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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年5月8日是華人樂壇悲痛的日子,一代巨星鄧麗君因氣喘病發在泰國清邁辭世,享年42歲。今年是鄧麗君逝世28周年,亦是其70歲冥壽。鄧麗君歌聲遍及世界不同角落,其國際性影響力是華人歌手之冠。事實上,這位一代歌后的人生經歷跟香港密不可分。香港間接造就了鄧麗君的成就。
童年時期 - 孕育於港產國語時代曲主流時代
鄧麗君本名鄧麗筠,1953年1月29日出生於台灣雲林縣。五六十年代香港是國語時代曲產地,當時國語樂壇百花齊放,歌曲紅遍東南亞。故此,鄧麗君自小便在國語時代曲的薰陶下成長。鄧兒時已展現音樂天賦。鄧長禧(鄧麗君五弟)表示,姐姐在收音機聽歌曲一兩遍就會唱。
1964年,鄧麗君參加由台灣中華電台舉辦的黃梅調歌唱比賽,以「訪英台( 原唱:凌波 1939 - )」獲得冠軍;她亦在台灣金馬獎唱片公司在1965年舉辦之歌唱比賽中以「採紅菱(原唱:夏丹 1938 - / 江宏 1937 - 1993)」奪冠,自此鋒芒漸露。以上兩首歌曲均是港產國語時代曲中的名曲。
1967年,台灣宇宙唱片公司正式替鄧麗君出版第一張個人大碟,當中全部是翻唱國語時代曲前輩的歌曲。除了「明月千里寄相思」及「鳳陽花鼓」為民國上海時期出版的作品外,其餘均是五六十年代於香港推出的國語流行曲(見下表)。從上述內容,可見港產國語時代曲孕育了鄧麗君這位一代天后。
鄧麗君第一張個人大碟(於1967年9月推出,當時唱片公司出版過兩款封面設計)
初來香港報到 - 喜獲「百花油小姐」之美譽
鄧麗君第一次到香港表演是1969年12月27日。當時華僑日報與香港工展會舉行「助學救同運動」,當中其中一項運動是慈善義賣。當時工展會舉行慈善義賣,都是由明星擔任拍賣官,能否賣到好價錢全靠這位明星的人氣。當時鄧麗君十六歲,在場義賣白花油,竟然籌集到港幣$5100元,成為工展會史上年紀最小的慈善皇后,可見她在香港的受歡迎程度很高。因此,鄧麗君早期有「白花油小姐」之暱稱,成為一時佳話。
年輕的「白花油小姐」初來香港報到,很快便引起唱片公司的注意。鄧麗君第一間簽約的本土唱片公司是「趙氏唱片公司(前身為香港美亞唱片公司)」。當時創辦人趙明恭獨具慧眼,隨即便邀請鄧小姐成為其旗下歌手,並且1970年替鄧小姐出了一張個人專輯「迷人的小姐」。這張唱片是鄧麗君第一張於香港灌錄及出版的唱片,意義非凡,今時今日已經成為樂迷青睞的唱片。可惜,鄧麗君隨後轉投規模較大的樂風唱片公司;而趙氏唱片公司亦不敵時代洪流,於七十年代中結業。
趙氏唱片公司主理人趙明恭邀請鄧麗君灌錄唱片之報道,取自《香港歌星》港版第14期(1970年10月)。
鄧麗君新唱片「迷人的小姐」宣傳廣告,取自《香港歌星》港版第14期(1970年10月)。
無綫電視節目無心插柳,造就鄧麗君翻唱「月亮代表我的心」爆紅
提起鄧麗君代表作,大家第一時間會想到「月亮代表我的心」。很多人不知道,這首名曲其實不是鄧麗君原唱。鄧翻唱「月亮代表我的心」爆紅的原因其實發生在香港。
七十年代中期無綫電視舉行慶祝中秋音樂節目。故此,幕後人員到唱片庫選取一系列中秋節歌曲,以便歌手關菊英於節目期間獻唱。當時他們覓得一首台灣歌手陳芬蘭聞所未聞的滄海遺珠,但是很應景的歌曲,名叫「月亮代表我的心」。製作人馮添枝(筆名歴風)看過這節目之後,覺得鄧麗君翻唱「月亮代表我的心」一定會紅,接着立即聯絡鄧小姐商討錄音事宜。所以,這件發生在香港的小事情,造就了鄧麗君永恆的經典。
迄今為止最國際化的華人歌手 - 合作夥伴來自五湖四海
鄧麗君1974年前往日本發展,隨即成為日本的大明星。由七十年代中直至鄧麗君去世,其熱門歌曲很多時都存在中日雙語版本。另外,除了國語及日文歌外,鄧麗君曾經灌錄過粵語,英語,閩南語,印尼語,及意大利語歌曲。鄧麗君的父母堅持用鄉音交流,故此她自小已經懂得山東話。因應鄧麗君不同時期的社交圈及居住地方轉變,她亦漸漸懂得上海話,馬來語及泰文。由此可見,她的語言天賦非常高。鄧麗君在不同國家及地區都取得相當大的成就,其合作班底亦都來自五湖四海,歌曲製作亦以跨國合作方式進行。
鄧麗君印尼語卡式帶專輯,八十年代初於印尼本土發行,這些專輯在香港地區是非常罕見。
鄧麗君第二張廣東歌大碟「漫步人生路」(1983年出版),製作班底包括香港的顧嘉煇,黃霑,鄭國江,盧國沾,向雪懷,和薛志雄)
隨唱片「漫步人生路」附送的鄧麗君拉斯維加斯演唱會特輯(1983),當年只有極少數華人歌手可以在拉斯維加斯舉辦個人演唱會。
鄧麗君簽名版卡式帶,從中可見參與的製作人來自香港,日本,台灣三地。
對香港情有獨鍾,一直視香港為第二故鄉
鄧麗君八十年代尾開始處於半退休狀態,逐漸減少娛樂圈活動,並且旅居於法國及香港。1988年,她在香港赤柱購買了一座別墅,成為她其中一個家。香港給予鄧麗君輝煌的事業。自鄧麗君出道開始,她就在香港發展,和香港在七八十年代一同高飛,所以她對香港情有獨鍾。香港中西文化交融的特色,對鄧麗君來說非常有魅力。1989年3月,鄧麗君推出日文歌曲《香港 Hong Kong》,訴說她對香港的喜愛,以及對香港未來的不確定性而擔憂。1994年,鄧麗君更罕有擔任亞洲電視時事清談節目《龍門陣》的特別嘉賓,跟主持人黃毓民,鄭經翰,陳耀南談笑風生。
鄧麗君「香港 Hong Kong」七吋黑膠封面(1989年3月出版)
「難忘的Teresa Teng」黑膠唱片(1992年3月出版)。這是鄧麗君最後一張黑膠新歌專輯,只包含兩首新歌,其餘都是歷年精選歌曲。同年的12月,所有香港本土唱片公司宣告不再出版黑膠唱片,CD正式成為新一代的主要唱片媒介)
後記
鄧麗君是華語音樂文化的一個縮影,其作品古今中外交融,體現了文化的多樣性。她傳承了上海及香港老派國語時代曲,以及向華語地區輸出日本歌曲,亦出版了多種語言歌曲,這都促進了國際間的音樂文化交流。鄧麗君的歌聲經久不衰,人們以「有華人的地方,就有鄧麗君的歌聲」來讚頌其成就。然而,國際巨星鄧麗君的成名之路與香港關係密切。鄧麗君身為一個台灣人,卻愛着香港這個地方。香港對鄧麗君來說,是個特別的地方。
參考及推介資料
陳碧天主編,《香港歌星》港版第14期(1970年10月)。
尤靜波:《中國流行音樂簡史》:上海,上海音樂出版社,2015。
區瑞強:《我們都是這樣唱大的》:香港,知出版社,2016。
師永剛 / 昭君:《鄧麗君全傳 — 鄧麗君逝世十周年典藏紀念版》:香港,明報出版社有限公司,2005。
師永剛 / 昭君 / 方旭:《鄧麗君畫傳》:北京,作家出版社,2004。
莊奴 / 楊曦東:《怎能遺忘鄧麗君》:台北市,普金傳播有限公司,2006。
姜捷:《絕響——永遠的鄧麗君》:台北市,時報文化出版社企業股份有限公司,2013。
亞視經典台ATV:《【ATV】【綜藝經典】《龍門陣中的鄧麗君》鄧麗君希望建設中國》,取自:https://youtu.be/qvVQe_FxpMo
香港蘋果日報:《【果籽| 專題】51歲兒子回憶「吹水唔抹 嘴」父親 原來係美亞唱片老闆 曾製作鄧麗君 首張唱片 走勻鴨寮街尋找亡父舊作 70年代 舊歌放上網免費聽#專題—果籽 原刊日期: 20210512》,取自:https://youtu.be/igtKYstYhk4
【덩리쥔 서세 28주기】한 시대의 여자 가수왕과 홍콩과의 인연
기타 | by 정경원
| 2023-05-08
홍콩 정경원(香港 鄭景元)
1995년 5월 8일은 중화인 음악계의 비통한 날.
한 시대의 톱스타 덩리쥔(邓丽君)이 태국 치앙마이(清迈)에서 천식이 발병하여 향년 42세로 별세했다. 올해는 덩리쥔 서거 28주년이 되는 해로 70세의 명수(冥壽)다.
덩리쥔(邓丽君)의 노래는 세계 구석구석에 널리 퍼져 있으며, 국제적인 영향력은 중화인 가수 중 으뜸이다. 사실 한 시대의 여자 가수왕의 인생 역정은 홍콩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홍콩은 간접적으로 덩리쥔(邓丽君)의 업적을 만들어냈습니다.
어린 시절 - 홍콩식 중국어 전통곡(時代曲) 주류시대에서 성장하였다
덩리쥔(邓丽君)의 본명은 덩리윈(邓丽筠)이며 1953년 1월 29일 대만 윈린(雲林)현에서 태어났다. 1950~60년대 홍콩은 중국어 전통곡(時代曲)의 산실이었다. 당시 중국어 음악계가 매우 번성하였고, 노래가 동남아 전역에 널리 유행하였다.
그래서 등려군은 어려서부터 중국어 전통곡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덩(邓)은 어린 시절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덩창시(邓長熙·등려군 남동생)는, 누나가 라디오로 노래를 한두 번 들으면 곧잘 불렀다고 했다.
1964년, 덩리쥔은 대만 중화 방송국에서 개최한 黃梅調 노래 경연 대회에 참가하여 "방영대(원곡 访英臺: 凌波 1939 -)"로 우승하였고, 또한 1965년 대만 金馬獎 레코드 회사에서 개최한 노래 경연 대회에서 "채홍릉(원곡 采紅菱: 夏丹 1938 - / 江宏 1937 - 1993)"으로 우승을 차지하면서 예봉을 나타내게 되었다. 두 곡 모두 홍콩산 중국어 전통곡 중 명곡이다.
1967년 대만 우주 레코드사가 덩리쥔을 위해 정식 발매한 첫 솔로 음반은 중국어전통곡 선배들의 곡을 모두 리메이크한 것이었다. 「明月千里寄相思」와「鳳陽花鼓」가 민국 상해 시기에 출판된 작품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1950~60년대에 홍콩에서 출시된 중국어 유행곡이다(아래 표 참조). 이같은 내용에 따르면, 홍콩산 중국어 전통곡은 등려군(邓丽君)이라는 한 시대의 여자 가수왕을 키워냈다.
덩리쥔의 첫 번째 솔로 음반(1967년 9월 출시, 당시 음반사를 위하여 표지 디자인 을 2종으로 출간하였다.)
처음 홍콩에 와서 - 「百花油小姐 백화유 아가씨」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기쁘게 받았다.
덩리쥔이 처음 홍콩을 찾은 것은 1969년 12월 27일.
당시 화교일보는 홍콩 工展會와 「助學救同運動: 학교를 돕고 학우를 구하는 운동」을 벌였는데, 그중 하나가 자선 바자회였다. 당시 工展 자선 바자회는 스타가 경매관을 맡아 좋은 가격에 팔릴 수 있었던 것은 스타의 인기에 달려 있었다.
당시 덩리쥔은 16세 때 백화유를 팔아 홍콩달러 5,100위안을 모금해 전시회 사상 최연소 자선 퀸이 될 정도로 홍콩에서 인기가 높았다. 그래서 등려군(邓丽君)은 초기에 백화유 아가씨라는 닉네임으로 불리며 한때 미담이 되었다.
젊은 백화유 아가씨가 처음 홍콩에 오자, 곧 음반회사의 주목을 끌었다.
덩리쥔이 처음 계약한 현지 음반사는 '趙씨 레코드(옛 홍콩 美亞 레코드)'다. 당시 설립자 趙明恭은 등려군을 소속 가수로 섭외하는 혜안을 갖고 있었고, 1970년 그녀를 위해 솔로 앨범 「迷人的小姐」를 냈다.
이 음반은 덩리쥔의 첫 번째 홍콩 음반으로 의미가 남다르며 오늘날 음악 팬들이 좋아하는 음반이 되었습니다. 덩리쥔은 뒤늦게 규모가 큰 樂風 음반사로 옮겼고, 趙씨 음반사도 시대의 흐름에 밀려 70년대 중반에 폐업했다.
趙씨 레코드의 조명공 사장이 덩리쥔을 초청하야 음반을 녹음한 기사는《香港歌星》홍콩판 14호(1970년 10월)에서 발췌하였다.
덩리쥔(邓丽君)의 새 음반 「迷人的小姐」홍보 광고는 《香港歌星》 홍콩판 14호(1970년 10월)에서 발췌하였다.
공중파 TV 프로그램 無心插柳는 등려군의 리메이크 곡「月亮代表我的心」을 크게 히트시켰다.
덩리쥔(邓丽君)의 대표작을 언급하면, 모두들 가장 먼저「月亮代表我的心」를 떠올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명곡이 사실 등려군의 원곡이 아니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녀가 리메이크한「月亮代表我的心」가 히트한 이유는 사실 홍콩에서 발생하였다.
1970년대 중반 지상파 TV는 추석 축하 음악 프로그램을 열었다. 이에 따라 제작자들은 음반창고를 뒤져 추석노래 시리즈를 찾아, 가수 관쥐잉(關菊英)이 방송 중에 그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하였다.
그때 그들은 대만 가수 陳芬蘭이 듣도 보도 못한 버려졌던 구슬 같은 노래(滄海遺珠)를 찾았는데,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노래 「月亮代表我的心」라는 노래이었다.
제작자 펑톈즈(笔添支·필명 歴風)는 이 프로그램을 본 후, 덩리쥔이「月亮代表我的心」를 리메이크하면 반드시 인기를 끌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어서 즉시 그녀에게 연락하여 녹음 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래서 홍콩에서 일어난 작은 이 일이 등려군의 영원한 고전을 만들어냈다.
지금까지 가장 국제적인 중화인 가수 - 파트너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왔다
덩리쥔은 1974년 일본으로 건너가 대스타가 됐다. 1970년대 중반부터 덩리쥔이 사망할 때까지 히트곡은 중국어와 일본어로 된 버전이 많았다.
한편 덩리쥔은 중국어와 일본어 외에도 광둥어, 영어, 민난어, 인도네시아어, 이탈리아어 노래를 녹음했다. 등려군의 부모님은 고향 말을 사용하였기에 어려서부터 산둥어를 잘 알아 들었다. 덩리쥔의 다양한 시대에 사교계와 거주지의 변화에 대응하여, 그녀는 점차 상하이어, 말레이어, 태국어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만큼 언어적 재능이 뛰어났다. 덩리쥔은 다양한 국가 및 지역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협력팀도 전국 각지에서 왔고, 곡 작업도 다국적 협력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980년대 초 인도네시아 본토에서 발매된 덩리쥔의 인도네시아어 카세트 음반은 홍콩에서는 보기 드문 앨범이다.
덩리쥔의 두 번째 광둥 가요 음반 「漫步人生路」(1983년 출판), 제작진은 홍콩의 顧嘉煇,黃霑,鄭國江,盧國沾,向雪懷,그리고 薛志雄이다.
음반 「漫步人生路」에 동봉된 덩리쥔 라스베이거스 콘서트 특집(1983년)은 당시에 극소수의 중국 가수만 라스베이거스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 수 있었다.
덩리쥔의 사인판 카세트테이프에는 홍콩, 일본, 대만 등 3개국에서 프로듀서가 참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悼顧嘉煇】는「家輝」에서 「嘉煇」로, 광둥어 유행곡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홍콩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여, 줄곧 홍콩을 제2의 고향으로 여겨 왔다.
덩리쥔은 1980년대 후반부터 반쯤은 은퇴하여 연예계 활동을 줄여가며 프랑스와 홍콩에 머물렀다. 1988년 홍콩 스탠리에 별장을 하나 장만하여 그의 집이 됐다. 홍콩이 덩리쥔에게 준 빛나는 사업. 덩리쥔은 데뷔 때부터 홍콩에서 성장해 70~80년대 홍콩과 함께 성장하였을 만큼 홍콩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홍콩에서 중국과 서양의 문화가 만나는 특색은 덩리쥔에게 매우 매력적이다.
덩리쥔은 1989년 3월 일본어 노래 《香港 Hong Kong》을 발표하며 홍콩에 대한 애정과 홍콩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호소했다. 1994년, 덩리쥔은 드물게 아시아 tv 시사청담(時事清談) 프로그램《龍門陣》에 특별 게스트로 출연해 黃毓民,鄭經翰,陳耀南 사회자와 담소를 나눴다.
덩리쥔 「香港 Hong Kong」 7인치 음반 표지 (1989년 3월 출판)
「難忘的Teresa Teng」 LP 음반(1992년 3월 출간). 덩리쥔(邓丽君)의 마지막 음반으로 신곡 2곡만 포함하고 나머지는 모두 역대 베스트곡이다. 같은 해 12월, 모든 홍콩 현지 음반사들은 더 이상 LP 음반을 내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CD는 공식적으로 차세대 주요 음반 매체로 떠올랐다)
에필로그
덩리쥔(邓丽君)은 중국어 음악 문화의 축소판이며, 그의 작품은 고대와 현대 사이에 융합되어 문화적 다양성을 반영합니다. 상하이와 홍콩의 노파(老派國) 중국어전통곡을 전승하고, 중화권에 일본 노래를 수출하며, 다양한 언어 노래를 출간해 국제 음악 문화 교류를 촉진했다.
등려군의 노랫소리가 오랫동안 쇠퇴하지 않아 사람들은 "화인이 있는 곳에 등려군의 노랫소리가 있다"고 그 업적을 칭송한다.
하지만 세계적인 스타 덩리쥔의 출세의 길은 홍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덩리쥔(邓丽君)은 대만인이지만 홍콩을 사랑하고 있어. 홍콩은 덩리쥔에게 특별한 곳이다.
참고 및 추천 자료
천비천(陳碧天) 편집자, 《홍콩가수》 홍콩판 14호(1970년 10월).
尤靜波:《中國流行音樂簡史》: 상하이, 상하이 음악 출판사, 2015.
區瑞強:《我們都是這樣唱大的》: 홍콩,知出출판사, 2016.
師永剛 / 昭君:《鄧麗君全傳 — 鄧麗君逝世十周年典藏紀念版》 : 홍콩, 명보출판사 유한공사, 2005.
師永剛 / 昭君 / 方旭:《鄧麗君畫傳》: 북경, 작가출판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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