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핀다는 것은
그리움이 사무쳐 삭는다는 것.
내 안의 피가 솟아
터지는 상처 같은 것이리.
무엇도 나를 지치게 할 수는 없지.
오지 않는 그대로 하여
날은 가물고
그래서 불꽃을 피우다
남몰래 잎들 지우지.
하나, 또 꽃을 피운다는 건
아직 가슴이 뜨겁다는 것.
만리의 그대까지
거리를 지져대는 꽃 가슴에 살아
붉어 터지는
저 기다림의 상처들.
제법 날이 많이 풀어졌지만, 아직 꽃샘추위의 시샘은 여전하다. 그래서 그런가. 아직 봄 처녀들의 화려한 외출은 시기상조이고 도시의 봄은 무기력해 보인다. 아니 계절의 무풍지대인 도시의 섬에선 오히려 팔자 좋은 소린지 모른다. 하지만, 어김없이 어디선가 바람결을 따라 코를 끌어당기는 봄 내음으로 가슴은 벅차오른다. 그리고 천년 고도의 경주행 초대장은 심박수를 더 끌어올린다. 며칠동안의 수면부족도 뛰는 심장을 제어할 수 없고 부푼 가슴은 벌써 선화공주의 품을 그린다.
사당공영주차장엔 이미 장사진이다. 특히나 이번 답사는 170여명의 참가로 이미 북새통을 예상했지만 직접 피부로 다가온다. 그들의 얼굴에도 기대감으로 한껏 앵두를 하나 둘 입안에 넣은 듯한 모습이다. 반가운 얼굴도, 낯선 얼굴도 그저 고맙기만 하다. 우리문화유적에 대한 열의를 공유한다는 연대감이 이심전심으로 전해져 가슴이 뿌듯하다. 그리고 스르르 피곤이 풀리는 것 같은 아니 기운이 생동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얼마나 기다렸던 경주답사인가. 아니 왜 이다지도 접근금지를 했더란 말인가. 무슨 억하심정이 있기에……. 대개,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경주는 기본일 것이다. 수학여행의 단골코스이니 말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중,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모두 설악산 쪽으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명색이 사학과를 다녔는데도 답사는커녕 그 근처도 얼씬거리지 못했으니 이는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다. 물론, 책, 영상 등으로는 눈이 아플 정도로 보았고 복기할 정도인데 왜 왜 왜……. 아마도 접근금지의 장막을 씌워둔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드디어 그 막을 걷고 허락하니 이 어찌 기쁘지 않으리오. 이젠 천년의 시간 속으로 간다. 선화공주가 잠자고 있는 경주로 간다. 서동이 되어 선화공주를 보쌈 하러 간다.
날씨는 더없이 화창하다. 경주로 향하는 우리의 철마에도 제법 생기가 돈다. 거침없이 달리는 폼이 물 찬 제비를 닮았다. 답답한 버스 안에서도 흥얼거리는 콧바람에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다.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 등을 하고 보니 벌써 대구에 닿았다. 그런데, 어디선가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공장 근처인 것 같은데……. 그리고 곧바로 연상되는 화면이 앞을 가린다. 대구지하철사고가 언제였던가. 한달이 조금 넘은 것 같은데, 아직 사고처리 및 정확한 사망자 신원파악도 안된 형편이니 말이다. 그리고 지금 또 다른 검은 연기로 자욱하니 사람들의 관심이 흐려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미군의 이라크 전쟁에서도 마찬가지로 수많은 진혼곡이 울려 퍼지겠지. 자욱한 건 검은 연기만이 아니다. 더욱 발길을 잡는 건 슬픔이 가득한 국화향기였다. 그리고 평사휴게소에 도착하니 갈 길 바쁜 태양이 서산으로 넘어가는데, 그 슬픈 향기를 더하여 더욱 사위가 어두워진다.
달 - 박목월
배꽃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慶州君 內東面 (경주군 내동면)
혹(或)은 外東面 (외동면)
불국사(불국사) 터를 잡은
그 언저리로
배꽃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리고
달이 가네
경주하면 달밤이 아니던가. 왜 이런 공식이 성립된 걸까. 그리고 우리문화가 달의 문화라고 하는 건 또 왜일까. 달은 보름달이 아니고, 반달정도였다. 이 곳도 도시인지 별들은 그리 밝지 않았다. 부석사에서의 별 사냥은 압권이었던 생각이 난다. 그러나 그런대로 달은 영롱하기 그지없었다. 천년 전의 그들도 저 달을 보고 선화공주를 생각했겠지. 신라의 달밤에 취했는지, 지음의 회포에 취했는지, 옛님들의 향기에 취했는지 모르게 밤은 깊어가고 경주의 첫날밤은 그렇게 선화공주의 속살을 그리는 서동의 흑심을 뒤로하고 저문다.
간밤에 진탕 먹은 술 탓에 컨디션은 최악이다. 일정상 첫 코스는 대왕암의 일출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못 볼 것 같다. 처용처럼 밤새 달맞이로 노닐다가 돌아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인양 못내 아쉽다. 그러나 우리의 철마가 숨을 헐떡거리며 토함산 자락을 올라갈 때, 산언저리에 실루엣으로 하혈하는 선화공주의 가랑이 사이로 또 다시 새로운 핏덩이가 탄생하며 천지를 진동한다. 버스의 창을 통해 바라보는 붉디붉은 저 희열의 울부짖음이여! 잠시 미망에 가려 숨죽이던 산천초목은 저 사자후 같은 일갈에 하나 둘 제 본 모습을 드러내며 깨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또 봄이 아니던가. 겨우내 움츠렸던 대지들도 하나 둘 기지개를 펴며 그동안의 긴장을 푸는지 여기저기 여린 아지랑이들을 피워낸다.
대왕암의 해변에 먼 길 돌아 돌아서 이제야 도착했다. 저 멀리 황룡은 아쉽지만 이미 제 갈 길을 쫓아 여의주를 물고 비천하였다. 하지만, 대왕암 주변에 만화와 같은 물안개를 뿜어내며 천년의 해후를 축하하는 듯 했다. 세찬 바닷바람을 맞으며 물끄러미 대왕암을 배알한다. 당신은 어이하여 이런 보시를 하였나이까. 황남대총의 화려한 묘산이 탐나지 않았습니까. 신선이 되어 안락한 극락도 부럽지 않았습니까. 뭐가 아쉬워서 이 시린 바닷가 바위 안에 산화되어 수장될 생각을 했습니까. 사실 신화와 같은 이야기는 진실과는 사뭇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 씀씀이는 울꺽 가슴을 죄어온다. 물론, 다 좋다. 군사적 목적이든, 아님 국민들의 사상통제를 하려는 의도이든. 하지만, 나라사랑하는 마음에 너와 내가 어디 있겠는가. 문무왕의 살신성인적인 신화는 어찌 보면 작금의 지도층의 분발을 요구하고 있다. 저희들만 살려고 갖은 특권을 앞세우며 부정부패를 일삼는……. 문무왕이 누구던가. 문무왕은 태종무열왕인 김춘추와 김유신의 누이동생인 문희 사이에 혼외정사로 낳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런 신분상의 한계 때문에 많은 어려움에 봉착했을 것이다. 물론, 역사적 기록에 나타난 사실은 없지만……. 그리고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문무왕은 신라와 가야의 결합이라는 사실이다. 역사적 비약일지는 모르나 신라는 기마민족의 후신들이고, 가야는 해양 문화적 성격이 농후한 문화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 둘 간의 문화적 결합은 혼인에 의해 배가되어 새로운 문화의 탄생을 예고했던 건 아닐까. 하여튼, 문무왕은 호국의 용이 되어 동해를 지키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만신들이나 사소한 개인들의 소원풀이 장으로 전락되어 관광지가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공손히 두 손 모아 문무왕께 기원해 본다. 천년 전의 고민처럼 지금도 일본의 야욕이 멈추지 않은 상황에서 또 다시 당신께 기원합니다. 계속해서 호국의 용으로 동해를 지켜주십시오.
유홍준 교수의 ‘아 감은사 탑이여’ 라는 감탄사가 인구에 회자되어 졸지에 신라의 최고 유물인 것처럼 과잉 부각된 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그런 찬사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이 탑의 아름다움은 넋을 잃게 하기 충분했다. 그 얇디얇은 석판을 올리는 공력은 어찌 인력으로 가능하리오. 그리고 그 미려한 조형적 완성미를 어찌 세치의 혀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저 눈 모아 손 모아 마음모아 경외의 합장만을 할 뿐이다. 이곳은 비교적 높은 단 위에 세워졌다. 지리조사 등에 의해 원래 이 지역은 어귀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하는데, 그런 것도 같다. 동양에선 우주에도 사계가 있다고 한다. 태양계를 도는 지구의 사계와는 별도로……. 그 관점에서 볼 때 지금은 가을에 해당한다고 한다. 가을은 어떤가. 낙엽을 보라. 바삭바삭. 수분이 부족한 금의 계절이다. 인간으로 본다면, 노년기에 해당한다. 노년기는 경험 등이 풍부하고 인간사를 초탈할 정신적 양식을 가지고 있지만, 육체는 수분이 빠져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다. 그런데, 말이다. 천년 전에는 필시 봄이나 여름에 해당되어 물 좀 있었을 것 같다. 이처럼 대지들도 가만히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리고 이 탑을 보면 백제의 미륵사탑이 연상된다. 물론, 이 탑을 조성하는데도 백제의 아비지들이 대거 참여했을 것이다. 탑하면 백제가 아니던가. 하지만, 이 감은사탑은 삼국의 합동작품이 아닐는지……. 백제는 기타처럼 화려하다. 고구려는 베이스기타처럼 둔탁하지만 육중하다. 그리고 신라는 드럼마냥 울림이 있지 않던가. 신라가 부분적이지만 통일하고 조성한 절이니만큼 여러 가지 고려가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는 가히 세계 최고의 축성술이 있고, 백제는 탑과 건축술이 또한 최고이고, 신라는 연못 조성이 또한 최고이니 이 모든 걸 결합하여 조성한 감은사가 어떤 모습을 담고 있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비록 지금은 뼈대만 담아 폐사지가 되었지만, 그래도 감은사탑이 당당히 남아 그걸 증거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 감은사탑에 대해 말 좀 해야겠다. 과연 이 탑은 지금 살아있는 걸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하겠지만……. 어떻게 돌이 살아있을 수 있어 하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살아있다는 표현은 비단 육체적 관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정신적인 관점에서도 통용될 수 있다. 예전에 이 감은사탑은 분명히 살아있었을 것이다. 탑의 심장은 바로 부처님의 사리다. 즉, 탑은 사리를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예전의 우리 옛님들은 이런 사실에 입각하여 탑 속에 사리함과 사리구, 사리 등을 정성스럽게 넣었다. 그러함으로써 탑은 생명을 얻고 탑의 지위를 얻었던 것이다. 그런데, 듣자하니 해체과정 중에 이 심장이 박물관 등으로 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현재 이 탑에는 심장이 없다는 얘긴데……. 미려한 탑이라도 심장을 잃어버렸다면 허깨비가 아닌가. 아니 모조품이라도 정성을 다해 봉양해야 되는 것 아닌가. 우리 문화는 그리 간단치가 않다. 순 화려한 껍데기만이 있는 그런 서양의 문화와는 다르다. 문화를 보존하는데 급급하여 탑의 생명을 앗아가는 누를 더 이상 범하지 말아야 한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그 사리함은 정말 신기의 예술품이라고 하는데……. 그게 비단 예술적 기술만으로 가당키나 하겠는가. 그건 바로 종교적 신심이요 정성인 것이다. 그래서 생명력을 유지해 왔던 것이다. 이런 고려도 없이 심장만 덜렁 빼내어 박물관에 전시한다면 어패가 있지 않은가. 물론, 보존해야 하니까. 그렇다고 이렇게 뇌사시켜 버린 채 방치할 수는 없지 않은가.
새벽편지 - 정호승
나의 별에는
피가 묻어 있다
죄는 인간의 몫이고
용서는 하늘의 몫이므로
자유의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하여
나의 별에는 피가 묻어 있다
골짜기를 따라 바람이 분다. 골바람은 봄이 왔는데도 불구하고 옷소매를 따라 뼈 속을 아린다. 지난밤의 숙취로 인해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런데, 버스는 무심하게도 우리들을 멀찌감치 떨궈 놓고는 저만치 가버린다. 그리고는, 시냇물을 따라 일주문을 거슬러 올라가라고 한다. 하긴, 현대인들은 발을 잃어버렸다. 사실 모든 도(道)는 발에서 시작하는데, 그 초심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고수들이 사라졌는지 모른다. 그리고 직접 두발로 걸어 들어가는 산사의 맛은 걸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천천히 제 발을 쳐다보고 걷고 있노라면 지나온 길들에 대한 반성 또한 따라온다. 그 길들을 흐르는 물에 씻고 나면 가벼워진 마음으로 이미 절반은 소기의 목적을 성취한 것임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심하게 침하되고 있는 언덕배기 위로 덩그렇게 석조물들이 시야를 채운다. 이렇게 장항사지와 첫 대면을 하게 된 것이다. 주위를 둘러봐도, 산세를 감안해도 도저히 절이 위치하기에는 부적절해 보이는데 요상하다. 그런데, 저 탑들을 보라. 장난이 아니다. 걸작이다. 손바닥만한 곳에 미려하게 뻗은 모습이 시원하다. 물론, 동탑은 폭탄세례에 몸돌을 잃어버리고 불구가 되었지만 서탑의 서기는 정말 예사롭지 않다. 첫 번째 몸돌에 새겨진 인왕상의 면모는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이 생동감이 넘친다. 그리고 그 가운데 문고리가 장식되어 있다. 그래, 마음을 모으자. 모든 탐진치를 버리고 저 문을 두드려 보자. 하지만, 어제 밤의 술내음이 인왕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듯이 문은 견고하게 닫혀져 있다. 옆쪽엔 금당지로 불대좌만 남아있다. 이 장식문양 또한 장난이 아니다. 그리고 앉아 있는 주춧돌도 또한 국가적 불사라고 할 정도로 정교한 양식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험한 곳에 불사를 한걸까.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국도가 생기기 전까지 이곳에 온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다는데, 도대체 어떻게 조성한 걸까. 또한 협소한 지형을 고려하여 가람배치는 가로로 길게 늘여 놓고, 탑 등은 세로로 극단적으로 높게 조성했다하는데, 정말 대단하다. 열심히 눈팅하고 내려오는 길, 세찬 골바람을 만나 혼비백산하던 차에 갑자기 이런 생각이 스친다. 혹시, 신라인들은 거대한 가람배치를 염두에 둔 건 아닐까. 대왕릉은 일주문, 감은사는 천왕문, 장항사는 금강문, 그리고 대웅전과 극락전은 석굴암, 불국사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거대한 장막을 둘러 바다 건너 마구니들의 침범을 차단하려 했던 건 아닐까.
2. 경주의 가을
텔레비전 - 최승호
하늘이라는 무한(無限)화면에는
구름의 드라마,
늘 실시간으로 생방송으로 진행되네.
연출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수줍은지
전혀 얼굴을 드러내지 않네.
이번 여름의 주인공은
태풍 루사가 아니었을까.
루사는 비석과 무덤들을 무너뜨렸고
오랜만에 뼈들은 진흙더미에서 나와
붉은 강물에 뛰어들었네.
불멸을 향한 절규들,
울음 울던 말매미들이 사라지고
단풍이 높은 산봉우리에서 내려오네.
나는 천성이 게으르고
누구와도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인지
산 좋아하는 이들을 마지못해 따라나서도
개울가에서 그냥 혼자 어슬렁거리고 싶네.
누가 염치도 없이 버렸을까.
휑하니 껍데기만 남은 텔레비전이
무슨 면목 없는 삐딱한 영정처럼
바위투성이 개울 한 구석에 처박혀 있네.
텅 빈 텔레비전에서는
쉬임없이
서늘한 가을물이 흘러내리네.
여름은 갔다. 초록의 공포로 인해 매미의 목청소리가 더욱 뜨거웠던 그 여름은 갔다. 지리한 장마의 암흑과 이글대는 태양의 압제로 인해 타던 그 목마름도 이젠 가버렸다. 또한, 이제 그 욱일승천하던 초록의 추억들도 흑백사진첩에 가지런히 철해져 벽장 속에 감금될 것이다. 그리고 어김없이 추파(秋波) 이는 가을이 왔다. 가을의 들판에는 여름내 불구덩이 속에서 더욱 단단해진 내밀한 제각각의 색깔들이 하나 둘 터져 물오르려 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가을에 격양가를 부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사실 가을열매의 풍요로움 뒤에 숨겨진 낙엽의 겸허가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들판의 알곡들을 쌓아 둘 빈 창고가 더욱 더 필요한 시기인 것이다. 그래야지, 강철 같은 겨울이 온다 해도 얼지 않게 모닥불을 지필게 아닌가.
얼마만의 답사인가. 유난히도 비가 많이 내렸던 올여름철의 등살과 화려한 솔로를 포기한 천형으로 자폐의 골방 속에 내내 유배 살이 한 것이 또한 그 얼마더냐. 그리고 한차례의 회오리바람으로 한반도를 철저히 유린한 태풍 매미의 상흔은 목의 가시처럼 걸린다. 그러나 ‘천사의 염화시중’에 힘입어 힘겨운 발걸음을 하게 된 것은 천우신조이리라. 마음의 빚을 잠시 잊고 옮기는 사당공용주차장으로의 발걸음엔 바람이 인다. 추석과 태풍 매미의 영향 때문인지 이번 수도권의 작황은 저조하다. 보통 버스 2대로도 부족할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던 기세가 아니다. 허나, 오붓한 맛이 있어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더 좋은 것 같다. 그렇지만, 지방의 기세는 오히려 뜨거웠다. 수도권을 압도하는 열기는 모처럼 춘추전국의 열국시대를 방불케 한다.
차창 밖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가을의 내음이 영글어 간다. 하지만, 예전의 기름기 절절 흐르던 그 안색이 아니다. 왠지 푸석푸석한 구석이 올 가을들판엔 수심이 여기저기 덕지덕지하다. 그러나 세상사 생각하기 나름이 아니던가. 비록 여기저기 찢기고 할퀴고 부서지고 망신창이가 되었다하더라도 그동안 우리 인간들이 뿜어내어 쌓였던 악취들을 말끔히 쓸어버려 숨통을 뜨게 한 것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먹구름을 죽 긋고 찌르는 비수의 칼날은 영롱하기 그지없다. 어디 인간들이 만들어 낸 색소들이 저 하늘의 쪽빛에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속살을 뚫고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비취색의 상감청자여. 파노라마처럼 하늘의 역사는 흐르고 그 속에서 숨죽이고 심혈을 기울이는 장인들의 손놀림에 혀를 찬다. 그렇다고, 수재민들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재를 뿌리는 저 강태공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씁쓸하다. 이땐 마구 소금을 뿌려야 하는데…….
이번 경주행은 비교적 빠른 템포다. 별 막힘이 없이 주동맥을 따라 도착했다. 경주의 맥박소리가 경주 톨게이트의 천마를 통해 요동쳐 온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몰려오는 지원군의 말발굽 소리와 함께 천지를 진동하며 하나 둘 답지한다. 이제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다. 어디 그 누가 이 기세를 꺾을 수 있단 말인가. 이제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우리문화의 들판에도 하나 둘씩 다시 꽃들이 피어나고 있다.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우리의 자생화들은 하나 둘 꽃씨를 터뜨려 세계만방의 꽃밭에 밀알이 되어 새로운 봄을 잉태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우리를 너무도 모른다. 그래서 더더욱 도반들이 소중하고 고수들을 찾아 여기까지 온 게 아닌가. 사실 서구에서 철학이든 과학이든 예술이든 간에 막히면 모이는 곳이 그리스란다. 그들 문화의 시원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란 말인가. 물론, 삼한의 전법에 따라 각기 의견을 달리하겠지만, 그래도 부분적으로나마 삼국통일을 달성했던 이곳 경주가 아니겠는가. 아마도 이곳엔 삼한의 법들이 조금씩이나마 배어있어 그 원형을 유추해 볼 수 있으리라.
빈자리가 필요하다 - 오규원
빈자리도 빈자리가 드나들
빈자리가 필요하다
질서도 문화도
질서와 문화가 드나들 질서와 문화의
빈자리가 필요하다
지식도 지식이 드나들 지식의
빈자리가 필요하고
나도 내가 드나들 나의
빈자리가 필요하다
친구들이여
내가 드나들 자리가 없으면
나의 어리석음이라도 드나들
빈자리가 어디 한구석 필요하다
빨리 도착하니 여유가 있어 좋다. 짝지와 경주 불국사숙박단지를 한바퀴 돌며 지난 신혼여행의 여운을 복기도 해 보고 경주 달빛 밟기를 해 나가면서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하지만, 저녁행사로 슬라이드 강좌가 있어 더욱 좋았다. 이번엔 통도사 학예연구사로 있는 선생님의 “알기 쉬운 불교미술-불화” 강의가 있었다. 특히, 조선불화에 대해서 조목조목 설명해 주셔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먼저 우리 문화면 무조건 좋다는 국수주의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것으로 모두(冒頭)를 열었다. 물론, 그렇다. 허나, 사실 우리에겐 그 반대가 더 문제가 아니던가. 현시점에선 우리 문화에 대해 조금이나마 국수주의를 가졌음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리고 쉽고 재미있게 강의해 주셔 감동받았다. 특히, 팔상도를 설명하는 중에 부처님이 생로병사의 고통을 알아가는 대목(四門遊觀相)에서 자식교육에 대한 언급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과잉보호는 오히려 자식 망치는 지름길이라고…….또한, 아줌마들의 강의도중 동감하는 행태에 대한 불화적 분석은 탁견이다. 그리고 아마도 화장술에 대한 언급은 압권중의 압권일 것이다. 대한민국 아줌마 여러분, 제발 화장할 땐 입술라인대로 자연스럽게 하시길…….
그러나, 이날의 행사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몇몇의 처용들은 경주 달맞이 하러 야행을 떠난 것이다. 사실 석굴암 일출을 보려 했는데, 이상하게 감포 수중대왕릉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훈족을 무찌르는 중국의 여걸 뮬란처럼 왜구의 침범을 용이 되어 온몸으로 막아 보겠노라고 산화하신 문무왕의 동해가로 내달린다.
어둠과 어둠의 경계선, 그리고 천상을 밝히는 촛불들이 파도와 함께 부딪쳐 온다. 오늘은 파도가 거세다. 그래, 흡사 괴성을 지르는 락커를 보는 것 같다. 거세게 흔드는 헤드 뱅은 온갖 잡념들을 산산이 부수고 바다의 락 공연에 몰입하게 한다. 그리고 거침없는 포효에서 튀어 나오는 바다의 침들은 짜다. 그렇다. 바다는 짰다. 그런데, 왜 바다는 짠 걸까. 계속 소금이 나오는 맷돌이 바다에 빠져서 그런 것인가. 하여튼, 바다의 소금세례는 뻣뻣하기만 한 배추포기의 숨을 죽이는 데 일조를 했다. 자, 여의도의 모래알들이여. 이리와 문무왕의 소금세례를 받으시라. 제발 숨을 죽이고 숙성하셔 맛난 배추김치가 되시라. 마구 뿌려대는 락커의 소금세례를 온몸으로 적시며 밤하늘을 본다. 별빛이 깜박인다. 작고 희미하지만 그래도 꺼지지 않는 난타의 가난한 자의 등불(貧者一燈)인양 마음속 심연에서 피어나온다. 그리고 별들의 이름을 더듬어 본다. 사실 발아래만을 쳐다보고 걸어 온 터라 별들에 대해 자세히 모른다. 이름이야 피상적으로 알뿐 그 외는 잘 모른다. 그런데, 능숙하게 손가락을 짚으면서 말을 잇는 친구가 그런다. 저건 카시오페이아(경상도의 특이한 톤이 압권이다), 저긴 오리온, 그리고 저기 저 밝은 것이 북극성이라고 한다. 하, 그렇군. 근데, 어떻게 글케 잘 아냐. 응, 그건 어렸을 때 아버지가 평상에 누워 가르쳐 주셨어. 그래, 아직도 별하면 아버지가 떠오른다고 한다. 정말 아름다운 추억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그 친구에겐 별은 아버지로 영원할 것이다.
다음 야행은 감은사지다. 감은사탑이야 이미 두 번 와봤던지라 별 느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어둠 속의 자태는 또 다른 매력으로 고혹적이다. 보일 듯 말 듯한 감질남이 더욱 더 마음을 후벼 판다. 그리고 최초의 태극마크가 찍힌 석대에 앉아 노래 가락을 조율해 본다. 내 전매특허인 꽃분네와 신타령을 거나게 불러 재낀다. 그러나 이미 알코올에 과다 노출된 육신은 부분 마취되어 제대로 나오질 않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뭐 어떠랴. 좋은 임들과 같이 있어 좋고 부처님 내외(?) 안전(案前)에서 모처럼의 재롱 또한 뭐 불경일까. 그리고 우슬착지(牛膝着地)하고 경배 드린 다음 탑돌이를 했다. 한바퀴 돌고 유난히 감은사지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짝지 생각이 간절하다. 또 한바퀴 돌고 짝지에게 내 작은 사랑을 쏘아 보내고, 세 바퀴 돌고 계속 겉돌기만 하고 꽉 막힌 체증을 뚫어 주십사 하고 빌고 또 빌었다. 그리고 내일 같은 오늘을 위해 무겁고 긴 여정의 발걸음을 내려놓기 위해 숙소로 향했다. 도중에 보문호수도 갔다. 잔잔한 호반의 적막이 마음을 가라앉게 한다. 그러다, 바다가 왜 짠지 알겠다. 강물처럼 고분고분 적당히 타협하며 내려가는 모범생들보다 거칠고 지저분한 사랑을 하지만 더 끈끈한 열등생들이 더 순수하다는 걸 알겠다. 보라. 바다고기는 오히려 민물고기보다 덜 짜지 않던가.
석굴암의 십일면 관음보살이 생각이 난다. 착한 얼굴, 성난 얼굴, 격려하는 얼굴, 비웃는 얼굴 등 열한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즉, 진리는 한 얼굴에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런 모습 저런 모습이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 경주의 이미지는 이렇지만 내일 경주의 이미지는 어떻게 다가올지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모습들을 인정하고 알아 갈 때만이 진정 경주를 다 알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첫댓글 추카추카해여~~~~모놀의 첫답사...진한감동....다시 한번 느껴봅니다.
칭구 축하한다 전해 줘요.
축하해요..멋져요멋져요..모놀에는 인재들뿐이넹..
해아리님 글 솜씨는 알아 주잖아요?..당연한 결과라고 감히 생각 합니다...태풍루사와 함께 한 해남 여행 정말인상 깊었지요..그때부터 두분의 사랑도 영글어 가고...ㅎㅎㅎ축하 하구요..수선화님 이사 갔어요? 답사 여행도 함께 해요..다음엔 꼭 이요...
축하하구요, 다음 답사 때는 귀한 두분 모습도 보여주세요
축하드립니다. 늘 행복하세요
축하해요..멋져요멋져요..모놀에는 인재들뿐이넹..(2) 다음답사 때엔 귀한 두분의 모습도 보여주세요^^(2)
유현님도 받으셨다고 하던데. 두 분이나 영광을 축하드립니다.
멋있고 좋은 글입니다. 상 받을 만 합니다. 모놀에는 인재들 뿐이넹..(3)
축하해요..멋져요멋져요..모놀에는 인재들뿐이넹..(3) 다음답사 때엔 귀한 두분의 모습도 보여주세요^^(3)...해아리님 지금 안 계시다니 하는 말인데요...상훈이가요..수선화누나라고 부르고요...해아리아저씨락 부른다요!!
축하축하...워낙좋은 글이니..당연지사 축하해
축하해요...멋져요 ..모놀엔 인재들뿐이넹..(4)^^
와~..축하 축하!! 답사때 만나면 한잔 해야지..
축하해요...멋져요 ..모놀엔 인재들뿐이넹..(5)
해아리님 축하해요... 글고.. 모놀식구중에 또 한분의 당선자는.. 유현님으로 알고있는데.. 맞죠??? 어쨌든.. 두분모두 축하합니다....
축하축하...멋진 글이야 정말 잘썼네요....대단합니다.
해아리님 축하합니다.글솜씨가 보통이 아니더만.ㅎㅎㅎ
우히히히히히히 잔치를 벌여야하는데....암튼 축드리구요.....^^낭중에 술한잔 사주세요...^^헤헤헤헤헤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