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주남지
국군의 날에 이어진 시월 초순 수요일이다. 간밤 기온이 부쩍 내려간 아침인데 낮 기온이 25도를 밑도는 날씨로 여겨졌다. 계절이 바뀌는 즈음이면 다수가 신경 쓰일 점은 커진 일교차로 감기를 염려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통년성 만성 비염이라 후각은 둔하지만 감기는 질환으로 여기지 않아 의원이나 약국을 찾은 예는 없다. 감기는 자가 면역력에 의한 자연 치유를 믿는다.
나는 오래전부터 봄이나 가을 어느 시점부터 의상에 한 가지 변화가 있다. 바깥나들이에서 늦은 봄에는 모자를 벗고 이른 가을이면 모자를 썼다. 그 모자는 다름 아닌 모직으로 된 헌팅캡으로, 멋을 부리기 위함이 아니고 시린 이마를 감싸주는 보온재다.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이 가고 시월에 드니 기온이 부쩍 떨어짐을 느낀다. 바야흐로 장롱 속에 둔 헌팅캡을 꺼내 써야 할 날씨다.
날이 밝아오는 미명에 자연학교 등굣길에 나섰다. 해가 짧아져 어둑한 어둠에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월영동으로 가는 버스로 원이대로로 진출해 도계동에서 내려 동읍 본포로 가는 31번 버스로 갈아탔다. 용강고개를 넘어간 동읍 일대 하늘로는 옅은 구름이 비쳤으나 안개나 노을이 끼지 않은 아침이었다. 동읍 행정복지센터 앞에서 단감 테마파크를 둘러 화목마을과 동전을 지났다.
차창 밖 저지대 농지는 연잎이 시들어 뿌리가 성장을 멈췄다는 표식을 드러냈다. 버스가 용산마을에 이르렀을 때 내려 산남저수지와 주남저수지의 경계를 이룬 둑을 지났다. 아득하게 펼쳐진 주남저수지 수면은 수위가 낮아져 무성하게 자란 연이나 마름을 포함한 습지 식물이 드러났다. 들녘으로 벼농사용 용수가 공급되면서 낮아진 수위인데 채워지려면 많은 비가 와야 할 듯했다.
수위가 낮아진 주남저수지에 절로 자란 연잎은 역시 서리와 무관하게 시들어 생장이 멈춤을 알렸다. 용산마을 들머리에서 주남저수지 탐방 데크를 따라 걸으니 덩치 큰 개를 목줄에 묶은 한 사내가 따라왔다. 그는 개를 무척 좋아하는지 큰 녀석과 더불어 목줄에 묶지 않은 작은 개 두 마리도 주인을 뒤따랐다. 인근에 사는 주민일 노부부도 보였는데 아침이면 매일 산책 나오는 듯했다.
배수문 근처에 이르니 둑길 언저리 물억새는 이삭이 패어 가을의 운치를 더해주었다. 둑 바깥으로 드넓게 펼쳐진 벼들이 고개 숙인 들녘은 황금빛이었다. 아마 자연이 빚어낸 천연염료로는 가장 순수한 색상일 듯했다. 가월마을 들머리에서 시작되는 주남저수지 탐방로를 역방향에서 걸어가는 셈이었다. 길게 이어진 둑길 가장자리는 코스모스나 메밀을 심지 않아 꽃길은 볼 수 없었다.
저수지 안쪽 수면은 동력장치로 달려온 작은 고깃배를 멈춰 그물을 살피는 한 사내가 보였다. 건너편 석산마을에서 내수면 어로로 생계를 잇는 전업 어부인 듯했다. 저수지 군데군데 정치망을 설치해 놓고 수시로 살펴 그물에 든 고기를 건져가는 듯했다. 사내는 그물로 이어지게 묶은 밧줄의 수초를 털어주고 시동을 건 동력선 고깃배를 몰아 쏜살처럼 달려 석산 계류장으로 향했다.
주남저수지 둑길을 걸어 주천강이 시작되는 배수문을 앞둔 낙조대 쉼터에 앉았다. 저수지 건너편은 구룡산이 산등선으로 이어져 와 백월산에서 암반 봉우리가 솟아올라 맥이 그쳤다. 쉼터에서 뒤를 돌아 바라보자 벼들이 익은 들녘이 펼쳐졌다. 전방 시야는 탁 트여 멀리 진영 신도시와 수산 아파트가 아스라이 보였다. 내가 가야 할 대산면 일대 아파트와 공장들도 시야에 들어왔다.
낙조대에서 들녘으로 내려 주남에서 신동을 거쳐 가술로 갔다. 마을도서관실에 머물다 점심을 해결하고 국도변을 서성이다 ‘시월 주남지’를 남겼다. “물억새 일렁이는 길고 긴 주남지 둑 / 벼들이 고개 숙인 드넓은 황금 들판 / 눈앞에 펼쳐진 풍광 가을 정취 넘친다 // 내수면 고기 잡아 생계를 잇는 어부 / 쪽배로 물살 갈라 부표에 다가가서 / 며칠째 드려둔 어망 줄을 당겨 살핀다” 24.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