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당국이 각종 대책을 내놓으며 진정세에 나섰지만 23일 원-달러 환율은 연중 최저치에 육박했다. 1차 저항선인 1480원 수준이 이틀 연속 돌파하면서 '1달러=1500원 시대'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올해 연평균 환율은 이날 기준 1421.67원으로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이후 가장 낮다.
최근 반년 사이 원화는 달러 대비 10% 가까이 급락해 주요 선진국과 아시아 통화에서 가장 약세를 보였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6월 말과 비교해 22일까지 원-달러 환율은 9.6% 하락했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 당선 후 대규모 경기부양책이 추진된 일본 엔화의 9.0%보다 하락폭이 컸다. 같은 기간 파운드화가 2.5%, 스웨덴 크로나가 2.1%, 위안화가 1.7% 올랐을 뿐 아니라 말레이시아 링깃이 3.5%, 태국 바트화가 3.7% 오른 것과 비교해 환율 상승이 두드러진다.
실질실효환율지수는 10월 말 기준 89.09로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 8월 말 88.88 이후 가장 낮았다. 국제결제은행(BIS)이 이 통계를 발표하는 64개국 가운데 일본의 70.41, 중국의 87.94에 이어 세 번째로 낮다. 실질실효환율은 각각의 통화가 실질적으로 얼마만큼의 가치를 갖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환율 변동뿐만 아니라 국가 간 물가 차이, 무역 비율 등을 반영해 산출한다. 기준치인 100보다 낮으면 통화 구매력이 기준시인 2020년 평균보다 낮다는 의미다.
이뿐만 아니라 기존의 환율 공식도 흔들리고 있다. 해외에서 벌어들인 경상수지 흑자는 올 들어 10월까지 895억 8000만 달러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고 코스피는 처음으로 4000포인트 시대를 열었다. 여기에 미국의 3연속 금리인하로 전통적인 원화 강세 조건이 동시에 갖춰졌지만 원-달러 환율은 오히려 하락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벌어들인 달러보다 빠져나가는 달러가 많았기 때문이다. 10월까지 해외주식과 채권 등 증권투자 724억 7000만 달러, 해외직접투자 223억 2000만 달러를 합한 규모는 누적 경상수지를 넘어섰다. 외국인도 같은 기간 코스피시장에서 2조 6160억원어치를 순매도했다. 인공지능(AI) 버블론이 불거진 지난달에는 코스피에서 14조 1700억원 상당을 순매도했다. 사상 최대의 순매도다.
한국 경제의 저성장이 자리 잡고 있는 점도 주요인이다. 새 정부 출범 후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해 경기 부양에 나섰지만 관세 협상 불확실성, 내수 부진 등이 겹쳤다. 국내외 주요 기관들은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 전망치를 연초 기대치 2%의 절반 수준인 0.91%로 제시하고 있다.
백석현 신한은행 이코노미스트는 한국 경제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을 닮아가고 있다. 성장잠재력 저하는 원-달러 환율에도 부담이라고 말했다. 또 미국과의 관세협상에서 연간 200억 달러가 한국이 아닌 미국에 투자되는 점도 원화 약세를 부추기고 있다.
박형준 우리은행 이코노미스트는 "내년 1분기까지는 원-달러 환율이 1달러=1500원을 사이에 두고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한다. 이에 대해 서정훈 하나은행 연구위원은 "정부 조치와 연말 기업의 달러 매도 가능성을 고려하면 1500원 돌파는 신중하게 봐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