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 하린 (시인)
22. 상상 테마21-의미 있는 동사나 형용사를 바탕으로 상상하며 시 쓰기
@ 소재나 모티브가 갖는 특징과 상상 적용 방법
동사와 형용사는 그 자체만 발음해도 연상 작용을 일으킨다. 누군가 ‘그 사람 처지가 짠하다’라고 말하면 연상 작용에 의해 그 사람의 불쌍한 모습이 곧바로 떠오른다. 연민이라는 감정도 형성된다. 그런 동사나 형용사를 바탕으로 상상을 적용하면 이미지나 정서를 형성하기 쉽다.
동사나 형용사를 바탕으로 상상을 적용할 땐 서정시의 본령인 개별자의 간절한 정서를 나타낸 동사나 형용사를 우선 선정해야 한다. 막막하다, 먹먹하다, 처연하다, 목마르다, 수령하다, 번식하다, 적막하다, 고독하다, 숨 막히다 등을 떠올렸다면 두 번째는 예상치 못한 사물이나 현상을 그 동사나 형용사와 맞물리게 해야 한다. 과일은 막막하다, 태양은 처연하다. 수요일은 목마르다, 죽음을 수령하다. 유리가 번식한다. 구름이 적막하다, 꽃은 고독하다, 기쁨은 숨 막히다, 라는 가제만 지어도 나만의 시를 쓸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
필자의 시를 통해 그 소재가 어떻게 상상과 만나 펼쳐지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자.
H씨 죽음을 수령하다 / 하린
시는 주로 밤에 번식한다 나의 시는 악성이라 구역질 나는 시궁창만 노래한다
시로 방황을 사고 암이란 거스름돈을 돌려받는 우울한 자기 복제 또는 자기 증식
계절 내내 신용불량이었던 나의 시 하여 나의 상상력은 담보가치가 없다
관을 살 밑천도 못 되는 비유와 화장터까지 걸어갈 수 없는 관절염 걸린 상징들
폭식한 시어들이 오장육부를 아프게 한다 구부러진 어휘들이 진통제를 맞고 헐떡이고 미완성된 노래가 등을 돌린다 하여 시는 태어날 때부터 죽음을 수령한 거다
청탁도 받지 않았는데 하늘에선 독촉 전화가 온다 빛이 오그라들고 어둠이 아가리를 벌리자
몸 밖으로 중독된 바람이 빠져나간다 요절한 시인들의 노래가 악천후처럼 떠돈다 ―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문학세계사, 2010.
1단계 - 스스로 점검하기 – 메시지 분명히 하기+내 시만의 장점 찾기
「H씨 죽음을 수령하다」는 ‘시의 몸도 병들 수 있다’라는 상상을 바탕으로 쓴 시다. 시의 몸이 병들었으니 시를 쓰는 H는 죽음을 수령한 상태다. 그런 시적 구조가 시의 배면에 깔려 있다. 이 기본 구조를 바탕으로 필자가 장점으로 적용한 것이 감각적인 언술이다.
시가 병들 수밖에 없는 정황을 감각적으로 언술한 후 죽음에게 둘러싸인 화자의 처지를 추가로 제시하여 공감대와 분위기를 형성했다. 어떤 시인은 스스로 자신의 시적 분위기에 갇혀 살아가게 된다. 이 시를 쓸 때 필자도 죽음의식이나 소외의식, 암울한 분위기에 갇혀 살았다. 그것들이 「H씨 죽음을 수령하다」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다.
2단계 - 객관적 상관물(현상)을 찾기+ 관찰과 조사 정밀하게 하기
이 시에선 부분 부분 화자의 처지와 시의 상태를 반영한 상관물이 나온다. ‘구역질 나는 시궁창’ ‘관’ ‘관절염’ ‘폭식’ ‘독촉 전화’ ‘중독된 바람’ 등이 거기에 해당하는데, 전부 다 암울한 상태와 음울한 분위기를 대변한다. 어차피 이 시는 진지함 자체를 유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진지함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위에서 언급한 상관물을 곳곳마다 배치해 분위기를 극대화시켰다.
3단계 - 확장하기 – 상상적 체험을 섬세하게 극적으로 하기
등단 초기에 필자는 암울하고 우울한 분위기의 시를 감각적으로 쓰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이 시에 등장한 H는 평소 악성으로 치닫는 시의 “우울한 자기 복제 또는 자기 증식”을 경험하게 된다. 그 감정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필자는 죽음까지 끌어왔다. 화자 자신을 죽음이라는 ‘분위기’ 속에 침잠시키는 상상적 체험에 돌입한 것이다. 그래서 “나의 시는 악성이라/ 구역질 나는 시궁창만을 노래한다/ 시로 방황을 사고 암이란 거스름돈을 돌려받는/ 우울한 자기 복제 또는 자기 증식” “폭식한 시어들이 오장육부를 아프게 한다/ 구부러진 어휘들이 진통제를 맞고 헐떡이고/ 미완성된 노래가 등을 돌린다/ 하여 시는 태어날 때부터 죽음을 수령한 거다” “빛이 오그라들고 어둠이 아가리를 벌리자/ 몸 밖으로 중독된 바람이 빠져 나간다/ 요절한 시인들의 노래가 악천후처럼 떠돈다”와 같은 구절이 탄생하게 됐다.
* 또 다른 예문
건너다 / 나희덕
달력 속에서 마지막 한 사람이 걸어나온다 몸이 반쯤 잠긴 물속에서 아니다 그는 물에서 걸어나오는 게 아니라 잠기고 있는 중이다 뜯어낸 열한 장의 시간이, 물이, 고통의 비등점을 지나 물이 된 기억들이 밀려와 방안에 울컥울컥 차오른다 두 다리가 지워지고 두 팔이 지워지고 마침내 물이 그를 삼킬 때까지 그는 물을 건너려 하지만 끝내 건너지 못한다 머지않아 찢겨나갈 뿐 멀리 방파제에 혼자 서 있는 사람 그가 건너려는 것은 방인지 바다인지 시간인지 끝내 죽음인지 물에서 걸어나오는, 물에 천천히 잠겨가는 그를 바라본다 아, 그는 춥지 않은가 - 《시로 여는 세상》 2020년 가을호
자물리다 / 구봄의
해질녘 유리창은 노을 꽃밭이다 건물 사이 골목들은 저녁을 수혈 받고 다크서클이 진 내 눈가에도 붉음이 감돈다 모니터 서류가 적재물처럼 쌓여 있다 바탕화면 아이콘들을 징검돌처럼 건너는 상상을 한다 내일 사표를 낸다면 부장의 표정은 어떨까 과장의 얼굴을 클릭하면 무엇이 쏟아질까 김 대리의 짜증을 압축하면 용량은 얼마나 될까 기획적으로 살아왔는데 나에게 창문은 습관일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하드웨어가 대기하고 있던 화면을 곧바로 보여준다 인공 창문에 젖어 인공 풍경을 살았다 가끔 불 꺼져 있는 나의 모니터를 보기 위해 발걸음을 죽이며 누군가 방문한 적이 있었을 거다 거기 미끄러져 갔을 당신과 나의 데칼코마니 지난주엔 누군가 날개를 가진 듯 유리창 사이를 퍼득이다 주저앉았다 누군가의 비명소리는 너무나 쉽게 지워졌고 다음달 재계약의 순간은 숨막히게 다가왔다 일순간 환해지던 노을의 몰락 오목새김으로 온전히 내게 남는다 개밥바라기 별은 얼마큼 먼 거리였던가 각오한 듯 창문 앞에 선다 긴 각목처럼 팔이 늘어나는 착각에 빠진다 반대편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는 나를 닮은 누군가의 등을 만진다 그도 비참을 웅얼거리며 나와 같은 방향을 품었을 거다 핏빛 노을과 내가 서로 자물린다 전화벨이 울린다 뒤돌아보니 모니터 속 서류들이 조금 더 쌓여 있다 이제 그만 계약을 끝내야 할까 죄 없는 죄인처럼 또다시 윈도우 앞에 끌려가야 할까 더이상 기회가 없다며 저녁이 문을 닫는다 - 2020년 〈투데이신문〉 직장인 신춘문예 당선작
기울다 / 임봄
소나무 허리가 더 기울었다 수백 년이 걸린 수긍이다 힘을 빼면 모든 것이 기운다 내가 점점 네게로 기울 듯 23.5도까지 기우는 데 걸리는 시간은 순간 아니면 평생 바깥쪽이 닳은 구두를 신고 걸으며 허리를 곧추세우는 동안 너는 멀어지고 국경을 넘는 아이의 눈물 젖은 뺨 숨죽여 울고 있는 여자들 바닥을 보지 않고는 기우는 이유를 모르듯 우리가 잃은 것이 단지 노래만은 아니어서, 굽은 허리로 소나무를 응시하던 아버지가 땅으로 기울었다 화사한 산벚이 며칠 후면 아버지에게로 기울겠다 -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6년 4월호
- 출처 :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더푸른, 2021.09)
* 하린 시인 1971년 전남 영광 출생.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 학위. 1998년 〈광주매일〉신춘문예 시 당선, 2008년 《시인세계》 등단.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 『1초 동안의 긴 고백』. 연구서 『정진규 산문시 연구』 시 창작 안내서 『시클』 시 창작 제안서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이것만 알면 당신도 현대 시조를 쓸 수 있다』 청마문학상(2011), 송수권시문학상(2015), 한국해양문학상(2016),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2020) 수상. 현재 중앙대 문화예술대학원 전문가과정 시 창작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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