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는 다양한 서구 문물이 유입된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유입된 서구의 과학 기술 중에는 의학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화기에 서양의학이 도입되었다고 해서 이 기술이 일순간에 널리 전파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서양의학 기술이 기존의 기술을 대체하는 과정은 많은 시간과 비용, 그리고 의식의 개선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당시의 일반 대중들은 개화파가 주도하는 일련의 ‘위생조치’에 대해서 크게 반발했습니다. 그리고 개화파 또한 이들 대중들을 설득시키기 보다는 상당히 강압적인 방법으로 ‘위생조치’들을 진행했습니다.
바로 국가공권력을 동원한 비위생 단속이었는데요, 개화파는 ‘위생경찰’제도를 도입하여 각 지역의 대중들을 단속했습니다. 개화파 중 박영효의 ‘建白書(건백서)’에 수록된 국가 위생의 발전을 위해서 제시한 사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무당의 전염병 치료행위 금지, 화재예방, 하수도 개선, 분뇨처리, 목욕장려”
유길준은 조금 더 급진적인 주장으로 위생에 대한 법률 제정 및 ‘위생경찰’ 제도의 도입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위생경찰’의 주요 업무를 다음과 같이 지정했습니다.
“전염병의 예방, 종두와 소독, 식수와 음식물 점검, 분뇨와 오수 처리점검.”
유길준은 이와 같은 제도의 도입을 주장하며 말미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입니다.
“무릇 순찰의 본의는 국가를 평안히 다스리는 것을 도와 개명한 진보를 지키는데 있다”
이처럼 유길준을 비롯한 개화기 지식인들은 위생문제를 국가의 개명진보를 결정짓는 하나의 요소로 파악했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당시의 정세상 개화파가 동원한 경찰력은 대중들의 큰 지지를 받는 세력이 아니었습니다. 이 때문에 위생에 대한 문제로 동원한 경찰력이 대중과 충돌하는 경우도 많았고, 위생을 위한 일련의 행동의 취지가 의심받기도 했었지요.
사실 개화파 지식인들의 ‘위생’관념도 현재의 우리 입장에서는 여전히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위생’을 전통 한의학의 개념을 차용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대개 “정신과 육체의 보양, 음식과 房事(남녀간의...)의 절제, 자연환경의 적응.”을 통해서 몸을 지키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굳이 현대의 관점으로 살펴보자면, 일종의 면역력 유지방법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위생에 대한 기초 이해는 서양의 그것과 조금 달랐지만, 이들이 국가적인 수준의 위생 통제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명확했습니다. 개인위생을 통한 인구 번성, 그리고 위생이 곧 문명의 상징이라는 인식 때문이었습니다.
개화기 위생에 대한 논의만 살펴보아도 정책 추진에 있어서 다양한 문제점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국가 공권력에 대한 민중의 불신, 대중설득 및 합의과정의 미비, 개인의 삶에 대한 통제를 통한 국가 성장을 강조하는 태도, 사안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와 인식 부족, 당시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대외적으로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는 모습....
물론 실제 위생학과 의학사의 발전은 이후로 다양한 방향으로 전개되며 앞서 본 것과는 또 다른 모습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적어도 개화세력 및 당시 정부의 주도 세력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더 큰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위정자들이 정책을 추진하면서 이러한 역사의 경험과 교훈들을 잘 생각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첫댓글 개화세력의 정책이 조금 더 온건한 방식이었다는 연구가 있긴 합니다만, 개화파의 위생정책과 일본의 위생정책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개화파의 시각과 정책이라는 것은 결국 일본이라는 창을 통해서 본 풍경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개화세력의 친일 문제를 이야기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의 정세에서 지향하는 근대화라는 것은 왜곡된 형태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나친 상상입니다만, 이 상황에서 만약, 조선이 독자적인 근대화를 이루었다면 일본제국 MK.2가 되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