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공주들이 커가며 새로운 일들을 참 많이 해 본다. 그 새로움이 힘들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우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보면 사람이라는 존재에게 어른이 되는 과정은 참으로 길고 어렵다. 옛말에 “결혼을 해야 어른이 된다.”는 말이 있다. 난 여기에 하나를 덧 붙이자면 “애들을 낳아서 길러봐야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말을 한 번 더 하고 싶다. 이 말은 정말 내 진심이다. 단순히 결혼만으로는 반 정도의 어른이 되는 것 같고, 애들을 낳아서 기르며 마주하는 많은 일들을 경험하고 헤쳐나간 후에야 진정한 어른이 되는 것 같다. 그 경험이 어른이 되는 밑거름이고 성숙한 어른을 만드는 자양분인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일들도 처음 마주할 때는 어두운 터널과 같지만, 그 터널에는 언제나 끝이 있기에 그 끝을 생각하면 또 용기가 생긴다. 그리고 그 끝을 지나고 나면 그 터널은 즐거운 기억으로 바뀌니 그 만큼 더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 같다.
사춘기 소녀 민경이와의 생활은 어린이 때와는 여러 가지로 많이 바뀌었다. 이제 민경이는 외모도 많이 바뀌었다. 어른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나는 여드름이 이마에 가득하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그 여드름을 부끄러워하며 이마를 가리는 헤어스타일을 고집하지 않고 이마를 들어내는 말총머리 헤어스타일을 계속 하고 다닌다. 그것만으로도 한가지 다툼은 줄어든 것 같다. 보통 이마에 여드름이 나면 애들은 머리카락으로 이마를 가리려고 하고, 어른들은 반대로 이마를 가리지 않아야 여드름이 덜 난다고 말을 하거나 답답해 보이는 헤어스타일 때문에 이마를 가리지 말라고 말을 한다. 이것도 부모들이 사춘기 소녀와 다투는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집은 이런 사소한 다툼이 없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어른의 관점에서 보면 여드름은 별개 아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이 또래의 애들에게는 큰 고민중의 하나다. 민경이가 이런 자연스러움을 이해해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여드름에 대해 큰 불평을 하지 않는 것이 고맙기도 하다.
살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 그저 이루어지는 것은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의 좋은 노력은 누군가를 좀 더 행복하게 하고, 누군가의 나쁜 행동은 누군가를 좀 더 불행하게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도 이런 민경이를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한다. 민경이의 여드름을 짜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이제 민경이의 손톱을 깎아주지 않아도 되니 또 새로운 일이 생겼다. 그래서 힘든 것이 아니라 너무 좋다. 애들에게 해 줄 일이 있다는 것은 내게 너무 좋은 일이다. 요즘 1-2주일에 한 번 정도는 이마의 여드름을 조금씩 짜 준다. 병원에 가서 짜거나 하면 많이 아픈데 난 손재주가 좋아서 그런지 민경이가 별로 아파하지 않았다. 내가 민경이에게 먼저 말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민경이나 내게 먼저 말을 하는 경우도 있어 서로의 필요가 만나는 지점이 지금은 여기인 것 같다.
여드름을 짜는 일에 모나미 볼펜이 나의 유일한 도구다. ‘끝 부분을 알콜에 소독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짧은 고민을 늘 하지만 항상 볼펜의 끝 부분을 휴지에 한 두 번 닦아서 그냥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가끔 생각해 본다. ‘이 도구는 볼펜으로 나온 것인가?, 여드름 짜는 용도로 나온 것인가?’ 지금 내게는 후자의 용도로 주로 쓰고 있다. 그리고 내가 민경이 나이일 때도 이 볼펜은 여드름을 짜는 용도로 많이 사용했었다. 내게 있어 여드름 짜는 것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물건이 이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직도 이마의 여드름을 짜는 것이 좋은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아내는 민경이의 이마 여드름을 보고 피부과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며 수시로 우리에게 이야기를 한다. 거기에 가서 짜고 치료를 받고 와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니 여드름을 짜는 것이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민경이는 피부과에 가서 여드름을 짜면 아프다는 선입견이 있어서 그런지 피부과에는 가지 않으려고 했다. 적당히 편안한 집에서 적당히 아픈 정도이며 익숙한 방법인 내게서 여드름 치료(?)를 받으려고 하니 나는 너무 좋다.
민경이는 화농성 여드름은 별로 없고, 주로 좁쌀형 여드름이 이마에 많다. 그런데 여드름을 자세히 살펴보니 약간씩 달랐다. 내 여드름을 짜던 때는 모르던 것이 보였다. 그리고 화농성 여드름은 손을 대지 않는다. 내가 짜기에는 너무 아프고 일정 시간이 지나니 자동으로 없어졌기 때문이다. 좁쌀형 여드름도 자세히 보면 조금씩 달랐다. 그래서 직접 짜보면 드러난 모양에 따라 어떤 것은 계란 모양의 알처럼 바로 나오는 것이 있고, 어떤 것은 가래떡처럼 나오는 것도 있었다. 난 주로 계란 모양의 알처럼 생긴 것이 나올 듯한 것만 짠다. 그 정도는 짜도 크게 아프지 않고 짜면서 나오는 그 느낌이 괜찮다. 민경이도 자신의 피부에서 뭔가가 빠져나가는 그 느낌이 괜찮다고 내게 말했다. 나도 볼펜으로 누르면 나오는 그 느낌이 괜찮았다. 짜서 나오는 그 순간은 낚시에서의 손맛과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또 한 번에 많이 짜지도 않는다. 아무리 내가 덜 아프게 짠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여자아이의 좁은 이마에서 열 개 이상을 짜면 당연히 아프고, 더 이상 짜야 할 곳도 없다. 그러면 으레 오늘은 그만하자는 이야기가 민경이와 나 중 한 사람에게서 나온다. 그리고 짠 것을 휴지에 모아 두었다가 보여주면 민경이도 신기해 하고, 옆에서 지켜보던 민채도 “우와~”하며 신기해 한다.
이렇듯 우리 집은 전형적인 부부의 역할을 구분하지 않고 일부 혼재해서 이런 정밀한 것은 주로 내가 한다. 손톱도 내가 깎았으니 이것도 자연스레 내가 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되니 애들도 자연스럽게 내에 먼저 부탁을 했다. 이것도 하려면 어느 정도 섬세한 손길이 필요하고, 좁쌀형 여드름의 모양을 잘 살펴서 구분도 잘 해야 한다. 짜면 잘 나올 듯한 모양을 고르고, 짤 때는 누르는 위치와 강도도 잘 조절해야 한다. 그래야 최대한 덜 아프게 하며 짤 수 있다. 나는 이런 것에 나름 소질(?)이 있고, 이런 업무가 적합하다. 언젠가 옆에서 지켜보던 민채는 내게 말했다. “아빠는 이렇게 잘 하는데 왜 피부과 의사가 안 되었어?” 부끄럽지만 나는 말했다. “아빠는 의사가 될 만큼 공부를 잘하지 못해서 그렇다”는 자백을 웃으며 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난 민채에게 말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민채는 의사가 되면 좋을 것 같아~” 또 잠시 정적이 흐르고 민채는 “난 의사 되기 싫은데~” 이렇게 이야기를 하며 서로 웃는다.
우리가 한루하루를 살아가려면 아침을 먹으면 곧 점심을 먹어야 하고, 점심을 먹으면 조금 후에 다시 저녁을 먹어야 한다. 이렇듯 우리 공주들이 유아일 때 해야 하는 일을 끝내면 어린이일 때 해야 하는 일이 생기고, 어린이일 때 해야 하는 일을 끝내면 청소년기에 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 그리고 해보지 않은 일이지만 청소년 시기가 지나면 또 다른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여러가지 일들을 계속 하다 보면 한편으로는 힘들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공주들에게 뭔가를 해 줄 수 있다는 그 사실이 그냥 즐겁다. 이렇듯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즐겁게 지내보려고 내 나름의 노력을 한다. 이런 것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큰 즐거움이고 내 삶의 작은 원동력이다.
첫댓글 자식을 키워봐야 아는 것들이 많지요.ㅎㅎㅎ
맞습니다.~~^^
아직 모르는 것이 많지만
해 줄 수 있는게 있어 좋습니다.
그리고 서툴지만 큰 불만없이 잘 따라주는
애들이 고맙기도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