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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fmkorea.com/6916512616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꾼 시기, 한반도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조선 사회에 척화론이 득세할 때 최명길은 홀로 "압록강이 얼면 큰 화가 닥칠 것이니 신은 매우 통탄스럽습니다." 라고 말하며 전쟁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당연히 반청 기조가 강했던 당시 사람들은 최명길을 청나라에 빌붙은 간신배라고 비난했다. 인조는 최명길의 상소를 보고 위험한 상황임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4만여 명의 청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진격했다.
결국 병자호란이 시작되고 말았다. 조선이 위기에 처하자 최명길은 어떻게든 사직을 보전하겠다고 눈물의 똥꼬쇼를 펼치는데 우선 적진에 들어가서 저들의 의중을 살펴보겠다며 청나라군에게 가서 동태를 살폈다. 그리고 자신이 청나라 측을 만나 시간을 버는 사이 인조를 피신시켰다.
그러나 대세는 기운 상황이었다. 난공불락이라 여겨지던 강화도가 함락된데다 인조 일행은 남한산성에 갇혀서 양식이 떨어져가는 상황, 결국 내부적으로 항복이 논의된다.
그리고 치열한 논쟁이 펼쳐지는데 적들에게 포위됐으니 항복할 수밖에 없다는 최명길의 주장과 끝까지 항전해야 한다는 척화파의 주장이 갈렸다.
그러나 고립된 조정이 항복 안 할 거라고 말한다고 해서 적들이 "아 그러시군요" 하고 순순히 물러갈 리가 없다. 결국 항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최명길은 척화파의 비난을 견뎌내며 내부적으로는 항복을 논하고 청나라 진영에 가서 협상을 시도하는 등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를 쥐어짜내려고 애썼다. 항복은 하되, 최대한 덜 치욕적인 결과를 만들고자 했다.
당연히 그 과정은 순탄치 못했다. 최명길은 위태로운 상황을 타파하고자 했지만 명분을 중시한 척화파는 자신의 행동을 하나하나 발목 잡았다. 결국 그는 청나라와의 굴욕적인 협상뿐만 아니라 내부의 비난도 뚫어야 했다.
김상헌: 전하, 항복하면 나라를 보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랑캐에 끝까지 맞서 싸워야 합니다.
최명길: 전하,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적과의 화친을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와신상담을 위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합니다.
척화파: 오랑캐와 화친을 주장하다니!! 최명길 같은 놈이 있으니까 일이 이렇게 된 거다!
최명길: 니들이 그 잘난 주둥이로 청나라 군대 몰아낼 수 있다면 이런 항복 절차 거칠 필요 없다. 할 수 있냐? 없으면 제발 가만히 좀 있어라!
이경석: "(항복 문서의) 문자에 타당하지 않은 곳이 많이 있으니, 우선 내일을 기다렸다가 사람을 보내도 해로울 것이 없겠습니다."
=쪽팔린데 내일 보내죠? 좀 늦게 보낸다고 해서 손해볼 거 없는데..
최명길: "그대들이 매번 조그마한 곡절을 다투고 분변하느라 이렇게 위태로운 치욕을 맞게 되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어찌 오늘날과 같은 상황이 되었겠는가. 삼사는 단지 신(臣)이라는 글자에 대해서 그 가부만 논하면 된다. 사신을 언제 보내느냐 하는 것은 곧 묘당의 책임으로서 그대들이 알 일이 아니다!"
=그딴 식으로 트집 잡고 미루다가 나라가 이 지경이 됐는데 아직도 그런 소릴 하냐?? 사신을 언제 보낼지는 너희가 정할 게 아니다.
그렇게 조선은 청나라에 항복했다. 인조는 오랑캐 앞에 무릎을 꿇는 치욕을 겪었지만 최명길의 노력 덕분에 더 큰 화는 면할 수 있었다. 최명길은 인조를 이렇게 위로했다.
"《예기》의 "국왕은 사직을 위해 죽는다"는 말은 사직이 망할 때를 말하는 것으로 그 외의 상황에선 꼭 죽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종사와 나라를 위해, 백성을 위해 욕됨을 견디셨으니, 항복해도 항복한 것이 아니고 욕되었지만 욕된 것이 아닙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청에서 돌아온 여성들을 위해 목소리를 냈다. 조선의 여인들은 전쟁으로 인해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조국으로 간신히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은 그들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냈고 사대부들은 "오랑캐들에게 더럽혀진 여인과 결합하기 싫다" 며 부인을 쫓아내고 이혼하려고 했다.
최명길: "정조를 잃은 건 그들이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라가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 데에 책임이 있는 것이니 이혼을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이에 대해 사관은 이런 논평을 하며 비난했다.
"아! 백 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三韓)을 오랑캐(夷)로 만든 자는 명길이다. 통분함을 금할 수가 없도다"
사관은 삼한을 오랑캐로 만든다고 최명길을 욕했지만, 오히려 삼한을 욕되게 한 건 무능으로 한국사의 크나큰 수치 중 하나인 삼전도의 굴욕을 야기한 인조정권이 아닌가 싶다.
최명길은 횡의 사건 때 청나라의 요구로 심양에 죄인 신분으로 끌려가 심문을 받았다. 조선은 청나라에 패배했지만 명나라가 아직 존재하기 때문에 비공식적인 관계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명나라 장수 홍승주가 청나라에 조선과 내통한 것을 실토했고 분노한 청나라는 조선에 책임자를 보내라고 요구했다.
최명길은 심양에서도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청나라 측의 날선 심문에도 "간첩행위에 대해 나의 임금과 다른 신하들은 모른다. (명나라에 서신을 보낸 건) 내가 독단적으로 꾸민 일이고 모든 죄는 나에게 있다. 나만 벌해달라" 라고 의연하게 대답했다.
이런 최명길의 충심은 그에게 반대했던 사람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나 보다. 그의 사망에 대해 다룬 실록의 기사를 보면 앞에 부정적인 사족을 붙여도 결국 그의 노력은 높이 평가됐다는 걸 알 수 있다.
"(최명길은) 추숭과 화의론을 힘써 주장함으로써 청의(淸議)에 버림을 받았다. 남한 산성의 변란 때에는 척화를 주장한 대신을 협박하여 보냄으로써 사감을 풀었고 환도한 뒤에는 그른 사람들을 등용하여 사류와 알력이 생겼는데 모두들 소인(小人)으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앞장서서 피하지 않았고 일에 임하면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하여 미칠 사람이 없었으니, 역시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라 하겠다."
댓펌
사신은 논한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으니, 이는 절의가 국가에 관계되고 우주의 동량(棟樑)이 되기 때문이다. 사로잡혀 갔던 부녀들은, 비록 그녀들의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의리가 이미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중략)...
절의를 잃은 부인을 다시 취해 부모를 섬기고 종사(宗祀)를 받들며 자손을 낳고 가세(家世)를 잇는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아, 백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三韓)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는 명길이다.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인조실록>에 쓰인 사관의 사론-
진짜 사관들에게 이런 모욕이나 당하면서도 나라 지킨 최명길은 정말...
"비록 그녀들의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오랑캐한테 항복한 나라에서 죽음으로 절의를 지키지 않고 멀쩡히 살아서 나라의 녹을 받아먹고 있는 사관이 쓴 말
참고로 김상헌도 청나라를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징발하는 걸 반대했다가 심양으로 가서 심문을 받습니다. 김상헌은 심양으로 가는 길에 의주에서 용골대를 만나서 심문을 받는데 "내가 뜻이 있어서 임금께 아뢰었는데 나라에서 충언을 채용해주지 않았소. 그 일이 다른 나라에 무슨 관계가 있기에 굳이 들으려 하시오?" 라고 말합니다. 용골대는 "어찌 다른 나라라 하는가?" 라고 따졌고 김상헌은 지지 않고 "두 나라가 제각기 경계가 있는데 어찌 다른 나라가 아니오?" 라고 답했습니다. 이런 두려운 기색 없는 대답을 보면 김상헌도 최명길과 반대되는 주장을 펼쳤지만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같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김상헌은 결국 청에 끌려가 옥사함
김상헌은 척화라는 이유만으로 비난받기엔 언행이 일치하고 학문을 실제에 도달시킴. 가치와 방법이 다를지언정 신하와 학자의 도를 놓은 적이 없음
애초에 저 사관의 졸기도 최명길을 순수하게 칭찬한다기보다는 '최명길이 잘못한 것도 많은데 어쨌든 나라 어지러울 때 애쓴 건 인정한다' 수준인 평가라..문천상에 비교한 김상헌의 졸기와 비교하면 죽을 때 제대로 평가받은 것도 아님.
그렇죠. 김상헌의 청나라에 굴하지 말고 맞서자는 말은 당시 사대부들이 좋아할 만한 주장이어서 고평가만이 존재하지만 최명길은 자신들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주장을 했기 때문에 좋은 말만 해주진 않았습니다.
서로 뜻하는 바는 달랐으나 조선을 생각하는 충심 있는 조선의 관료들이었고 김상헌이 최명길의 항소를 찢어버리는 등 많은 대립이 있었으나 병자호란이 끝난 뒤 김상헌은 관직도 받지 않고 청의 연호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청의 심양으로 압송됩니다. 그 때 최명길도 명나라에 밀서를 보냈다는 이유로 잡혀와 있었는데, 조선을 대표하는 두 대신은 포로의 신세로 함께 잡혀 있으면서 끝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묵은 오해를 풀게 되는데
먼저, 김상헌이 시 한절을 읊조리죠.
從尋兩世好(종심양세호) - 조용히 두 사람의 생각을 찾아보니
頓釋百年疑(돈석백년의) - 문득 백년의 의심이 풀리는구료.
이에 최명길이 화답합니다.
君心如石終難轉(군심여석종난전 ) - 그 대 마음 돌 같아서 돌리기 어렵고
吾道如環信所隨(오도여환신소수) - 나의 도는 고리 같아 경우에 따라 돌리기도 한다오.
7년 만에 서로가 품었던 오해가 풀어지는 훈훈한 순간,
그러면서도 해야 할 말, 하고 싶은 말은 있을 터, 김상헌은 다시 시로써 자신의 심회를 토로하게 됩니다.
成敗關天運(성패관천운) - 성공과 실패는 천운에 달렸으니
須看義與歸(수간의여귀) - 모름지기 모든 것은 의(義)로 돌아가야 하느니.
雖然反夙暮(수연반숙모) - 아침과 저녁은 바꿀 수 있을망정
未可倒裳衣(미가도상의) - 웃옷과 아래옷을 거꾸로 입을소.
權或賢猶誤(권혹현유오) - 권도(權道)는 어진 이도 그르칠 수 있으나
經應衆莫違(경응중막위) - 정도(正道, 經)는 사람들이 어길 수 없느니.
奇言明理士(기언명리사) - 이치 밝은 선비에게 말하노니
造次愼衡機(조차신형기) - 급한 때라도 저울질은 삼가할진저
이에 최명길이 화답하죠.
靜處觀群動(정처관군동) - 고요한 곳에서 여러 움직임을 볼 수 있어야
眞成爛漫歸(진성란만귀) - 참되게 합의점을 이루리라.
湯氷俱是水(탕빙구시수) - 끓는 물과 얼음 모두 같은 물이고
裘褐莫非衣(구갈막비의) - 털옷도 삼베옷도 옷 아닌 것이 없느니.
事或歸時別(사혹귀시별) - 혹 일이야 때에 따라 달라질지라도
心寧與道違(심녕여도위) - 어찌 속마음이야 정도에 어긋나리오.
君能惜斯道(군능석사도) - 그대 능히 이 이치를 깨달아 알게 되면
語黙各天機(어묵각천기) - 말없이 각자 하늘의 이치를 지켜 나가세
https://ckrksp6696.tistory.com/m/8746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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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멋지다 인조빼고 ㅋ 잘읽었어 고마워
저런 충신을 두고..... ㅠ
명길헴.. 그래도 당신이 옳았슴더.. 저 시대에 대단하네
저 상황이 요즘이랑 다를게 없어보인다... 보고 배워야지
저 상황에서 어떻게 항복하자하고 여성들 데려와서 이혼반대하냐ㅠ
진짜 대단하다
욕먹어도 결국엔 맞는말 하는 사람 좋아해 후손들이라도 기억해줘야지ㅠㅠㅠ
한남들 애먼 여자탓하는 건 저때나 지금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