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 하린 (시인)
26. 상상 테마25 - 사물의 기분을 바탕으로 상상하며 시 쓰기
@ 소재나 모티브가 갖는 특징과 상상 적용 방법
서정시는 원래 처음부터 화자나 시적 대상의 기분을 시로 나타내는 문학 장르이다. 간절한 심리 상태, 교묘하고 오묘한 심리 상태, 그 존재만이 느끼는 개별화된 심리 상태를 객관적 상관물을 끌어와 표현하는 양식이다. 그럴 때 객관적 상관물은 대부분 사물이다. 이 사물들은 그 자체로 이미지를 많이 포함하고 있어서 활용하기만 하면 구체적이고 매력적인 형상화에 도움을 준다. 그런 사물들만이 가진 기분에 대해 상상해 보자. 조건은 사람들이 이미 익숙하게 인식하는 사물들의 속성에 따른 기분이 아니라 그 대상만이 느낄 수 있는 기분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 먹구름의 기분, 마스크의 기분, 배터리의 기분, 안쪽의 기분, 왼쪽의 기분, 창문의 기분, 우물의 기분, 배를 삼킨 바다의 기분, 옹이의 기분, 뿌리의 기분, 일기예보의 기분, 인형의 기분, 소품의 기분, 바닥의 기분, 겨울꽃의 기분 등처럼 뭔가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사물의 기분에 대해 상상해 보면 나만의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긴다.
‘기분’은 지극히 주체적인 존재로 사물을 격상시켜 준다. 일반화된 관념이나 정의만을 껴안고 살아가는 사물을 주체성과 개별성을 가진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방치된 ‘마네킹’이 있을 때 그것을 관찰자 입장에서만 다루면 객관적 시선이 지배적이게 되지만, ‘마네킹의 기분’이라고 제목을 붙이고 마네킹 입장에서 밀착하게 되면 주체적 발화를 서슴없이 하게 되는 것이다.
비유적 방법으로 화자나 시적 대상이 갖는 심리 상태를 A라는 사물이 갖는 기분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도 좋다. 예를 들어 철저히 고독을 맛보는 C가 있다면 그의 존재성을 ‘피뢰침’이라는 사물을 끌어와 비유할 수 있다. 그럴 경우 ‘피뢰침의 기분’은 ‘C의 기분’을 암시하게 된다.
필자의 시를 통해 그 소재가 어떻게 상상과 만나 펼쳐지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자.
딸기 우유의 기분 / 하린
나는 딸기를 오해하고 어머니는 우유를 이해한다 처음부터 섞이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아이와 어른이 섞여서 어른아이가 되거나 아이어른이 되는 일만큼 자연스러우면서도 불완전한 상태인 게 없다
그 많던 씨들의 가능성은 어디로 갔나요 어머니, ‘진짜딸기우유’ 속에는 딸기의 심장과 맥박과 숨소리가 있을 것만 같은데 진짜란 무엇을 위한 기억인가요
유통기한이 지나도 싱싱함을 보장하는 건 냉장고의 배려 혹은 음모 어머니는 알츠하이머의 원산지를 걱정했어야 했다 먹지도 버리지도 않고 쌓아놓은 딸기 우유를 내게 내미는 습관 한 모금 한 모금 마실 때마다 딸기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순하고 연한 빨강이 으깨지는 상상만 떠오르는데,
우유 속에서 딸기가 걸어 나와야 니 애비 속에서 여자가 걸어 나와야
온갖 편린들이 섞여 어머니의 지금을 증명했다 아, 아버지 닮은 나를 누군가 마시고 있다는 느낌 붉은 립스틱을 칠하던 어머니를 지금도 저녁이 외면한다는 느낌 ― 《시인수첩》 2020년 가을호
1단계 - 스스로 점검하기 – 메시지를 분명히 하기+내 시만의 장점 찾기
「딸기 우유의 기분」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어머니의 존재성을 표현하기 위해 쓰인 시다. 병원에 입원한 어머니는 ‘어른아이’ 아니면 ‘아이어른’이 된 불안정한 상태에서 본능적이고 무의식적인 행동을 한다. 유통기한이 지난 딸기 우유를 “먹지도 버리지도 않고” 보관하다가 화자인 자식이 갈 때마다 내민다. 무슨 의미일까? 자식에 대한 사랑일까? 한 가지만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우유 속에서 딸기가 걸어 나와야/ 니 애비 속에서 여자가 걸어 나와야”라는 대사를 통해, 지금도 “붉은 립스틱을” 칠하는 어머니를 통해 어머니가 가진 이중성을 나타낸다. 비윤리적인 행동을 한 아버지를 미워하면서 저녁마다 선택받고 싶은 심리 상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을 지켜보는 딸기 우유의 기분은 어떨까? ‘진짜딸기우유’라고 써진 포장지의 ‘진짜’는 어머니의 본질적인 심리 상태를 암시한다. 따라서 이 시의 장점은 딸기 우유가 가진 요소를 통해 어머니의 심리 상태를 자연스럽게, 교묘하게 암시한 것이다.
2단계 - 객관적 상관물(현상)을 찾기+ 관찰과 조사 정밀하게 하기
이 시의 객관적 상관물은 딸기 우유다. 딸기 우유는 딸기와 우유가 합쳐진 상태의 음료다. 처음부터 이중성을 띤 딸기 우유를 통해 필자는 어머니가 가진 이중적인 심리를 암시하려고 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어머니는 아버지의 여자를 미워하면서도 여전히 아버지에게 선택받고 싶어 하는 심리를 가지고 있다. 그런 이중적인 심리 상태를 반영하고 있는데, 먹지도 버리지도 않은 상태로 만든 것도 의도성을 띤다. 과거의 상처를 삼키거나 버려서 없애야 하는데, 어머니는 그것을 놔뒀다가 자식인 ‘나’에게 계속해서 건넨다. 못된 아버지를 잊지 말라는 뜻인 것만 같다. 그래서 “아버지 닮은 나를 누군 마시고 있다는 느낌”이 찾아오게 된 것이다.
3단계 - 확장하기 – 상상적 체험을 섬세하게 극적으로 하기
필자의 어머니는 다른 병으로 병원에 입원한 적은 있지만 알츠하이머로 입원한 적은 없다. 그런데 치매에 대한 시는 꼭 한 편 쓰고 싶었다. 나만의 방식으로 어떻게 하면 치매를 신선하게 형상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했다. 그래서 치매가 심한 어머니를 둔 화자 입장에서 상상적 체험을 하기로 했다. 상상적 체험을 할 때 치매에 걸렸지만 어머니가 반복적으로 잊지 못하는 것을 무엇으로 할까 하는 또 다른 고민도 했다. 그래서 비윤리적인 아버지가 탄생했고 그 아버지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이중적인 시선이 탄생했다. 이렇게 필자는 실제 경험과 다른 상상적 체험을 통해 치매에 걸린 사람의 존재성을 내밀하게 표현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 또 다른 예문
기분 상점 / 임지은
창문을 여는데 죽은 새를 만져 본 것 같았다 이건 누구의 기분이지? 나는 기분을 사러 갔던 최초의 기분을 생각했다 사방이 유리인 가게에서 나는 갓 태어난 아이의 기분을 샀다 연애편지를 쓰고 있는 사람의 기분을 샀다 정확한 기분을 느끼고 싶었지만 기분은 언제나 다른 기분과 조금씩 섞여 있었다 안개 + 레몬 = 깜짝 선물에 대한 기분 냉장고 + 인형 + 시체 = 심야 택시를 기다리는 기분 미용실 + 아스파라거스 + 돌 + 향신료 =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다 읽은 기분 어떤 기분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고 들었다 나는 자주 그런 기분에 휩싸였다 그럴 땐 서랍을 열어 달리고 있는 개의 기분을 삼켰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개의 기분은 근육으로 만들어졌다 주인으로부터 출발했다 자꾸 밖에 나가자고 졸랐다 불안과 볼링 핀이 쓰러지기 전에 집을 나왔다 도로 한복판에서 비둘기가 움직이지 않았다 죽음을 수행하려는 걸까? 나는 손끝이 베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엄지손가락을 빨자 비릿하게 피 맛이 났다 기분일 뿐이었는데 단지 기분일 뿐이었는데
어떤 기분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고 들었다 나는 자주 그런 기분에 휩싸였다 -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0년 6월호
어쩌다, 기분 / 정운희
방아쇠를 당겨 머리통을 날려버리는 상상을 한다 어쩌다 기분으로
총구를 머리에 대면 긴장하는 것은 머릿속일까 방아쇠에 얹은 나의 엄지손가락일까
서로를 벗어나 마주한다 사과는 시들고 수염이 자라는 동안 우린 서로 묵인하에 즐겼을지도 몰라 새장의 새가 탈색되는 줄도 모르고
허공에도 빨간 신호등이 있어 감나무에 감이 열린다면 누군가는 아이들을 목놓아 부르고 또 다른 누군가는 돌아오겠지 나는 총을 아끼다가 비틀어 새로 되돌려놓았다
새가 총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면 아이들을 불러 모으고 피자를 굽겠네 총을 바삭하게 구워 뇌부터 씹어 먹겠네
방아쇠를 당기면 어쩌다 기분이 되어 - 《시로 여는 세상》 2017년 여름호
사과의 감정 / 이윤정
풋` 이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면 흔들리는 것쯤 견뎌야하지 처음 듣는 단어들은 싱그럽고 처음 느끼는 감정은 두근대고 우리의 거리는 점점 넓어져가지 누군가를 향해 눈을 찡긋하게 만드는 건 풋`을 견딘 후에 온다는 걸 알았지 한 무리 새들이 밤하늘을 날아갔어 떫은맛에서 시작된 오해는 얼마나 기다려야 달콤해지는 걸까 시큼한 생각을 버려야 빨갛게 익어간다는 건 알고 있었어 무심코 던진 말에는 덜 익은 시간이 들어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지 당신이 보낸 편지를 읽으며 감정을 정리해 보았어 사과의 물음에 답하지 못한 감정은 여전히 달콤하지 않아 사람들은 왜 한 번도 사과나무에게 사과를 하지 않는 걸까 어젯밤 너는 잘 익힌 사과를 보냈지만 네가 내민 사과는 여전히 거짓말 너는 밤새 빨간색으로 덧칠을 했는지 깊숙이 남아있는 ‘풋’ 내게는 왜 초록으로 보이는 걸까 한 입 가득 깨문 사과의 형식은 여전히 시고 떫다 - 《시인광장》 2019년 4월호
- 출처 :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더푸른, 2021.09)
* 하린 시인 약력 1971년 전남 영광 출생.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 학위. 1998년 〈광주매일〉신춘문예 시 당선, 2008년 《시인세계》 등단.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 『1초 동안의 긴 고백』. 연구서 『정진규 산문시 연구』 시 창작 안내서 『시클』 시 창작 제안서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이것만 알면 당신도 현대 시조를 쓸 수 있다』 청마문학상(2011), 송수권시문학상(2015), 한국해양문학상(2016),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2020) 수상. 현재 중앙대 문화예술대학원 전문가과정 시 창작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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