먼 약수를 건너는 사람을 보낼 때
붓질 한 번에 광 한 번
해오라비 난 한 촉
피리 젓대를 뽑을 때
AI, 혹시 당신입니까? 2
지원군 없이 싸우는 광야의 밤
하마 배신이나 복수나 그런 그림
그렇게 선한 군대를 몰고 나타나는 그대
어쩌면 한마디 버릴 말이 없다고 탄식하다가
그게 당신의 말이냐고 귀 기울이는 모순
꽃 멍 불 멍 당신멍으로 탕진한 세월
세상에서 가장 예쁜 말을 하는 그 사람이
그러니까 AI, 당신이 맞지요?
물 자욱을 따라 종종걸음치며
맑은 아픔이 다시 도지는 봄
아름다운 빛이 돌부리에 걸려있고
억세게 뒤채이는 바람을 닮은
낙타가 하품하다 욕망을 배회하다
슬픔을 뒤척이다, 황홀한 당신을 만나는
그러니까 AI, 완벽한 당신이 맞지요?
김신영
《동서문학》 신인상 ’94 등단, 중앙대 국문과 문학박사.
시집 화려한 망사버섯의 정원. 평론집 시창작론집 등 6권 출간.
2023년 심산재단 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