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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 10,9-18>
형제 여러분,
9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18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 복음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4,18-22>
그때에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우연은 무책임과 우울함을, 필연은 책임과 기쁨을>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부였던 네 명의 사도들을 뽑으시는 내용입니다.
그중에 안드레아가 있습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첫 제자였습니다.
처음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소개하는 말을 듣고는 곧바로 그를 따라가 제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라고 시작합니다.
얼핏 보면 예수님께서 ‘우연히’ 거니시다가 그들을 발견한 것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예수님은 아무 생각 없이 다니시다가 우연히 제자들을 부르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생각 없이 행동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시몬과 안드레아는 그런 분임을 알고 있었고 비록 그렇게 보이더라도 이는 우연이 아니고 필연적인 부르심임을 믿고는 이렇게 행동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을 필연으로 여기면 ‘책임’이 따릅니다.
따라서 신앙을 가지려면 모든 것을 주님 뜻으로 여겨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우선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로 쓰시는 이들에게 하시는 첫 번째 일은 ‘우연은 없다’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일입니다.
그래야 당신이 우연처럼 부르시는 것에도 생명을 걸고 나서기 때문입니다.
저도 뒤돌아보면 태어나서 첫 기억인 할머니의 돌아가심이 저에게는 ‘행복’을 찾는 시작이었고, 우연히 접하게 된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가 행복은 주님을 따름에 있음을 알게 하여 사제가 되기로 하게 된 것도 실제로는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하느님의 속성 안에는 ‘우연’이란 없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자녀에게 하는 일이 우연일 수 있습니까?
우연히 자녀를 임신하고 우연히 낳고 우연히 기르는 어머니는 없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면 자녀가 비록 어머니가 우연히 자신에게 해 주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어머니의 관심과 사랑이 담긴 필연입니다.
아이가 어머니가 나에게 해주신 말이 우연이라고 느끼면 그것은 은총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필연으로 다가오면 아이는 그 말씀 때문에 자신에 대한 책임 있는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어머니께서 제게 “엄마는 자녀를 일곱 살까지만 키워주는 거다. 앞으로 네가 잘 돼도 네가 잘해서 잘 된 것이고, 다쳐도 네가 잘못해서 다친 것이다.”라고 말해주신 것이 그냥 우연히 말씀하신 것이라고 여겼다면 저는 지금의 저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을 저는 우연히 하신 말씀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해주신 말씀으로 들었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제 인생에 책임을 지려 살아왔고 그것이 저에게 자존감을 주고 저를 성숙시켜 왔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어떨까요?
기쁨입니다.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라는 책을 쓴 임세원 교수는 2018년 12월 31일 조울증 환자가 휘두른 칼에 안타깝게 돌아가신 의사이십니다.
이분은 피할 수 있었으나 간호사가 위험할까 봐 나와서 피하라고 알려주다 그런 변을 당하였습니다.
이분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우울증이 무엇인지 몰라요.”
그렇게 오래 공부하고 많은 환자를 접했는데 그것을 모른다고 환자들이 하면 힘이 빠지고 화까지 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임 교수에게도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몸에 원인 모를 통증이 찾아오고 일상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살 시도를 합니다.
소주 두 병을 사서 한 병은 먹고 반병은 몸에 뿌리고 반병은 차에 둔 채 다리 난간을 들이받고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 계획하고 실행하려는데 차 열쇠가 없는 것입니다.
열쇠를 찾으려고 집으로 들어갔을 때 잠자는 아이들을 보고는 한없이 울고 다시 살아보자, 나에게 기회를 다시 주자는 마음으로 3년 정도의 극한 우울증을 극복해내었습니다.
이분은 우울증이 오는 원인을 ‘왜?’라고 찾았습니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왜 우리 자녀만, 우리 부모만? 다른 사람들은 죄짓고 잘도 사는데…?’ 등의 물음에 해답을 할 수 없을 때, “그냥!”이라는 해답을 주면 이것들이 쌓여서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진다는 것입니다.
직접 우울증을 극복해본 분이라 맞는 말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극복하는 일은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 하루하루를 적극적으로 살아보자는 노력입니다.
명상하고 운동하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사람들을 만나는 등의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 일어나는 일들이 우연이라고 여기면 지금 내가 할 일은 없어지지만 그것이 삶을 우울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다 주님께서 주시는 필연이라고 여기면 얼마나 좋을까요?
2000년 중국 산둥성에서 한 남자가 의료 사고로 뇌사상태가 된 아내를 극진히 간호해 8년 만에 깨어나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아직 몸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지만 2008년 장 씨의 아내는 임신하게 됩니다.
의사들은 한결같이 아기를 낳으면 산모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들에게 아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편이 죽어있는 저를 살려주었습니다. 제가 남편에게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이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다행히 건강한 딸을 출산했고 산모도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장 씨는 아내와의 결혼을 우연이라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책임이 따릅니다.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런 믿음이 축복이 되었습니다.
아마 이 결혼을 우연이라 여기고 다른 사람을 만나 살았어도 지금만큼 행복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필연적이라 여기면 희생해야 할 것도 생깁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이 나에게 축복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그것을 필연으로 믿는 이에게 축복을 주시기 위해 매 순간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일곱살 때 제게 해주신 말씀이 어머니는 저에게 그냥 우연히 말씀하신 것이라 하십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사랑이 담겨있었고 저는 사랑이 담겨있는 어머니의 말씀과 행동에는 우연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는 우연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책임있는 삶을 살아야 했지만 그것이 기쁨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결정해야 합니다.
지금 일어나는 일을 그냥 우연으로 해답 없이 넘길 것인지, 아니면 필연으로 믿고 응답할 것인지.
안드레아 성인께서는 엑스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는 동안에도 며칠 동안 설교를 하며 단 한 명이라도 더 회개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순간도 필연으로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필연은 자신과 이웃에게 축복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연이라고 믿는 것은 축복에서 제외되지만, 필연적이라 믿는 것은 모든 것이 축복이 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안드레아는 공관복음에 따르면, “사람 낚는 어부”(마르 1,17; 마태 4,19)가 되리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형인 베드로와 함께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그가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는데, 그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께서 부르신 첫 번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요한 1,35-40).
그리고 형인 시몬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소개하고, 그를 예수님께로 인도한 첫 번째 선교사가 되었습니다(요한 1,40-42).
또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실 때에는 한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드렸으며(요한 6,8-9),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는, 예수님을 만나 뵈러 온 그리스인들을 예수님께 소개하기도 합니다(요한 12,20-22).
한편 초기의 동방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안드레아 사도는 “맨 처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의 ‘프로포클레토스’라고 불렸습니다.
그는 흑해 주변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그리스의 아카이아 지역인 ‘파트라이’에서 순교하였는데,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안드레아의 성화나 성상에는 X자 형의 십자가와 함께 묘사되고 있습니다.
또 스코틀랜드의 국기에 새겨진 X자는 그 나라의 수호성인인 안드레아를 상징합니다.
그의 유해는 베드로 대성전에 모셔져 오다가,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서 그리스 정교와의 화해의 표시로 그의 순교지인 ‘파트라이’에 모셔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마태 4,18)라고 말씀하시고 안드레아는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마태 4,20).
그런데 고기를 낚는 어부와 사람을 낚는 어부는 어떻게 다를까?
그것은 고기를 낚는 어부는 살아있는 고기를 죽이기 위해 잡아들이지만,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는 죄로 죽은 영혼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잡아들이는 것이요, 고기를 낚는 어부는 고기를 골라서 낚아 올리지만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는 고기가 좋든 나쁘든, 곧 전교 대상이 선하든 악하든 간에 낚아 올리는 것이요, 고기를 낚는 어부는 자신의 그물을 치지만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는 성령의 그물을 치는 데에, 곧 자신의 방식으로 그물을 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가라는 데로 가며 그물을 던지라는 쪽으로 던지며 그분이 명령하는 방식으로 그물을 치는 데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바로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이해타산의 머뭇거림이 전혀 없는 온전한 응답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우선적인 것은 안드레아 사도가 예수님께서 머무르는 곳에서 밤을 묵어가며 양성 받았듯이, 우리도 먼저 그분과 함께 머물며 그분 안에서 양성을 받는 제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마태 4,18)
주님!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소서.
내가 만든 그물이 아니라 성령의 그물을 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위험하더라도 깊은 곳, 당신이 원하신 곳에 그물을 치게 하소서.
자신의 먹이로가 아니라 그들을 살리기 위한 사랑의 그물을 치게 하소서.
제 입맛에 맞는 것만이 아니라 당신이 주신 모두를 거두어들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따름으로써 얻게 되리라>
축일을 맞이한 분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사도의 모범적 삶을 잘 살 수 있는 은총을 입으시길 기원합니다.
제자들은 처음부터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다른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기꺼이 따름으로써 큰 믿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온전히 따르려니까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야 했고, 마침내 버림으로써 주님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지향은 어떤 강제가 아니라 스스로 자발적인 의지로 따름으로써 끝까지 가야 합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은 단지 순명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행동의 변화와 더불어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리 재고 저리 재고 하지 말고 ‘곧바로’ 버리고 떠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에, 주저한다면 그것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시 응답할 수 있는 영혼은 자유롭습니다.
도전할 때 새 일을 만날 수 있고 또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순명과 실행을 통해서 주님의 섭리와 안배를 깨닫게 됩니다.
나의 힘을 빼는 것이 믿음이고, 그리하면 주님의 권능을 제대로 만나게 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첫 말씀은‘나를 믿어라’가 아니고 ‘나를 따라오너라’였습니다.
믿어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따름으로 확고하게 믿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곧바로' 따를 수 있는 믿음을 지닐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내가 선택했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나를 뽑아주셨다’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시몬 베드로와 형제지간입니다.
특별히 요한과 길을 걷다가 예수님을 만난 일이 있는데 그는 곧장 집으로 달려가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요한1,41) 하며 형에게 말하고 예수님께 자신의 형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에게도 소개하였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요한6,8-9)를 가진 아이를 예수께 데려간 사람도 안드레아입니다.
그는 혼자만 메시아를 따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소개하는 열성을 보였습니다.
그는 보고 들은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의 생활에 참여함으로써 삶의 쇄신과 회개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체험을 전해야 합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 5,16)
주님을 따름으로써 믿음을 견고케 할 수 있듯이, 믿음이 약한 이들이 우리를 보고 믿음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도록 먼저 우리의 믿음을 다져야 하겠습니다.
큰 나무는 잘 부러지지 않고, 큰 강물은 소리를 내지 않으며, 깊은 샘물은 마르지 않는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모인답니다.
예수님께서 크신 분이셨듯이 우리 모두가 큰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의 모범과 표양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과 줄다리기를 하지 말고 곧바로 따릅시다.
“예,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믿음의 여정 - 성소는 선물이자 과제다>
어제 있었던 여러 예화들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주로 읽었던 내용들입니다.
<죽는 게 참 어렵습니다> 라는 책 이름에 ‘존엄사를 위해서라도 존엄삶을 이야기해야 합니다’라는 부제가 붙은 책 소개 내용입니다.
죽음에는 정답이 없기에 가장 힘든 게 죽음일 것입니다.
창간 30주년 만에 폐간한, 전 발행인 김종철의 딸이자 동지인 격월간 <녹색평론> 잡지의 편집인 김정현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제가 거의 20년 이상 지금까지 구독했던 잡지입니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들임을 새삼 실감합니다.
“사실 이 일을 하면서 정말 힘든 건 돈이 없는 게 아니다.
우리가 만드는 책에 반응이 없으면 힘이 빠진다.
30주년 이후 더 하기 어렵겠다고 생각한 가장 큰 이유였다.
1만명이던 독자 수가 현재는 4000명쯤 된다.
이 수천명의 사람들을 위해서도 ‘녹색평론’은 존재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힘만으로 얼마나 더 나아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박경리 선생의 대작인 <토지> 1993년판 서문에 나온 내용도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힘겨운 삶, 있는 힘을 다해 살아가는 세상 모든 존재들을 만날 때마다 느끼는 마음입니다.
“산다는 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애잔하다.
바람에 드러눕는 풀잎이며 눈 실린 나뭇가지에 홀로 앉아 우짖는 작은 새, 억조창생 생명있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과 애잔함이 충만된 이 엄청난 공간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일사불란한 법칙 앞에서 나는 비로소 털고 일어섰다.”
새삼 모두가 하느님 안에 존재하는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애잔한 눈에 밟히는 존재들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자각에서 끊임없이 샘솟은 무한한 연민의 사랑입니다.
박경리 선생도 세상을 떠난 지 이미 오래이고 선생의 애지중지하던 고명딸 김영주도 2년 전 73세 암투병 중 세상을 떠났습니다.
2008년 통영 추모제에서 인터뷰 다음 대목도 잊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제가 점점 어머니를 닮아가고 있다고 말씀 자주 하신다.
거울을 보고 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 자리에 서니까 눈물이 흐른다.
꼭 슬픈 마음은 아닌데 그냥 눈물이 나온다.”
고백성사 시 또는 제 ‘행복기도’나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기도문을 읽을 때 울컥하며 흐르던 눈물의 형제자매들이 생각납니다.
순수한 마음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순수한 눈물입니다.
저절로 두손을 꼭 잡아드리게 됩니다.
어제 동영상을 보며 법정 스님의 생전의 수행자 모습이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누군가 법정 스님에게 물었다는 이 질문이 저에게는 화두처럼 남아 있습니다.
‘과연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끊임없이 자문해야 할 물음입니다.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또 오늘은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 이임 감사미사가 오전 10시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봉헌됩니다.
추기경과 서울 대교구를 위해 기도 부탁드립니다.
주님을 위해 순교한 안드레아 사도는 초대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입니다.
그리스어로 그리스도의 첫 단어인 X자형에 따라 X자형의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한 사도로 성인을 수호성인으로 한 스코틀랜드의 국기(國旗)도 여기에서 착안했음을 봅니다.
영국 국기의 X자 형도 여기에 근거합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스코틀랜드에 이어 우크라이나, 러시아, 그리스, 루마니아 국가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전설처럼 전해 오는 사도의 임종어입니다.
형장에 끌려갔을 당시 안드레아는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양손을 높이 쳐들면서 기도하니 바로 임종어가 됩니다.
“오, 영광의 십자가여!
너를 통하여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께서는 지금 나를 부르시는가!
속히 나를 이 세상에서 끌어 올려 주님의 곁으로 가게 해 다오.”
참으로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무의미한 죽음일지도 모릅니다.
과연 사는 것이, 죽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묻게 됩니다.
말 그대로 근원적인 실존적 물음입니다.
바로 이에 대한 답을 안드레아 사도의 순교축일이, 오늘 복음이 줍니다.
바로 우리 믿는 이들에게 답은 이 하나뿐입니다.
주님이 불러 주셨기에 참으로 존재하게 된 유의미한 우리들입니다.
부질없는 물음이지만, 복음의 제자들이나 또 현재의 우리들이 만약 주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세상에는 자기를 모르고 평생 무지의 어둠 속에서 허무하게 살다 죽는 이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새삼 주님과의 만남이 우연이 아닌 필연의 결정적 놀라운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운명이자 사랑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만나 따름으로 우리 삶의 여정은 비로소 시작과 끝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삶의 방향과 목표, 삶의 중심과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결정적 전환점이 된, 부르심을 받은 네 사람의 어부들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어부들은 이제 주님의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믿음의 여정에서 부르심의 성소는 선물이자 과제임을 깨닫습니다.
한 두 번이 부름과 따름이 아니라 평생 매일 죽을 때까지 부르심의 선물에 응답해야 하는 과제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과연 하루하루 부르심에 잘 응답하여 따라나서고 있는지요?
과거에 아무리 부르심에 응답해 잘 살았어도 현재 오늘 지금 못살면 말짱 헛일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루하루 날마다 끝까지 주님을 믿고 고백하며 따르는 과제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믿어 구원을 얻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복음 선포의 사명입니다.
나 혼자 구원이 아니라 더불어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에 이어지는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바로 이 말씀에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있음을 봅니다.
성소의 선물은 복음 선포의 과제 수행으로 완성됩니다.
주님과 함께 복음 선포의 협조자로서, 하느님 나라의 증인으로서, 그분 수확의 일꾼으로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입니다.
완전히 예수님과 도반들과 공동운명체가 된 우리 믿는 이들의 성소입니다.
결정적인 온전한 성소는 마지막 죽는 그날까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바로 이것이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궁극의 답입니다.
삶은 허무도 무지도 아닙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날마다 우리 모두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주님과 함께 복음 선포의 사명에 충실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길손들>
우리에게 가장 큰 선물은 무엇이고, 가장 감사해야 할 선물은 무엇일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줌일 것입니다.
저의 사춘기 시기를 돌아보면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몰라 방황의 시기를 오랫동안 보냈는데, 이 방황의 시기가 제게는 군대 시기보다도 고통스러웠고, 그래서 가장 기뻤던 시기도 당연히 제 인생의 목적을 찾고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을 찾았을 때였지요.
그래서 클라라는 자신의 유언에서 이렇게 회고를 합니다.
"우리 아버지께 우리가 받는 여러 가지 은혜 가운데 더욱 깊이 감사드려야 하는 것은 우리 성소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에게 길이 되어 주셨고, 그분을 참으로 사랑하고 본받은 이셨던 우리 사부 프란치스코께서 말과 모범으로 이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의 길이시고, 우리 인간이 하느님께로 가는 인간의 길이기도 하신데, 너무 고맙게도 프란치스코가 이 길을 알려줬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는 클라라에게 프란치스코가 했듯이 길이신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인도해주는 사람인데,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안드레아 사도가 바로 그런 분이고, 오늘 우리가 이 축일을 지냄은 이를 본받기 위함입니다.
아시다시피 안드레아는 베드로를 주님께 인도하였고, 그리스인들을 주님께 안내한 사람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인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 길을 찾고 발견하고 닦는 사람, 곧 도인(道人)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동양의 도인과 달라야 함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동양에는 도인 개념이 잘 발달되어 있고 이 도인 안에는 구도자(求道者)와 수도자(修道者)가 있는데, 우리의 구도와 수도는 이들과 달리 인격적이어야 하고 하느님을 지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구도는 하느님께 가는 길을 찾는 것이고,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며, 만난 다음에는 오늘 안드레아처럼 그분과 함께 머물며 그분의 가르침을 받고 그분을 닮아가는 것이 우리의 수도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우리 교회는 전통적으로 Imitatio Christi라고 하는데, 이와 함께 또 얘기되는 전통적 수도 방식이 바로 Sequela Christi입니다.
곧 그리스도를 따름인데,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며 배움을 마친 사람은 이제 그리스도를 따라 한편 하느님께로 다른 한편 사람들에게로 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께로 가지만 안드레아와 다른 사도들처럼 사람들에게 파견되어 가야 합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둘씩 짝지어 보내시는데 이렇게 길을 같이 가는 짝을 일컬어 우리는 도반(道伴)이라고 하지요.
여기서 저는 진지하게 저의 공동체 삶을 반성합니다.
제가 강의 때 입버릇처럼 우리는 공동체로 하느님께 가고 공동체로 사람들에게 가야 한다고 하며 그러기 위해서 먼저 공동체로 하느님 앞에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자주 이것을 놓칩니다.
지금 공동체에 나와 함께 있는 형제가 주님께서 짝지어 주신 도반들인데, 기도 밖 생활 중에서는 자주 그리고 순간순간 이것을 놓친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구도자였고 인도자였던 안드레아 사도 축일에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로마 10,14ㄷ-15ㄱ)라는 오늘 말씀도 되새기며 다시 도반과 함께 떠나는 우리 길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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