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흘리면서 목이 매어 전화를 하는
리더북스의 이대표님의 목소리는 너무나 감격스럽게 드렸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치성드리듯 매일 교회가서
기도를 드렸답니다.
"제발 현오 선생님 책이 선정되게
해주소서!"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이번에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이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예진흥원에서 선정하는 세종도서 교양 부문에 뽑히게 된 것에 대한 작은 일화입니다.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감히 그런 큰 영예를 안을 수
있다니....
여러 곳에 잘난 척 좀
했습니다.
리더북스 이대표님께 보답을 좀 한 느낌도
들고.....
경영난에 허덕이고
계셨거든요.
사람들이 책을 안
읽으니까......
26조원의 일부분을 국민들 책 읽기 사업에
조금이라도 투자를 했었으면 좋았을 것을....
제가 할 일은?
예.
그렇습니다.
또 산에 가야죠
다시 지리산입니다.
이번에는 남강 건너 둔철산
부근입니다.
사실 남강을 건넜으니 지리산은
아닙니다.
지난 초봄 지리산 둘레길을 하면서 눈여겨 보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웅석봉을 향하면서 "저 둔철산에서 보는 이곳
정경은 어떨까?"하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죠.
저의 산을 보는 그런 시각은 왕산과 필봉산에서
와룡산이나 상여봉 그리고 정수산 등을 볼 때도 크게 다르지 않었습니다.
그때도 이들 산을 이어서 걸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둔철산 ~ 척지마을 ~ 정수산 ~ 상여봉 ~
와룡산 ......
그 산행의 중심지 산청을
봅니다.
그런데 지리산 들레길을 하면서
들여다보았던 산청의
역사는 실로 여러가지 흥미로운 사실들이 여러 개 눈에 띄었습니다.
옛 지명인 산음부터 경호강, 회계산 그리고
왕희지에 얽힌 고사까지....
과연 선비의 고장이자 동의보감 같이 향기 좋은
냄새가 풍기는 사서史書 한 편을 읽은 느낌이 오더군요.
산청과 그 주변 산으로 들어가
볼까요?
지금 준비 중인 '현오와 걷는 지리산 둘레길'
중에서 관련 내용을 뽑아봅니다.
신라
경덕왕(
? ~ 765)의
성은 김,
이름은
헌영(憲英),
시호는
경덕(景德)이다.
신라의
제33대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친형인 효성왕(孝成王,
재위
737∼742)에게
자식이 없었으므로 왕제로서 태자가 되었으며,
742년(효성왕
6)
효성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
당시 신라 왕실의 전제왕권은 새로운 귀족세력의 부상으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경덕왕은 왕권의 재강화를 위한 일련의 관제정비와 개혁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책을
뒤져 보면 이를 위하여 그가 한 일은 상당히 많다.
하지만
우리에게 관심을 끄는 대목은 바로 757년(경덕왕
16)에
실시한 주(州)·군(郡)·현(縣)의
명칭과 행정체계를 대대적으로 정비한 일이다.
즉
중국식 한자로 고친 것이다.
한화정책이었던
것이다.
이는
삼국통일 이전 옛 고구려와 백제 ·
가야
시대의 명칭이 뒤섞여 사용되고 있던 지명(地名)을
정비해 지방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고 중앙정부의 지방통제력을 높이기 위한 목적에서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가령
고구려 냄새가 물씬 풍기는 사벌주(沙伐州)는
상주(尙州)로
이름을 바꾸고 10군
30현을
소속시켰고,
삽량주(歃良州)는
양주(良州)로
바꾸고 1소경
12군
34현을
소속시켰다.
그리고
금관소경(金官小京)은
김해경(金海京),
국원소경(國原小京)은
중원경(中原京),
북원소경은
북원경(北原京),
서원소경은
서원경(西原京),
남원소경은
남원경(南原京)으로
하였다.
경덕왕 때의 이러한
정비작업으로
운봉(雲峰)
· 거제(巨濟)
· 거창(居昌)
· 고령(高靈)
· 삼척(三陟)
· 부여(扶餘)
등
오늘날까지 사용되는 각 지역의 명칭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경덕왕의
위와 같은 한화적 개혁정치는 신라 중대의 전제왕권 체제를 재강화해 연장시키려는 정치적 노력이었으나 성공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혜공왕
때에 이르러 대부분의 지명이 옛 이름으로 환원되었으니 말이다.
그
중 지금의 산청은 본래 지품천현이었다.
신라
초기까지 그렇게 불리다가 위와 같이 경덕왕 때 산음으로 고쳤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산양이라고도 불렸는데 영조43년
그러니까 1767년에
이르러서야 지금의 산청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당나라
즉 중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경덕왕 때나 조선 시대에 이르러 개명을 하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모화사상과의
관련성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산청의
옛 이름 산음은 중국 절강성 소흥현 산음(상해
바로 아래의 사오싱시紹興市)의
한 마을에서
따온 지명이다.
지리산의
동쪽 자락에 있는 산청의 아름다운 자연 환경이 그곳의 산수와 비견된다는 것이다.
그
중국 산음의 대표적인 인물로 문학가이자 서예가인 왕희지(307~365)가
있다.
중국인들은 두보가
시성詩聖이라면
서성書聖으로
왕희지를 꼽는데 주저할 리가 없을 것이다.
왕희지는
거위가 물에서 헤엄치는 자세를 관찰하면서 필법의 묘를 깨우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서체는 거위의 노닒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나름
그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니
왕희지가 거위를 좋아하게 됨은 당연할 터,
그는
특히 흰 거위를 유달리 좋아했다고 한다.
당시
중국인들은 거위와의 교류에서 비롯된 왕희지의 글씨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금은보화를 가진 것 이상의 자랑거리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니
그의 글과 관련된 일화가 없을 리 없다.
얘기를
들어본다.
산음에
있는 어느 도사는 왕희지의 서법書法을
대단히 좋아해서 그에게 ‘도덕경道德經’을
써 달라는 청탁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왕희지가 경서를 베끼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말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왕희지가 흰 거위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다.
왕희지는
붓글씨를 더욱 생동하고 힘차게 표현하기 위해 늘 거위가 물에서 헤엄치는 모양을 본떠서 손목을 단련했다.
그래서
도사는 새끼 거위들을 사서 정성을 다해 기르기 시작했다.
몇
달이 지나자 새끼 거위들은 백설같이 아름다운 거위로 자라났다.
도사는
거위들을 왕희지가 늘 지나다니는 길목에다 가져다 놓았다.
그곳을
지나가던 왕희지는 깃털이 눈같이 희고 자태가 고운 거위들을 보고는 너무나도 욕심이 나서 그 거위를 자기에게 팔라고 도사에게
사정했다.
그러자
도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
거위들은 원래 팔지 않는 것인데,
선생님께서
저의 소원대로 ‘도덕경’
한
책을 필사해 주신다면 선물로 드릴 수는 있습니다.”
왕희지는
두말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응낙했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도덕경’을
필사해 주고는 그 거위들을 품에 안고 가던 길을 갔다.
여기서
‘백아환자白鵝換字’라는
고사 성어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즉
‘유난히
거위를 좋아했던 왕희지가 흰 거위白鵝를
얻기 위해 ’도덕경‘을
자신의 필체字로
써서 그 둘을 바꿨다換.'는
유명한 고사가 생기게 됐다는 것이다.
이
사오싱紹興시를
흐르는 강이 경호강이고 그 도시에는 회계산會稽山도
있고 환아정과 난정도 있었다 하니 우리의 산청에도 이런 지명이나 이름을 가진 건축물도 있어야 할 것이다.
지명이나 건축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가 당시 선비들이 읊었던 시를 읽어보는 것이다.
어느
곳에서 어떤 이와 어떤 곳을 바라보며 어떤 상황이었는 가가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 부근의 경치를 그린 시 중,
함양군수를
지낸 남주헌(1769~1821)이
1803.
3. 산청현감
정유순鄭有淳,
진주
목사 이낙수 등과 함께 지리산을 산행하면서 이 산청 그러니까 당시 산음에 들러서는 환아정換鵝亭에
올라 주변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그린다.
“정자
아래로 강물이 흐르고,
강가에
절벽이 임해 있으며,
예쁜
꽃과 길쭉한 대나무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이곳의
옛 지명은 산음山陰이다.
그래서
산은 회계산會稽山이라
일컫고 물은 경호강鏡湖江이라
이름하며,
왕일소王逸少의
고사를 본떠 환아정을 지은 것이다.
여기는
내가 여러 차례 본 곳이다.”
그렇게 한 마디 하고는 산음을 떠나면서 시 한
수를 읊는다.
稽産鏡水繞空臺
회계산과
경호강이 빈 누대를 감싼 자리
癸丑春年上巳會
계축년(353년)의
봄날이 상기일과 겸해 돌아 왔네
籠鵝已去沙鷗至
거위
안고 떠나가니 갈매기만 날아오고
道士難逢洞客來
도사
상봉 어려우니 동객만 찾아오네.
남주헌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회계산과 경호강 그리고 환아정 등이다.
중국
사오싱시의 그것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즉
경호강은 산청을 가로지르는 물줄기를 말함이니 곧 남강이라는 긴 물줄기 중 이 산청을 지나는 부분만 따로 떼어서 특히 경호강이라 부른
것이며,
회계산은
산청의 어느 산을 이른 이름이고 환아정은 누군가가 지은 건축물일 것이다.
이럴
경우 역시 지리산에 대해서는 김선신의 두류전지가 한몫을 한다.
“‘산청지’에는
(환아정은) 객관 서쪽에 있으며 강가(경호강)에
임해 굽어보고 있다.
현감
심린이 건립했으며 화산花山(안동의
다른 이름)
권반權攀(1419∼1472)이
우군 왕희지의 고사를 취해 이름을 지었다.
우암
송시열과 백헌 이경석의 기문이 있다.”고
적고 있다.
그렇다.
위와
같이 환아정은 왕희지의 백아환자白鵝換字라는
고사에 따라 산음현 2대
현감 심린이 축조를 할 때 당시 저명한 학자였던 권반權攀이
‘환아정換鵝亭’이라
이름 지었고 그 현판의 글씨는 당대 최고의 명필 한석봉이 썼다는 것이다.
이렇게
경호강도 만들었고 환아정도 만들었으니 이제는 회계산이다.
참고도
#1 대동여지도에 나오는 회계산
참고도
#2 도선지도에 나오는 회계산
참고도
#3 동여도에 나오는 회계산
산이니
지도를 봐야겠다.
우선
고지도부터 찾아본다.
대동여지도와
조선지도에도 나와 있는 회계산이 불행히도 현재 지도에는그 위치가 불분명하다.
위
옛날 지도에 의하면 “회계산은
‘동산’의
북동쪽 정곡 마을 좌측에 있다.”거나,
반면
대동여지도에는 “회계산은
‘동산’의
북동쪽 정곡 마을 좌측에 있다고 하고,
‘비변사인방안지도’와
광여도에 의하면 ‘관문으로부터
5리
거리’라고
되어있다.
그럴 경우 ‘동산’이
현재 산청의 진산인 꽃봉산237.5m이라고
하니 회계산은 지금의 산청군 하수 종말 처리장 옆에 있는 231.7봉이라는
견해가 있으나 이 정도의 조망의 봉우리에 그 수려한 이름을 갖다 붙였을까?“‘비변사인방안지도’와
‘광여도’에
의하면 ‘관문으로부터
5리
거리’”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동산’이
현재 산청의 진산인 꽃봉산237.5m이라고
하니 회계산은 지금의 와룡산416.7m
정도가
되지 않을까?
다만
참고도 #3의 광여도에 의할 때 환아정이 있는 지금의 산청초교 야산으로 그려져 있어 이를 찾는 데 혼란을 주고 있다.
1489년
4월
봄이 무르익은 계절에 탁영 김일손도 지리산 유람을 떠나면서 이곳을 지났다.
그는
“환아정(換鵝亭)에
올라 기문記文을
보면서 북쪽으로 맑은 강을 대하니,
유유하게
흘러가는 물에 대한 소회가 있었다.
그래서
잠시 비스듬히 누워 눈을 붙였다가 일어났다.
아!
어진
마을을 택하여 거처하는 것이 지혜요.
나무
위에 깃들여 험악한 물을 피하는 것이 총명함이로구나.
고을
이름이 산음이고 정자 이름이 환아換鵝니,
아마도
이 고을에 회계산會稽山의
산수를 연모하는 사람이 있었나 보다.
우리들이
어찌 이곳에서 동진東晉의
풍류를 영원히 이을 수 있겠는가.”라고
소회를 밝혔다.
참고로
경호강은 따로 독립된 강 이름이 아니라 남강에 속한 물줄기라는 것을 확실히 하고 넘어가기로 하죠.
즉
남강 ⊃
경호강입니다.
이쯤에서
물줄기를 정리해 볼까요?
그래야
산줄기가 보이니까 말입니다.
존경하는
박성태 선생님의 신산경도에서 관련 구간을 캡쳐해 왔습니다.
참고도 #4
남강 구간에서 산청을 지나는 물줄기를 특히
경호강이라 부른다고 했습니다.
티브이를 보다 보면 이곳에서 리프팅을 즐기는
이들에 대한 멘트가 리포터를 통해서 나올 때 분명히 이 강을 경호강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위 참고도 #4에서 보듯 지리산을 싸고
있는 물줄기 중, '가' 구간 까지를 람천, '나' 구간 까지를 임천, 그리고 '다' 구간 까지를 엄천이라고 구분하여
부릅니다.
이는 지리산의 각 계곡에서 내려오는 지천支川이
주主 하천에 합류하면서 그 지역에서 부르는 이름에 따라 바뀐 것으로 이는 관습상의 문제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관리 주체의 변경에 따라 바뀐 이름은 아니라는
것이죠.
다만 '엄천'의 경우 지역 주민들은 아직도
'엄천'이라 부르고 있는 반면 국토지리정보원에서는 과감하게 이를 무시하여 지도 상으로는 윗 물줄기 이름 그대로 '임천'으로 표기한 점이
다릅니다.
참고도 #5 대동여지도
정교하기로 세계적으로 이름 높은 대동여지도에도
이 구간의 강 이름은 엄연히 엄천이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임천이 용유담에 이르러서는 엄천으로 바뀐다는
것이죠.
부근에 있다 폐사된 엄천사 때문일
겁니다.
물줄기 얘기가 나왔으니 여기서 산줄기 공부 하나
할까요?
산줄기는 山經이라 하여 산맥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산맥을 배울 때 산맥과 산줄기를
구분하지 않고 배웠기 때문에 개념상 혼란이 있습니다.
산맥이
고토의 작품이라고?
“형.
근데
지질구조선이 산맥이라며?
우리가
배운 태백산맥이니 뭐니 하는 산맥이 어떻게 만들어지게 된 거야?
원래
산맥이라는 말이 우리가 쓰던 말이었다면서!”
장감독은
제법 언성이 높아졌다.
우리는
학교 다닐 때 그렇게 배웠으니 말이다.
“장감독,
아베
노부유키라고 알지?”
“응
.
요새
인터넷을 달구고 있잖아.
지금
수상인 아베신조의 할아버지.”
하긴
그 똑똑한 장감독이 그런 걸 모를 리가 있나.
“그가
한 소위 ‘마지막
총독 아베의 소름끼치는 예언’이라는
것도 알지?”
“알지.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는...”
“바로
그거야.
일본은
우리를 침략하고서는 역사와 지리교육에 각별하게 온 힘을 기울였다고 하잖아.”
고토가
조선 땅에 들어오기 전 예습을 한 것은 조선의 역사뿐이 아니었다.
그가
주목한 책은 ‘조선팔역지’라는
책이었다.
이
책은 이중환(1690~1756?)의
‘택리지’를
일본어로 번역한 인쇄물이었다.
‘택리지’는
일본뿐만 아니라 ‘조선지리소지(朝鮮地理小志)’라는
이름으로 중국에서도 간행된 인문지리서이다.
1881년에
일본에서 출간된 이 책에는 조선지리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조선
사람들은 풍수지리라는 동양 고유의 철학이자 자연관을 신봉했다.
그것은
길흉화복을 담은 어쩌면 과학이라기보다는 미신적인 요소도 있었다.
즉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자연세계와의 조화를 공생으로 보는 이 풍수사상은 서양의 실증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조선의
지리학 역시 자연과 조화된 균형 있는 개발을 모토로 인간의 안전과 편리를 도모하는 학문이었다.
이에
반해 서양 지리학은 자연을 개발의 대상,
정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가?
“그렇다!
택리지에
서양지리학을 가미하자.”
그는
1884년
독일 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접한 택리지 아니 조선팔역지 중 산수(山水)편을
본 첫 감상은 신세계를 본 기분이었다.
“어떻게
이 작고 미개한 나라에서 이렇듯 과학적인 산줄기 체계를 가지고 있었을까?
과학이
그렇게 발달한 서양에서도 접하지 못한 산줄기 체계.
그것을
이미 1000년
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걸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 받고 있었다니!
고조선
시대에는 만주벌판을 호령했고 고구려 시대에 와서는 한반도 대부분 지역과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등 동북삼성이 다 그들의 지배하에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들의 문화는 어떠한가!
금속활자나
측우기 같은 것은 세계 최초로 만들었고 그들의 도자기 굽는 기술이나 화약을 최초로 실용화하고 나침반도 신라시대부터....
더군다나
그들은 자신들의 글자까지 가지고 있으니...
좋다!
이들의
정신적 지주는 단군과 백두산이렸다!
조선산맥?
백두산부터
흘러내린 조선의 기둥이 조선산맥이라고?
‘곤륜산의
한 가지가 큰 사막의 남쪽으로 오다가 동쪽에 이르러 의무려산이 되고,
이곳으로부터
크게 끊어지어 요동 평야가 된다.
평야를
건너 다시 일어나서 백두산이 되는데,
곧
산해경에서 말하는 불함산(不咸山)이
이것이다.
정기가
북쪽으로 천 리를 뻗치고 두 강을 끼고 남쪽으로 향한 것이 영고탑이 되었다.
등
뒤로 뻗어 나간 한 가지는 조선산맥의 머리가 된다.’
그래!
택리지
아니 조선팔역지의 팔도총론 도입부에 나온 이 조선산맥!
산맥으로
가자!”
택리지를
본 고토는 자신이 조선에 들어가 해야 할 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짐을 느꼈다.
대일본제국을
위한 일이었다.
천황
메이지를 위한 일이었다.
-ㅡ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157쪽
산경표에는
백두대간과 정간,
정맥이
나온다.
산경표는
산줄기에 계급을 주었다는 얘기다.
그렇다.
간(幹)은
줄기이고 맥(脈)은
줄기에서 흘러나간 갈래다.
맥이라는
게
무엇인가?
혈관
즉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산맥이란 산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
즉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여러 산줄기들이 가지를
친다.
그
가지 줄기들은 강을 둘러싼 줄기와 그렇지 않은 줄기로 나누었다.
그러니까
강을 둘러싼 줄기를 주맥(主脈)으로
보고 그렇지 않은 줄기를 지맥(支脈)으로
보았
다.
주맥은
정간과 정맥이었고 여타 줄기들은 다 지맥이었다.
곧
조선산맥을 중심으로 각 지맥이 작은 산맥으로 나뉘어져 간 것이었다.
고토는
이해했다.
조선인들은
물줄기를 따라 촌락을 형성하며 살았고 산줄기를 사이에 두고 양쪽 지방의 풍습과 언어도 달라짐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곧
조선인들은
이미
산과 강을 다 꿰차고 거기에 순응하며 사는 사람들이었다.
백두산을
숭배하며 백두산신이 천왕이고,
천왕이
국사대천,
천황이라
불리는 단군 아니던가!
ㅡ 졸저 전게서 , 160쪽
정리하면 산맥은 융기, 단층이나 습곡 작용
그리고 화산 활동 등 지구 내부의 구조적인
요인에
의해 생기는 지질구조선을 이야기합니다.
반면 산줄기는 그 지질구조선이 외부에 돌출된
채로 수천만 년-최소 5,000만 년-을 지나면서 위와 같은 구조적인 요인 외에 바람과 비와 같은 풍화작용과 침식 작용 즉
기후적인 요인으로 인해 깎이고 닳은 현재의 산-산-산과 같은 산의
이음으로 봅니다.
굳이 얘기하자면 2차 산맥 정도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를 영어로 표현하자면 산줄기는 mountain
ridge로 산맥은 mountains나 ranges 정도로 씁니다.
물론 산줄기는 분수계 혹은 분수령을 뜻하기도
하므로 'water devide'보다는 지형적 분수계라는 의미의 'geomorphic devide'라 쓸 수도 있을 겁니다.
어쨌든 이런 구분을 처음부터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으면 별 문제 없이 산줄기와 산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응용하여 이를 실생활에 선용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언제나 그러하듯이 일본이라는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구한말.
조선은 열강들에 둘러싸여 호시탐탐 눈독을 들이고
있던 말 그대로 풍전등화 같은 신세였습니다.
카스라 · 테프트 밀약으로 미국의 양해를 얻은
일본이 선수를 칩니다.
상인들이 들어오고 그리고 1900년 일본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가 광물탐사사업의 학술책임자 자격으로 입국합니다.
자원침탈 사업의 일환이었던
것이죠.
그렇게 우리 땅의 지질을 조사하고는
1903년 '조선산맥론'이라는 논문을 통하여 그가 독일에서 배운 서양 지리학의 체계 즉 조산운동에 따른 산지 체계를 일정한 방향 위주로 파악하는
방법으로 우리나라 산지 쳬계를 정의합니다.
우리나라 고유의 산줄기 체계를 무시한 채 자신이
14개월 동안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산지 체계를 정리하고 그 방향에 선을 그어 산맥을 만듭니다.
그게 곧 랴오뚱(요동) 방향이니 중국(지나)
방향이니 한국(조선) 방향이라는 산지 체계입니다.
그리고 그 각 체계 안에 연속된 산열로서
선형線形을 이룬 것, 어느 정도 폭과 길이를 가진 것, 산봉山峰, 산릉山稜 정도의 외형을 갖춘 것 등을 36개로
추립니다.
이 과정에서 고토 분지로는 교묘하게 우리나라
고유의 산줄기 개념인 '산맥山脈'을 도용합니다.
산맥은 우리 조상들이 쓰던 산줄기의 다른
말입니다.
고토 분지로는 위 논문에서 서양 지리학의
mountains, ranges, chains, system 등을 우리가 아무런 저항감 없이 산줄기의 다른 말로 이해하며 부르던 이름인 산맥으로
번역을 한 것입니다.
그가 조선에 들어오기 전 '조선팔역지'라는
이름으로 일역되어 출간된 조선최고의 인문지리학자 이중환의 '택리지'를 이미 공부한 학습효과 덕이었습니다.
그 작업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산줄기를 토막내는
과정이었습니다.
조선대산맥 즉 백두대간이 마천령산맥 - 함경산맥
- 낭림산맥 - 태백산맥 - 소백산맥 등으로 훼절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고토분지로 아니 일본의 목적은 최소 두
가지였습니다.
조선인의 삶, 역사의 원천이자 정신적 지주인
백두산을 이 땅에서 지우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조선민족의 역사와 지리를 지운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당연히 자원
침탈이었겠고.....
그렇게 8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는 동안 해방은 됐으나 우리의 백두대간이나
정맥 등 잃어버린 산줄기는 찾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산맥 체계로 공부를 한 학생은 선생이 되어 어린
학생에게 산맥을 가르쳤고 그 학생은 다시 선생이 되어 자신의 학생에게 태백산맥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만 지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제 식민지 체제 하에서 잊혀졌던 산줄기 산지
체계는 그렇게 영영 우리에게서 사라질 뻔 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몇 백 년 후에는 알려질 수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긴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건 지금이건 그 역할은 산꾼의
몫이었습니다.
영원한 지도쟁이 이우형 선생에 의해 발견된
산경표는 이우형이나 조석필, 현진상 등에 의해 그 내용이 밝혀지면서 커다란 전기가 마련됩니다.
대수롭지 않게 보던 지리학계였지만 기존의 산맥
체계를 뒤흔들 조짐이 보이자 이들도 나름 연구에 뛰어들었습니다.
①김상호 교수의 산지체계 재정립 주장이 나오는가
하면 ②백두대간과 현대산맥론 비교(오경섭, 손일), ③분수계 산지 개념(이민부) 등의 논문이 발표되고 ④현행 산맥도의 문제점 및 대안의
모색(박수진, 손일)이 제시되다가 ⑤권혁재에 이르러서는 산맥 체계를 산괴 혹은 지괴로 바꾸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교과서의 산맥 체계에도 변화가 있게
됩니다.
이런 조그마한 변화는 결국 2009년 개정 교육
과정 때 고등학교 지리교과서에 '고문헌 속에 담겨진 우리 조상들의 국토관'이라는 타이틀로 부족하나마 산경도를 통하여 백두대간 등 1대간 1정간
13정맥이 소개됩니다.
지리학자들이 산꾼들에게 일시적으로나마 무릎을
꿇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너무 미미하여 산맥과 산줄기를
비교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습니다.
'태백산맥은 없다.'로 불어닥친 '조석필
선풍'이 조금 가라앉자 다시 학계에서도 "언제 그랬냐?"며 다시 논의를 잠재우는 분위기입니다.
여기에 국토연구원 김영표 박사도 한몫 거들었으나
조직적으로 덤벼드는 지리학회를 이길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러고는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무관심한 산림청이나 교육부에서는 '나
몰라라'하는 분위기이고....
이런 논의가 근저에 있는 산줄기 체계를 집대성
한 책冊이자 표表가 바로 산경표입니다.
그 산줄기 체계의 기본 교과서는 위에서 얘기한
산경표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찾아볼 수 없는
독자적인 자신들만의 산줄기 체계를 가지고 있는 나라!
그 나라가 가지고 있는 산경표에는 크게 두 가지
본이 있습니다.
하나는 서울대 규장각에서 보관하고 있는
'해동도리보'에 나오는 산경표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여지편람' 중의 산경표입니다.
시중에 떠돌아 다니는 산경표는 1910년 육당
최남선이 사라져가는 우리 고전들을 보전, 발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한 조선광문회에서 그들의 설립 목적인 '중대하고 긴요한 책'에 해당된다고
선정한 '최성우 소장본'을 바탕으로 1913년 간행한 책입니다.
이는 필사본이 아니라 활자로 인쇄한 영인본이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부수가 시중에 깔렸을 것이나 일제강점기를 지나는 동안 남아 있는 책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어쨌든 1980년 이우형 선생에 의해 이 최성우
본이 발견이 되었고 그때부터 산경표라는 거대한 폭풍이 휘몰아 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산경표의 중심에 있던 것이 바로
'백두대간'이었습니다.
사실 이 백두대간이 인구에 회자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한 것은 모 맥주회사의 카피copy덕이었습니다.
이때는 산경표 = 백두대간으로
이해하였습니다.
민간지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여 산경표가 알려지고
백두대간이 일본인 고토 분지로에 의해 훼절되었으며 지리학자들은 매국노라는 인식이 팽배해졌습니다.
학자라는 사람들이 진짜 산경표라는 걸 여태까지
몰랐었느냐?
아니면 알고도 사실이 은폐될까봐 숨기고
있었느냐?
니네 일본인 선생이 그렇게 가르쳐
주더냐?
그러고도 니네들이 교수라고 할 수
있느냐?
...........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분개한 산꾼들을 중심으로
'백두대간 걷기' 열풍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넷의 보급으로 산악회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게 되었고 여기에는 IMF 구제금웅의 여파로 직장에서 쫓겨난 교육받은 엘리트들이 산으로 몰리면서 자연스레 동참을
자원했습니다.
이들의 손에는 단행본 조석필 저 '태백산맥은
없다.'가 쥐어져 있었고 이 책은 그들의 산줄기 교과서로 필독되었습니다.
세인들은 이들을 '산경표 교도敎徒'라 불렀고
산꾼들은 그렇게 불리기를 자처했습니다.
이렇게 급박한 순간에도 학자들은
느긋했습니다.
물론 위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산맥을 재조명하는
연구는 있었지만 이는 여전히 산맥에 머물렀지 산줄기로의 접근은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비아냥은 있었습니다.
산경표의 체계는 비과학적이고 계통이 서 있지
않다는 등의 비난이었습니다.
그 말은 곧 산경표를 제도권 하에 두지 않겠다는
지리학회의 다짐으로 들렸습니다.
이때 이중환 이래 최고의 민간인 지리학자가
등장합니다.
"한 톨의 쌀에 반야심경을 새긴다는 사람처럼
비현실적인 사람이 나타났다."
조석필은 이 분을
이렇게 소개하였습니다.
심한 말로 좀 미련하기도 하거니와 정신 나간
사람이라는 것이죠.
그럴 정도로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2004년 7월의
일이었습니다.
'신산경표'였습니다.
그렇게 신산경표는 세상에 얼굴을 드러냈고
이는 산경표가 현대 지리학 개념으로 재해석되어 실용화 될 수 있도록 재편된 책이자 표였습니다.
민간지리학자 '박성태'라는 이름은 그렇게
우리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신산경표!
선생의 위대한 창작물인 신산경표는 '태백산맥은
없다'의 저자 조석필의 의지대로 즉시 최고의 산줄기 교과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이 책의 발간은 그간 재조의 지리학자들이
산줄기파들을 비하하면서 제기했던 여러가지 물음에 대한 답이기도 했습니다.
즉 그동안 지리학자들이 비아냥 거리던 산경표에
대한 답변은 이러했습니다.
①장백 정간의 정간이 정맥과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이를 정맥으로 흡수했으며,
②그리고 정맥의 하위 개념으로 기맥과 지맥을
제시하였으며,
③그렇게 함으로써 대간은 물론 정맥이나 이들의
하위 개념인 지맥 등의 분기점을 확실히 하였으며,
④그 결과로 당연히 각 산줄기의 구간의
길이도 확정했습니다.
⑤더불어 겹침 줄기 문제도 해소하였으며 정맥의
끝을 강과 바다가 만나는 합수점으로 가게끔 일원화하여 소위 '산자분수령'의 대원칙에 부합하다는 평가도 받게 되었습니다.
위 참고도 #4는 역시 선생의 신산경표에 나오는
산줄기를 토대로 선생께서 직접 제작한 개념도입니다.
지도 만드는 법을 공부하여 일일이 작도하여 선을
긋고 글씨를 썼음에도 아직 안경을 쓰지 않는 것을 보면 선천적으로 눈은 타고 나신 것 같습니다.
각설하고 이 신산경표 이전에도 여러 분들이
나름대로 산줄기를 그었습니다.
특히 자하 신경수 같은 이는 지맥의 하위
개념으로 500개가 넘는 단맥을 설정하여 실제 단맥을 답사 중에 있기도 합니다.
다만 자하 선생의 치적은 그의 작업이 아직
활자화 되지 않아 잘못하면 사장되지나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렇듯 꾸준히 산줄기 산행을 하시는 분들 중
2014년경부터 드디어 신산경표에서 설정한 162지맥을 졸업하는 꾼들이 배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졸업자는 매년 꾸준하게 배출되어 2018년 6월
현재 그 졸업자 수가 30여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숫자에는 이미 이전에 완주한 자하
신경수님이나 죽천 서영구 님은 포함되지 않은 숫자입니다.
이렇게 산줄기에 많은 관심을 갖고 답사를 하면서
나름 연구를 하는 꾼들이 많아지게 됨은 자연스럽습니다.
그 중 체계적인 이론을 가지고 산줄기를 분석하는
꾼이 관심을 끕니다.
바로 '산으로 박흥섭'이 제시한
'대한산경표'라는 이론인데 제 견해와도 일치하여 제가 지맥을 소개할 때나 진행할 때 이 대한산경표를 따르기도 합니다.
이론이 구구하지만 설명해 주는 사람도 없고 그
차이를 제대로 아는 분들도 흔치 않아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신산경표와 비교하여 잠깐 소개하기로 합니다.
기본적으로 신산경표와 대한산경표의 차이는
산경山經을 위주로 산줄기를 보느냐 아니면 산줄기에서 비롯된 물줄기 즉 수경水經을 위주로 산줄기를 보느냐에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확실히 하고 넘어갈 것은 이들은
나라로부터 공인 받은 게 아니기 때문에 뭐가 옳고 뭐가 그르다는 얘기는 논의의 본질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런 논의를 통하여 산줄기를 좀 더 폭넓게
사용하자는 취지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이런 글을 쓰기가 상당히 조심스러운 것이 필자는
물론 '산으로 빅흥섭'도 신산경표의 박성태 선생으로부터 산줄기를 배웠거나 영감을 얻었기 때문에 혹시나 선생께 누가 되지나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런 비교가 선생의 큰 업적을 계승 ·
발전시키는 일이라 확신하고 이는 선생께서도 바라는 것이라 생각하고 글을 진행합니다.
기술한 바와 같이 신산경표는 남한 정맥의 끝을
모두 합수점으로 돌리면서 그 결과 9정맥을 7정맥으로 단순화하였습니다.
선생의 신산경표 남한 7정맥에 대해서는 필자가
월간 산 2014년 5월호부터 12월호까지 7개월간 해설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7정맥화의 작업은 지극히 타당하고 유의미한
그것이라고 저는 적었습니다.
문제는 기맥과 지맥인데 신산경표는 일정한 요건에
근거하여 기맥과 지맥을 나누어 분류한 반면 대한산경표는 정맥 이하의 산줄기는 모두 지맥으로 단순화하였습니다.
즉 지맥을 도상거리 30km 이상의 산줄기로서
백두대간, 정맥, 지맥에서 분기한 산줄기로 다음 유형에 해당하는 산줄기라 규정합니다.
①첫째 유형으로 '합수점'형을
듭니다.
산줄기의 기본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위 참고도의 남강지맥이 이에
해당합니다.
즉 백두대간이 남덕유에 이르러 산줄기 하나를
가지칠 때 그 사이에서는 남강이 발원함은 지도상 명백합니다.
여기서 이 산줄기를 남강과 동일시 하느냐 아니면
별개로 보느냐의 차이점입니다.
신산경표는 산줄기와 물줄기를 무관한 것으로 보아
이 산줄기가 물을 만나 그 맥을 다 할 때까지 가장 길게 가는 방향으로 진행시킵니다.
그렇게 그으니 위 참고도의 진양기맥이 되었고 이
기맥은 남덕유 ~ 기백산 ~ 황매산 ~ 한우산 ~ 봉화대를 지나 진양호로 잠기는 도상거리 157.2km의 산줄기가 됩니다.
반면 대한산경표에서는 타이틀 이름 그대로
합수점으로 갑니다.
즉 백두대간과 이 지맥支脈 사이에서 발원하는
물줄기인 남강이 자신보다 상위등급의 강 즉 낙동강을 만나는 합수점에서 지맥支脈인 산줄기도 그 운명을 같이 한다는 것이죠.
참고도 #4을 봅니다.
이 남강은 자신보다 상위등급의 강인 낙동강과
만나는 합수점인 '마'의 곳에서 맥을 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지맥의 진행은 남덕유 ~ 기백산 ~
황매산을 지나 한우산에 이르러 좌틀하여 우봉산을 지나 위에서 말한대로 남강과 낙동강의 합수점으로 잠기게 되며 그 도상거리는 138.3km로
확정됩니다.
신산경표가 긴산줄기의 방향으로 행하여
157.2km의 산줄기가 된 반면 대한산경표의 산줄기는 두 물줄기의 힙수점으로 진행하여 138.3km의 산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름도
달라집니다.
신산경표에서는 그 줄기의 대표적인 산 이름,
혹은 지방. 특정한 지명에서 이름을 따오는데 이 경우 '진양호'라는 특정한 지명의 이름에서 차용하여 진양기맥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반면 물줄기를 중시하는 대한산경표에서는 당연히
물줄기의 이름을 차용하기 때문에 남강지맥이라 이름하게 된 것입니다.
고로 신산경표와 대한산경표가 진행 방향은 똑
같고 이름만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위 참고도의 신산경표의 연비지맥과
대한산경표의 임천지맥, 웅석지맥과 덕천지맥, 정수지맥과 양천지맥 그리고 수도지맥과 황강지맥 등이 그 예입니다.
②대한산경표의 지맥의 유형 중 두 번째 그것은
'울타리'형입니다.
일종의 제1유형인 '합수점'형의 보완형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위 참고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한우산에서
가지를 친 줄기가 양천과 남강이 만나는 합수점 방향으로 가는 경우입니다.
즉 한우산 ~ 집현산 ~ 청현 ~ 엄혜산으로
진행을 하여 양천 우측으로 잠기게 됩니다.
참고도 #6 가상해 본
양천동지맥
이럴 경우 원 줄기는 정수지맥 혹은 양천지맥
줄기이므로 이 줄기는 양천이라는 물줄기의 울타리 역할은 수행하고 있으므로 '양천동지맥'이라는 이름의 설정이 가능해 집니다.
그러나 가칭 '양천동지맥'의 경우 도상거리가 약
24.6km로 지맥枝脈의 요건인 30km가 채 되지 않으므로 울타리형 지맥 조건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 산줄기는 청현에서
우틀하는 게 아니라 계속
직진합니다.
그러고는 진양호를 만나서야 비로소 그 맥을
다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를 ③'산줄기'형으로
이름합니다.
신산경표의 기본 인식과 같이 하는
형type입니다.
이럴 경우 천황산 분기점 ~ 집현산 ~ 봉화대
~ 진양호로 이어지는 도상 거리 약 36.9km의 산줄기가 되니 '지맥枝脈'이라는 계급을 얻게 되고 이때 그 이름은 산경山經을 따랐으니 대표적인
산의 이름을 따 '집현지맥'이라 이름하게 됩니다.
이 삼각점은 경남 326호 삼각점으로
경상남도에서 설치한 것으로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 삼각점입니다.
04:35
이정표 하나를 지나고....
04:55
하도 밋밋하여 604.0봉은 언제 지났는지도
모르게 지납니다.
그러고는 다시 이정표를
봅니다.
좌측으로 심거마을에서 올라오는 길이
보입니다.
이른바 심거마을
삼거리이군요.
05:05
656.3봉도 어디가 봉우리인지 알기
어렵고.....
05:13
지도 #1의 '나'의 곳에서 암벽 구간을 지나며
드디어 조망이 터지기 시작합니다.
동부지리의 맹주 웅석봉1099.9m과
십자봉900.2m이 확인되는군요.
우측으로 왕선과 필봉산의 정상부는 구름에
가렸고.....
진행방향으로는 둔철산이
보입니다.
05:20
시루봉702.0m으로
오릅니다.
이 바위 전체의 모양이 떡 찌는 시루같이 생겨서
시루봉이라고요?
사실 이 봉을 시루봉이라고 부른다면 이는 최근에
누군가가 붙인 이름이지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이름은 아닐 것입니다.
시루는 고구려의 옛 말 '수리' 즉 '높다'는
뜻에서 수리/시리/시루 정도로 변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 시루봉에 올라 지리를
봅니다.
중앙 우측의 웅석봉과 그 좌측이 딸뜨기
능선.
웅석봉 좌측 아래 있는 마을이 운리이고 여기서
보이지는 않으나 가려진 봉우리 바양으로 내려오면 청계저수지와 탑동의 단속사지가 보일 것입니다.
단속사라!
불교의 선종과 교종의 만남을 보여주던
단속사!
휴정(1520~1604, 서산대사)이 삼가귀감을
저술하면서 유가의 글을 맨 뒤에 둔 것에 분개하여 젊은 혈기에 단속사에 불을 지르기도 했던 부사 성여신(1546~1632)의 분기탱천한 모습이
어른거립니다.
잠깐 단속사를 봅니다.
단속사의
단속斷俗은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다는 말일 게다.
금계사였던
원래 이름을 단속사로 바꾸면서까지 용맹정진하려는 수도승의 의지가 자못 결연해 보인다.
지금은
보물 72호와
73호로
지정된 동·서삼충석탑
두 기와 당간지주만이 예전의 화려했던 영욕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이
보물인 탑 두 기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탑동마을의 단속사로 들어가 볼까?
참고
사진 : 단속지의 동서 삼층석탑
1487년
9월의
남효온이나 1489년
4월의
김일손은 우리와 같이 산청에서 곧바로 웅석봉을 통하여 점촌을 지나 단속사로 온 게 아니라 당시는 단성현이어서 현내리란 이름으로 불렸을 단성면
소재지를 통하여 들어왔다.
웅석봉이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광제암문廣濟嵒門’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바위를 보고 이곳에 들었다 했다.
이
단속사의 창건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신라
경덕왕 7년(748년)
대내마
이순이 임금에게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어느 날 관직을 버리고 승려가 되어 단속사를 창건하고 그곳에 거처했다.”는
‘이순’설과,
삼국유사
신충괘관조에 의하면 763년
신충이 벗들과 함께 지리산에 들어가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짓고 죽을 때까지 왕의 복을 빌었다고 하는 ‘신충’설
등이 그것이다.
1489년
김일손의 두류기행록에 위하면 “신라의
유순(이순의
오기인 듯)이
녹봉을 사양하고 불가에 귀의해 이절을 창건하였다.”는
그 절의 승려의 말을 인용한 것을 보면 ‘이순’설이
맞는 것 같다.
참고
사진 : 단속사지의 정당매
이
단속사를 얘기하려면 매화나무 자세히는 정당매를 빼놓을 수 없다.
이
단속사에서 공부하던 조선 전기의 학자 강희안(1417~1464)의
조부 강회백이 이 절에서 공부를 할 때 손수 매화나무 한 그루를 심었는데 뒤에 급제하여 정당문학이라는 벼슬에까지 이르게 되자 이 매화나무가
‘정당매’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김일손의
‘정당매
시문후’에
이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단속사가 한국 불교사에서는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즉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를 통하여 선종이나 교종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던 사찰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8세기
초 신라 승려 신행(704~779)이
등장한다.
그는
당나라에서 북종선을 배워와 신라에 그 불법을 전했는데 그 최초의 사찰이 바로 이 단속사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선종을 볼까?
인도의
불교를 중국으로 가지고 온 달마대사가 세운 중국의 선종은 8세기
초 크게 북종선과 남종선으로 나뉜다.
북종선은
중국 선종 4대
조사 도신의 법맥을 계승한 선종 불교로서 당시 교종이 성행하던 신라사회에 불교사상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됐다.
신라
왕실이나 귀족사회와 깊게 연결이 되어 있는 이 단속사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는 위 신행과 그의 스승인 법랑에서 비롯되는
바,
이들의
활동은 김헌정의 ‘단속사
신행선사비’에
잘 나타나 있다.
도신이
입적하자 신행은 중국 선종 6조인
신수의 법손法孫
지공에게
사사師事해서
크게 깨달은 후,
759년
단속사에 머물면서 북종선을 전파하는데 노력했다.
하지만
교종과 선종을 아우른 북종선은 신라 중대왕실이 무너지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예전의
단속사의 규모는 “광제암문에서
짚신을 갈아 신고 절을 한 바퀴 돌고 나오면 다 헤졌다.”거나
“쌀뜨물이
10리
밖에서도 보였다.”는
말들로 알 수 있다.
김일손은
그가 이 단속사를 방문했을 때에는 절이 황폐화 되지 시작하여 승려가 거처하지 않는 방이 수백 칸이었다고 그리고 있다.
그런
절이 억불숭유 정책과 사찰에 대한 과도한 노역과 세금으로 쇠락하다가 1568년
이 절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특히
성여신)
불상을
훼손하고 경판을 불태운 사건이 있은 후 그 속도가 더해지다 1598년
정유재란 때 완전히 소실되어 현재의 터만 남아 있다
-졸고 '현오와 걷는 지리산 둘레길' 초고 중에서 발췌
가운데 줄이 덕천지맥의 흐름 그리고 그 뒷줄이
동부능선이며 맨 뒷줄이 황금능선이군요.
저 황금능선은 언제 가보나?
겨울에나 갈 수 있으려나?
물줄기가 보이는군요.
적벽산166.3m 뒤로 남강이 진양호로
흘러들어가는 모습입니다.
저 진양호가 재미 있는
곳이죠?
이 남강의 물은 저 진양호에서 왼쪽으로 꺾어
진주시를 관통하여 촉석루를 지난 다음 서진하여 의령과 창녕 그리고 함안이 만나는 곳에서 낙동강을 만나게 됩니다.
남강은 낙남정맥에 막혀 서진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런데 진주 곤명 쪽에서 보면 지리산과
덕유산에서 내려오는 이 물이 너무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수로를 만들어 남강의 물을 받아
쓰기로 합니다.
즉 낙남정맥의 산줄기 하나를 뚫기로
합니다.
수로를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내동면 유수리의 가호마을을 흐르는 조그만
실개천이었던 가화천이 진양호의 물을 사천만 쪽으로 흘려보내는 방수천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부득이 낙남정맥을 진행하는 산꾼들은
행정구역상 진주시 내동면 유수리의 유수교를 통하여 물을 건너게 됩니다.
참고도 #7
개념도를 봅니다.
집현지맥은 이미 얘기했던
것입니다.
신산경표에서는 이를 전체로 진양기맥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죠?
덕천강과 그보다 상위 개념의 물줄기인 남강의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는 덕천지맥은 신산경표에서는 웅석지맥이라 부르는 지맥입니다.
그리고 낙남정맥을 유수교라는 다리를 통하여
건너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개념도 만으로도 사진의 집현지맥이
맥을 다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05:29
시루봉702m에 오릅니다.
중앙으로는 집현지맥이 마지막 용솟음을
치는군요.
앞에서 두 번째 줄이 덕천지맥이며 중앙에 가장
높은 봉이 석대산535.9m.
왕산과 필봉산은 아직도 구름 속에
있고....
진행 방향으로 둔철산입니다.
무슨 바위인고?
이건 또 뭐?
지도 #2
05:58
심거마을로 빠지는 삼거리를
지나,
05:59
지도 #2의 '나'의 곳에
오릅니다.
둔철산 정상석이 서 있군요.
국토지리정보원 지도는 물론 김형수555,
영진지도 등 어느 지도에도 여기가 둔철산이라고 표기된 지도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아닌 교육기관의 교직원들이 이렇게
무책임하게 아무 데나 정상석을 세우다니.....
이러시면 안 되죠!!!
그러거나 말거나 의리의 사나이 이한검
대장님과,
제가 포즈를 취해 봅니다.
인물 사진이 없는 저로서는 실로 오랜만에 찍는
사진입니다.
06:06
심거 폭포로 내려가는 삼거리를
지나,
06:10
오리지널 둔철산입니다.
2등급삼각점(산청24)도
확인합니다.
순식간에 안개 구름이
덮칩니다.
조망은 꽝.
동부지리를 바라보지만 나오느니
한숨뿐입니다.
지금까지 보고 올라온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인가!
06:24
헬기장을 지나,
06:31
지도 #2의 '다'의 곳에서 양천(정수)지맥을
만납니다.
양천지맥은 참고도 #6에서 이미
봤죠?
남강지맥(신산경표에서는
진양기맥)에서 금원산 ~ 기백산을 지나 소흘산761mm에서 0.8km를 더 진행하면 우측으로 가지치는 줄기를 만납니다.
이 줄기는 비득재 ~ 정수산 ~
둔철봉 ~ 적벽산을 지나 양천과 남강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 34.7km의 지맥이 됩니다.
위에서 열거한 3가지 지맥의
유형 중 제1유형인 '함수점'형에 해당하는 줄기인 것이죠.
좌측 소로가 척지리에서 올라오는 지맥 길로
우리도 그 길로 바로 내려가도 되지만 이 둔철산의 명물인 와석총을 그냥 놓칠 수는 없는 노릇!
우측 길을 따라 와석총을 보고 오기로
합니다.
그 길은 곧 신등면과 신안면의 면계이기도
합니다.
지맥 길을 걷습니다.
'산으로' 님이 마중
나오셨군요.
반갑습니다.
06:43
그런데 와석총 가는 도중 척지리로 바로 내려갈
수 있는 샛길을 만납니다.
사실 척지리로 가는 길은 조금 전 봤던 지맥
3거리만 있는 걸로 알고 지맥 3거리 ~ 와석총 구간의 왕복 약 1.8km는 부담으로 남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내려갈 수 있는 샛길이
있다니......
선답자들의 산행기에서 못 봤던 내용이기에 상당히
의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삼거리에서 20여 m 진행하면
표지띠가 어지러이 날리고 우측 숲 안으로 길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바위봉 구간을 우회하는 길이려니 생각하고
직진합니다.
조금 고도를 높입니다.
역시 로프가 있는 바위 구간이
나오는군요.
둔철산을 바라보고,
우측 양천지맥의 흐름도
봅니다.
정수산도 구름에
덮였고......
06:51
와석총 삼거리입니다.
직진하는 길은
양천지맥길이고....
우틀합니다.
06:54
200여 m 안으로
들어가니.....
좀 더 확실하게 보기 위하여 위로 올라가
봅니다.
06:57
와석총이 있는 761.7봉 정상은 묘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틀하여 와석총을 정상부로
갑니다.
음......
매끄러운 돌.....
총塚;이라기 보다는 바위가 깨진 너덜의
모양이었습니다.
암괴류巖塊類 block stream 즉
돌강이라고 부르는 돌무더기입니다.
땅속에 있던 바위 즉 화강암이 기계적,
화학적 풍화작용에 의하여 그 표피가 벗겨져 지표에 모습을 드러냈고 그것이 지표로 올라오는 과정에서 암석을 누르던 거대한 압력이 팽창하면서
규칙적인 절리가 발생하게 되고 그러면서 일정한 모양으로 바위가 깨진다고 하는군요.
그것이 오랜 5,000만 년이라는 긴 시간을
지나면서 벽돌 모양이던 수 많은 암석들이 풍화와 침식 등으로 모서리가 깎이고 마모되어 둥근형태의 암석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이겠고....
이런 과정을 지중풍화地中風化 혹은
심층풍화深層風化라고 한다는군요.
좋은 거 배웠습니다.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충분히 답사할 가치가있는
곳입니다.
주변은 아무 곳도 볼 수
없고....
07:03
다시 돌아 나갑니다.
나갈 때는 아까 그 우횟길로
나갑니다.
예상했던 대로 그 바위봉 구간을 우회하는
길이었습니다.
07:07
그 삼거리의 정경입니다.
존경하는 배창랑 선생님.
무수히도 많은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분이죠.
07:18
척지리 삼거리에서 10분 정도 쉬다가 다시 길을
나섭니다.
우틀합니다.
지맥길은 산청읍과 신등면의 면계를 따르겠지만
지맥길을 벗어난 고로 일단 신등면 안으로 들어갑니다.
계곡을 두어 번 왔다갔다 하면 완전한 임도로
들어섭니다.
07:45
척지리 민가를 만납니다.
정수산 방향을 보면서 들머리를
잡습니다.
올라가는 들머리는 우측이나 좌측 다 정수산
방향으로 올라가고 있으니......
어떻게 한다?
제가 그려온 트랙은 좌측 척지교회로 올라가는
루트이긴한데....
동네 분들에게 물어보기로
합니다.
사진 좌측이 정수산 가운데 푹 꺼진 곳이
도성고개.
그리고 우측이
719.7봉입니다.
조금 이따 만날 곳들입니다.
돌아서서 내려온 길을
봅니다.
중앙이 와석총 가는 안부로 우리가 내려온
곳.
우측이 둔철산 자락.
둔철산 안내지도를
보고....
08:03
척지소류지를 지나 척지 경로당
앞입니다.
마침 할머니 한 분이
보이는군요.
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묻자 우측으로 안내를
하여주시는군요.
그러면 척지교회 루트를 포기하고 우측으로 진행을
하여 새신바위 방향으로.....
재미 있는 것은 동네 한가운데에서 산청읍과
신등면이 갈린다는 것입니다.
소류지 좌측은 산청읍 사람, 우측은 신등면
사람.....
이 안으로 들어가랍니다.
08:10
여기서는 길 좋은 곳을 따르지 말고 우측의
소로를 따라 올라가야 했었는데.....
그냥 이바구 떨며 진행하다 보니 무덤 앞에서
길이 막힙니다.
다시 되돌아 나가도
되지만.....
어차피 날등은 어디로 가든 약 200여 m만
치고 올라가면 되므로 바로 4륜구동으로 기어를 변속합니다.
잡목이 성가시긴 하지만 대강 오르다 보면 길이
나오기 마련!
08:45
사랑하는 '백두사랑산악회'의 표지띠가
맞아주는군요.
오늘 저에게 그렇게도 '서시(견두) 지맥'을
함께 하자고 졸랐건만.....
"이대장님 미안합니다. 마루도,
한회장님도...."
대원들 모두에게 죄송한 마음
뿐...."
어쨌든 이 부근에서 산청읍과 신등면의 면계를
따릅니다.
08:53
선생님을 뵙습니다.
며칠 전 맨발사부님과는 연락을 나눴건만 정작
선생님께는 문안 인사도 못 드리고.....
항상 강건하십시오.
우선 표지석과,
4등급 삼각점(산청424)을
확인하고......
바람이 시원한 바위쪽으로 나가 좀 쉬었다 가기로
합니다.
신등면의 율현리 방향을
봅니다.
바로 앞이 590.2봉인데 저 바위봉을
새신바위라고 특히 부릅니다.
저 새신바위는 좌측에 있는 율곡사와 연결지어
생각을 하여야 하고....
즉 율곡사에서 그림을 그리던 새가 날아와서 앉은
곳이 저 새신바위라나 뭐라나......
모든 유래가 그러하듯 창작하려 했으면 정도껏
하셔야지.....
좌측으로 보암산723.8 암봉이 멋지게 눈에
들어오고....
남강과 양천의 흐름도
봅니다.
집현지맥.....
중앙 우측이 조금 전 다녀온 와석총의
761.7봉.
집현산.
40분 정도 머물다 자리를
뜹니다.
09:46
10분 정도 내려오면 바로 도성고개가
나오는군요.
참고로 이 도성고개는 우측에 있는 도성사는
암자에 착안하여 제가 임의로 붙인 이름입니다.
한북정맥의 도성고개도 생각이
나서리.....
부드러운 능선은
계속되고.....
조금 비알을 극복하면,
지도 #3
10:06
얌전한 정상석이 있는 지도 #2의
841.3봉입니다.
정성스럽게 이 정상석을 지고 오셔서 이름을
남겨주셨지만 나라의 지도는 이곳을 그저 841.3봉으로만 표기하여 놓았으니.....
혼란만 가중된 꼴!
하지만 이 부근에서는 이 봉우리가 최고봉이니
무조건 탓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군요.
재미있는 것은 산청군에서도 이 봉우리가 정수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수산을 가려면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따라
오랍니다.
10:11
그러니 5분 더 북진하여 만나는
곳.
즉 지도 #3의 '라'의 곳이 이 산청군에서
얘기하는 정수산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곳의 해발 고도는 829m가
아닙니다.
이 부근의 해발 829m라는 숫자를 가지고 있는
봉우리는 두 곳 더 있습니다.
829.8봉과 삼각점이 있는
829.1봉.
그렇다면 생각건대 이 정상석은 그 둘 중의 한
곳에 세워야 했던 것인데 조금 이따 확인할 수 있듯이 거기는 일반 등로가 아니고 지맥꾼들만 가는 곳!
그러다 보니 곡괭이라든가 삽 등 최소한의 장비가
있어야 정상석을 설치할 수 있는 그런 곳입니다.
그러니 가지고 온 걸 버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
묘자리가 있어서 평평한 이곳에 세우고 간 것
같습니다.
관심 없는 이정표 설치업자와 산림과 공무원은
삼거리이기도 한 이 교통의 요지에 이정표를 부착하고는 '정수산'으로 못박아 버렸습니다.
좌측으로 내려가는 내수마을 길을 버리고 우측의
좁은 길로 들어섭니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 상의
정수산.
우측으로 구름이 살쩍 덮힌 곳이
황매산1113.1m.
얼마전 KBS1 '숨터'라는 프로그램에 나왔던
곳이기도 하고...
너무 아름다운
영상이었습니다.
상여봉 가는 길....
10:33
지도 #3의 '마'의 내수마을
삼거리입니다.
직진합니다.
구름이 좀 걷힌 황매산.
잡목의 저항이 심합니다.
목을 올리고 목과 안면을
가립니다.
10:45
국토지리정보원 지도 상의
정수산입니다.
산청읍, 신등면, 차황면 등 삼개면이 갈리는
곳인 이른바 삼면봉입니다.
지리정보원에서는 이곳이 삼면봉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이곳을 정수산이라고 못박은 건가요?
참고도 #7
광복 이전에 발간된 일제시대의 지도를 보면 지금
이 삼거리봉을 828.5m의 정수산으로 표기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봉을 정수산으로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좌틀하여 산청읍과 차황면의 면계를
따릅니다.
10:53
829.1봉에서 꼭꼭 숨은
3등급삼각점(산청306)을 찾습니다.
숲과 풀에 가려 있어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산복숭아가 무척이나 많군요.
술을 담그면 좋다나요?
이대장님 작업을 시작합니다.
저도 거들고....'
두 봉지 따서 가방에 넣는데 아무래도 부족할 거
같아 한 봉지 더....
그러다 보니 철수리 방향으로 가고
있군요.
황급히 되돌아 나와 다시 지맥길을
따릅니다.
황매산.
지맥길이 확실하게
보이는군요.
좌측 능선을 따라야겠죠.
11:20
다시 지도 #3의 '바'의 곳으로 되돌아
옵니다.
10분 정도 알바했습니다.
여름에 지맥을 진행할 때에는 한시라도 한눈을 팔
수 없습니다.
한번 잘 못들면 대형 알바로 이어지기 일쑤이기
때문이죠.
길 자체도 힘들고.....
사람 다닌 흔적이 없는 곳들이라 거기가 거기
같아서리....
11:21
그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선생님의 산패를
봅니다.
지도 #4
이제부터 지맥 마루금은 날등이 아닌 펑퍼짐한
곳으로 내려가기 때문에 올바른 루트를 잃기 십상입니다.
능선의 흐름을 잘 읽고 진행하여야
합니다.
12:15
593.6봉도 주의를 요하는
곳입니다.
능선의 흐름을 읽고 사면을
탑니다.
12:21
반갑게 임도를 만나지만 우리와는 무관한
길.
계속 잡목을 치고
내려갑니다.
이런 잡목길.
사실 이런 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선답자의 글에도 별다른 얘기가 없어 그런가 보다
합니다.
12:30
정글도라도 가져왔으면
좋았으련만......
바닥의 길도 안
보이고....
그저 쑤시고 지나갈
수밖에.....
덥고 습기는 올라오고 팔과 얼굴로 가시와
나뭇가지가 찔러대며 종아리는 감각이 없어지니다.
12:38
경험칙에 따르면 이런 곳에서는 이 표지띠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다들 자신이 없기 때문이죠.
혹시나 내가 가고 있는 길보다 더 좋은 길이
있거나 그 더 좋은 길이 올바른 지맥길일 경우 표지띠를 붙인 그 사람이 심정은....
그래서 아예 안 붙이고 진행을 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인간 네비게이션 산으로님은 확실하게 한
수를 둡니다.
잠시 한숨을 돌리고 뒤를
봅니다.
다시 숲 아니 정글속으로 들어가 한참을 후빈
끝에,
12:55
임도를 만나고,
그러고는 그 임도가 이어지는
비득재입니다.
남강지맥(진양기맥).
593.6봉에서 이어지는
능선.
비득재에서 올라가는 길이 마땅치
않습니다.
서성거리다 그냥 치고 올라가기로
합니다.
13:08
지도 #4의 '사'의 곳인 지맥
갈림길입니다.
산으로님에게 이곳 사정을 카톡 사진 한 장과
함께 날렸더니 답장이 오는군요.
"양천지맥에서 달임재~비득재 구간이 길도 없는
가시밭으로 최악의 코스였습니다."
그렇겠죠.
"우리도 뺑이치고
있습니다."
13:16
489.8봉에서 4등급 삼각점(산청 415)을
확인하고....
숲속에서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는 간벌지를
지납니다.
정수산을 보고.....
13:24
최신형 멧선생 목욕탕을
지납니다.
얼마나 비벼댔는지 껍데기가 다
까졌습니다.
13:41
이런 길은 무척 양호한 길.
숨을 돌립니다.
양호한 길.
13:58
죽을 힘을 다 해 썩은 나무를 잡고 상여봉에
오릅니다.
멀리 웅석봉을 보고....
593.6봉 라인.
중앙으로 우측이 석대산.
우측이 웅석봉에서 내려오는
덕천지맥.
좌측은 오전에 올랐던
둔철산.
동부 지리의 모습.
금방 웅석봉은 구름에
가렸고...
그 우측으로 기산과 그 뒤의
왕등재봉.
가은데가 산청.
우측이 왕산과 필봉
능선....
중앙이 고동재.
얼마나 덩굴과 가시나무에 시달렸으면 이
상여봉에서 교암轎巖이라는 각자도 확인하지 못했군요.
'높은산'님이 광인선배 등과 함께 겨울에
진행하며 찍은 사진입니다.
이때는 겨울이라
그나마....
이 산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쌍교봉이었습니다.
참고도 #8
그런데 그 이름이 상여봉이
되다니.....
저는 쌍교하면 삼국지가
떠오릅니다.
공명이 오나라를 설득하여 조조에 맞서려 할 때
그는 교묘하게 주유의 질투심을 자극했었죠?
바로 조조가 지은 시에 나오는 '동작대'와
'쌍교'라는 시어인데 여기서 쌍교를 대교와 소교 즉 손권의 처와 주유의 처를 조조가 취하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을 한 것이죠.
결국 결과적으로 적벽대전 된 전투에 주유를
참여케 했고....
여기서는 모르긴 몰라도 가마轎에 바위巖을 썼으니
두 개의 암봉이 가마와 같이 생겼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그런 쌍교봉이 왜 좀 칙칙한 '상여'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25분 정도 쉬다가
내려옵니다.
칠점사 한 마리를
보고....
거의 70cm는 충분히 넘는
놈이던데.....
이제부터 죽음의 시작입니다.
길은 없습니다.
오로지 가시나무와
덩굴나무......
어른 키만한 높이기 때문에 발로 밟고 갈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기어갈 수도 없는
노릇!
금북기맥을 하고 오랜만에 만나는
정글.
좁은 날등에 있는 이 정글은 너비 약 100m
정도에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들어서면 탈출도
불가능합니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進退兩難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주로 이대장님이 헤쳐나가고 저는 방향이 틀어졌을
때만 바로 잡으면서 나아갑니다.
진행 속도는 아마 시속 600m는
되려나?
그게 문제가 아니고 체력 소모
속도입니다.
그래도 쉴 때마다 계속 먹어주고 오전에 서늘한
기온 덕에 물이 많이 남아 있던 것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2km정도 갔나?
와룡산까지 600m정도 남았으니 거기까지만 가면
산불 난 지역을 통과하기 때문에 좀 나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목적 산행이기도 하고 거기를
가야할 당위성이 있더라도 이건 아닙니다.
좌측으로 소나무가 나옵니다.
소나무가 있으면 다른 잡목들도 있다는
얘기.
15:18
499.8봉을 넘으면서 지도를 보니 300여 m
떨어진 곳에 임도가 보입니다.
무조건 치고 내려오니 사람 다닌 길이 희미하게
보이고 이내 개짖는 소리가 들리며 임도입니다.
16:09
산청읍 무리의
내부마을입니다.
내려와 몸을 씨고 옷을 갈아입으니 후회가
되는군요.
그냥 갈 것을 .....
그냥 가서 꽃봉산을 밟고 올
것을....
충분히 갈 수 있었는데 괜히 이한검 대장님께
미안하기도 해서.....
사당역에 내리니 부근에 봉회장님과 인회장님
그리고 백총무님이 관악산에서 암벽훈련을 마치고 막 파하려 하신다는....
첫댓글 더운 여름 지맥길 고생많으셨슴다...거리도 만만치않고~
힘내셔요 응원 합니다 ^^^ ***
지맥을 진행하기 어려운 계절에 고생하셨네요~~저는 상여봉과 와룡산은 지나지 않은 듯하고요~~
고생 하셨네요...
현오님 산행기는 그 하나 하나가 하나의 책으로 내도 무방하리만큼 깊은 지식을 바탕으로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네요.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