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데우스」를 읽고
지난 3주간 나는 거의 이 책을 읽는데 매달렸다. 55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도 그렇지만 저자가 자신의 논거로 제시하는 다양한 사례를 따라가며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자 유발 하라리는 옥스퍼드에서 서양 중세사를 전공하고 지금은 히브리대학에서 세계사를 강의하고 있다. 수년전 그가 펴낸 「사피엔스」를 읽은 일이 있다. 20만 년 전 아프리카 사반나에서 始源한 보잘 것 없는 생물종의 하나였던 현생 인류가 어떻게 이 행성을 지배하는 주역이 될 수 있었는지 인류의 역사를 밝히는 내용이었다. 그가 제시한 논점은 7~8만 년 전 인류의 뇌 속에서 발생한 돌연변이가 인류로 하여금 실재하지 않는 존재인 종교, 국가, 돈을 상상하고 창조하여 이것이 인류가 대규모로 서로 협업할 수 있는 길을 터놓음으로서 인류가 다른 모든 종들을 제압하고 지구의 주인공이 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호모데우스」란 뜻은 신이 된 인간이란 것이다. 이하 이 책의 내용 중 특히 인상적인 몇 구절을 인용하여 책 내용을 간략히 서술하고자 한다.
지난 수 천 년 간 인류를 괴롭혀 왔던 기아, 질병 그리고 전쟁은 아직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수 십 년 내에 거의 해결될 것으로 전망된다는 것이다. 그리 되면 인류는 풍요, 건강,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성공은 야망을 낳는다. 번영, 건강, 평화를 얻은 다음 목표는 불멸, 행복, 신성이 될 것이다. 이런 꿈들은 기술적으로 오만할지 몰라도 관념적으로는 오래된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생명, 행복, 신성을 얻으려는 시도는 인본주의가 품어온 오랜 이상의 논리적 결론일 뿐이다. 인본주의(인류에 대한 숭배)가 세계를 정복하는 원동력이 되었지만 바로 인본주의는 떠 오를 때부터 몰락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인간을 신으로 업그레이드하려는 시도는 인본주의의 논리적 결론인 동시에 인본주의에 내재한 결함들을 드러낸다. 인간이 추구하는 어떤 이상이 애초에 결함을 품고 있다면, 대개 그 이상의 실현 단계에 와서야 그러한 결함이 드러난다.(안톤 체호프의 법칙-1막에 등장한 총은 3막에 발사된다).
동물로서의 호모 사피엔스의 과거, 또는 다른 동물과의 관계를 무시하고는 신이 된 우리의 미래를 살펴볼 수 없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미래에 전개될 초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예측하는데 가장 좋은 모델이기 때문이다.
종교란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대규모 협력을 조직하는 도구라고 말하면 종교를 영성으로 가는 최고의 길로 생각하는 이들은 화를 낼지 모르겠지만 종교와 과학사이의 간극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좁은 반면 종교와 영성사이의 간극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넓다. 종교가 계약인 반면 영성은 여행이다.
집단적인 제도로서 과학과 종교는 진리보다 질서와 힘을 우선시한다. 그러므로 이 둘은 의외로 잘 어울리는 짝이다. 타협 없는 진리추구는 영적여행이라서 종교나 과학의 제도권 내에 머물기 어렵다.
사실 근대는 놀랍도록 간단한 계약이다. 계약 전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 이다. 즉 인간은 힘을 가지는 대가로 의미를 포기하는데 동의한다는 것이다.
우리를 구속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무지 뿐이다.
근대 이후 문화는 역사상 가장 위력적이고 쉼 없이 조사하고 발명하고 성장한다.
동시에 과거의 그 어떤 문화보다도 큰 존재론적 불안에 시달린다.
신용이란 신뢰를 경제적 수단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기도, 선행, 명상이 위안과 용기를 줄 수는 있지만 기아, 역병, 전쟁 같은 문제들은 성장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 저 세상의 파이를 약속하는 다른 종교들과 달리 자본주의는 지상의 기적을 약속한다.
세계에는 세 종류의 자원이 존재한다. 원재료, 에너지, 그리고 지식이다. 원재료와 에너지는 고갈한다. 반면, 지식은 성장하는 자원이다. 사용하면 할수록 늘어난다.
과학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지를 발견한 것이다.
역사에 정의는 없다. 재난이 발생하면 으레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보다 훨씬 더 고통을 당한다. 전쟁은 약자를 절멸시키고 강하고 야심찬 자들에게 보상을 내린다.
환경을 보호하는 것은 무척 멋진 생각이지만, 집세도 못내는 사람들에게는 녹아내리는 만년설보다 자신들의 마이너스통장이 훨씬 더 걱정스럽다.
자유주의 정치에서는 유권자가 가장 잘 알고 자유주의 경제에서는 고객이 항상 옳다면 사회주의 정치에서는 정당이 가장 잘 알고 사회주의 경제에서는 노조가 항상 옳다.
하지만 우리가 인권이나 인간평등의 명목으로 최적자를 거세한다면, 초인간은커녕 호모사피엔스의 쇠락과 멸종을 초래할 지도 모른다.
역사에서 숫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뒤를 돌아보는 대중이 아니다. 그들은 앞을 내다보는 소수의 혁신가들 이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의 그물망이 생기고 풀리는 것을 지켜보고, 한 시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였던 것이 후손에 이르러 완전히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깨닫는 일 이다.
모든 주관적 경험에는 기본적인 특징 두 가지가 있다. 바로 감각과 욕망이다.
지난 세기 과학자들은 사피엔스의 불랙박스를 열어 그 안에 영혼, 자유의지,‘자아’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인간은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 우리가 자유의지를 욕망에 다라 행동하는 능력이라고 정의 하면 맞는 말이다. 내가 특정한 소망을 느끼는 것은 내 뇌에서 일어나는 생화학적 과정들이 그런 느낌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들은 결정론적이거나 무작위적일 뿐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다.
중세 십자군 전사들은 삶의 의미가 신과 천국에서 온다고 믿었고, 현대의 자유주의자들은 인생의 의미가 자유로운 선택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하지만 둘 다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뇌 속에는 경험하는 자아와 이야기하는 자아가 자리 잡고 있다. 이야기하는 자아는 과거의 고통이 무의미했음을 인정하지 않기 위하여 미래에도 계속 고통을 겪는 쪽을 택한다. 환상을 갖고 사는 것이 훨씬 쉬운 것은 그것이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지부조화의 대가라서 실험실에서는 ‘개별적인 자아는 환영’이란 과거 인도, 중국,그리스의 사상가들의 주장을 믿지만 법원이나 의회에서는 전혀 다른 것을 믿을 수 있다.
유기체는 알고리즘이다. 호모사피엔스를 포함한 모든 동물은 수 백 만년의 진화를 거치며 자연선택 된 유기적 알고리즘들의 집합이다.
알고리즘의 계산은 계산기를 어떤 물질로 만들든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주판을 나무로 만들든 철로 만들든 플라스틱으로 만들든 두알 더하기 두 알은 네 알이다.
따라서 유기적 알고리즘을 비 유기적 알고리즘이 적대하지 못하거나 그 보다도 뛰어난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다. 계산만 정확하다면 알고리즘이 탄소로 이루어지든 실리콘으로 이루어지든 무슨 상관인가?
19세기 산업혁명은 도시 프롤레타리아라는 거대한 신흥계급을 탄생시켰고 이 새로운 노동자 계급의 전례 없는 필요, 희망, 두려움에 달리 응답할 길이 없었기 때문에 사회주의가 확산되었다. 자유주의가 결국 사회주의에 승리를 거둔 것은 사회주의 프로그램의 가장 좋은 부분을 채용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가 사회적 불평등을 해결하는 방식은 모든 사람의 경험이 같아지게 하는게 아니라 서로 다른 경험에 평등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포스트 자유주의 세계가 직면한 세 가지 실질적 위협은
첫째, 인간이 가치를 완전히 잃게 된다.
둘째, 인간이 집단으로서의 가치는 유지하더라도 개인은 권위를 잃고 외부 알고리즘의 관리를 받게 된다.
셋째, 일부 사람들은 업그레이드되어 필수 불가결한 동시에 해독 불가능한 존재로 남아 소규모 특권집단을 이룬다.
20세기에 의학의 목표는 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21세기에 의학의 목표는 건강한 사람의 성능을 업그레이드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이로서 대중의 시대가 가고 대중의학의 시대도 끝난 것 이다.
21세기 우리는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란 거대한 규모의 새로운 계급이 탄생하는 것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경제적, 정치적, 예술적으로 어떤 가치도 없으며 사회의 번영 ,힘과 영광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 ‘쓸모없는 계급’은 그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라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20세기 인본주의를 대체할 종교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이름 하여 데이터교일 것이다.
21세기에는 더 이상 감정이 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알고리즘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전례없는 연산력과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하는 우월한 알고리즘을 개발하고 있다. 구글과 페이스북 알고리즘들은 당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정확히 알 뿐 아니라 당신 자신에 대하여 본인은 짐작도 못하는 백만 가지 다른 점들을 알 고 있다. 이제 인간은 자신의 감정에 귀 기울이는 것을 그만두고 이런 외부 알고리즘에 귀 기울이기 시작해야 한다. 인본주의의 계명이 ‘“네 감정에 귀 기울여라!” 였다면 데이터교의 계명은 “알고리즘에 귀 기울여라”이다.
데이터교에서 가장 큰 죄는 정보의 흐름을 막는 것이다. 따라서 데이터교는 정보의 자유를 최고선으로 한다. 데이터교는 우리에게 요구한다. “경험하면 기록하라. 기록하면 업로드하라. 업로드하면 공유하라.”(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