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8월 27일 성녀 모니카 기념일
제1독서 : 1테살 2,1-8
복 음 : 마태 23,23-26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3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24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26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성인이 됩시다.
-열렬한 사랑은 성덕의 잣대-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인사말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샬롬!(평화!)”, 유대인들의 인사말입니다.
“인샬라!(하느님께 영광!)”, 이슬람인들의 인사말입니다.
“찬미예수님!”, 우리 천주교 신자들의 인사말입니다.
“성불하십시오!”, 합장하며 드리는 불자들의 인사말입니다.
참 좋은 인사말입니다. 여기에 저는 하나 천주교 신자들에게 더 추가하고 싶은 인사말이 있습니다.
“성인이 되십시오!”, 얼마나 좋은 인사말입니까!
피정이나 면담성사를 보는 형제자매들에게 자주 드리는 성인이 되라는 권고입니다.
모두가 계면쩍어 하지만 한 결 같이 미소 지으며 흐뭇해합니다.
성인이 되라 불림 받는 우리들입니다.
비상한 성인이 아니라 하느님 주신 참 나의 실현이 성인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사랑할 때 성인입니다.
성인이 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요 책임이요 평생과제입니다. 세상에 온 목적도 여기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입니다.
하여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닮고 싶은 하느님을 향한 갈망과
하느님 말씀에 대한 사랑이 잠재해 있는 법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갈망, 배움에 대한 사랑에 바탕 한
항구하고 충실한 수행이 하느님을 닮아 성인이 되게 합니다.
하여 연중 제21주간 본기도 중에도
“하느님의 가르침을 사랑하고 그 약속을 갈망하며”라는 구절이 들어있습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녀 모니카도 참 각별한 분입니다.
오늘 성녀 모니카, 내일은 성 아우구스티노, 이렇게 모자분을 나란히 놓고 축일을 지내는 경우는
교회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일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성인들의 배경에는 성녀 어머니들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전자전이 아니라 모전자전입니다.
동방 18현 중의 한분이 오천 원 지폐에 나와 있는 율곡(1537-1584)의 얼굴이요,
최고액 권 화폐 5만 원 권에 나와 있는 그 어머니 신사임당(1504-1551)의 얼굴입니다.
모자분 다 치열히 사시다가 똑같이 만47세에 선종하였습니다.
16세 때 어머니를 잃은 율곡이 사무치는 그리움에 쓴
신사임당 어머니의 일대기인 선비행장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나의 어머님은 진사 신명화공의 둘째 따님이다.
어린 시절에 경전에 통달하여 글을 잘 지었으며, 그림 그리고 글씨 쓰기도 잘 하였다.
또 바느질이나 기능이 뛰어나고 수놓은 일에도 정밀하고 교묘한 기능을 많이 지니셨다.
겸하여 타고난 자질이 온화하시고 지조가 정결하며
행동하심은 한정閒靜하고, 일을 처리함에는 안상安詳하며 말수가 적고 행실이 신중하셨다.”
성녀로 손상이 없는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삶의 좌표가 되는 영원히 현재성을 띠는 성인들입니다.
성녀 모니카의 아드님, 성 아우구스티노와의 영적우정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깊고 신비롭습니다.
정말 모두를 구비한 성녀 모니카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을 보면 성녀 모니카에 대한 주옥같은 일화가 즐비합니다.
성녀 모니카는 성깔 있는 남편을 유순한 성품으로 길들였고,
시어머니와도 놀랍도록 화목을 이루었으며,
다투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언제나 화해를 도모하였고,
하느님의 종들을 섬기는 여종의 삶에도 항구했습니다.
힘든 부부관계 중에 있는 자매들에게는
“네가 네 혀만 잘 다스릴 수 있다면, 너는 남편에게 매 맞는 일이 거의 없을 것이며
언젠가 네 남편을 더 좋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조언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에 낙심한 성녀는 주교와 상담결과,
“그렇게 어머니가 기도로 많은 눈물을 쏟은 아들이 파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주교의 격려 말씀도 듣습니다.
하여 기도하기 17년 후 마침내 아드님은
밀라노의 주교 성 암브로시오에게 28세 개종하여 세례를 받습니다.
치열하고 거룩하게 산 성인들은 죽음역시 거룩합니다.
영적 싸움 중에 ‘전사戰死’해야 ‘주님의 전사戰士’라는 제 지론처럼 성녀의 죽음도 감동적입니다.
여드레를 앓다가 거룩한 선종이요 그 동안 성 아우구스티노에게 고백한 유언도 감동적입니다.
“아들아, 나로 말하면 이승살이에서는 이미 아무것도 재미가 없어졌다.
이 세상에 대한 희망이 다 채워진 마당에 여기서 뭘 해야 하는지,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구나.
내가 이승살이에 조금이라도 머물고 싶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
나 죽기 전에 네가 가톨릭 그리스도 신자가 되는 것을 보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그것을 나의 하느님께서 과분하게 베풀어 주셔서
네가 지상 행복을 멸시하고 그분을 섬기는 종이 된 것을 보게 해 주셨구나.
그러니 여기서 내가 더 뭘 하겠니.”
“이 몸이야 아무데나 묻어라. 그 일로 너희가 조금도 걱정하지 말거라.
오직 한 가지 부탁이니 너희가 어디에 있든지 주님의 제단에서 나를 기억해다오.”
“하느님께 멀리 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단다.
세상 종말에 그분이 어디에서 나를 부활시켜야 할지 모르실까봐 두려워할 필요는 없단다.”
이런 유언 후 마지막 어머니 모니카의 죽음을 성인은 다음처럼 묘사합니다.
“그렇게 병석에 누운지 아흐레 되던 날 어머니의 나이 쉰여섯, 제 나이 서른셋 되던 해에,
그 독실하고 경건한 영혼이 육신에서 놓여났습니다.”
오늘 성녀 모니카에 이어 내일은 자랑스런 아드님,
가톨릭교회의 독보적인 성인 아우구스티노의 축일을 맞이합니다.
참 감동적인 거룩한 모자분의 일화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바오로 사도의 성인다운 인품도 감동적입니다. 구구절절 감동입니다.
얼마나 하느님을 사랑한 바오로 성인인지, 또 모든 성덕의 열매들 역시 하느님 사랑의 열매임을 깨닫게 됩니다.
온갖 고난과 모욕을 겪으면서도 하느님 안에서 용기를 얻어
격렬히 투쟁하면서 복음을 전하 바오로 사도입니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바오로 사도의 행동지침이었습니다.
아첨하는 말은 하지 않았고 구실을 붙여 탐욕을 부리지도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증인이십니다.”
얼마나 확고한 신념인지요.
바오로 사도는 사람들에게 영광을 찾지도 않았고
결코 비겁하거나 비굴하지 않았고 사도로서 위엄 있게 처신했습니다.
그러면서 신도들을 대할 때는 자녀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처럼 온화하게 처신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열렬한 하느님 사랑은 그대로 형제 사랑으로 표출됨은 다음 대목이 입증합니다.
“우리는 이처럼 여러분에게 애정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나눌 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위하여 우리 자신까지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그토록 우리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거짓이 추호도 없는 진실과 사랑의 고백입니다. 열렬한 하느님 사랑은 성덕의 잣대입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이 바오로 사도를 정화하고 성화하여 가장 예수님을 닮은 성인이 되게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호된 꾸중을 듣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눈먼 인도자들아!”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눈먼 바리사이야!”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이요,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라는 가르침을 주는
참 좋은 반면교사 역할을 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입니다.
십일조만 강조하다 보니 더 본질적인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놓쳐버린
본말전도의 분별의 지혜가 결핍된 어리석은 이들입니다.
전례행위도 중요하지만 내용인 컨텐츠contents, 즉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는 더욱 중요합니다.
겉은 깨끗하지만 속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찬 표리부동의 이중적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눈먼 무지의 어리석은 사람들이요, ‘내용contents’과 ‘이야기story’가 없는
참 공허한 껍데기의 삶입니다.
이렇게 살지 말아야, 이 반대로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진실하고 겸손하고 지혜롭게 살아야 성인이 된다는 가르침을 줍니다.
교회 역사상 이렇게 우리처럼 신앙생활 하기 좋은 때도 없었을 것입니다.
교회 역사상 언제 신자들이 이렇게 매일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습니까?
우리는 매일 주님을 만나 배우고 모시니 성인이 될 수뿐이 없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성덕을 북돋아 주시며 날마다 축제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은 저를 살펴보시고 잘 아시나이다.
앉으나 서나 당신은 저를 아시고, 멀리서도 제 생각 알아차리시나이다.
길을 가도 누워있어도 헤아리시니, 당신은 저의 길 모두 아시나이다.---
너무나 신비한 당신의 예지, 저에게는 너무 높아 닿을 길이 없나이다.”(시편139,1-3.6참조)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렸을 때 친구들과 함께 잡지를 보다가 ‘손금 보는 법’이라는 내용의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이 잡지의 설명을 토대로 서로의 생명선을 비교했습니다.
우리 중에서 제가 제일 짧더군요.
남들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짧은 저의 생명선 손금을 보고
친구들은 하나같이 “너 일찍 죽나 보다.”라고 했습니다.
솔직히 이 말을 듣고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괜히 마음이 울컥해져서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구석진 곳에서 혼자 훌쩍거리며 울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명선이 제일 짧은 저는 지금 다른 친구보다 훨씬 더 건강하고 튼튼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제 친구들이 제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우리 중에 제일 오래 살 거야.”
길게 그리고 짧게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최종 목표는 이 세상 삶의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 할 수 있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이니까요.
따라서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깨닫게 됩니다.
바로 두 가지의 ‘용기’가 아닐까 싶네요.
하나는 삶에 끝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입니다.
이 용기를 갖기가 사실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끊임없이 연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용기는 이렇게 찾아낸 진실을 토대로 직접 행동으로 취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월든’의 저자 헨리 데이브드 소로는 ‘삶이 아닌 모든 것을 뒤엎을 수 있는 용기가 있는가?’라는 말을 했지요.
자신의 삶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스스로 과감하게 뒤엎을 수 있는 용기가 있을 때
‘좋은 삶’, ‘행복한 삶’을 만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어제에 이어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를 향해서 불행선언을 하십니다.
그들은 겉으로 보이는 부분만 열심히 하고 보이지 않는 마음에는 탐욕과 방종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였던 이유는 이 세상의 삶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끝에 있는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좋게 생각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힘주어 강조하십니다.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잔 속은 바로 우리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용기,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직접 실천하는 용기를 통해
우리 삶 안에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은 신용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매일 같이 이를 닦고 얼굴을 씻고 옷매무새를 고칩니다.
외출을 하려면 거울을 보고 다시 한 번 몸단장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어떤 이는 ‘아름다운 얼굴이 추천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형수술도 하고 외모를 가꾸려 많은 정성을 기울입니다.
그에 비하면 마음을 가꾸는 일에는 너무도 인색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마음이 깨끗하면 표정이 맑고, 얼굴이 빛납니다.
그 ‘아름다운 마음은 신용장’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그리고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럼에도 마음을 가꾸는 것에 정성을 기울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12,2)라고 권고합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정결 예식에 대한 법을 지키고 가르치는 데 신중을 기했습니다.
그럼에도 ‘위선자’소리를 듣는 것은 중요한 것은 외적인 의식(컵을 닦고 그릇을 닦는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라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겉을 깨끗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닦아야 할 속을 버려두고 겉만 닦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잔이 아무리 좋은 잔이고 화려해도 속이 더러우면 쓸 수가 없습니다.
속이 깨끗하면 다른 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형식적 의로움에 사로잡히지 말고 영적이고 참된 의로움을 추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15,11).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바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증언, 중상이 나온다.”(마태15,19-20).
그러므로 마음을 깨끗이 하고 하느님과 스스로에게 정직할 수만 있다면
외적 행동 또한 빛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가꾸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신독"(愼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홀로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는 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하느님 앞에 있습니다.
하늘의 그물은 누구도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혹여 내가 누구를 속였어도 그것은 내가 빠져 나간 것처럼 여길 뿐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얼굴이 밝아지고 마음이 괴로우면 기가 꺾인다”(잠언 15,13)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잠언 4,23).
그러니 기도합니다.
“주님, 당신께 찬미 노래 부르오리다.
흠 없는 길에 뜻을 두리니 언제 저에게 오시렵니까?
저의 집 안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걷고 불의한 일을 저의 눈앞에 두지 않으오리다.,,,
그릇된 마음 제게서 멀리 떨어지고 악한 것을 제가 알지 않으리이다.”(시편101,2. 4).
삶의 여정 안에서 ‘더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눈물의 아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교회 역사 안에서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님(354~430)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가신 성인이 다시 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청소년 시절 그의 방황과 타락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가지 말아야 할 곳은 다 다녔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다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마니교 이단에 빠져 헤어날 줄을 몰랐습니다.
충격에 사로잡힌 가족들은 동네 사람들 앞에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모니카(332~387)는 끝까지 그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백방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때로 타일러도 보고, 때로 야단도 치고, 때로 눈물로 호소도 해보고,
밤 새워 기도도 해보고 별의 별 방법을 다 썼습니다.
아들 때문에 밤낮없이 울고 다니던 그녀에게 암브로시오 주교님은 이런 위로의 말씀을 건넸습니다.
“눈물의 아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방황하는 아들의 회개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모니카의 얼굴과
우리의 회개를 위해 눈물로 하소연하시는 성모님의 얼굴이 꼭 빼닮았습니다.
문제 청소년 아우구스티누스의 죄와 타락 앞에 취한 어머니의 태도는 참으로 영웅적이었습니다.
달콤한 죄의 유혹에 깊이 빠져든 아들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보였습니다.
현명한 어머니는 한 가지 전략을 세우는데 그것은 바로 ‘장기전(長期戰)’이었습니다.
아들의 변화를 위해서는 오랜 투자와 무한한 인내, 집중적인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단과 방탕한 생활에 빠진 아들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더 이상 야단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아들의 회개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다하고
나머지는 하느님 자비의 손길에 맡겨드렸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기도가 아니라 혼신의 힘을 다한 기도, 목숨을 다 바친 기도,
지극한 정성이 담긴 기도를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의 새로운 삶을 지향하며 수시로 단식했으며 더불어 이웃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당시 모니카가 직면해야 했던 현실은 참으로 혹독했습니다.
사방이 높은 장벽으로 가로막혀 있어 탈출구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방황과 타락의 세월은 점점 길어지고 강도를 더해갔습니다.
남편 역시 신앙심은 빵점이고 출세욕구나 야심으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아들로 인한 스트레스는 하늘을 찔렀고 매일 울고 다니다보니 건강도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가족 모두가 하느님께로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계속 기도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녀는 남편의 구원을 위해 16년 동안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아들의 회개를 위해서 30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그녀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을 주셨습니다.
남편과 아들과 손자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들은 그렇게 간절히 바랐던 회개의 길로 접어들었고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부요 추앙받는 대 성인으로 거듭났습니다.
십일조와 미사의 목적
전삼용 요셉 신부
부모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 어떤 성당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교중미사 때 제단 앞에 관이 놓여있었습니다. 신자들은 의아해했습니다.
신부님은 이번 교중미사는 장례미사로 치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강론 때는 그 관 속에 들어있는 사람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예수님과 매번 대립각을 세웠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삶을 산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신자들은 그 사람이 누굴까 의아해합니다.
강론을 마친 신부님은 일렬로 나와서 관 안에 누워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라고 합니다.
신자들은 한 사람씩 관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관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대신 거울이 하나 놓여있었습니다. 그 거울에는 관 속을 들여다보는 사람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관을 다 본 다음 신부님은 이런 말로 강론을 마무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곧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도 이런 장례식을 치르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강의할 때 거의 항상 미사 때 사제가 성작을 들며 반복하여 외우는,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 ” 이라는 경문을 한 번 신자들도 외워보라고 시킵니다.
그러면 대부분은 외우지 못합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흘릴 내 피다.”라고 합니다.
이는 대부분의 신자들이 미사를 하면서 가장 집중하여야 할 때 집중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심지어는 미사에 왜 나와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미사에 나오면
저절로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미사에만 참석하면 되지 사제가 하는 그런 경문은 뭐 하러 신자가 외워야하느냐?”라고
물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경문 내에서
“새롭고 영원한 계약”과 “죄 사함을 위하여 흘릴 피”라는 구절은 생각이 나야합니다.
그것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 미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그분과의 계약과 연결되지 않으면 미사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 이 예식을 행하라고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의 계약의 갱신식이 미사인데, 그냥 미사만 참석하였다고 하여
할 것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도 정녕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고 그저 형식적으로
전례에만 참석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무엇이 중요한지 모른 채 성전에 나오고
오래 기도 하고 십일조를 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 의롭다는 말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자신들의 뜻이 항상 우선이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은 물어볼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것이다.”라고 말씀하시러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뜻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자꾸 하느님의 뜻을 강조하는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미사는 내 뜻을 주님께 알려주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들으러 오는 시간입니다.
미사에만 참석하였다고 하여 다 구원되지 않습니다.
도로의 표지판은 그것을 통해 목적지를 가게 하는 것이 존재이유입니다.
십일조나 미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 자체가 구원을 보증해주지 않습니다.
표지판을 보았다고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보았다면 어떤 생각을 해야 했을까요?
‘아, 맞다. 에덴동산은 우리 것이 아니라 하느님 것이지! 하느님이 나의 주인이시지!’라는 것을
기억해야 했을 것입니다. 선악과를 주님께 드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선악과를 통해 주님께 순종해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십일조는 에덴동산의 선악과입니다.
십일조를 내며 내가 가진 모든 것, 나 자신의 주인은 하느님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미사에 참석하면 구원 받을까요? 그것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적인 생각입니다.
미사에 참석하는 것과 구원받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십일조를 내는 것과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 목적을 알고 그 목적지에 도달하려 노력해야합니다.
미사는 그리스도와의 계약을 갱신하여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기억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미사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맺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기억하고 갱신합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피를 주시니 우리는 그분의 계명을 따라주어야 하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피를 흘리심같이 나도 이웃을 위해 피를 흘려주어야 하는 구나!
그래야 그분과 계약이 유지되어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구나!’를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오지 않는다면 마치 강도만난 사람을 그냥 두고
미사에 오는 사제나 레위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진 채 미사를 하시는 분들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가 확실합니다.
작은 벌레들은 걸러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기 때문입니다.
먼저 헌금을 하기 이전에 빨리 미운 사람이 있으면 용서하고 축복의 기도를 해 주어야합니다.
당장은 용서가 되지 않더라도 용서가 될 때까지 끝까지 기도해 줄 것을 결심해야합니다.
그래야 미사의 목적을 알고 미사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처럼 되지 않기 위해 항상 내가 하는 모든 신앙행위의 목적은
하느님의 뜻을 알아 그것을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는 것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어머니인 교회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선교사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세력을 키움이 아니라
하느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한다.
그렇다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직자나 수도자처럼 살아갈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평신도는 세상 속에 살아야 한다.
하느님이 세상에서 그들을 부르셨고 또 다시 그 속으로 파견하셨기 때문이다.
어깨띠를 두르고 몰려다니며 확성기로 예수님을 믿으라고 외침은 선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역효과를 낸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나 성모님 또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세상에 알려야 하는 것은 교리보다는 예수님의 삶이다.
그분의 삶은 ‘자녀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1테살 2,7) 같았다.
세상은 똑똑하고 강력함보다는 부드럽고 온화함을 더 바란다.
아마 처음부터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란 말은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을 단번에 찾아들어간다.
지식을 전하는 선생들은 인터넷을 통해 방에서도 만날 수 있다.
비판하고 훈육하는 이들은 곳곳에 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이들도 나에게 그렇게 한다.
그러나 나를 있는 그대로 너그럽고 온화하게 받아주며
신의를 지키고 의롭게 사는 사람들을 만나기는 정말 쉽지 않다.
이것이 예수님이 세상에서 하신 일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통해 하느님께 십일조를 바친다.
그것은 교회의 선교활동을 위한 재물보다는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 같이 율법의 핵심적인 요소들이다.’(마태 23,23)
사실 이런 것들은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인간 삶의 근본적인 요소이다.
예수님을 참 하느님이요 참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루의 십분의 일, 한 30분만이라도
이웃에게 어머니가 되어주는 척이라도 한다면 세상은 정말 평화로울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을 참으로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이고 선교이다.(1테살 2,4)
예수님,
더 열심히 일하기보다는 조금만 더 너그럽고 온화하게 이웃들을 맞이하겠습니다.
속마음까지는 그럴 수 없다면 겉으로라도 그리하겠습니다.
그러다보면 속마음도 그렇게 되겠지요.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목숨을 걸고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이셨던 그 믿음과 신뢰를 저에게도 가르쳐주소서. 아멘.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신독愼獨
“군자는 혼자 있을 때 더욱 신중하고 조심한다.”
전 요세피나 수녀
오늘 불행 선언의 주인공인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겉과 속이 다르고, 마음과 행동이 어긋나는 이들을 예수님께서는 호탕치십니다.
축복을 내려주시고,행복을 선언하시기를 즐기시던 예수님께서
유독 겉과 속이 다른 자들에게는 자주 과감하고도 단호하기까지 하십니다.
오늘 독서,
사도 바오로가 테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의 내용 중
다음의 말씀을 함께 묵상해 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인정하여 맡기신 복음을 그대로 전합니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시험하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1테살 2,4)
오늘의 복음을 들으며 함께 떠오르는 덕목 하나.
바로 신독(愼獨)입니다.
신독은 중용(中庸)에서 군자가 지니는 덕목 중 경지의 단계라고 합니다.
중용에
“군자는 보지 않는 곳에서 삼가고,
들리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를 두려워한다.”고 씌여져 있는데 바로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몸가짐을 바로하고 언행을 삼가는” 경지이지요.
중학교 시절, 도덕 수업 시간에 배운 이 신독은
“양심(良心)”이라는 교훈 아래 중고등학교 내내 무감독고사를 치르며
소감문을 작성할 때 마다 되새기게 된 소중한 시금석과도 같은 덕목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불호령이
사언행위에 있어 섬세한 성찰을 하며
주님 마음에 들려고 했던 초심자(初心者)로서의 모습에서
조금씩 요령을 피우고, 꾀를 내며 주님과 흥정하려는 제게로
바로 떨어지는 듯하여 정신을 차려 봅니다.
사람의 이목(耳目),
사람의 평가를 기준으로 한 위선과 가식이 아닌
아니 계신 곳 없으신 임마누엘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깨끗한 봉헌이 되도록
서원 때 올린 첫 마음을 되살려 보는 오늘입니다.
때로는 위로와 격려보다
쓰디 쓴 약과 따끔한 주사가 더 귀하게 느껴집니다.
오늘의 예수님께서 내리신 처방전을 감사히 받아 들여 봅니다.
우리 봉헌의 크고 작음,
높낮이를 헤아리지 않으시고
그 지향(志向)을 온전히 받아 주시는 하느님이 계셔서
참으로 살맛나는 삶이면서도
때로는 그 지향을 속일 수 없기에 도전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의 눈은 겉치레에 속고
내게 오는 손이익에 따라 난시(亂視)가 되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눈은 아십니다.
비록 오늘 복음의 말씀은 불행 선언이지만,
행복 선언 속 해법을 찾아보며 마음을 다 잡아 봅니다.
군자(君子)는 홀로 있을 때에도
자신의 사언행위를 삼가며 신중히 한다지만,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들이야
아니 계신 곳 없으신 주님 안에서
참으로 자유로운 '신독'을 즐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뵈오리니!"(마태 5,8)
‘한모금’ /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 수녀원)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