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 하린 (시인)
23. 상상 테마22 - 부품 또는 도구로 상상하며 시 쓰기
@ 소재나 모티브가 갖는 특징과 상상 적용 방법
‘작고 단순한 사물이나 현상으로 상상하여 시 쓰기’ 장이 있음에도 ‘부품 또는 도구로 상상하여 시 쓰기’를 추가한 이유는 그만큼 크고 총체적인 사물이나 현상보다 작고 단순한 사물이나 현상이 훨씬 더 매력적인 모티브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부품이나 도구로 상상을 적용할 땐 그 소재가 개별자의 정서적 맥락을 간접적으로 반영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 다음 상상으로 비유하거나 상징화시켜서 교묘하게 맞물리게 해야 한다. 망치를 예로 들어 살펴보겠다. 망치를 소재로 설정했다면 피할 수 없는 어떤 대상이나 현상과 맞물리게 해야 한다. 목요일마다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존재를 만난다면 제목으로는 ‘목요일의 망치’가 좋을 것이다. 하나 더 오븐을 예로 들겠다. 봄에 대한 시가 너무나 식상해서 상상을 적용해 ‘오븐+봄’을 만나게 하여 ‘햇살 오븐’이란 제목을 짓고 시를 써도 좋다. 그렇게 일상 속 부품이나 도구가 상상을 통해 화자나 시적 주체의 간절한 상태와 맞물리게 되면 나만의 좋은 시를 무궁무진하게 쓸 수 있다.
필자의 시를 통해 그 소재가 어떻게 상상과 만나 펼쳐지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자.
어머니의 저항(Ω) / 하린
건전지 갈아 끼우듯 여자를 바꾸던 아버지가 안방에 들어서면 스파크가 튀는 밤이다 두꺼비집에 두꺼비가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저항 한 개를 추가하며 꼬마전구처럼 소심하게 깜빡거리고만 있다 아버진 뒤늦게 어머니와 접속을 시도하지만 어머닌 차단기 내린 지 오래 전압이 센 할아버질 수발한 이력을 어머니가 토해낼 때마다 양과 음이 쪽쪽 빨아대는 전류의 본능만 탓하는 아버지 어머닌 한이 충전된 배터리를 꺼내 아버지 몸속에서 헤엄쳐 다니는 여자들을 지져댄다 눈이 뒤집힌 여자들이 하나둘 꽁무니를 뺄 때 아버진 수명 다한 필라멘트처럼 퍽 맥이 풀린다 과부하가 걸리는지 면상에 손가락까지 찔러대는 어머니 오긴 왜 와? 여기가 어디라고! 급기야 하늘과 지상 사이에 퓨즈가 나가는 소리 이승과 접속이 끊기는 소리 살벌하게 튄다 어휴, 난 어머니가 차려준 전기만 먹고 살아야지 눈물이 마르지 않는 희한한 발전기를 몸 안에 단 어머니 다 타버린 향불 앞에 독주 한잔 따라 올리며 40년이 넘은 울음 센서 스위치를 누른다 누전(漏電)인지 누전(淚田)……
제삿밥도 못 먹은 방전된 아버지, 내년에도 오실라요? ―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문학세계사, 2010.
1단계 - 스스로 점검하기 – 메시지 분명히 하기+내 시만의 장점 찾기
이 시는 비윤리적인 아버지 때문에 고된 삶을 살고 있는 화자 어머니의 존재성을 재미있게 형상화시키기 위해 쓴 작품이다. 이 시를 쓸 때 필자는 두 가지 상상을 적용했다. 첫째, 화자와 시를 쓰는 필자를 분리해 시 속 아버지와 어머니를 전혀 다른 인물로 설정했다. 필자의 아버지는 살아계신 분이다. 그리고 이 시에 나온 것처럼 비윤리적인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상상으로 화자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탄생시킨 것이다. 둘째, 저항 심리를 보이고 있는 어머니를 대변하기 위해 전기적 현상을 상상으로 끌어와 적용시켰다. 특히 전기 부품에 해당하는 ‘Ω’과 어머니의 저항(抵抗)을 동음이의적으로 활용해 유쾌한 상상력을 활성화시켰다. 이 시의 장점은 당연히 두 번째 상상에 해당하는 전기적 현상과 부품적 요소를 재미있게 활용한 점이다.
2단계 객관적 상관물(현상)을 찾기+관찰과 조사 정밀하게 하기
이 시에서 객관적 상관물은 저항(Ω)을 중심으로 한 전기적 현상과 제사 행위이다. 저항은 위에서 설명한 바대로 어머니가 갖는 저항 의식을 대변한다. 그리고 제사 행위는 어머니의 구체적인 심리적 맥락을 암시한다. 바람기 잘 날 없던 아버지의 외도는 “스파크가 튀는 밤”의 제사를 연출했고, 어머니가 “한이 충전된 배터리를 꺼내/ 아버지 몸속에서 헤엄쳐 다니는 여자들을 지져”대게 만들었다. 일평생 외로움에 시달렸을 어머니의 숨은 ‘분노’ 내지는 ‘한’을 간접적으로 풀어내는데 전기적 현상과 제사 의식이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를 쓰기 위해 메모한 단어와 구절은 다음과 같다. 저항(Ω), 건전지 갈아 끼우다, 스파크, 두꺼비집, 꼬마전구, 접속, 차단기, 전압, 양과 음, 전류, 한을 충전하다, 배터리, 지져대다. 수명 다한 필라멘트, 맥이 풀리다, 과부하, 하늘과 지상 사이에 퓨즈, 희한한 발전기, 울음 센서, 스위치, 누전(漏電), 누전(淚田).
3단계 - 확장하기 – 상상적 체험을 섬세하게 극적으로 하기
이 시의 상상적 체험은 어머니의 저항 심리를 재미있게 형상화하는 데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위에서 제시한 대로 일부러 시 속 아버지가 여러 명의 여자와 불륜을 저지르게 만들었고, 그런 상황에서도 병든 시아버지를 어머니가 수발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저항 심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기 위해 “과부하가 걸리”는 상황, “하늘과 지상 사이에 퓨즈가 나가는”, “이승과 접속이 끊기는” 상황 등을 착안했다. 그리고 각종 전기 용어를 활용해 해학적인 요소를 추가했다.
* 또 다른 예문
파이프 / 신성률
길고 큰 구멍이 동심원으로 관자놀이에서 뛰논다 한참을 놀다가 찬물도 씻어 먹는 엄마를 코끝에 몰아놓고는 종아리를 마저 올려세운다 찬물로 찬물을 헹군 엄마는 늘 뜨겁고 저녁은 오늘도 길고 크다 신나게 놀다가 들어왔을 뿐인데 식을 것 없는 상보 아래 저녁은 심심하게 식어가고 엄마는 속이 다 보이도록 자꾸 아까운 찬물을 헹궈낸다 그때마다 길고 큰 구멍은 중심을 잃고 나를 향해 운다 종아리를 올리기 전부터 저녁이 다 내려앉을 때까지 찬물 같은 엄마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면 관자놀이는 제멋대로 뛰놀고 저녁놀처럼 어지럽다 심심한 저녁은 동심원으로 종아리를 말아 올린다 놀면서도 심심해하는 나를 엄마는 잘 알고 나는 파이프와 더 친하다 파이프가 나를 파이프로 만들어주기로 한 걸 엄마는 모르고 그 길고 큰 저녁의 끝까지 나는 알기 싫지만 모르는 척해도 떠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아서 짧고 작은 종아리로 중심을 잡는다 어디 따로 향할 데가 없는 것처럼 심심한 종아리를 따라다니며 놀기에도 아까운 저녁을 마저 헹군다 마치 아무 소리도 흘리지 않는다는 듯이 동심원으로 멀리 뛰노는 저녁의 종아리를 차마 못 보겠다는 듯이 찬물로 뜨겁게 헹궈낸 파이프의 끝이 입에 딱 달라붙어 다 저녁 찬물을 밥을 말아 뚝뚝 떨어지는 딸국질을 건져먹는다 - 2018년 오장환 신인문학상 당선작
경운기를 부검하다 / 임은주
그는 차디찬 쇳덩이로 돌아갔다 움직이지 못할 때의 무게는 더 큰 허공이다 돌발적인 사건을 끌고 온 아침의 얼굴이 쾡하다 피를 묻힌 장갑이 단서를 찾고 일순 열손가락이 긴장한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망치와 드릴이 달려들어 서둘러 몸을 빠져나간 속도를 심문한다 평생 기름밥을 먹은 늙은 부검의 앞에 놓인 식은 몸을 날이 선 늦가을 바람과 졸음이 각을 뜨는 순간, 그의 흔적이 남아있는 진흙탕과 좁은 논둑길이 나타난다 미궁이 건너온 死因에 집중한다 붉게 녹슨 등짝엔 논밭을 뒤집고 들판을 실어 나른 흔적이 보인다 심장 충격기에도 반응이 없는 엔진 오랫동안 노동에 시달린 혹사의 흔적이 발견되고 탈, 탈, 탈, 더 털린 들판도 없이 홀로 2만km 를 달려 온 바퀴엔 갈라진 뒤꿈치의 무늬가 찍혀있다
가만히 지나간 시간을 만지면 그 속에 갇힌 울음이 시커멓게 묻어나온다 소의 목에서 흘러나온 선지 같은 기름이 왈칵 쏟아진다
임종의 안쪽에는 어느새 검은 멍이 튼튼히 자리잡았다 길이 간절할 때마다 울음이 작동되지 못하고 툴툴거린 흔적이다 죽어도 사흘동안 귀는 열려 있다는 말을 꼭 움켜쥔 얼굴의 피멍이 희미한 눈빛부터 쓸어내렸다
이제 拾骨(습골)의 시간이다 정든 과수원 나무들이 마지막 악수를 청했는지 뼈마디마다 주저흔이 보인다고 기름 묻은 손이 넌지시 일러주었다 - 2019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용수철의 힘 / 조영란
용수철은 제 몸에 날개가 있다고 믿는다 트램펄린 위를 구르던 발들이 멀리 날아가지 않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유는 용수철의 비상을 믿기 때문이다
날고 싶은 욕망을 누르며 지켜온 평온한 둥지 속에서도 도무지 깃들지 못하는 마음이 있어 공중을 향한 그리움이 있어 체념의 깊이만큼 높이 튀어 오르는 것
누구의 마음속에나 허공을 타진하는 날개는 있고 내게는 남모르는 깃발 하나 있었기에 자꾸 발목이 접질릴 때마다 그토록 심한 몸살을 앓았던 건지도 모른다
견딜 수 없었던 건, 아무도 모르게 키워온 깃털들이 비명도 없이 뽑히고 있었다는 것 더 이상 떨어질 일 없어 안심했던 곳이 결국 바닥이었다는 것
이제는 반동에 기대어 내가 나를 쏘아 올릴 시간
발끝에 단단히 힘을 준다 바닥의 기억을 털어 내며 일어서는 그림자 까마득한 천공 속으로 요동치며 날아가는 뜨거운 날개들 격렬한 혁명처럼 거짓말처럼 - 『당신을 필사해도 되겠습니까』, 시인동네, 2021
- 출처 :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더푸른, 2021.09)
* 하린 시인 1971년 전남 영광 출생.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 학위. 1998년 〈광주매일〉신춘문예 시 당선, 2008년 《시인세계》 등단.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 『1초 동안의 긴 고백』. 연구서 『정진규 산문시 연구』 시 창작 안내서 『시클』 시 창작 제안서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이것만 알면 당신도 현대 시조를 쓸 수 있다』 청마문학상(2011), 송수권시문학상(2015), 한국해양문학상(2016),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2020) 수상. 현재 중앙대 문화예술대학원 전문가과정 시 창작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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