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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불인(無書不印)
인쇄되지 않은 책이 없다는 뜻으로, 세종 때 금속활자 주조에 대한 뜻을 밝힌 변계량은 경자자를 주조한 결과 인쇄하지 못 하는 책이 없고,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 없어질 것이라 했다.
無 : 없을 무(灬/8)
書 : 글 서(曰/6)
不 : 아닐 불(一/3)
印 : 도장 인(卩/4)
恭惟我恭定大王作之於前, 今我主上殿下, 述之於後, 而條理之密, 又有加焉者.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공정대왕(恭定大王·태종)께서 이전에 활자를 만드셨는데 지금 우리 주상 전하(세종)께서 뒤를 이어 더욱 치밀하게 조사하셨다.
由是而無書不印, 無人不學, 文敎之興當日進, 而世道之隆當益盛矣.
이로 말미암아 인쇄되지 않은 책이 없고,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 없어질 것이니, 문교(文敎)가 날로 진작되고 세도(世道)가 갈수록 마땅히 융성해질 것이다.
視彼漢唐人主, 規規於財理兵革, 不啻霄壞矣, 實我朝鮮萬世無疆之福也.
재정과 국방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을 국가의 급선무로 삼았던 한나라와 당나라 임금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이니, 실로 우리 조선에 무한한 복이 될 것이다.
위 문장은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이 쓴 ‘주자발(鑄字跋)’로, ‘동문선(東文選)’ 권103에 있다. 금속활자를 만든 뜻에 대해 변계량이 간략히 썼다. 그의 문집 ‘춘정집(春亭集)’에는 ‘대학연의주자발(大學衍義鑄字跋)’로 돼 있다.
조선이 개국하기 전인 1392년 1월 서적원(書籍院)이 설치돼 활자 주조와 서적 인쇄를 맡았다. 태종이 1403년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해 금속활자 계미자(癸未字)를 주조하고 서적을 간행했다. 세종이 1420년에 계미자의 단점을 보완해 경자자(庚子字)를 만들었다.
위 문장의 앞 문장에는 세종이 경자자를 주조한 이야기가 나온다. 변계량은 경자자를 주조한 결과 인쇄하지 못 하는 책이 없고,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 없어질 것이므로 문교가 날로 진작되고 세도가 갈수록 융성해질 것이라 했다.
그럼으로써 세종 대에 그 많은 책이 나왔다. 조선이 문헌의 나라로 일컬어지게 된 것은 금속활자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종과 금속활자
활자 개량 통해 책 대량생산 시대 활짝
책에 몰입했던 세종은 단순히 책을 좋아하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군주였다. 서적에 관한 정책을 세우고 집행할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군주의 권력을 이용해 책을 생산했다. 왕위에 오른 뒤 그가 처음 했던 일은 금속활자의 개량이었다.
신하들 '어렵다'고 해도 거듭 개량 명령
태종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진 계미자로 책을 찍어내기는 했지만 계미자는 몇 가지 약점이 있었다. 활자 모양이 그리 아름답지 않았고, 활자 크기도 들쑥날쑥했다. 무엇보다 큰 약점은 느린 인쇄 속도였다. 조선시대의 활자 인쇄는 조판틀에 활자를 배열한 뒤 활자판에 먹을 바르고 종이를 뒤집어 찍어내는 과정으로 이뤄졌다. 한데 활자를 배열하는 기술에 문제가 있었다.
구리로 만든 조판틀에 활자를 배열하고 인쇄할 때 활자가 움직이면 인쇄가 어려워진다. 따라서 활자가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방법이 필요한데 계미자의 경우 그렇지가 못했다. 계미자는 밀랍을 녹여 붓고 거기에 활자를 심어 고정시켰던 것이다.
밀랍은 간단히 말해 양초 성분 물질이라 생각하면 된다. 녹이기는 쉽지만, 무르고 열에 약하다. 밀랍에 의해 고정된 활자는 쉽게 흔들린다. 인쇄를 몇 장 하고 나면 활자가 삐뚤삐뚤해진다. 다시 고정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 같은 밀랍 고정방식 때문에 계미자로는 하루에 10장도 인쇄할 수가 없었다. 목판인쇄보다 나을 것이 전혀 없었다.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고려가 강화도로 피난했을 때 금속활자로 '고금상정예문(古今詳定禮文)'을 인쇄한 이후 밀랍 고정방식은 한 번도 개량된 적이 없었단 말인가? 이것은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 목적이 대량의 인쇄물을 빠른 시간 안에 얻는 데 있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더욱 많은 서적을 필요로 했다. 이 때문에 마침내 활자와 인쇄방법의 개량이 시도된다. 이때의 정황이 '세종실록' 16년 7월2일조에 소상히 기록돼 있다. 세종은 이날 이천(李천)을 불러 새 활자의 주조를 명하면서 과거 한 차례 있었던 활자와 조판술의 개량을 회상한다
태종께서 처음으로 주자소(鑄字所)를 두시고 큰 활자를 주조할 때 조정 신하들이 모두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태종께서 우겨 만들게 하시고, 그것으로 많은 책을 인쇄해 중외(中外)에 널리 보급했으니, 또한 위대한 일이었다.
다만 일을 처음 시작한 탓에 제조방법이 정밀하지 않았다. 예컨대 책을 찍을 때 반드시 먼저 조판틀에 밀랍을 편 다음 그 위에 활자를 심었다. 그런데 밀랍의 성질이 원래 물렁해 꽂은 활자가 고정되지 아니하므로, 몇 장을 인쇄하면 활자가 움직여 한쪽으로 쏠리는 탓에 또다시 바로잡아줘야 했기에 인쇄공들이 골치를 앓았다.
내가 이런 문제를 걱정하여 경에게 개량할 것을 명했으나 경은 또한 어렵게 여겼다. 내가 강요하자 경은 그제야 지혜를 짜내어 조판틀을 다시 만들고 활자를 다시 주조했던 바, 모두가 평평하고 방정(方正)하여 단단히 고정이 돼(竝皆平正牢固), 밀랍을 쓰지 않고도(不待用蠟) 많은 양을 인쇄해도(印出雖多), 활자가 한쪽으로 쏠리지 아니하므로(字不偏倚) 내가 아주 아름답게 여겼다.
계미자의 인쇄 속도를 높이기 위해 세종이 활자의 개량을 명했던 바, 이천이 새 방법을 찾아냈던 것이다. 이 기술 개량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계미자는 원래 밀랍에 활자를 꽂기 위해 활자의 끝이 뾰족했다. 한데 위의 자료에 의하면, 새로 주조한 활자는 '평평하고 방정하다.' 이것은 활자의 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뒷날 성현(成俔)이 '용재총화( 齋叢話)'에서 이 활자에 대해 "끝이 송곳처럼 생겼으며 밀랍을 써서 고정시켰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 자료의 '평평하고 방정하다'는 말은 활자의 끝이 평평하고 방정한 것이 아니라, 활자의 몸체 사면이 고르고 방정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활자 몸체의 사면이 정확하게 사각형을 이루고 또 매끈하게 가공됐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형태상의 개량으로 인해 밀랍을 붓기 전에 이미 조판틀과 활자 사이, 그리고 활자와 활자 사이의 공간이 줄어들어 더 단단히 고정됐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기술 개량에 따라 인쇄 속도가 빨라졌다. '세종실록' 3년 3월24일조에 의하면 계미자의 인쇄는 하루에 몇 장(數紙)에 불과했다. 하지만 변계량(卞季良)의 '주자발(鑄字跋)'에 의하면 새 활자와 조판술로 인해 하루에 20장을 인쇄할 수 있었다고 하니, 대단한 기술 발전인 셈이다.
이 기술 개량은 세종이 주도했다. 앞의 인용 글에 의하면, 세종이 계미자의 인쇄 속도에 대한 폐단을 걱정해 이천에게 개량을 명하는데 이천이 난색을 표하자, 세종이 재차 강요해 마침내 기술 개량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세종실록' 3년 3월24일조는 "임금이 직접 지휘하고 계획하여 이천과 남급(南汲)으로 하여금 구리판(조판틀)을 다시 주조해 글자의 모양과 꼭 맞게 만들게 했다"고 하고 있는 바, 활자와 조판틀을 개량하려는 생각과 개량 방법 역시 모두 세종의 의지와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쨌든 이 개량 사업으로 주자소는 술을 무려 120병이나 하사받았다. 그만큼 활자 개량이 성공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활자의 제조는 경자년(1420) 겨울에 시작돼 임인년(1430) 겨울에 끝났다. 학계에서는 활자 주조가 시작된 연도를 따서 이 활자를 '경자자'라고 부른다.
목판 사용하던 중국보다 인쇄술 훨씬 앞서
활자와 인쇄술의 개량이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또 한 번의 중요한 개량이 있었다. 앞의 기록에서와 같이 세종(16년 7월 2일)은 활자를 다시 만들 것을 지시한다. 지금 있는 활자를 녹여 큰 활자를 만들자는 것이다.
일을 맡은 사람은 집현전 직제학 김돈(金墩), 직전(直殿) 김빈(金 ), 호군 장영실(蔣英實), 첨지사역원사 이세형(李世衡), 사인(舍人) 정척(鄭陟), 주부 이순지(李純之) 등이었다. 그리고 '효순사실(孝順事實)', '위선음즐(爲善陰 )', '논어(論語)' 등의 자형(字形)을 땄다.
활자는 불과 2개월 만에 완성됐으니, 앞서 경자자가 2년에 걸쳐 만들어진 데에 비하면 대단히 빠른 것이었다. 그만큼 활자 주조의 기술이 축적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활자는 갑인년에 만들어져 '갑인자'라고 불린다. 갑인자는 큰 활자를 찍기 위해 만든 것이지만, 사실 그 가치는 활자의 크기보다 다른 데 있었다.
즉 갑인자부터 활자가 완전히 고정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의하면 갑인자부터 밀랍 고정방식을 버리고 대나무로 활자와 조판틀, 그리고 활자와 활자 사이의 공간을 메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활자는 움직이지 않게 됐고 인쇄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졌다.
'실록'에 의하면 하루에 40여 장을 인쇄할 수 있었다고 하니, 이건 대단한 진보다. 즉 계미자는 하루에 10장 미만이었고 경자자는 20장, 갑인자는 40장이었으니 속도가 무려 6, 7배나 빨라졌던 것이다. 게다가 갑인자는 글씨체가 완정(完整)하고 아름다워 이후 조선 후기까지 여러 차례 다시 만들어진다. 조선의 대표 활자인 셈이다.
세종은 이후에도 활자 개량에 깊은 관심을 쏟았다. 세종은 즉위 17년 8월24일 중국에 사신을 보내면서 중국의 금속활자 인쇄술에 대해 물어보게 한다.
12월13일 돌아온 사신단은, 중국은 옛날에는 동활자를 사용했으나 목판과 다를 것이 없고 비용은 더 많이 들기 때문에 근래에는 모두 목판을 사용한다는 답을 들었다고 보고했다.
이 시기 동아시아 삼국 중 일본은 금속활자 인쇄 자체를 아예 몰랐고, 중국은 금속활자 인쇄술을 알기는 했지만 다시 목판으로 회귀했으니 금속활자 인쇄술에 대해서는 조선이 최고 수준이었던 것이다
금속활자 보급 이전에 주로 사용된 목활자
세종의 금속활자는 책을 쏟아냈다. 그때 찍어낸 방대한 책의 목록은 지금도 우리를 경악하게 한다. 그뿐이랴, 금속활자가 일단 인쇄본을 만들어내면 그 인쇄본은 지방으로 전해지고, 지방에서는 그 인쇄본을 저본(底本)으로 목판을 새겨 다시 책을 인쇄해냈다.
그 결과 책 생산은 증가했고, 그 책을 읽은 사대부층이 단단히 형성됐으며, 조선은 문화적으로 성숙해졌던 것이다. 세종의 인쇄기술 개량은 실로 조선이란 국가를 공고히 한 일대 사건이었다.
하지만 인쇄술의 발전은 세종조가 처음이자 끝이었다. 갑인자 이후 세조에서 성종에 이르는 기간에 필요에 따라 다양한 금속활자들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갑인자의 수준을 넘을 수 없었다. 조판술과 인쇄기술 역시 조선조 말까지 동일했다.
세종이 창안했던 조판술은 정조(正祖) 때도 바뀐 바 없었다. 활자를 활자틀에 심고 먹을 칠하고 솜뭉치로 두드려 한 장 한 장 떼어내서 책을 묶는 방식은 조선조가 종언을 고할 때까지 조금도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책 보급은 백성 아닌 사대부 위한 것
이뿐만이 아니었다. 활자는 모두 한자(漢字)였다. 물론 훈민정음이 창제된 뒤 만든 금속활자에는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나 '월인석보(月印釋譜)'를 찍은 한글 활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이 활자는 갑인자가 그랬던 것처럼 수십 수백 종의 책을, 다시 말해 애당초 수십 수백 종의 국문서적을 인쇄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 활자는 '월인석보'라는 특정한 책을 인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 뿐이었다. 이 활자가 널리 활용돼 국문서적을 쏟아내는 경우는 없었던 것이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위해 만든 문자가 분명하지만, 세종의 머릿속에는 한글 활자를 만들어 백성들이 읽을 독서물(讀書物)을 만든다는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왜인가?
무엇보다 지배층의 머릿속에 '백성과 독서물'이란 관계, 즉 '책을 읽는 행위'와 '책을 읽는 백성'을 연결하는 상상력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세종조부터 본격적으로 가동된 금속활자 인쇄술은 구텐베르크의 활자가 궁극적으로 독서 대중을 만들어낸 것과 달리 오로지 사대부의 탄생에만 기여했을 뿐이다.
흔히 한국의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몇 년을 앞섰다고 자랑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활자 제작에만 초점을 맞춘 것일 뿐이다. 금속활자 외에 책을 조판하고 인쇄하는 기술, 그리고 활자가 표음문자인가, 표의문자인가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요컨대 조선의 금속활자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는 제작 배경이 전혀 달랐던 것이니, 비교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공연히 구텐베르크의 활자보다 몇 년을 앞섰다고 떠들 필요가 없다.
조선시대의 한자 활자는 20만 자 내외로 주조됐다. 적으면 10만 자, 많으면 30만 자였다. 이런 규모의 금속활자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은 국가밖에 없었다.
민간의 누구도 감히 20만 자의 활자를 만들어 책을 찍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 민간에서 만든 금속활자가 몇 종 있기는 했지만, 그것 역시 국가의 금속활자와 똑같은 기능을 했을 뿐이다. 오로지 사대부들에게 필요한 소수의 책을 찍었을 뿐이었다.
요컨대 조선의 금속활자도 혁명은 혁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중세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중세의 지배층을 탄생시키고 공고히 하는 혁명이었을 뿐이다
조선의 활자
(위키백과)
교육 진흥에 따른 활발한 편찬 사업은 활자 인쇄술과 제지술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이미 13세기경에 세계 최초로 발명되어 쓰이기 시작한 금속활자는 조선 초기 이후 더욱 개량되어, 계미자(1403년: 태종 3년), 경자자(1421년: 세종 3년), 갑인자(1434년: 세종 16년) 등이 차례로 주자소에서 주조되었다.
그 중에서 특히 갑인자(甲寅字)는 글자 모습이 아름답고 인쇄하기에 편하게 주조되었을 뿐 아니라, 활자가 20여만 개나 되어 가장 우수한 활자로 꼽힌다.
활자 만드는 데 쓰는 금속은 처음에는 납이었으나 세종 18년부터는 그보다 강한 구리를 쓰기 시작했다. 하루에 만드는 활자 주조 수량은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만든 수량의 약 10배에 달하는 3,500자 정도나 되었다.
또 종전에는 밀(蜜)을 써서 활자를 고정시키는 방법을 썼으나, 세종 때부터는 식자판(植字版)을 조립하는 방법을 창안하여 종전보다 두 배 정도의 인쇄 효율을 올리게 되고 인쇄 효과도 훨씬 선명하게 되었다.
세종 때 학자 변계량(卞季良)이 쓴 '갑인자발(甲寅字跋)'에 "인쇄되지 않은 책이 없고 배우지 않은 사람이 없다"라고 한 것은 다소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조선 초기 출판문화의 높은 수준을 말해 준다. 조선의 인쇄 기술은 일본·중국 등 이웃나라의 인쇄 기술의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계미자(癸未字)
계미자(癸未字)는 조선 시대 최초의 구리활자이다. 1403년(태종 3년) 왕명으로 주자소를 설치하고 예문관 대제학 이직(李稷), 총재 민무질(閔無疾) 등이 구리로 이 계미자를 만들었다. 이때 주조된 활자 수는 약 10만 자나 된다.
자본(字本)은 송판본(宋板本)의 고주(古註), 시경(詩經) 등을 이용하였으며, 인쇄본으로 송조표전총류(宋朝表牋總類) 1책, 십칠사찬고금통요(十七史纂古今通要) 1책이 현존한다.
경자자(庚子字)
경자자(庚子字)는 조선 최초의 동활자인 계미자(癸未字)의 단점을 보완하여 만든 두 번째 구리활자이다. 1420년(세종 2) 계미자의 모양이 크고 가지런하지 못하며, 또 주조가 거칠어 인쇄하는 도중 활자동요가 자주 생겨 능률이 오르지 않으므로 세종이 다시 개주(改鑄)하게 한 것이다.
세종때에 들어와 처음으로 주조한 금속활자로, 활자의 모양은 끝이 송곳처럼 뾰족했던 계미자와는 달리 네모 반듯한 입방체로 고쳤으며, 인쇄 방식에 있어서도 밀납을 판에 녹여서 글자를 배열하던 방식을 개량해 글자 모양에 알맞게 인판을 만들고 죽목(竹木)으로 각 활자의 빈 공간을 메우는 방법을 활용함으로써, 밀랍을 사용하는 비용을 절감하면서도 인쇄량과 인쇄효과는 오히려 높일 수 있게 되어 금속활자 인쇄술의 많은 발전을 보게 되었다.
갑인자(甲寅字)
갑인자(甲寅字)는 1434년(세종 16)에 만든 동철활자다. 위부인자(衛夫人字)라고도 한다.
왕명을 받들어 지중추원사 이천(李蕆), 직제학 김돈(金墩), 직전(直殿) 김호(金鎬), 호군(護軍) 장영실(蔣英實), 첨지사역원사(僉知司譯院事) 이세형(李世衡), 사인(舍人) 정척(鄭陟), 주부(主簿) 이순지(李純之) 등이 경연청에 소장(所藏)한 '효순사실(孝順事實), 위선음즐(爲善陰騭), 논어(論語) 등의 명나라 초기 판본을 자본(字本)으로 하여 만들었다. 경자자(庚自字)보다 모양이 좀 크고 자체(子體)가 바르고 깨끗한 것이 20여만 자나 되었다.
현존하지 않으며, 그의 인쇄본 신편음점성리군서구해(新編音點性理群書句解) 2책, 증간왕장원집주분류소동파선생시(增刊王狀元集注分類蘇東坡先生詩) 1책, 신간대자부음석문삼주(新刊大字附音釋文三注) 1책이 있다. 2021년 6월, 인사동에서 갑인자 실물로 추정되는 한문 활자와 한글 한자가 발굴되어 주목받고 있다.
조선시대의 금속활자
(두산백과)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처음에는 나무로 만든 목각자(木刻字)로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등을 찍었으나, 1403년(태종 3) 처음으로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고 수개월에 걸쳐 놋쇠로 수십만 자의 금속활자를 주조, 이것을 그 해의 간지(干支)에 따라 계미자(癸未字)라 불렀으며, 이때부터 활자는 주조한 해의 간지에 따라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이후 금속활자의 주조는 역대 왕조의 중요한 문정(文政)의 하나로서 주조술의 개량과 인쇄술의 발달에 힘을 기울여 많은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다음 세종은 계미자의 뒤끝이 송곳 같아서 판짜기에 불편하고 능률이 오르지 않았으므로, 활자 모양을 고쳐 만들게 하여 1420년(세종 2)부터 2년간에 걸쳐 경자자(庚子字)를 만들었다. 이 경자자의 모양은 매우 정밀하고 인쇄에 편리하여 하루에 20지(紙), 또는 수십 지를 인쇄할 수 있었다 한다.
이때는 조판기술도 개량되어 종래에는 조판하는 사이에 황랍(黃蠟)을 녹여서 부은 다음 굳기를 기다려 인쇄하였으나, 세종이 친히 연구, 지시하여 다시 동판(銅板)을 부어 만들어 활자와 동판 사이의 틈을 없애는 등 기술을 개선함으로써 활자가 움직이지 않아 인쇄 능률도 몇 배나 오르게 되었다.
1434년에는 갑인자(甲寅字)를 주조하였고, 다시 큰 자(字)를 주조하기 위해 용해도(鎔解度)가 낮은 납을 쓰게 하였다. 이로부터 갑인자는 8차례나 재주조하여 가장 많이 쓰인 활자가 되었으며, 1484년(성종 15)의 갑진자(甲辰字)는 2차례, 1677년(숙종 3)의 한구자(韓構字)는 3차례, 1684년의 운각자(芸閣字)는 4차례, 1795년(정조 19)의 정리자(整理字)는 2차례를 주조하여 썼다.
조선시대에는 이 밖에도 많은 활자를 놋쇠, 납, 무쇠 등의 금속으로 주조해서 계속 책을 인쇄하였다. 한글 활자로는 1447년(세종 29) 석보상절자(釋譜詳節字), 1448년 동국정운자(東國正韻字), 1455년(세조 1) 강희안자(姜希顔字), 1465년(세조 11) 정란종자(鄭蘭宗字), 1580년(선조 13) 한호자(韓濩字), 1688년(현종 9) 무신자(戊申字:顯宗甲寅字), 1684년 운각자(芸閣字), 1693년(숙종 19) 원종자(元宗字), 1772년 임진자(壬辰字:甲寅字), 1883년(고종 20) 전사자(全史字) 등이 놋쇠 또는 무쇠로 만들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전까지는 놋쇠나 구리로 주조하거나 나무에 새겼으나, 이후에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목각자를 사용하였다. 그 후 차차 다시 금속활자를 썼는데, 대부분의 경우 나라에서 주조하였고 민간에서는 나무로 활자를 새겨서 썼으나 제한이 있었다.
임진왜란 후에는 활자의 등면을 깎아서 금속이 덜 들게 활자 모양을 바꾸었고, 후기에는 활자의 등을 파내서 경상(經床) 다리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판짜기에도 잘 고정되는 방법을 써서 인쇄 능률을 더욱 높였다. 이 밖에 그림을 새겨서 동판을 만들어 인쇄하는 방법도 인조(仁祖) 이후에 나타나게 되었다.
▶️ 無(없을 무)는 ❶회의문자로 커다란 수풀(부수를 제외한 글자)에 불(火)이 나서 다 타 없어진 모양을 본뜬 글자로 없다를 뜻한다. 유무(有無)의 無(무)는 없다를 나타내는 옛 글자이다. 먼 옛날엔 有(유)와 無(무)를 又(우)와 亡(망)과 같이 썼다. 음(音)이 같은 舞(무)와 결합하여 복잡한 글자 모양으로 쓰였다가 쓰기 쉽게 한 것이 지금의 無(무)가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無자는 '없다'나 '아니다', '~하지 않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無자는 火(불 화)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불'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갑골문에 나온 無자를 보면 양팔에 깃털을 들고 춤추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무당이나 제사장이 춤추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춤추다'가 본래의 의미였다. 후에 無자가 '없다'라는 뜻으로 가차(假借) 되면서 후에 여기에 舛(어그러질 천)자를 더한 舞자가 '춤추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無(무)는 일반적으로 존재(存在)하는 것, 곧 유(有)를 부정(否定)하는 말로 (1)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공허(空虛)한 것. 내용이 없는 것 (2)단견(斷見) (3)일정한 것이 없는 것. 곧 특정한 존재의 결여(缺如). 유(有)의 부정. 여하(如何)한 유(有)도 아닌 것. 존재 일반의 결여. 곧 일체 유(有)의 부정. 유(有)와 대립하는 상대적인 뜻에서의 무(無)가 아니고 유무(有無)의 대립을 끊고, 오히려 유(有) 그 자체도 성립시키고 있는 듯한 근원적, 절대적, 창조적인 것 (4)중국 철학 용어 특히 도가(道家)의 근본적 개념. 노자(老子)에 있어서는 도(道)를 뜻하며, 존재론적 시원(始原)인 동시에 규범적 근원임.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실재이므로 무(無)라 이름. 도(道)를 체득한 자로서의 성인(聖人)은 무지(無智)이며 무위(無爲)라고 하는 것임 (5)어떤 명사(名詞) 앞에 붙어서 없음의 뜻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없다 ②아니다(=非) ③아니하다(=不) ④말다, 금지하다 ⑤~하지 않다 ⑥따지지 아니하다 ⑦~아니 하겠느냐? ⑧무시하다, 업신여기다 ⑨~에 관계없이 ⑩~를 막론하고 ⑪~하든 간에 ⑫비록, 비록 ~하더라도 ⑬차라리 ⑭발어사(發語辭) ⑮허무(虛無) ⑯주검을 덮는 덮개 ⑰무려(無慮), 대강(大綱)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빌 공(空), 빌 허(虛)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존(存), 있을 유(有)이다. 용례로는 그 위에 더할 수 없이 높고 좋음을 무상(無上), 하는 일에 막힘이 없이 순탄함을 무애(無㝵), 아무 일도 없음을 무사(無事), 다시 없음 또는 둘도 없음을 무이(無二), 사람이 없음을 무인(無人), 임자가 없음을 무주(無主), 일정한 지위나 직위가 없음을 무위(無位), 다른 까닭이 아니거나 없음을 무타(無他), 쉬는 날이 없음을 무휴(無休), 아무런 대가나 보상이 없이 거저임을 무상(無償), 힘이 없음을 무력(無力), 이름이 없음을 무명(無名), 한 빛깔로 무늬가 없는 물건을 무지(無地),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음을 무자(無子), 형상이나 형체가 없음을 무형(無形), 아무런 감정이나 생각하는 것이 없음을 무념(無念), 부끄러움이 없음을 무치(無恥), 도리나 이치에 맞지 않음을 무리(無理), 아무도 도와 줄 사람이 없는 외로운 처지를 이르는 말을 무원고립(無援孤立), 끝이 없고 다함이 없음을 형용해 이르는 말을 무궁무진(無窮無盡), 능통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소불능(無所不能), 못 할 일이 없음 또는 하지 못하는 일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소불위(無所不爲), 무엇이든지 환히 통하여 모르는 것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무불통지(無不通知), 인공을 가하지 않은 그대로의 자연 또는 그런 이상적인 경기를 일컫는 말을 무위자연(無爲自然), 일체의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무아의 경지에 이르러 일체의 상념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념무상(無念無想), 아버지도 임금도 없다는 뜻으로 어버이도 임금도 모르는 난신적자 곧 행동이 막된 사람을 이르는 말을 무부무군(無父無君), 하는 일 없이 헛되이 먹기만 함 또는 게으르거나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무위도식(無爲徒食), 매우 무지하고 우악스러움을 일컫는 말을 무지막지(無知莫知), 자기에게 관계가 있건 없건 무슨 일이고 함부로 나서서 간섭하지 아니함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불간섭(無不干涉), 성인의 덕이 커서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유능한 인재를 얻어 천하가 저절로 잘 다스려짐을 이르는 말을 무위이치(無爲而治), 몹시 고집을 부려 어찌할 수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가내하(無可奈何), 아무 소용이 없는 물건이나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무용지물(無用之物) 등에 쓰인다.
▶️ 書(글 서)는 ❶회의문자로 书(서)는 간자(簡字)이다. 성인의 말씀(曰)을 붓(聿)으로 적은 것이라는 뜻이 합(合)하여 글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書자는 '글'이나 '글씨', '글자'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書자는 聿(붓 율)자와 曰(가로 왈)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聿자는 손에 붓을 쥐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붓'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여기에 '말씀'을 뜻하는 曰자가 더해진 書자는 말을 글로 적어낸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참고로 일부에서는 曰자가 먹물이 담긴 벼루를 표현한 것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그래서 書(서)는 성(姓)의 하나로 ①글, 글씨 ②글자 ③문장(文章) ④기록(記錄) ⑤서류 ⑥편지(便紙) ⑦장부(帳簿) ⑧쓰다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책 책(冊), 글월 문(文), 글 장(章), 문서 적(籍)이다. 용례로는 책 또는 경서와 사기를 서사(書史), 편지를 서신(書信), 글 가운데를 서중(書中), 남이 하는 말이나 읽는 글을 들으면서 그대로 옮겨 씀을 서취(書取), 책을 넣는 상자 또는 편지를 넣는 통을 서함(書函), 글씨를 아주 잘 쓰는 사람을 서가(書家), 글방을 서당(書堂), 글씨와 그림을 서도(書圖), 책의 이름을 서명(書名), 대서나 필사를 업으로 하는 사람을 서사(書士), 글자를 써 넣음을 서전(書塡), 책을 보관하여 두는 곳을 서고(書庫), 남편의 낮은 말서방(書房), 책을 팔거나 사는 가게서점(書店), 이름난 사람의 글씨나 명필을 모아 꾸민 책을 서첩(書帖), 글씨 쓰는 법을 서법(書法), 유학을 닦는 사람을 서생(書生), 글방에서 글을 배우는 아이를 서동(書童), 글씨와 그림을 서화(書畫), 문서를 맡아보거나 단체나 회의 등에서 기록을 맡아보는 사람을 서기(書記), 글씨 쓰는 법을 배우는 일을 서도(書道), 책 내용에 대한 평을 서평(書評), 글자로 기록한 문서를 서류(書類), 책을 갖추어 두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방을 서재(書齋), 문자의 체제를 서체(書體), 참을 인 백 자를 쓴다는 뜻으로 가정의 화목은 서로가 인내하는데 있다는 말을 서인자일백(書忍字一百), 책은 남에게 빌려주지 않는다는 말을 서불차인(書不借人), 편지로 전하는 소식이 오고 간다는 말을 서신왕래(書信往來), 희고 고운 얼굴에 글만 읽는 사람이란 뜻으로 세상일에 조금도 경험이 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백면서생(白面書生), 뚜렷이 드러나게 큰 글씨로 쓰다라는 뜻으로 누구나 알게 크게 여론화함을 이르는 말을 대서특필(大書特筆), 책을 빌리면 술 한 병이라는 뜻으로 옛날에 책을 빌릴 때와 돌려보낼 때의 사례로 술 한 병을 보낸 것을 이르는 말을 차서일치(借書一瓻), 영 땅 사람의 글을 연나라 사람이 설명한다는 뜻으로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을 억지로 끌어대어 도리에 닿도록 함을 이르는 말을 영서연설(郢書燕說), 책을 읽느라 양을 잃어버렸다는 뜻으로 마음이 밖에 있어 도리를 잃어버리는 것 또는 다른 일에 정신을 뺏겨 중요한 일이 소홀하게 되는 것을 이르는 말을 독서망양(讀書亡羊), 아무 생각 없이 오직 책읽기에만 골몰하고 있는 상태 또는 한 곳에 정신을 집중하는 것을 이르는 말을 독서삼매(讀書三昧), 글 읽기를 백 번 한다는 뜻으로 되풀이하여 몇 번이고 숙독하면 뜻이 통하지 않던 것도 저절로 알게 됨을 이르는 말을 독서백편(讀書百遍), 소의 뿔에 책을 걸어 놓는다는 뜻으로 소를 타고 독서함을 이르는 말로 시간을 아껴 오로지 공부하는 데 힘쓰는 태도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우각괘서(牛角掛書), 눈 빛에 비쳐 책을 읽는다는 뜻으로 가난을 무릅쓰고 학문함을 이르는 말을 영설독서(映雪讀書), 저지른 죄가 너무 많아 이루 다 적을 수 없다는 말을 경죽난서(磬竹難書) 등에 쓰인다.
▶️ 不(아닐 부, 아닐 불)은 ❶상형문자로 꽃의 씨방의 모양인데 씨방이란 암술 밑의 불룩한 곳으로 과실이 되는 부분으로 나중에 ~하지 않다, ~은 아니다 라는 말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 때문에 새가 날아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음을 본뜬 글자라고 설명하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不자는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不자는 땅속으로 뿌리를 내린 씨앗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아직 싹을 틔우지 못한 상태라는 의미에서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참고로 不자는 ‘부’나 ‘불’ 두 가지 발음이 서로 혼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不(부/불)는 (1)한자로 된 말 위에 붙어 부정(否定)의 뜻을 나타내는 작용을 하는 말 (2)과거(科擧)를 볼 때 강경과(講經科)의 성적(成績)을 표시하는 등급의 하나. 순(純), 통(通), 약(略), 조(粗), 불(不)의 다섯 가지 등급(等級) 가운데 최하등(最下等)으로 불합격(不合格)을 뜻함 (3)활을 쏠 때 살 다섯 대에서 한 대도 맞히지 못한 성적(成績) 등의 뜻으로 ①아니다 ②아니하다 ③못하다 ④없다 ⑤말라 ⑥아니하냐 ⑦이르지 아니하다 ⑧크다 ⑨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 그리고 ⓐ아니다(불) ⓑ아니하다(불) ⓒ못하다(불) ⓓ없다(불) ⓔ말라(불) ⓕ아니하냐(불) ⓖ이르지 아니하다(불) ⓗ크다(불) ⓘ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불) ⓙ꽃받침, 꽃자루(불)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닐 부(否), 아닐 불(弗), 아닐 미(未), 아닐 비(非)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가(可), 옳을 시(是)이다. 용례로는 움직이지 않음을 부동(不動),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일정하지 않음을 부정(不定), 몸이 튼튼하지 못하거나 기운이 없음을 부실(不實), 덕이 부족함을 부덕(不德), 필요한 양이나 한계에 미치지 못하고 모자람을 부족(不足), 안심이 되지 않아 마음이 조마조마함을 불안(不安), 법이나 도리 따위에 어긋남을 불법(不法), 어떠한 수량을 표하는 말 위에 붙어서 많지 않다고 생각되는 그 수량에 지나지 못함을 가리키는 말을 불과(不過), 마음에 차지 않아 언짢음을 불만(不滿), 편리하지 않음을 불편(不便), 행복하지 못함을 불행(不幸), 옳지 않음 또는 정당하지 아니함을 부정(不正),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속까지 비치게 환하지 못함을 불투명(不透明), 할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것을 불가능(不可能), 적절하지 않음을 부적절(不適切), 부당한 일을 부당지사(不當之事), 생활이 바르지 못하고 썩을 대로 썩음을 부정부패(不正腐敗), 그 수를 알지 못한다는 부지기수(不知其數), 시대의 흐름에 따르지 못한다는 부달시변(不達時變) 등에 쓰인다.
▶️ 印(도장 인)은 ❶회의문자로 무릎마디, 무릎을 꿇은 모양의 병부절(卩; 옛날 약속할 때의 표이며 증명서와 같은 것)部와 부수(部首)를 제외한 글자(손톱의 모양, 손에 가지는 일)로 이루어졌다. 즉 증표를 손에 쥐다, 사령(辭令)에 찍는 도장, 표, 표하는 일을 말한다. ❷회의문자로 印자는 ‘도장’이나 ‘인상’, ‘찍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印자는 爫(손톱 조)자와 卩(병부 절)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印자의 갑골문을 보면 사람을 손으로 눌러 무릎을 꿇기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印자는 이렇게 사람을 누른다는 의미에서 ‘누르다’, ‘억압하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후에 중국에서 도장 문화가 발달하면서 印자는 ‘도장’을 뜻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여기에 扌(손 수)자가 더한 抑(누를 억)자가 ‘누르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印(인)은 (1)도장(圖章) (2)옛날 중국에서 관직(官職)의 표시로서 패용(佩用)한 금석류(金石類)의 조각물 (3)결인(結印) (4)인도(印度) (5)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도장(圖章) ②인상(印象) ③벼슬, 관직(官職) ④찍다, 놀러서 자리를 내다, 박다 ⑤찍히다, 박히다 ⑥묻어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잉크를 사용하여 판면에 그려져 있는 글이나 그림 등을 종이나 천 따위에 박아 내는 일을 인쇄(印刷), 인쇄한 책을 인본(印本), 사진의 음화에 인화지를 겹쳐서 감광시켜 양화로 만드는 일을 인화(印畫), 서적의 발행자가 저작자에게 주는 돈을 인세(印稅), 어떤 대상을 보거나 듣거나 하였을 때 그 대상이 사람의 마음에 주는 느낌을 인상(印象), 도장을 찍는 데 쓰는 붉은빛의 재료를 인주(印朱), 도장이나 관인 등의 총칭을 인신(印信), 대조용으로 관공서 및 기타 거래처에 미리 신고하여 둔 도장을 인감(印鑑), 인장의 글자를 새긴 면을 인면(印面), 나무나 그밖의 물건에 새기는 일 또는 그 글자를 인각(印刻), 불에 달구어 찍는 쇠도장 또는 다시 씻기 어려운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낙인(烙印), 불에 달구어 물건에 찍는 쇠붙이로 만든 도장을 소인(燒印), 도장을 찍음을 날인(捺印), 도장을 새김 또는 새겨 만든 도장을 각인(刻印), 불에 달구어 찍는 쇠도장 또는 지우기 어려운 부정적 평가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화인(火印), 봉하여 붙인 자리에 도장을 찍음 또는 봉하여 붙인 자리에 찍는 도장을 봉인(封印), 관서 또는 관리가 직무 상으로 사용하는 도장의 총칭을 관인(官印), 서류나 물품에 검사를 마친 다음 그 표지를 찍는 도장을 검인(檢印), 서류에 얽어 맨 종잇장 사이에 도장을 걸쳐 찍음을 간인(間印), 남을 대신하여 도장을 찍음 또는 그 도장을 대인(代印), 서로 관련된 두 종이 위에 걸쳐서 찍는 계契자를 새긴 도장을 계인(契印), 찍힌 부분이 도드라져 나오거나 들어가도록 만든 공인을 압인(壓印), 개인이 사사로이 쓰는 도장을 사인(私印), 한 문건에 여러 사람이 도장을 찍음을 연인(連印), 원본을 사진 제판으로 복사하여 인쇄함을 영인(影印), 잎이 붙었던 자리를 엽인(葉印), 인발 위에 글자를 겹쳐 써서 표적으로 삼음을 일컫는 말을 인상가서(印上加書),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는 뜻으로 묵묵한 가운데 서로 마음이 통함을 이르는 말을 심심상인(心心相印), 한 판에 찍어 낸 듯이 조금도 서로 다름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여인일판(如印一板)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