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릉 따르릉"
현관문을 여는 순간 전화벨이 숨가쁘게 울린다.
난 신발을 내 동갱이 치듯 벗어던지고 뛰어들어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사모님 댁 전화하기가 참 힘드네요."
전화선을 타고 낯선 여자 목소리가 투정 비슷하게 들려왔다.
"지금 전화하고 있는데 뭐가 힘들어요. 댁은 누구시죠?"
"예, 여기는 KBS방송국 TV는 사랑을 싣고 작가 ○○○예요.
혹시, 박윤배씨 아세요?"
"박윤배씨요? 그 사람이 누군데요?"
"전원일기에 응삼역 했던 분 있잖아요"
"아, 그 사람요. 우리 고향 중학교 후배라는 건 알지만 개인적으로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예요."
"기억을 잘 더듬어 보세요. 박윤배씨가 유영숙씨를 찾고 있어요.
중학교때 좋아 했었데요. 그래서 TV는 사랑을 싣고 시간에 출연을
부탁 드리려구요. 어릴 때 참 예뻤다면서요."
"이를 어찌나, 사람을 잘못 찾으셨네요. 전 어릴 때 안 예뻤어요.
지금 예쁘긴 하지만 호호호, 하여튼 전 아닙니다"
난 농담한마디를 던지며 혼잣말로 "혹시 유 ○숙(동창생)인가?"
하고 말을 흘렸다. 작가가 얼른 내 말을 물고 늘어졌다.
"유 ○숙요? 이름이 전혀 틀리잖아요."
"뭐가 틀려요. 가운데 한 글자만 틀리니까 착각할 수도 있죠."
"아참, 그렇군요. 그럼 그 친구 전화번호 좀..."
난 전화선 너머로 번호를 알려주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탈랜트 박윤배씨가 어린시절에 꿈을 키우고 작은사랑을 키워준 아름다운
유년의 친구를 우리 여자 동창들중에서 찾고 있는 모양이다.
누굴까? 궁금하기도 하고 잔잔한 감동과 함께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생면부지의 작가라는 여성과 추억을 한참 더듬어 본 탓일까?
오늘따라 왠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난 상념의 날개를 달고
추억속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중학교 입학을 하면서부터 난 논둑 밭둑을 타고 시냇물을 건너 철원
읍에 있는 중학교에 다녔다.
그 당시 중학교는 선택받은 아이들이나 다니는 곳처럼 귀했다.
공부보다 의식주 해결이 더 시급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여자에 대한 편견이 심해 계집애들은 거의 공부를 안 시켰다.
내가 살던 이평4리만 해도 100호 가정 중에 중학생이 단 3명이었는데,
그 중에 한명은 우리언니, 한명은 K라는 남학생, 그리고 나였다.
동네 사람들은 계집애들을 둘씩이나 중학교에 보내는 아버지를 비웃었다.
그러나 우리아버진 도리어 그런 사람들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래서였는지 그 넓은 철원에 단 하나뿐인 중학교 전체 학생수가 많지
않아 각 학년마다 한 학급에 불과했다.
그런데 내가 입학할 당시 이상하게도 우리학년이 두반이 모집이 되어
문제가 생겼다. 교실이 모자랐던 것이다. 그래서 급히 교실을 새로
짓게 되었다. 그 당시 교실 지을 예산이 없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볏집을 작두로 썰고 산 밑에 황토흙을 파서 진흙에 이겨 흙벽돌을
만들어 토담집 교실을 만들었다.
일꾼들 마저 모자라 학생들은 토담교실 짓는 일에 가담을 했다.
그래서 단 한 켤레뿐인 까만 운동화와 단 한벌뿐인 검정 교복을
흙투성이로 만들어 입고 다녔다.
여학생들은 허리에 보자기를 앞치마처럼 두르고 돌맹이를 담아 버렸다.
우리학교 운동장엔 흙보다 돌맹이가 더 많아 체육을 제대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소사 아저씬 토담교실에 석가래를 얹고 이엉을 엮어
지붕을 덮었다. 우리는 공부에는 맘이 없고 토담집 짓는 일을 더 좋아
하고 재미있어 하지 않았나 싶다.
어쨌든 토담집 교실은 어린 우리들의 정성과 사랑과 땀이 배어있던
학교였다. 토담교실이 완성되어 새 교실에서 공부하던 날 우리 학년은
두반으로 갈라졌다. 전체가 남학생인 A반 남녀 합반인 B반. 그런데
B반인 우리반은 여학생 수가 남학생 보다 많았다. 그래서 남학생들을
중앙에 모시고 여학생들이 양옆에서 보호하듯 앉았다.
과잉보호의 나약해진 탓 일까?
우리반 남학생들은 여학생들이랑 점심 먹는게 서먹서먹 했던지 밖으로
도망나가 먹었다. 비가오는 날엔 낡은 우산을 번갈아 받쳐주며 점심을
먹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반찬이 고추장 한가지라 창피해서 그러
지 않았나 싶다. 그때야 누구나 고추장, 콩자반, 장아찌, 김치가 도시락
반찬의 대명사였지만 때로는 깨소금, 새우젖, 된장까지 가지고 다녔던
가난한 시절이 아니었던가. 어쩌다 해처럼 둥근 계란후라이라도
도시락위에 얹어온 아일 보면 우리는 그 아일 모두들 부러워했다.
토담집 교실 창문밖엔 금학산 끝자락인 야트막한 산이 있었는데 그
밑으로 아카시아 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봄이 무르익어 갈 무렵, 아카시아 꽃이 무리지어 피어나면 토담교실은
꽃속에 묻혀 전원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하얀 천사들이 모여 하얀 옷자락을 날리며 하얗게 노래하고 하얗게
춤추는 것 같았다.
바람이라도 부는 날엔 아카시아 꽃물결은 향기를 날리며 꽃잎들은
운동장까지 몰고 나가 눈보라처럼 휘날리며 뒹굴었다.
우리는 그렇게 3년을 같은 반에서 같은 교실에서 공부를 했다.
그러다보니 우리반 아이들은 친구처럼 오누이처럼 친척처럼 학교생활을
하며 토담교실에서 정이 홈빡 들고 말았다. 남자니 여자니라는 개념도
없이 우리는 한가족처럼 스스럼 없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강산이 수십번 변한 오늘이지만 토담교실에서 공부했던 우리들 마음속엔
기쁨과 슬픔과 가난을 함께 나눴던 추억의 끈이 연결되어 한매듭에
묶여 있다.
어느새 찾아온 황혼의 내리막길에 삶이 서러워 발버둥 치다가도
동창모임 이라고 하면 모든일 제끼고 달려오는 것은 인간다움에 대한
향수가 아닐까?
탈랜트 박윤배씨로 인해 난 오늘 웬 종일 토담집 교실안 아이가 되어
추억에 푹 젖었던 날이다.
카페 게시글
♤ 토담집 敎室
***토담집에서 공부한 아이들***
유영숙
추천 0
조회 89
03.07.16 21:13
댓글 1
다음검색
첫댓글 그럼 영숙씨도 나와요?? 황혼의 내리막 길은 아니다 뭐!!! 글쎄 그럴까? 에라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