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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26일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제1독서 : 1테살 1,1-5.8ㄴ-10
복 음 : 마태 23,13-22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3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14)
15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16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17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는 또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19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 사실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고,
21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성전과 그 안에 사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며,
22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
행복하여라
-보석寶石같은 사람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얼마전 산책중 만난 수도형제의 “보석을 주었습니까?”인사말이 생각납니다.
이어 보내준 ‘임마누엘 보석’이란 메시지와 더불어
수도원 정문 옆 임마누엘 신부가 설치한 작품 사진이었습니다.
요즘에서야 깨닫는 무수한 보석들입니다.
얼마 전 ‘야외이발소’란 메시지와 더불어 선물 받은
저와 수도형제가 서로 이발해주는 사진도 보석 같았습니다.
어제 저녁성무일도 중 기도하는 엄마 품에 잠든 아기 장면도
보석처럼 참 아름답고 평화로워 기도가 끝나는 즉시 사진에 담았습니다.
얼마 전 사진을 받은 자매의 답 글도 생각납니다.
“하느님의 창조물인 꽃과 사람, 나무와 풀들, 하느님의 선물인 노동,
우리의 형제인 예쁜 강아지들, 감사드립니다. 보석인줄 모르고 살았어요.”
얼마나 보석 같은 행복을 놓치고, 잊고 살았는지 깨닫습니다.
요즘은 산책 중 찍는 아름다운 사진들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보석들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저에게 산책은 보석 줍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어찌 산책 시간뿐이겠는지요?
참으로 깨어 있는 삶이라면 하루하루 모두가 반짝이는 보석들을 줍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행복기도 중 다음 대목이 생각납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진짜 살아있는 생명의 보석들은 기쁨, 평화, 감사,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강론 중 많이 쓰는 ‘깨닫다’라는 말마디입니다. 깨달음의 은총, 깨달음의 선물, 깨달음의 행복입니다.
깨달음과 더불어 내적 이해 지평과 내적 자유의 확장이요, 점차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참으로 깨달아 눈이 열릴 때 발견되는 생명의 보석 같은 아름다운 모습들입니다.
보석중의 보석이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야 말로 참 아름다운 하느님의 살아있는 보석들입니다.
아름다운 자연의 사진에 예쁘다고 감동하는 분들에게 저는 지체 없이
“형제님의 영혼은 더 예쁩니다.”하고 격려하곤 합니다.
사실 사랑하는 영혼들 보다 더 예쁜 것은 없을 것입니다.
끊임없는 하느님 사랑의 찬미와 감사의 삶과 기도가 우리 영혼을 튼튼하고 아름답게 합니다.
하느님의 살아있는 보석들이 되어 살게 합니다.
새삼 육신 건강에 앞서 영혼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테살로니카 1서에서 우리는 참 아름다운 보석 같은 영혼들을 만납니다.
살아있는 복음서 같은 바오로의 삶이요, 바오로에게 극찬을 받는
참 아름다운 테살로니카 교회 신도들의 삶입니다.
저절로 “행복하여라, 테살로니카 교우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신망애의 삶을 살아가는 참 행복한, 아름다운 테살로니카 교우들입니다.
다음 두 대목이 우리의 행복한 신앙생활에도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노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의 인내를 기억합니다.”
참으로 우리에게도 절실한 믿음의 행위, 사랑의 노고, 희망의 인내라는 신망애 삼박자의 삶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귀한 깨달음을 줍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 여러분이 우리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여러분이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며,---
우리를 구해 주실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다리게 되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우상들을 버리는 회개와 더불어 하느님께 돌아와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며,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회개-섬김-기다림’의 종말론적인 깨어있는 삶은
언제나 유효한 우리 영적 삶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행복한, 보석 같은 테살로니카 교회 신도들의 삶입니다.
이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예수님의 호된 질책을 받는 오늘 복음의 일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입니다.
“행복하여라” 대신 “불행하여라”라는 말마디가 세 번 거푸 연속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불행하여라, 너희 눈 먼 인도자들아!”
이는 단순한 저주가 아니라, 예수님의 깊은 아픔, 또는 심판 예고로 이어지는 분노를 드러냅니다.
이들의 회개는 물론 복음을 듣는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형제들에게 디딤돌이 아닌 걸림돌이 되고 주객전도, 본말전도의 무분별한
어리석은 삶을 살아가는 현대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도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새삼 늘 강조하는 마음의 병, 무지가 화근임을 깨닫습니다.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이런 위선적 걸림돌이 되거나
무분별한 무지의 삶을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안다면 위선과 교만에서 벗어나 진실과 겸손의 삶을 살 것입니다.
문제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문제입니다.
하여 늘 강조하는바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끊임없는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우리 삶의 여정은 ‘회개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을 통해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으로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가
빛나는 보석 같은, 생명과 사랑의 보석 같은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애플의 창시자 스티브 잡스는 췌장암에 걸려서 생을 마감했지요.
사실 그가 2003년 10월 처음 암으로 진단을 받았을 때,
의사들은 아직 종양 크기가 작으니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스티스 잡스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물건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인지
자신의 병 역시 고칠 수 있다고 믿었나 봅니다. 수술을 거부하고 대체 의학을 선택했습니다.
수술과 항암치료에 대한 부작용을 겪기보다는
효과를 보았다는 사람들이 선택한 대체 의학을 통해서 치료하기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암은 계속 성장하여 퍼져나가 간까지 전이되어
어쩔 수 없이 여덟 달 뒤 수술에 동의했지만, 그 누구도 그를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스티브 잡스 본인도 그의 자서전에서 후회했던 결정으로 수술 거부한 것을 뽑고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세상이 깜짝 놀랄만한 아이폰을 만들었던 힘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들어야 할 때는 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이 아닌 이상 자신의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듣지 않으려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여기에 문제는 자기 자신만이 여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남들까지 설득을 시켜서 자신의 영역에 끼워 넣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같이 살자.’라는 마음이 아니라 ‘같이 죽자.’라는 마음은 아닐까요?
이는 단순히 사람들에게 자기처럼 하라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것인지를 알면서도 ‘남들도 다 하니까.’라면서 똑같이 행동할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예를 들어 교통신호를 받아서 멈췄습니다.
그런데 옆 차선에 있던 차가 신호를 무시하고 지나갑니다.
또 그 뒤의 차도 신호를 무시하고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뒤의 차는 ‘왜 가지 않느냐?’면서 경적을 울립니다.
신호는 분명 정지 신호인데도 남들이 하니까 나도 따라 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바로 나 자신의 말과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직접 강요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지금 하는 말과 행동만으로 충분히 영향을 미칠 수가 있습니다.
특히 그 사람의 지위가 남다르다면 어떨까요? 더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을 향해 불행선언을 외치십니다. 깜짝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처럼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들의 단식과 기도와 자선은 그 누구도 쫓아가지 못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위선을 보셨습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 남들보다 자신이 더 낫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삶,
그러한 삶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도 영향을 받아 커다란 죄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몸과 마음으로 진정으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좋은 모범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위선을 통해서는 ‘불행선언’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이 주는 위로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띠를 두르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확성기를 틀어놓고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을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을 갑니다. 예수를 믿으십시오!’
열성을 가지고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들이 주님을 올바로 믿고, 전하는 방법도 예수님께서 하신 방법으로 하여 꼭 구원을 얻기를 기원합니다.
이사야는 예언자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에게 다가오고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있고
나에 대한 그들의 경외심은 사람들에게서 배운 계명일 뿐이니
나는 이 백성에게 놀라운 일을, 놀랍고 기이한 일을 계속 보이리라”(이사29,13-14).
우리는 이런 책망을 듣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마태23,16)라고 하시는 말씀은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달으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좋겠습니다.
덜 중요한 것을 더 중요한 것보다 더 중시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내신 주님 안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해야 하고
그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라고 (마태5,33-37)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취미생활이나 여가 생활의 연장이 아닙니다.
주님께 대한 열정을 긍정적으로 보면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나쁘기로 말하면 좋은 것보다 훨씬 더 나쁘기도 합니다.
열심이 지나쳐서 고약한 광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하느님을 등에 업고 자기를 내세우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짐만 지우게 됩니다.
그릇된 신심에 빠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걱정입니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 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마태23,4).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내세워야 하지만 죄와 벌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지옥의 공포로 몰아가게 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위선자로 지목되어 야단을 맞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사람에게 희망을 주어야지 절망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과 자비가 없는 종교는 무의미합니다.
자비를 입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이 신앙이 주는 위로요, 희망입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것은 좋으나 진심어린 삶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우리 역시 그 화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5,20).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기에 앞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눈떠야 하겠습니다.
온갖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아멘.
맹세라는 극단적인 도구의 통용보다는, 상호 신뢰와 우애가 더욱 필요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이요 백성들의 자존심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은
몇 번이나 파괴되고 정복당하는 우여곡절을 겪다가,
AD 70년,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철저히 함락 당하고 산산이 부서집니다.
그 와중에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알량한 교도권을 행사하며,
유다교를 지탱해나가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토록 불행하던 시절, AD 90년경, 마태오 복음서를 집필하게 되는데,
그 무렵 그리스도교는 유다교로부터 완전히 선을 긋고 독립하게 됩니다.
민족 종교이자 기성 종교, 나름 정통성을 자부하던 유다교 입장에서는
신생 그리스도교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교를 이단으로 선포하고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다교 쪽에서 워낙 강하고 심하게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고 몰아붙였기에,
마태오 복음서를 집필하고 있던 복음사가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유다 회당의 지도자 격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보이고 있던 위선과 이중성을
신랄하고 지적하고 몰아붙입니다.
그들의 율법주의를 고발하고 단죄하면서, 절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고발과 단죄의 말씀이 얼마나 강하던지, 듣고 있노라면 섬뜩할 정도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강력한 단죄와 고발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떠오른 한 가지 생각입니다.
속으로 ‘아이고~ 잘 됐다. 속이 다 시원하다!’며 뒤돌아서서 고소해하고,
끼리끼리 모여 낄낄댈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7가지 불행 선언은
오늘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 각자를 향한 경고의 말씀이기도 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저지르고 있었던 위선적 삶과 이중적인 신앙생활은
오늘 우리도 저지르기 쉬운 악덕이니만큼, 강력한 경고 말씀을 매일 우리 각자의 삶에 비추어볼 일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정의나 자비, 신의나 이웃 사랑과 같은
율법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들을 뒤로 내동댕이치고,
세세한 율법의 준수에만 목숨을 거는 율법제일주의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 손에 ‘지식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거들먹거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뽐내던 지식은 거짓 지식으로 결국 백성들을 멸망에로 이끌고 말았습니다.
참된 지식의 열쇠는 이미 수제자 베드로 사도와 그리스도 교회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들의 전매특허인 ‘맹세’를 밥 먹듯이 되풀이하는 와중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절대 진실’을 요구하셨습니다.
그 결과 절대로 맹세를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맹세는 대체로 불신 사회에서 성행하는 어법입니다.
누군가가 말을 하면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의 말을 제발 믿어달라는 의도에서 맹세를 내세웠습니다.
유다인들은 맹세를 즐겼는데, 맹세를 할 때
성스러운 하느님의 이름을 거명하기는 두려웠던지 우회적인 표현들을 사용했습니다.
정말 웃기고 속보이게도 성전이나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구속력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대신 성전의 금(금촛대, 금속죄판, 금화)이나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유효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이 많은 사이비 지도자라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했습니다.
겉으로는 거룩해 보이려고 기를 썼지만, 성전 장사꾼이나 다를 바 없는 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외치십니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마태오 복음 23장 17절)
예수님께서 성전은 성전을 장식하는 금 촛대보다 훨씬 상위의 가치를 지니고,
제단은 제단 위에 바쳐진 예물보다 훨씬 상위의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명쾌히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한 신앙인,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맹세’라는 극단적인 도구의 통용보다는,
상호간에 자주 오고가는 신뢰와 우애, 나눔과 소통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인도자의 조건
전삼용 요셉 신부
영재 발굴단에 나온 여섯 살 서진이는 문제를 푸는 것을 가장 좋아합니다.
상담 선생님 앞에서도 다른 것은 대답하지 않고 “일단 문제 하나 내봐요!”라며 자신의 실력을 뽐냅니다.
그리고 어떤 문제들은 아직 풀 수 없다며 자격지심을 드러냅니다.
물론 그런 문제들은 여섯 살 다른 아이들은 꿈도 못 꾸는 혼합계산과 같은 것입니다.
영재로 인정받음에도 그런 자격지심은 왜 생겼을까요? 상담 선생님은
“나는 네가 문제를 잘 푸는지, 안 푸는지가 궁금하지 않은데? 네 기분이 어떤지가 궁금한데?”라고 말하니
서진이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서진이는 문제집이 재미있어서 풀었던 것이 아닙니다.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문제를 풀어왔던 것입니다.
엄마는 서진이에게 공부하라고 강요한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문제를 맞히면 칭찬해주고 틀리면 칭찬해주지 않는 것 자체가
서진이에게 남들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마음을 심어주었던 것입니다.
서진이 말고 세윤이도 있었습니다. 엄마는 여덟 살 세윤이가 공부가 제일이라고 가르칩니다.
세윤이는 학원을 무려 11개나 다닙니다. 팔방미인으로 엄청난 칭찬을 듣는 아이입니다.
세윤이는 엄마가 억지로 시킨 공부 때문에 한숨을 쉬다가
엄마가 나오는 동요에서 엄마 생각을 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의 꿈을 위해 달리는 것인지, 엄마의 꿈을 위해 달리는지 모르는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입니다.
우리는 다 누군가의 지도자요 인도자들입니다.
내가 인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적어도 자기 자신의 인도자입니다.
인도자가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면 그를 따르는 이들은 그 지도자와 함께 망하게 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유다 지도자들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하늘나라의 문을 잠그고 자신도 못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무엇이 중요한지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자녀에게 신앙보다는 공부나 성공을 우선시 가르쳤다면 그 부모는 눈먼 인도자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면 지옥가도 괜찮다고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고,
또 세상의 권력자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각자, 또 나에게 딸린 가족이나 이웃들을 잘못 인도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손에 소위 만보기를 차고 다니는 사람들을 가끔 봅니다.
그들은 하루에 몇 보를 걸었는지 체크하기 위해 손목에 그런 기구를 차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들은 자신들의 건강을 수시로 체크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차고 다니는 수고를 감수한다는 말은 그 사람들에겐 건강이 최고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은 손목에 어떤 것을 차고 다녀야할까요?
영혼 구원을 위해 하루에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했는지 안 했는지 체크하는 무언가 있어야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차고 다니며 수시로 체크해야 하는 것은 바로 ‘기도시간’입니다.
스마트 폰을 기도시간에 맞추어 놓고 기도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분들은 하루의 기도시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들입니다.
이분들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나, 명예를 얻는 것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며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분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자녀들의 신앙일 것입니다.
저도 하루에 얼마동안 기도해야겠다는 것이 정해져있습니다.
그러면 하루 종일 그것을 몇 프로나 채웠는지 체크합니다. 이것이 하루 중 가장 신경 쓰는 일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제가 무엇을 해도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또 기도하면 다 잘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친교가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면
자신과 이웃을 위한 잘못된 인도자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인도자의 조건은 무엇이 중요한 지 아는 것입니다.
믿음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
창조는 어렵지만 파괴는 쉽다.
위로와 희망은 어렵지만 비난과 단죄는 쉽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위로할 수 없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참된 희망을 말하기 어렵다.
우리 신앙은 사느라고 지치고 상처 입은 이들을 위로하고
절망하며 슬퍼하는 이들에게 다시 일어나 걷게 하는 희망을 주어야 한다.
주님이 해결사나 슈퍼맨 같은 존재는 아니지만 인생의 참된 동반자가 되어주신다.
나그네 인생길의 목적지를 밝혀주시고 순례를 마칠 때까지 위로하고 격려하시며 힘을 주신다.
신앙은 삶의 짐이 아니어야 한다.
외우고 지켜야 하는 또 다른 의무가 아니라
던져 버리고 싶은 삶의 무게와 지워버리고 싶은 부끄러운 과거와 상처에서도
의미와 희망을 찾게 해주는 안내자가 신앙이다.
믿음에는 돈이 안 들지만 종교는 돈이 필요한 게 현실이다.
그렇지만 믿는 이들이 버거워할 만큼 필요하지 않다.
누룩 없는 빵과 포도주 그리고 그릇 두 개만 있으면 하느님을 모실 수 있다.
비 오거나 뜨거우면 천막을 치면 된다.
성직자와 수도자는 하느님이 부르셨으니 어련히 잘 먹여 살리실까.
신앙이 위로와 희망을 주고 그것을 자라고 굳건하게 하는 데
이것저것이 필요하다면 믿는 이들이 도울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 내리신 저주에 가까운 질책에
마음이 불안해지지 않아야 한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마태 23,13)
예수님, 저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주님께 대한 신뢰입니다.
부르셨으니 뭔가 좋은 것을 주실 것이고 주님이 시작하신 일이니
끝맺음도 주님께서 하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거기에서 위로와 희망이 생겨납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뭐가 있어야 하고 어떤 건 없어도 되고 또 없어야 하는지도 잘 모릅니다.
필요한 것은 얻어주시고 불필요한 것은 치워버리고 그거에는 마음도 주지 않게 도와주소서. 아멘.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마태 23, 17. 19)
김 연희마리아 수녀
어느 집단에 가든지 불평하는 사람이 꼭 한명씩은 있습니다.
'불평'은,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현이 바깥으로 나오는 거죠.
불평할 껀덕지는 마음만 먹는다면야 얼마든 무궁무진하게 많이 나올 수 있습니다.
더불어 그 표현의 방식 또한 다양하게 펼쳐 보일 수 있답니다.
가령, 끊임없이 혼잣말로 궁시렁 거린다거나
아예 대놓고 주변 사람들에게 불평거리에 대해 선포하면서
불평하는 자신에 대한 정당성을 드러내거나
얼굴의 온갖 주름을 다 활용해 갖은 인상을 써가며
본인이 알고 있는 최대한의 표현력을 동원해서 표현되기도 하며
보다 확실하게는 몸을 이용해 과격한 표현을 함으로써 표출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불평은 왜 일어나는 걸까요?
아마 본인의 기대치만큼 환경이 따라주지 못하기 때문이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자신이 기준으로 잡아 둔 잣대로 재었을 때 그 기준 이하의 것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지요.
그렇게 일어난 불평은 곧 만족하지 못함에서 비롯되며
그렇게 표현된 불평은 자신은 둘 째 치고 주변에도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게 되어있습니다.
좋은 기운은 빨리 퍼집니다. 나쁜 영향은 더 빨리 퍼집니다.
한 사람의 궁시렁거림이, 한 사람의 찡그린 얼굴이,
한 사람의 부정적인 눈빛이나 부정적인 말 한마디, 거칠은 몸짓이
주변에 참으로 불편한 기운을 전달하지요.
그 순간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은 충만한 기쁨을 누리고 있던 사람도
한 사람의 불평하는 소리를 들음으로써 자신의 충만함을 의심하게 될 수 있고
고단함에 쳐져있는 어깨를 다시금 추스러보려 최선을 다해 애를 쓰고 있던 사람도
한 사람의 짜증스런 얼굴의 부정적 태도 때문에 삶의 의욕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잣대에서 비롯된 불만족이 불평을 낳고
불평은 곧 자신의 불행을 만들어낼 뿐 아니라
자신과 함께 하고 있는 주변사람들까지도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불행하니까 남이 행복한 꼴을 보는 것이 배 아픈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내가 온전히 상대방이 되어볼 수는 없으므로
적어도 상대방을 나의 불행으로 오염시키지는 않도록 배려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종교계에 관련된 사람들을 야단치십니다.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은 곧 오늘날의 종교계 종사자들이지요.
그 사람들에 대한 수식어들을 보면 위선자, 못된 지옥의 자식, 어리석고 눈먼 인도자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들은 어쩌다가 위선자, 못된 지옥의 자식,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눈까지 먼 인도자가 된 걸까요?
그들의 본질은 누가 뭐라 해도 인도자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들이고 하느님을 위해 봉사하며 살아가는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맡겨진 일이 다름 아닌 하느님을 못 보는 이들을 자신이 보는 하느님께로 인도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보다보면 자꾸 그쪽으로 가게 되겠지요.
더군다나 그것이 악한 것이라면 그 악한 방향으로 인도해가는 인도자가 될 것이구요.
자신만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해있는 공동체까지 같이 불행으로 오염시키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하느님은 사람의 행복을 바라시는 분이시지 불행에 쪄들어 살기를 바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자신의 불평불만으로 주변사람들을 불행에 인도해가는 사람이 아니라
불평불만이 일어날 수는 있겠지만 그것에 포커스를 맞추지 않고 오히려 그 상황에서
좋은 것, 만족스러운 것, 배울 점, 하느님의 뜻을 참아감으로써
감사와 기쁨을 주변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어야겠습니다.
‘한모금’ /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 수녀원)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