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팬 클럽
최근 언론보도를 보니 개신교인은 1.6%가 줄어든 반면 가톨릭교인은 75% 정도 증가하였다는 기사를 보았다. 1980년대 세계가 놀랄 만한 부흥기를 맞았던 한국의 개신교가 최근 들어 일반인은 물론 기존의 교인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각 교회마다 총동원 전도 주일이다, 또는 부흥회다 하여 교인 증가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고 실제로 교인수가 엄청나게 증가된 교회도 있으나 개신교 전체적으로는 줄어들고 있으니 그것은 교회들이 다른 교회의 교인을 옮겨오는 것은 성공하였지만 안 믿는 자에게 전도하는 것은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된 원인은 이미 많은 교계 관계자들이 분석하고 그 회복을 위하여 회개하고 기도하고 있지만 추상적인 분석이 대부분이고 구체적인 분석은 타인을 비난하고 교계의 화합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자제하고 있는 것 같다. 여러 시각이 있을 수 있으나 평신도의 입장에서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교회가 이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개신교인이 줄어든 이유 중에 하나라고 생각된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교회에 대한 기대는 있다. 그들은 교회야말로 정의롭고 깨끗하며 화평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보여준 모습은 영생의 축복보다는 현세의 축복을 더 우선적으로 강조하여 왔다. 현세의 축복은 단 시간에 교인을 증가시키는 효과는 있지만 그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온 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결국 기독교인도 암에 걸리고, 사업에 실패하며, 잘못도 저지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때에 영생에 대한 소망과 죄에 대한 용서와 희생에 의한 승리가 기독교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교회는 효능이 정지되어 버린 요술 방망이가 되어버려서 더 이상 교회에 다니는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더구나 예수님의 능력보다 특정 목사님이나 장로님이 없으면 교회가 쓰러질 것 같이 인간의 능력이 더 중요시 되며, 기도의 대부분이 남의 소원은 들어 주지 말고 내 소원만, 다른 교회는 아니고 내 교회만, 비기독교인은 아니고 기독교인만 그 소원을 이루어주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으로 비춰질 때 사회의 어느 집단보다도 이기적인 이익 집단으로 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모습이 대학 입시를 앞둔 교회의 모습이다. 대학 합격 기원 특별 새벽 기도회에서 그 동안 쌓은 실력과는 상관없이 내 아이의 합격만을, 우리 교회 학생들의 합격만을 기원하는 것은 경쟁인 입시에서 다른 이의 불합격을 기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민망한 적이 많았고 교회에서의 기도는 좀 달랐으면 하는 생각이 든 적도 많았다.
예수님의 초능력을 빌려 이 세상에서의 건강, 물질, 성공을 이루는 것이 교회의 최우선이 되면 안 믿는 자를 교회로 인도하기는 쉽지만 그것만으로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만들기는 어렵다. 최근 기독교인의 수가 감소하는 것은 교회에서 용서와 양보를 보기보다 내 믿음만 옳다는 독선과 아울러 재벌들도 꺼리는 대 물리기, 정년퇴임 연장하기, 편가르기, 고소하기 등이 언론에 등장하면서 평신도들이 개미같이 땀 흘려 전도한 이들이 무리를 지어 교회를 벗어난 결과라 여겨진다.
이제 우리 기독교인들은 과연 기독교인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할 시점에 다다랐다. 기독교인이란 예수를 믿는 사람, 더 자세히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다시 오실 것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것만으로는 무언가 모자라는 것 같다. 예수님에 대해 매일 성경공부하고 매일 기도하면 기독교인인가? 교회 예배 빠지지 않고 십일조 등 헌금에 충실한 것만으로 기독교인이라 할 수 있는가?
기독교인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한국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자. 한국인이란 한국에 대해 매일 공부하고 한국을 위해 매일 기도하고 한국에 살며 한국에 세금을 낸다고 한국인이 아니다. 진정한 한국인이란 우선 국적이 한국이어야 하고 한국말을 사용하고 한국 사람의 생활 태도, 습성 등을 가져야 한국인인 것이다.
기독교인도 마찬가지로 우선 국적이 이 세상이 아니고 주님의 나라여야 하고 예수님과 같은 생활 태도, 습성, 같은 언어를 가져야 한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기독교인을 정의하는 말씀 중 하나라 생각한다. 여러 가지 표현 중에서 굳이 먹는 것을 예로 드신 것은 구체적인 일상의 삶이 예수의 삶이어야 한다는 뜻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예수님께서 사셨던 방식대로 살기를 원하여 그대로 살려고 애쓰는 기독교인은 별로 많지 않다. 대개는 예수님의 용서, 사랑, 거룩, 자비, 온유, 십자가의 희생은 닮고 싶어하지 않고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셨던 기적의 능력,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는 치유의 능력만 닮고 싶어하며 이 부분에 더 매력을 느낀다.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따라 살기보다는 예수님의 능력만 빌려 자기의 세상적 목적을 달성한 후 실제 삶의 방식은 성공한 정치가, 유명한 재벌 등을 따라 살고 있는 것이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의 모습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오늘날 기독교인의 일부분은 한류 스타에 매혹된 욘사마 팬들처럼 예수를 좋아하여 예수에 미쳐있는 팬 클럽 회원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욘사마 회원이 배용준과 한국을 아무리 좋아해도 한국인이 아닌 것처럼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이라는 스타에 매혹되어 있는 팬클럽 회원일 뿐이지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수의 삶을 살고 있는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이제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사셨던 삶의 목표를 우리의 삶의 목표로 삼고, 그가 살았던 방식이 우리의 삶의 방식이 되게 하며, 매 순간마다 우리의 선택이 예수의 선택이 되게 하고, 우리의 미소가 예수의 미소가 되고, 우리의 언어가 예수의 언어가 되게 하며, 우리의 용서가 그리고 우리의 사랑과 희생이 예수의 사랑과 희생이 되게 하여야 하겠다.
--- 이진학 (서울대 안과 교수, 서울대병원교회 장로)
2006년 7월호 “건강과 생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