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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3 / 핑계 없는 믿음으로 (민13:25-33)
민수기는 ‘백성들의 수를 센 기록’이라는 뜻으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대상으로 시행된 두 번의 인구조사에서 제목을 따온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히브리어 성경은 항상 책의 첫 단어를 제목으로 사용했기에 민수기의 경우엔 히브리어 원제목이 ‘베미드바르’입니다. 직역하면 ‘광야에서’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약속의 성취를 향해 나아가는 현장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민수기에는 광야라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인간의 타락과 불신앙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가운데 그 모든 죄악을 넘어 언약을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신실하심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이런 민수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어째서 두 번의 인구조사를 하게 하셨는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민수기에 기록된 인구조사는 1장과 26장에 각각 기록되어 있는데 인구조사를 실시한 목적이나 방법은 같지만, 핵심은 인구조사 당시의 조사 대상이 달라졌다는 겁니다.
1장의 인구조사는 출애굽 1세대를 대상으로 실시한 거고 26장의 인구조사는 출애굽 2세대 즉 광야에서 태어나고 자란 세대를 대상으로 행해졌던 겁니다.
통상 광야에서의 인구조사는 가나안 행군을 위한 준비 단계의 성격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게 1차로 끝나지 않고 2차가 진행되었다고 하는 건 은연중에 1차 인구조사 이후로 진행된 일들이 실패했음을 암시하는 거라 볼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출애굽 1세대는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인해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사람은 누굴까요?
출애굽 후 광야에서 태어난 세대 즉 광야 세대였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두 세대를 구분 짓는 사건이 바로 가나안 정탐 사건이라는 겁니다.
민수기 1장에서 인구조사를 명하신 하나님은 성막을 중심으로 진용을 짜서 그간 머물던 시내 산을 떠나 가나안을 향해 출발시키셨고 드디어 가나안 문턱까지 오게 하셨는데 이때 이스라엘 각 족속을 대표하여 뽑힌 자들로 하여금 가나안을 정탐하게 됩니다. 그런데 돌아온 정탐꾼의 보고 이후 출애굽 세대 백성들은 가나안 거민과의 전쟁을 두려워하여 가나안을 포기한 채 광야로 되돌아섰고 그 결과 그들은 40년을 광야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렇다면 알아야 할 것이, 하나님은 왜 가나안 땅을 정탐하라 하신 걸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시면서 이미 가나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가나안에서 지켜야 할 율례와 법도도 가르치셨으며, 먼 길 인도하여 드디어 가나안 문턱까지 오게 하셨으면 그냥 가나안 땅에 들어가 차지하고 살게 하시면 될 것을 굳이 정탐꾼을 보내시면서까지 그 땅을 두루 탐지하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유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거저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것’임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과론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탐꾼의 보고만 듣고도 가나안의 거민을 두려워하고 그들과의 전쟁을 이기지 못하리라 여겨 가나안을 포기하고 돌아섰습니다.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려버렸다는 건데, 그렇다면 정탐 없이 무작정 가나안에 들어갔더라면 상황이 어땠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기껏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시켜 가나안에 들여보냈더니 이번엔 가나안의 노예로 전락해 버리고 말 형편에 맞닥뜨린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을 정탐하게 하신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 땅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정말 좋은 땅인지를 먼저 확인하게 하시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선택하게 하신 겁니다. 너희가 나를 믿고 가나안을 정복하던지 가나안의 거인족들을 보며 두려워 포기하던지를.
사실 출애굽 이후 광야를 통과하며 가나안 문턱에 오기까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서 기대하신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믿음 때문이 아니라, 노예에서 해방되고 공짜 땅이 생긴다니까 하나님을 따라나섰던 겁니다.
그들은 애초부터 손익 계산을 따진 출애굽 세대였기에 가나안 문턱에서도 믿음이 아닌 손익 계산부터 따졌던 거고, 그랬기에 이후 광야 생활 중에도 사사건건 불평과 불만만 가득했던 겁니다.
저들의 그런 속셈을 하나님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랬기에 믿음이냐, 손익 계산이냐를 분명히 선택하라 명하신 게 바로 정탐꾼 파견 이유였던 겁니다. 따라서 돌아온 정탐꾼들의 보고는 단지 내용이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의 문제로만 끝나는 게 아닌 겁니다. 하나님은 그 보고를 통해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두 가지를 묻고 가르치려 하신 겁니다. 첫째. ‘무엇을 기준으로 현실을 보느냐?’와 둘째. ‘누구의 생각을 대변하며 사는가?’를 물으셨던 거고, 그에 대한 답을 가르치고 계신 겁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현실을 보느냐?’
‘환경이냐, 하나님이냐?’
‘누구의 생각을 대변하는가?’
‘내 생각인가, 하나님 생각인가?’
이 두 개의 질문에 대한 대답 여하에 따라 누구든 그 인생이 광야인가와 가나안인가가 결정되게 됩니다.
그럼, 이제 이 두 개의 질문을 각자의 삶에 대입해 보세요. 그동안 나의 삶이 환경을 보며 살아왔는지, 하나님만 보며 살아왔는지. 또한 매번 내 생각만 앞세웠는지, 하나님 생각을 헤아려 봤는지.
가나안을 포기하자 했던 열 명의 정탐꾼들처럼 오늘 우리도 많은 순간 ‘나에겐 능력이 없어.’ ‘지금 상태로는 불가능해.’ 같이 아예 스스로가 포기하는 생각들을 하며 살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을 기준으로 본다면 환경은 절망할 이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얻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가난할 수 있습니다.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주어진 환경입니다. 그러나 그 가난이나 실패가 낙심할 이유가 아닌 것은 가난 때문에 하나님을 찾고 실패 때문에 기도할 이유가 생긴 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이 무엇인지를 새삼 정의한다면 ‘믿음은 보이는 현실을 해석하는 렌즈’입니다.
믿음으로 보면 가나안 거민은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해야 할 이유일 뿐이고 그래서 믿음으로 보면 가나안을 차지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주셔야 할 걸 내 능력이나 노력만으로 얻으려 하니 안 되고 힘든 겁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주신다고 했는데 그들은 왜 가나안 거민들과 전쟁할 생각부터 했을까요?
그게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늘 현실 상황에서 결단되고, 있어야 할 요소인 겁니다.
본문을 다시 보세요. 정탐꾼들의 보고를 보면 열두 명 모두가 가나안은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건 공통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다음 말’에서 이견이 갈립니다.
가나안은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더라. 그런데 열 명의 정탐꾼은 그 뒤에 ‘다만’ 혹은 ‘그러나’라는 단서를 붙이고 있습니다. 다만, 그러나 거기엔 우리가 이기지 못할 아낙 자손이 있더라는 겁니다.
반면에 여호수아와 갈렙에게선 ‘정말’만 있을 뿐, ‘다만’이나 ‘그러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정탐 중에 아낙 자손을 못 봤던 건 아닙니다. 봤지만 두 사람의 시선은 그들이 아닌 하나님께 머물러 있던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다만’이 있는가, 없는가.
이게 믿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앞서 ‘믿음은 보이는 현실을 해석하는 렌즈’라 했기에 믿음으로 보아야만 하나님을 믿게 되는데 믿음 없이 보니까 현실만 보게 되고, 현실만 보다 보니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 하면서도 늘 ‘다만’, 이래서 안 된다. 저래서 못 한다는 조건을 붙이게 되는 겁니다.
이건 순서가 잘못된 겁니다. 현실이 어렵고 힘드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다만’을 말하고 나면 남는 건 여전히 어렵고 힘든 현실뿐이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받고자 하면 이제부터 우린 우리에게 있는 ‘다만’을 지우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현실을 살지만 그 현실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려고 하는 것.
이게 우리에게 있어야 할 믿음입니다. 따라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겐 ‘믿음과 현실’이라는 두 가지가 다 중요합니다.
실제로 민수기를 보게 되면 “너희는 내가 주어 살게 할 땅에 들어가서”라던가, “너희는 내가 인도하는 땅에 들어가거든”이라는 말씀이 자주 나오는 걸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들어가’라는 단어입니다.
‘들어가’라는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계획은 나 있는 곳으로 가나안을 가져다주시는 게 아니라, 가나안을 향해 내가 가게 하시려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내가 주어 살게 할 땅에 들어가서”라는 말씀을 보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들어가야 할 사람은 우립니다. 또한 “너희는 내가 인도하는 땅에 들어가거든”에서도 하나님은 인도하시고 우린 들어가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향해서는 주신다고 했으니 우린 ‘믿어야’하는 것이고, 세상을 살면서는 매일매일을 우린 주어진 현실에서 힘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훗날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여호와이레’와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모리아 산 위에 이삭을 대신할 수양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래 놓고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라 말씀하셨는데, 이때 가나안 땅에 ‘들어가라’와 모리아 산에 ‘올라가라’는 같은 의미입니다.
결과를 비교해 보세요. 출애굽 1세대는 하나님이 들어가라 하신 가나안에 들어가려 하질 않았기에 광야 인생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올라가라 하신 모리아 산에 올라갔기에 여호와 이레의 복을 받은 겁니다.
출애굽 이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매일매일을 한 걸음 한 걸음씩 광야를 걷게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선 매일이 똑같이 힘들고 고달픈 광야 생활인 것 같아 보였어도 사실 그들은 매일 한 걸음씩 가나안에 가까워지고 있었다는 걸 알아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가나안으로 상징되는 복과 은혜와 여호와이레의 응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복을 주시고 받는 방법이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그것들을 나 있는 곳에 가져다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주시는 데까지 나에게 가라 하십니다. 그런데 가려니 어찌해야겠습니까?
우리에게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다 했으니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신 걸 받을 때까지 매일매일을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게 ‘세상에서의 우리의 노력’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자로 살려면 우린 세상에서도 노력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해 놓고 정작 공부하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면 결과가 어찌 될까요?
그 반대도 마찬가집니다. 애는 쓰지만 믿음이 없다고 하면 원하는 결과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는 언제나 ‘믿음과 노력’이 함께 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세상일에 힘써야 하고, 세상에서 힘쓰고 애를 쓰면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제부턴 같은 것을 봐도 보는 관점 달아야 합니다.
세상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닙니다. 특히 믿음 안에서는 100% 그러합니다. 히브리서 11:3절 말씀도 보면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당장에 눈앞에 문제가 보인다 할지라도 그 문제를 푸는 방법은 믿음으로 풀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문제를 만나면 그때부턴 그 문제만 붙들고 씨름합니다. 그러나 문제만 생각하게 되면 남는 건 고민이고 걱정뿐입니다. 결국엔 실망하거나 좌절하게 됩니다. 반면에 믿음의 사람은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봅니다.
유명한 복음 성가 중에 ‘너는 무엇을 보았길래 그렇게도 놀라느냐. 너는 무슨 소리 들었길래 근심 속에 빠졌느냐. 믿음의 눈을 떠라. 믿음의 길을 열어라. 세상 모든 풍파를 믿음의 눈으로 보라.’는 권면의 가사가 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우린 닥친 상항마다 문제를 문제로 보지 말고 믿음과 기도 제목으로 삼는 훈련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언제든 말씀 앞에서 ‘다만’이 아닌 ‘아멘’을 할 수 있게 되며, 그렇게 아멘으로 받은 말씀은 우리의 삶 중에 반드시 말씀 대로와 믿음대로 되는 결과가 있게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만 믿으려 하면 이제부턴 우리의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져야 합니다.
먼저 열 명의 정탐꾼을 보세요. 가나안이 축복의 땅임을 인정하면서도 스스로가 그 땅이 내 땅이 되지 못할 핑곗거리를 찾습니다. 31절을 보세요.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고 합니다. 또한 처음엔 그 땅을 아름다운 땅이라고 칭찬하더니 그다음엔 말을 바꿉니다. 32절을 보세요.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라고 합니다.
말에는 파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악하거나 부정적인 말은 무질서하고 파괴적인 파장이 나오고 긍정적이고 선한 말에서는 질서정연한 창조적인 파장이 나옵니다. 그래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은 과학적으로도 맞는 말이고 우리 말에도 ‘말이 씨가 된다.’고 했는데, 말이 씨가 된다면 그 씨로 인한 말의 열매도 있게 됩니다. 그래서 성공하는 사람은 성공하는 말을 갖고 있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행복한 말을 갖고 있으며, 불행하고 우울한 사람은 불행하게 만들고 우울하게 만드는 말을 갖고 삽니다.
본문에서도 보세요. “애굽으로 돌아가자” 외쳤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한 대로 광야를 떠도는 삶을 살아야 했지만, “능히 이기리라”고 했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말한 대로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승리를 얻었습니다.
사람 사는 일에 항상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매번 나쁜 일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좋은 일이 됐든 나쁜 일이 됐든 성경은 단언하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린 언제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인생을 살아야 하며,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로 매 순간을 살아야 합니다.
질문 하나를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음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을 믿으시나요?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음을 믿습니까?
믿으신다면 기억하세요. 이제부턴 언제든 하나님께 선택받았으면 나도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께 사랑받는다면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으면 나도 하나님을 부르는 자로 살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선택하는 게 믿음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순종이며,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과 순종과 기도는 결국엔 우리의 삶에 가나안의 승리와 복이 있게 해 줍니다.
이후로 그리스도인의 인생에서는 더는 ‘다만’이 필요 없습니다.
안 되는 핑계를 내세우지 말고, 못하는 변명을 늘어놓지 말고,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이심을 믿고, 나 자신에게나 세상을 향해 ‘능히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되게 하신다.’ ‘하나님이 해 주실 거야.’를 선포함으로써 결국 매사에 능히 할 수 있게 되는 하나님의 응답과 체험과 간증을 누리며 살게 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