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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숙 시인의 시세계시어로부터 발산되는 영혼적 에너지의 합창(심은섭 가톨릭관동대학 교수. 본지 편집위원) : 네이버 블로그
김경숙 시인의 시세계
시어로부터 발산되는 영혼적 에너지의 합창
(심은섭 가톨릭관동대학 교수. 본지 편집위원)
序
시에 있어서 불변하는 것이 있다면 자기표현이라는 의미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따라서 시는 시인의 존재를 드러내는 양식이다. 그 존재의 아우라(Aura)를 추구하며, 그것도 언어로 드러내는 형식을 취하기 때문에 시어의 중요성이 더 강조된다. 그 많은 언어 중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와 가장 가까운 시어를 선택하여 행을 만들고 연을 만드는 일이 시인의 몫이며, 마땅히 귀결되는 의무이다.
언어관의 변화에 따른 문학관의 변화가 발생되며 시어는 분명히 일상어와 구별된다. 또한 대상에 대한 의식의 차이에 따라 언어의 차이가 발생한다. 논증Argument은 논리적 필연성과 타당성을 가진 언어 행위인 반면에 표현Expression은 공감각(시인의 타고난 감수성)과 기억의 재료를 사용하는 언어 행위이다. 따라서 김경숙 시인은 과학적 인식적 언어용법이 아니라 시적 언어용법으로서의 시어를 선택하고 구사한다.
예술 작품이 지니고 있는 흉내 낼 수 없는 고고하고도 개성적인 고유의 본질이 아우라Aura다. 벤야민은 '유일하고 아주 먼 것이 아주 가까운 것으로 나타날 수 있는 일회적 현상'이라고 아우라에 대한 정의를 일목요연하게 논리적으로 내렸다. 따라서 예술작품의 자율성과 품위는 아우라에 근거한다고 보았다. 즉 아우라를 통해서만이 예술 작품이 고고한 분위기를 풍길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뒤질세라 김경숙 시인의 시는 농익은 과일의 아우라를 가지고 있다. 부연한다면 홍시 맛이며, 때로는 후추 향을 낸다. 가을의 코스모스처럼 하늘거리기도 하며, 엄동설한의 절기 중에 하나인 소한의 찬 맛을 제대로 풍기기도 한다. 또 김경숙 시인의 아우라의 수는 다수 존재하거나 혹은 색깔이 있다고 여길 수도 한다. 그의 시가 가지고 있는 아우라의 본질적 색깔을 인격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김경숙 시인의 제 1의 아우라의 수는 철학적 시적 구조이며, 제2의 아우라의 수는 성찰이며, 반성의 시적 태도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영혼적 에너지라고 할 수 있는 독습적인 분위기를 찾아낼 수 있다.
대부분의 시인들은 시에 끌려가지만 김경숙 시인은 순발력과 반짝이는 시적 사유로 시작품 속에 철학의 사유를 깊이 있게 묻어 놓는다. 시작품 속에 담긴 의미가 소리를 쳐도 메아리가 돌아오지 않는 만장동굴만큼이나 깊다. 생각이 깊을 때 무게 있는 행동이 나올 수 있는 말이다.
이 장에서 서론이 결론을 구성하듯 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김경숙 시인의 시어나 시의 내용분석은 상세화하거나 구체적으로 논의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따라서 지금부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입장에서 시편들을 정독하며 분석해 보고자 한다.
2. 언어를 샤우팅shouting하는 요리사
일반적으로 시인에게는 언어가 고통이다.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를 정확하게, 또는 온전하게 담아 드러낼 수 없는 것이 언어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언어는 표현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시인에게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고통을 극복하고자 아방가르드 시인들은 그림을 언어대신 사용하게 된다. 그러나 김경숙 시인은 언어를 요리의 재료로 활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시를 쓰는데 있어서 언어가 고통이 아니다. 그 언어를 가지고 즐기고 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장화들이 지나간 자막 사이로 빗금이 몰려오고 우왕좌왕하는 우산들, 동쪽하늘로 휘어진다. 축축한 숲엔 이끼들이 초록 부침개를 부치고 관절사이로 빗방울들 콕콕 들어와 박힌다. 엎질러진 술병도 놀라 파랗게 갠다. 저수지와 논물이 키를 높이고 하늘마저 가라앉아 수위를 높인다.
-「빗소리 시청료」 일부분
언어를 요리한다는 것은 바로 ‘빗소리+시청료’이다. 이런 부분이 김경숙 시인의 장점이다. ‘빗소리’는 낭만적인 요소를 가진 단어다. 반대로 ‘시청료’라는 단어는 그다지 낭만적이라고 할 수 없는 현대성을 포함하고 있는 단어이다. 바꿔 말하자면 자연(빗소리)와 문명(시청료)의 만남이다. 이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조화Harmony’이며, 화합이다. 문명과 자연, 자연과 문명의 만남은 상생의 길을 모색하며, 일치를 이루려고 노력한다. 문명과 자연의 일치를 이루는데 김경숙 시인은 강제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뼈는 상류로부터 말라’(「풀의 뼈」 일부)가기 때문이다. 혁명은 밑(下)에서 위(上)로 일어난다. 즉 하층계급으로부터 상류층 계급으로 번져간다. 그러나 김경숙 시인의 ‘화합’의 사유는 상류에서 하류로 물이 흐르듯이 자연의 순리에 따라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흐른다.
언어의 선택은 시인의 깊은 사유로부터 결정된다. 김경숙 시인의 언어 선택은 오래된 시창작의 결과에 의해 자연스럽게 결정된다. 인위적이며, 가식적, 혹은 이중적이거나 불안의 요소가 보이지 않는다. 진솔한 내면세계에서 잘 숙성된 언어를 선택하여 시의식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그의 언어에는 조용하면서도 함성이 들어 있다. 그래서 김경숙 시인의 시작품을 살펴보면서 첫 번째로 의도한 바가 ‘언어를 샤우팅shouting하는 요리사’로 명명하고 싶은 일이다.
김경숙 시인은 언어에 힘을 가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작품들이 한결같이 외유내강하다. 이러한 시세계는 수많은 천둥소리에 수많게 놀랐던 가슴이 있어야 하고,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있어야 하며, 언어를 버리는 심정으로 시를 쓸 때만이 가능하다. 이러한 시적 사유를 「풀의 뼈」를 통해 살펴본 결과, ‘붉은 물 다 빠진 내 몸도/건천 같은, 풀 대궁 같은 마른 뼈가 질겨진다’는 표현이나, 「돌에게서 사람에게로」에서 ‘본분을 찾는다는 것은/흔들리는 돌을 조금씩 굳혀가는 일이다’라는 표현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돌이 늙으며/사람대접을 받’는다는 세상의 진리를 익히 알고 있는 까닭이다.
김경숙 시인의 생각은 곧 김경숙 시인의 행동이다. 그가 언어를 선택할 때 가지는 깊은 사료는 무거운 듯 가볍고, 가벼운 듯 무거운 언어를 찾아내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입술’, ‘용의’ ‘귀’, ‘심장’, ‘돌’, ‘풀’, ‘물’, ‘물방울’, ‘씨앗’, ‘시간’, ‘꽃잎’, ‘뼈’, ‘산문’, ‘명상’, ‘몸’. ‘석불’, ‘법회’, ‘오후’, ‘나무’, ‘사람’ 등과 같이 「풀의 뼈」와 「돌에게서 사람에게로」라는 두 작품에서만 ‘침묵하는 아우성’의 언어들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또 시작품 속에 밀어 넣어 샤우팅으로 언어를 요리한다. 그런 연유로 김경숙 시인의 시는 농익은 과일이다. 홍시 맛이며, 때로는 후추 향을 낸다. 가을의 코스모스처럼 하늘거리기도 하며, 겨울의 소한보다 더 찬 맛을 내기도 한다고 서두에서 한 말이다.
빈 방을 가려놓고
흥건한 빗소리를 내려놓고
단 한 번도 들키지 않으려 구름과 계약 했었다.
맑은 아침, 반짝
살 올라 붉어진 나는
어떤 가을날 정오와 몸 섞고 있다.
-「블라인드」 일부
블라인드는 김경숙 시인의 역사의 뒤안길이다. 때로는 ‘달맞이꽃향기를 올렸다 내리고 집배원 오토바이소리를 올리기도 하고 명주나비 꼬리와 옻나무 붉은 얼굴들을 내리기도’ 하지만 ‘어쩌면 창밖 빗소리는 누군가 올렸다 내리는 블라인드 소리일지도 모른다’고 블라인드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빗소리에 비유하여 그 의미를 뚜렷하게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김경숙 시인은 시인이라는 신분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갈수록 하늘은 눅눅해지고 잿빛 까마귀들이 빗소리를 물고 오죽나무 숲 속으로 이동’하는 정서를 가지고 있다.
시어는 그 시작품의 의미를 결정한다. 더 나아가 그 시어의 결정은 시적화자의 몫이다. 즉 화자가 대상이 되는 어떤 욕망으로 보았느냐가 중요하다. 따라서 피상적이지만 시어의 기능을 구분하자면 화자가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거나 이입되어 그 어떤 사물이나 자연물이 대신하여 나타내 준다.
정독한 열편의 시속의 시적화자는 모두 자아와 대립적 분위기로 몰고 가지는 않는다. 대상(세계)과 자아가 화해라는 동일성을 추구하는 서정시의 본래적 장르의 특징을 취한다. 화자persona는 그 특징을 이루기 위해 시어의 선택에 정성스럽게 공을 들이고 있다. 「블라인드」에서 나타나는 시어를 살펴보면 ‘빗소리’, ‘창밖’, ‘풍경’, ‘달맞이꽃’, ‘집배원’ ‘옻나무’‘하늘’, ‘까마귀’, ‘숲’, ‘빈 방’, ‘구름’, ‘아침’, ‘가을’, ‘정오’, ‘몸’을 사용함으로써 이 시어들은 모두 화해의 정서를 가져다주는 동일성同一性을 확고히 하는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 다른 특징은 시의 서술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방에 살면서 ㉠올리고 내린 풍경들이 많았다. 달맞이꽃향기를 ㉡올렸다 내리고 집배원 오토바이소리를 올리기도 하고 명주나비 꼬리와 옻나무 붉은 얼굴들을 ㉢내리기도 했다. 어쩌면 창밖 빗소리는 누군가 ㉣올렸다 내리는 블라인드 소리일지도 모른다. 갈수록 하늘은 눅눅해지고 잿빛 까마귀들이 빗소리를 물고 오죽나무 숲 속으로 ㉤이동한다.
-「블라인드」 일부
예시된 시는 「블라인드」의 일부분이다. 4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서 ㉠, ㉡, ㉢, ㉣의 서술어는 모두 ‘올리고 내리’는 상하수직적 정신을 보여준다. 이 상하수직적 사유는 시인의 삶이 반영된 것을 의미한다. 누구에게나 삶의 과정에서 부침이 없는 사람이 있겠냐마는 김경숙 시인은 숱한 역경의 시대를 자연물과 관련된 시어를 선택하여 독자들에게 순화된 정서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오직 ‘오르고 내리’는 굴곡진 여정으로 시의 정서를 끝내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서 특유의 시상으로 화해의 무드를 조성한다. 가령, ‘갈수록 하늘은 눅눅해지고 잿빛 까마귀들이 빗소리를 물고 오죽나무 숲 속으로 ㉤이동한다’는 시행에서 ㉤의 ‘이동한다’라는 수평적 사유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러 현상들이 빚어지는 이유는 모두 시인의 본성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그런지 뷔퐁은 “글은 곧 그 사람이다”고 이 세상에 불변의 진리 한 마디를 내던진 것이 아닐까. 뷔퐁의 말에 따른다면 김경숙 시인의 시작품은 모두 김경숙 시인 자신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함부로 시를 써서는 안 된다는 이유이기도 하다. 경거망동한 시적태도를 보이지 않으려고 김경숙 시인은 시어의 선택에 혼신을 다하고, 원석을 고르듯이 심혈을 기울이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입추 지나자 논에 물을 뺀다.
이삭이 영그는 논둑에서
쓸쓸쓸 물 빠지는 소리가 까끌까끌하다.
여기저기 터진 논바닥마다
서늘한 바람이 몰려든다.
더 이상 어른거리는 바닥을
가둬놓지 않겠다는 듯
쓸쓸쓸 물들이 밀려나간다.
······〈중략〉 ······
금들이 패인 가슴을 포개고 손을 잡으며
쓸쓸쓸 꽃무늬를 만들고 있다.
······〈중략〉 ······
너울바람에 풀벌레소리 불러놓고
쓸쓸하게 섞이는 소리들이 누렇게 익어간다.
풍덩, 빠질 일 없으므로
푹푹 빠질 일 없을 거라고
쓸쓸쓸 물이 혼잣말을 하고 있다.
-「물 빼는 논—혼잣말」 일부
대부분의 시인들은 시어에 끌려가지만 김경숙 시인은 순발력 있는 시적 사유로 시작품 속에 철학의 사유를 깊이 있게 묻고 있다. 「물 빼는 논—혼잣말」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이 작품에서 압권은 ‘쓸쓸쓸’이라는 의성어이다. ‘쓸쓸쓸’이 5회나 반복된다. 만약 ‘쓸쓸’이라는 시어를 사용했다면 이 시는 한낱 개인적인 푸념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쓸쓸쓸’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새로운 ‘낯설게 하기’를 시도한다. 시인의 의무 중에 하나로 볼 수 있는 것은 독자들에게 상상력을 제공하거나 그 상상력을 확장해 줄 의무가 있다. 한 줄의 시구이든 한 개의 연이든 그것을 통해 상상을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그래서 시 쓰기에서 압축성과 이미지를 요구하는 까닭이다. 또 다른 시인이 가져야할 의무가 신조어를 만드는 일이다. 따라서 김경숙 시인은 ‘쓸쓸쓸’이라는 시어와 ‘까끌까끌’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시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시적태도를 보이고 있다.
비록 이삭이 영글고 있지만 ‘쓸쓸쓸 물 빠지는 소리가 까끌까끌하다’는 표현이나 ‘더 이상 어른거리는 바닥을/가둬놓지 않겠다는 듯/쓸쓸쓸 물들이 밀려나간다’는 것이나, 또는 ‘금들이 패인 가슴을 포개고 손을 잡으며 /쓸쓸쓸 꽃무늬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나 ‘너울바람에 풀벌레소리 불러놓고/쓸쓸하게 섞이는 소리들이 누렇게 익어간다’는 것이나 ‘풍덩, 빠질 일 없으므로/푹푹 빠질 일 없을 거라고/쓸쓸쓸 물이 혼잣말을 하고 있다’는 진술은 인간이 외로운 동물임을 증명하는 일로 볼 수 있다.
저 까칠까칠한 먹성이,
쓱쓱 온 산을 베어 먹는다 해도
집성촌을 허물어버린다 해도
당산나무그늘을 토막 낸다 해도
톱날은 다만 몇 개 톱니를 부러뜨릴 뿐이다.
잘생긴 나이테가 곧 밥이다.
대이어 물려줄 지문으로 날카롭게 날을 갈아
나이가 나이들을 먹여 살리지만
밥의 끝이란 양족(양쪽) 나이를 들키는 일이다.
여전히 뿌리를 박고 있을 나이와
쓰러지거나 먼 곳에서 말라갈 나이가
똑같이 닮았다.
-「톱밥」 일부
톱밥은 `60~`70년대의 생활상을 기억하게 만드는 매개물이다. 톱밥이라는 시어를 귀로 들어 만 봐도 지난날 궁핍의 일상들이 고스란히 스크린처럼 되살아난다. 이런 점이 김경숙 시인의 특유의 시 쓰기 기법이다. 앞에서 주지한 바와 같이 시인의 의무 중에 독자들에게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일이다. 또한 「톱밥」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매우 다양하다. 시인은 ‘톱밥’이라는 시어를 선택하여 지난날의 추억을 불러오게 하는 일도 시현하고 있지만 문명이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문제점도 이 「톱밥」을 통해 지적한다. ‘아무리 나무를 썰어먹어도 깡마른 톱’이라는 표현과 함께 ‘저 까칠까칠한 먹성이,/쓱쓱 온 산을 베어 먹는다 해도/집성촌을 허물어버린다 해도/당산나무그늘을 토막 낸다 해도/톱날은 다만 몇 개 톱니를 부러뜨릴 뿐이’라고 표현함으로써 문명이 야기하는 각종 문제점에 대해 비판적 정서를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어디 그 뿐인가. ‘다 쓴 톱을 연장통에 보관한다./톱날은 여전히 번쩍거리지만 /당분간은 죽을 사람도/태어날 사람도 기미가 없다’고 함으로써 문명은 생사의 관계없이 피해를 자행함을 보여주고 있다.
나무는 인간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주거할 집을 짓는 데에 각종 재료로 사용되기도 하고 탁한 공기를 정화하는 등 여러 가지 이로운 점을 인간에게 대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톱날이 나무의 몸에 다가가면 나무는 톱의 밥이라는 톱밥이 되고 만다. 이런 안타까움에 대해 김경숙 시인은 ‘잘생긴 나이테가 곧 밥이다’라며 자연이 인간과 공생의 동반자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또 삶의 허무함도 「톱밥」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쓰러진 허공 쪽으로 뻗어갈수록/가늘어지는 가지 끝으로 나이들이 빠져나간다./그쯤에서,/족보엔 죽은 사람들 갈래가 더 많아진다’고 니힐리즘(Nihilism)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그 니힐리즘(Nihilism)의 의식은 니체의 긍정적 허무와 같은 것이다. 인간의 정신이 낙타, 사자, 아이의 단계로 변모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낙타는 생존을 위해 스스로 사막을 택한 것처럼 영원불멸성을 가지려고 인간은 죽음을 필연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다.
김경숙 시인은 ‘너머’의 시공간이 아니라 넘는 행위 자체를 긍정한다. 모든 사람들의 인생이 끝없이 고통을 넘어 서려고 하는 것처럼, 죽음의 고통으로 거듭나는 자신을 긍정하려고 노력한다. 허무란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가치가 그 가치를 잃어버렸을 때이다. 죽음은 잃어버릴 수가 없다. 인간은 그 어느 누구도 죽음의 가치를 잃어버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가치의 가치를 잃어버릴 수 없음을 ‘다 쓴 톱을 연장통에 보관한다./톱날은 여전히 번쩍거리지만/당분간은 죽을 사람도/태어날 사람도 기미가 없다’는 진술로 대신하고 있다. 그러므로 김경숙 시인은 부정하지 않는 삶을 만들어 가고 있다고 할 것이다.
때로는 비판적 시적태도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내 그 비판을 교훈으로 순화하는 재치를 발휘한다. 다음의 「푸른 교훈」에서 그것을 살펴보자.
여름은 입이 떫고
가을은 입이 달다.
여름뒤란은 습습한 교훈
딱딱 지붕위로 떨어지는 소리
떫은 것들 중
중도포기가 아닌 것이 없다.
······〈중략〉······
일 년 중 여름은
뒤란이 뒤숭숭해지는 계절,
그늘이 받치고 있는 염천炎天과 같이
늙은 그늘이 감나무를 받쳐놓고
딱딱, 푸른 교훈을 떨군다.
-「푸른 교훈」 일부
일반적인 교훈이 아니다. 푸른 교훈이다. ‘교훈’이라는 단어 자체가 긍정의 뜻을 지니고 있는데, ‘푸른’이라는 형용사 하나를 덧붙였다. 교훈의 의미를 긍정의 긍정으로 강조하고자 했다. 신조어의 시어를 ‘푸른’+‘교훈’이라는 합성어로 ‘푸른 교훈’을 생산해 냈다. 연금술사로서 이렇게 언어를 다루는 언어의 조련사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푸른 교훈」이 전하는 의미를 내용적인 측면에서 고려해 보더라도 자연에서 가져온 ‘계절’, ‘염천’, ‘그늘’, ‘감나무’라는 시어를 통해 자연의 섭리를 내세워 인간이 깨달아야할 교훈으로 시어로 잘 요리하고 있다.
김경숙 시인이 추구하는 언어는 존재 이해의 방법론적 통로이다. 그 존재가 작품을 탄생시키는 근원이며 작품은 존재의 드러남이라는 의미의 가치를 가진다. 또 김경숙 시인의 시어는 특수하고 구체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지만 이 이미지는 특수성과 구체성을 초월한 어떤 피안이나 보편적인 것을 암시하며, 시는 말과 침묵으로써 그 전체를 이루고 있다.
무수한 발을 가진 입에게
발등을 물렸다
그때부터 발속에는
욱신거리는 발가락들이 돌아다닌다.
손바닥에 다른 손이 돌아다니는 일이나
입속에 또 다른 입이 맴도는 일이나
심장에 들이지 않은 심장이 뛰는 일은
다지류 엉킨 다리 갈피처럼
우왕좌왕 아픈 일이다.
-「내 발속에 마흔 개의 발이 들어있다」 전반부
현실을 초월하는 일들이 「내 발속에 마흔 개의 발이 들어있다」는 시작품 속에서 뚜렷이 일어나고 있다. 입이 무수한 발을 가지고, 발속에는 발가락들이 돋아나고, 입속에 다른 입이 돋아나고 맴도는 일이나 심장에 심장이 또 뛰는 일들은 현실에서 일어날 가능성은 전혀 불가능하다. 모두가 기이한 일들이고 지금까지 현실에서 본 적이 없는 사건들이다. 시인은 무수히 많은 상상력을 독자들에게 일으켜보자는 취지에서 초현실주의Surrealism, 超現實主義의 기법을 도입한 것이다.
환상적이고 기괴한 이미지로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현상들이지만 현실에서 일어난다면 가슴 아픈 일이다. 가령 ‘발에게 발을 물리고/어디라도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은데/스무 쌍의 검은 발들이 /스멀거리며 돌아다니는 몸,/언젠가 문밖에 벗어두었던 신발이/발속에 들어와 서성거리듯’한 일들은 타인의 삶에 훼방꾼이 되는 일이고, 적지 않은 피해를 입히는 악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일들의 결과를 사전에 방지하고 싶은 심정에서 혼란한 사회를 정의롭게 하려고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는 표현을 구사한 것으로 사료된다. 이런 시작법(詩作法)을 구사하는 시인의 의도는 인간심리의 탐구와 그 표현을 촉구하는 수단임을 강조하면서, 방법론적 연구와 실험을 매우 중시하기 때문이다.
소나무 어르신 한 벌 수의를 준비 중이시다. 담쟁이덩굴 여러 갈래 펼쳐놓고 기꺼이 품을 재고 계시는 중이시다. 칡넝쿨로 기장을 재고 사위질빵으로 빈틈없이 마름질하시더니 계요등으로 넉넉하게 시접을 넣고 꺼끌꺼끌한 환삼덩굴로 박음질을 하고 계신다.
결박을 위해 속박을 벗고 계시다.
살아서는 단단한 사람들의 관을 꿈꾸시더니 마음 바꿔 한그루 죽음이 되시려는 것이다. 분별없는 줄기들로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며 한 벌 수의를 준비 중인 것이다.
별을 닮은 이파리로 수백 개 만장을 만들고 지나는 바람 따라 만가를 흥얼거리며 평생 단 한 번 겨울도 쉬어보지 못한 사철 청정하게 달려온 일생을 꽁꽁 묶어 끝내시려는 것이다.
누구 하나 도와주는 손길도 없이 햇살과 그늘과 여름 한철을 섞어 스스로 수의를 짓고 계시는 중이다.
이미, 머리끝까지
번잡한 벌레를 들이시고도
휘어지는 곡哭소리에도
시취尸臭 하나 없으시다.
-「수의를 짓다」 전문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삶을 묘사한 「수의를 짓다」의 전문을 예시로 실었다. 그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소나무 어르신’이라는 시어는 김경숙 시인이라는 최고의 요리사가 최고의 요리를 하듯이 만들어낸 시어의 요리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김경숙 시인은 「수의를 짓다」에서 사용된 시어를 보고 시어의 요리사임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연 1행 첫머리를 장식하는 ‘소나무 어르신’은 누구인가. 주지하듯이 우리 모두의 ‘아버지’의 상징이다.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들은 현재 수의를 짓고 있거나 지어놓았던 수의를 입고 천국의 계단으로 올랐으리라. 그러나 시적화자의 진술에 따르자면 「수의를 짓다」에서 ‘소나무 어르신’은 수의를 짓고 있는 중이다. 그것도 시인은 이중적 구조의 시적 형식을 취하여, 이 시를 끌고 간다. 하나는 ‘소나무’가 아버지의 상징으로서 자신의 목관을 짜고 있는 것을 ‘소나무 어르신 한 벌 수의를 준비 중이시다’라고 표현했으며, 또 다른 하나는 일반적인 모든 아버지들의 목관을 짜고 있는 ‘소나무’로 해석 할 수 있다. 여기서 어느 것이 옳고 그른 것이라고 흑백논리로 논의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삶의 무늬를 남겼는가에 그 해석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
첫 연은 수의 한 벌을 맞추기 위해 몸의 치수를 재는 현장을 생생하게 들려준다. 품을 재고, 기장을 재고, 마름질하며, 시접을 넣기도 하고, 박음질을 하고 있다는 정황을 사실로 드러내고 있다. 2연의 1행인 ‘결박을 위해 속박을 벗고 계시다’는 진술은 「수의를 짓다」 시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결박’이라는 시어와 ‘속박’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동일성으로 오히려 차별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결박’과 ‘속박’의 시어는 완전히 다른 개념으로 분리된다. 속박의 시어는 결박을 위해 죽어가야 한다. 즉 소나무는 죽은 자를 위해 스스로 목관을 내어 주는 일이 결박을 위해 죽어 가는 일인 것이다. 동시에 ‘소나무 어르신’은 자식을 위해 기꺼이 희생이라는 속박을 벗어남으로써 자식의 결박을 해제하는 것으로 삶의 무늬를 남으려고 한다.
김경숙 시인은 ‘소나무 어르신’이 ‘별을 닮은 이파리로 수백 개 만장을 만들고 지나는 바람 따라 만가를 흥얼거리며 평생 단 한 번 겨울도 쉬어보지 못한 사철 청정하게 달려온 일생을 꽁꽁 묶어 끝내시려는 것이다’라며 화자의 정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요컨대 ‘소나무 어르신’은 완전한 속박을 위해 스스로 결박을 종용하고 있다. 완전한 속박은 자유로운 영혼의 아이러니(irony)이다. 첨언하면 반어법은 존재와 당위 간의 차이에 대한 고도화된 인식으로부터 일어나며, 감정이 절제된 페이소스를 나타낸다. 또한 공공연한 칭찬이나 비난을 피하는 간접적인 표현형식이다. 극적 아이러니는 말의 사용보다는 작품의 구조에 달려 있다. 희곡에서는 아가멤논이 아부에 넘어가 자신의 수의(囚衣)가 될 자줏빛 융단 위를 걷는 경우처럼, 등장인물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는 다가올 운명을 관객이 알고 있을 때 일어난다.
「수의를 짓다」에서 찾아낸 ‘소나무 어르신’의 생애는 한없이 위대하고, 티 없이 순수하며 깨끗하다. 그렇게 너무나 청명하고 자연을 닮아서 ‘머리끝까지/번잡한 벌레를 들이시고도/휘어지는 곡哭소리에도/시취尸臭 하나 없’다. 그의 몸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은 사리(舍利)다.
아이러니를 사용하게 그 이유는 우리들의 무지와 겸손을 가장하여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 아버지라는 주제에 관하여 어리석고 명백한 질문을 함으로써 우리들의 무지를 깨닫게 해주려는 교시적 의도를 가지고 있다.
3. 結
글은 고통이다. 그러나 그 고통을 즐겨야 하는 것이 시인이다. 그래서 김경숙 시인의 시작품을 대하면서 그의 고통이 무엇인지 고스란히 목격하였다. 그 고통은 화려하지도 않으면서 화려했으며, 뼈 속에 뼈가 있는 시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고통은 소리 없는 무통의 아픔이었고, 성찰의 강물이 홍수처럼 불어나 무척 풍요로운 고통이었다. 김경숙 시인은 그런 고통을 무척 즐겼다. 그런 고통을 즐겼다는 것은 세계(대상)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 있다는 결론이고, 따라서 적어도 시인은 시를 쓸 때만큼은 성찰과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성찰과 반성은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타자에게 영향을 주어야 한다. 절망하는 자에게 희망을 주어야 하고, 슬퍼하는 자에겐 위로를 대신할 수 있는 탈무드 한 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목마른 자에게는 한 모금의 생명수를 줄 수 있어야 하고 정신이 무너진 자에겐 오류의 정신을 과감히 도려내는 고통을 함께 시인은 분담 할 줄 알아야 한다.
시는 신(神)의 말이라는 투르게네프의 정의를 되돌아보게 하는 김경숙 시인의 시 열편을 상쾌한 마음으로 두 귀를 열어놓고 감상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즐거운 마음으로 평론을 썼다. 지금은 열대지방에서 잘 익은 두리안을 마음껏 먹은 기분이다. 사금파리 하나 없는 넓은 운동장에서 명징한 소리를 내는 언어들과 신명나게 한판 뒹굴며 놀아본 기분이다.
부조리한 사회와 실천타성태의 제도와 규범에 대해 분노하지 않거나 성찰하지 않으며, 또한 반성하지 않는 시는 한 여름 동안 울어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매미와 같다. 김경숙 시인의 시작품은 한 여름 내내 울다가 목이 쉬어버린 참매미의 가치 있는 노동의 그 자체이다.
아름다운 시어의 선택과정에서 보여준 고뇌하는 모습은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별칭을 부여받아도 어떤 반론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시인은 언어를 탁마하는 데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그런 까닭에 어떠한 시에도 시어 선택에 소홀히 하거나 대충하는 일이 없다. 한 편의 시작품이 퇴고과정을 다 끝낼 때까지 고뇌의 끝을 놓지 않는 흔적들이 시편 곳곳에서 화석처럼 흔적을 남겼다.
고뇌하며 건져 올린 시어로 김경숙 시인의 시는 철학적인 내용의 깊이가 동짓달 긴긴 밤보다 깊었다. 소나무 한그루를 대한민국의 모든 아버지로 변신시키는 상상력의 힘은 오랜 시창작의 내공에서 비롯된 듯하다. 그러므로 김경숙 시인의 시의 언어는 자연과 인간이 조화된 원초적 통일성을 지향한다. 또 김경숙 시인의 시는 기본적으로 역설적인 언어로 의미차원이 아니라 존재차원을 지향한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바람이 곳곳을 누비고 있다. 이런 때에 가슴의 언저리에 오래도록 머무는 쾌락의 근저는 김경숙 시인의 시편들이 작용한 것이다. 훗날 또 다른 지면에서도 지금과 같은 시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