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녘을 지나 마을로
개천절을 보낸 시월 첫째 금요일이다. 새벽에 잠을 깨 전날 함안보 일대로 다녀온 트레킹에서 마련된 고구마 줄기 껍질을 까면서 시조를 한 수 남겼다. “개천절 아침나절 트레킹 나선 걸음 / 함안보 언저리로 내봉촌 지나가니 / 밭 임자 아내와 함께 고구마를 캐더라 // 부산물 잎줄기 따 찬 삼아 먹으려니 / 주인장 응답하길 흔쾌히 그러십사 / 덩이도 두 개 안겨줘 황송하게 받았다”
제목을 ‘내봉촌 인심’으로 붙여 지기들에게 아침 시조로 보냈다. 식후 자연학교 등교에 나서 원이대로로 나가 31번 버스를 타고 도계동 만남의 광장을 둘러 동읍 행정복지센터 앞을 거쳐 주남저수지를 비켜 봉강과 용연을 지났다. 삼국유사 설화가 전하는 백월산 동쪽 기슭은 봉황이 내려왔다는 봉강이고 산남저수지에서 가까워 물이 흔했을 용연인데 용이 살았던 못을 짐작하게 했다.
아침 첫차 버스로 타고 간 승객은 둘이었는데 한 부녀는 가촌 일반산업단지에서 내려 혼자 남아 가술 거리와 모산을 지난 신성주유소 앞에 내렸다. 농가가 드문 들녘에는 가까운 둑으로 안개가 번지는 모습이 운치를 더했다.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띠를 이룬 안개는 세력이 약해 옅게 번졌다. 들녘으로 가는 농로 진입로 근처 외딴 가옥 담장 석류는 붉게 익어 금이 가기 직전이었다.
누렇게 익은 벼농사보다 시설하우스에 키우는 특용작물이 더 많았다. 풋고추는 수확하는 곳도 있고 겨울에 따낼 농장은 어린 모종을 심어 한창 자라기도 했다.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은 대규모 시설채소단지 오이 농장이다. 학교 운동장만큼이나 넓어 보인 비닐하우스인데 초여름에 한 차례 때 내고 두 번째 심어 키운 다다기 오이 농장이다. 배양토에 수경재배로 키우는 스마트팜이었다.
지난여름 그곳 비닐하우스단지 상품성이 뒤져 포장에서 제외된 오이를 챙겨 이웃과 나누어 잘 먹었다. 추석을 쇠고 난 열흘께 전에도 한 차례 들러 처진 오이를 보조 가방까지 채워 이웃에 나눔을 했다. 차를 운전하지 않아도 배낭과 양손에 들 수 있을 만치 봉지에 가득 채워 이동했다. 이번에도 처진 오이가 나와 있으면 그럴 참인데 비닐하우스 농장에 닿으니 예상이 빗나가고 말았다.
오래도록 폭염에 시달리다 지난번 남녘 해안을 스친 바람 없는 태풍이 폭우를 쏟아붓고 더위는 물러갔다. 엊그제부터 아침 기온이 부쩍 낮아져 최저 온도는 15도 밑으로 내려가 나는 이마가 시려 모직 헌팅캡을 쓰고 다닌다. 오이 재배 비닐하우스는 보온을 위해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닫아두어 내부를 살펴볼 수 없게 되었다. 인기척이 없어 농장주 내외나 외국인 인력을 못 만났다.
비닐하우스 내부는 부속 시설로 외국인 근로자 임시 숙소와 샤워실과 화장실도 확보해 웬만한 주택과 같았다. 겨울에는 전기인지 기름인지 난방이 가동되고 여름은 창으로 여닫아 환기를 시켰다. 잠금장치를 하지 않아 문짝을 밀어 주인을 찾거나 외국인 일꾼을 만나 내부 사정을 알아봐도 되겠으나 적극성을 띠지 않았다. 다음에 시간 내서 한 번 더 들리기로 하고 발길을 돌렸다.
오이를 확보했으면 마을버스로 곧장 가술로 갈 생각인데 그렇게 하질 못하고 농로 따라 들녘을 더 걸었다. 벼들이 익은 논은 추수 이후 뒷그루는 비닐하우스에서 당근을 키울 테다. 죽동천을 건너 들녘을 걸으니 먼 산자락에 옅은 안개는 걷혀가는 즈음이었다. 대방에 이르니 싸움소를 키우는 축사가 나왔는데 거구의 황소 여남은 마리가 고삐에 묶여 눈을 껌벅거리며 되새김질했다.
대산 일반산업단지에서 가술 거리로 나가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를 들면서 마을도서관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개관 시간 맞춰 열람실에서 신간으로 비치된 이옥선의 산문집 ‘즐거운 어른’을 단숨에 읽었다. 내보다 열 살 더한 여성이 남편을 여의고도 여생을 즐겁게 사는 생활 속 얘기였다. 김별아가 쓴 역사소설 ‘논개’에서는 주인공의 연고지와 출생에 얽힌 초반 얘기를 봐두었다. 24.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