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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하느님께서 너의 광채를 드러내 주실 것이다.”
<바룩서의 말씀 5,1-9>
예루살렘아,
슬픔과 재앙의 옷을 벗어 버리고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입어라.
2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의 겉옷을 걸치고 영원하신 분의 영광스러운 관을 네 머리에 써라.
3 하느님께서 하늘 아래 어디서나 너의 광채를 드러내 주시고
4 ‘의로운 평화, 거룩한 영광’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너를 부르실 것이다.
5 예루살렘아,
일어나 높은 곳에 서서 동쪽으로 눈을 돌려 보아라.
네 자녀들이 거룩하신 분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께서 기억해 주신 것을 기뻐하면서 해 지는 곳에서 해 뜨는 곳까지 사방에서 모여드는 것을 보아라.
6 그들은 원수들에게 끌려 너에게서 맨발로 떠나갔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왕좌처럼 영광스럽게 들어 올려 너에게 데려오신다.
7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당신 영광 안에서 안전하게 나아가도록 높은 산과 오래된 언덕은 모두 낮아지고 골짜기는 메워져 평지가 되라고 명령하셨다.
8 하느님의 명령으로 숲들도 온갖 향기로운 나무도 이스라엘에게 그늘을 드리우리라.
9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서 나오는 자비와 의로움으로 당신 영광의 빛 속에서 이스라엘을 즐거이 이끌어 주시리라.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
▥ 제2독서
“여러분은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십시오.”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 1,4-6.8-11>
형제 여러분, 나는
4 기도할 때마다 늘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5 여러분이 첫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6 여러분 가운데에서 좋은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8 사실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애정으로 여러분 모두를 몹시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증인이십니다.
9 그리고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더 풍부해져
10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1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복음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3,1-6>
1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리사니아스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
2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3 그리하여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4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5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6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마음의 문을 열어>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오늘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인 세례자 요한은 우리에게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길을 곧게 마련하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퍼뜩 드는 느낌은 당황과 난감입니다.
우선, 주님 오실 것을 기다리라는 말부터 이미 와 계신데 무슨 오실 것을 기다리라는 것인지, 다음으로 주님의 길을 마련하라는 말도 주님께서 길이시고 주님의 길은 주님이 내시는 것이지 왜 우리가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어떻게 낼 수 있다는 것인지.
그러나 차분히 이 말씀을 묵상하면 노래 하나가 떠오르고 다음으로 묵시록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 노래는 우리 성가 173번 ‘Veni Jesu, Amor Mi’인데, 직역을 하면 '나의 사랑이신 예수님, 오소서'라는 뜻이지만 우리말로는 '사랑이신 예수님, 내 마음에 오소서'라고 의역하지요.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 동네까지, 아니 우리 집 문앞까지, 그리고 우리 마음의 문 앞까지 오셨습니다.
그런데 묵시록을 보면 주님께서 우리 집까지 오셔서 문을 두드리시는데, 그 문은 우리가 열어드리지 않으면, 특히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 문입니다.
곧 주님은 우리 마음의 문을 우리가 스스로 열도록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자유를 존중하신다면 우리도 주님의 그 숭고한 사랑을 존중해야 하는데, 우리는 종종 그 사랑을 개떡같이 여기니 문제인 거지요.
그러면 주님의 사랑을 개떡같이 여기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그 숭고한 사랑을 감히 개떡같이 여기게 합니까?
그제 얘기했듯이 눈에 뵈는 것이 없게 만드는 교만이고, 교만에서 비롯된 지독한 자기애(自己愛)입니다.
교만은 자기밖에는 아무도 사랑하지도 중요하지도 않고 그래서 주님을 포함한 다른 누구의 사랑도 우습게 여깁니다.
또 제 잘난 맛에 살기에 주님이라는 존재는 안중에도 없을 뿐 아니라 주인노릇 하러 오시는 주님은 거북하고 그래서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높은 산이 낮아지라는 것은 교만의 높은 콧대를 꺾으라는 말씀과 다름 없습니다.
그러면 골짜기는 메우고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교만과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두려움이나 죄책감이나 비하감 같은 것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느님을 무시하지 않고 하느님 사랑을 잘못 이해하여 하느님 사랑에 자신을 노출시키기보다 자기 안으로 숨어들게 할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무시하는 것도 문제지만 하느님 사랑을 왜곡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사랑의 주님이 아니라 벌주시는 주님이라면 오시는 것이 두렵겠지요.
주님이 오신다면 아담과 하와처럼 서둘러 숨어버리겠지요.
그러니 이쪽과 저쪽으로 위로 아래로 굽어진 마음을 펴는 것이 이 대림절에 우리가 해야 할 준비 중 하나일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이제 우리는 대림 2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오늘은 한국교회가 정한 인권주일이며, 사회교리주간의 시작되는 날입니다.
2020년 10월 3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전야에 반포된 프란치스코 교종의 세 번째 회칙 「모든 형제들」은 인간의 형제애와 사회적 우애를 다루고 있는데, 특히 코로나19의 전 세계적 확산으로, “안이하고 냉담하며 세계화된 무관심이 어떻게 지배하는지를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30항)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는 지난 2021년 5월 4일 새 문헌 「교회의 삶과 사명에서의 시노달리타스」를 발표하였고, 교종께서는 10월 9일, “친교, 참여, 사명”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세계 주교 시노드”(2021-2023)의 개막연설에서 “함께 걸어가는 길(여정)”이란 뜻의 ”시노달리타스“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원리로 ”경청과 참여“를 말하고 있습니다.
곧 우리가 함께 가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바깥에서나 무엇보다 먼저 형제와 이웃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경청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세상과 함께 걷는 일’에 적극 참여하는 것입니다.
교종께서는 이러한 구체적임 참여를 통한 ‘친교’를 이루며 그 속에서의 ‘사명’의 실행을 요청하십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같은 메시지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전해줍니다.
제1독서에서 바룩 예언자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서 나오는 자비와 의로움으로, 당신 영광의 빛 속에서 이스라엘을 즐거이 이끌어 주시리라.” (바룩 5,9)고 말하며,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필리 1,10-11)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6)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구원과 영광’을 보기 위해 우리는 지금 의로운 사람, 세례자 요한과 함께 ‘광야’에 나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를 듣습니다.
곧 ‘시노달리타스’가 시작됩니다.
그것은 ‘들음’(경청)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바로 들은 바에 대한 참여를 요청합니다.
곧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일, 그분의 길을 곧게 하는 일’에 참여토록 합니다.
바로 그 안에서 친교를 이루기를 요청합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루카 3,4-6)
요한은 자신이 단지 ‘미리 주님의 길을 닦는 이’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요한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루카 3,3)라고만 말합니다.
곧 그는 용서를 위한 회개는 선포하였지만 결코 자신이 죄를 용서할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표시’로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결코 죄를 용서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성령을 불어넣을 그릇과 그 공간을 만들 수는 있었지만,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오셔서 바로 이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사명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사명을 지니셨습니다.
그렇게 요한은 자신의 사명에 충실했습니다.
이제 우리도 우리의 사명에 충실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용서를 입었고, 하늘나라를 선사받았고, 하느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리니 우리의 사명은 무엇보다도 먼저 입은 용서를 우리도 행하는 것이요, 하늘나라를 사는 것이요, 그분의 구원 안에 머무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을 보내면서,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알아보고 신뢰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루카 3,6) 하였으니,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는 길’을 함께 걷는 이 일이야말로 바로 우리의 사명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프란치스코 교종의 세 번째 회칙 [모든 형제들](54항)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최근의 감염병 확산으로 우리는 두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던져 응답한 수많은 길동무들을 다시 한번 알아보고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 공동 역사의 결정적 사건들을 용감하게 써 내려온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엮여있고, 그들을 통하여 지탱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그 누구도 혼자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말·샘 기도>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루카 3,5)
주님!
사방이 탁 트여 어디 하나 숨을 곳이 없는 곳, 발가벗겨진 광야로 불러내어 제 실상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시어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소서.
오늘도 제 마음의 광야에 숨어계시는 현존으로 속삭이는 사랑의 노래를 듣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길들여지는 사람은 길을 내지 못한다. 지금의 행복에 길들지 않기를.>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직무가 소개됩니다.
요한의 직무는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그분의 길을 미리 닦아놓는 역할입니다.
이를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라고 합니다.
‘회개’란 무엇이 행복인지 아는 것입니다.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는 사람이 회개했다고 하면 이제 술을 덜 마시는 것이 행복임을 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집을 나온 아이가 회개했다고 하면 그래도 집에서 부모님과 사는 것이 행복임을 안 것입니다.
박보영 목사가 안성에서 있을 때 길거리 아이들을 데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아이들은 다시 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살 때 입었던 더럽고 냄새나는 옷을 다시 줍니다.
그리고 입어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코를 막고 억지로 입고는 자기들 손으로 내다 버리고 샤워를 두 시간씩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길거리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그리스도 없이 사는 것보다 더 행복하지 않으면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간신히 주일미사에 나오기는 하겠지만 일상을 살아갈 때는 그리스도께서 동행하심을 까맣게 잊고 삽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습니다.
그들도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살기보다는 뱀의 뜻에 따라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를 채우는 것을 더 행복으로 여겼습니다.
회개는 그리스도를 부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런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돈도 없고 먹고 마실 것도 없고 명예도 없는 광야에서 사는 것이 더 행복임을 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삼구를 포기할 때 하느님의 어린양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 광야로 나오지 않으면, 곧 삼구를 포기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사랑이신데 삼구는 사랑과 반대되는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불과 물처럼 한 공간에 공존할 수 없는 욕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머무는 것이 세상의 즐거움을 다 포기하는 것보다 행복함을 믿지 못한다면 누가 광야로 나오겠습니까?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먼저 그 길을 간 사람이 필요한데, 그 사람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일단 믿고 광야로 나와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삶 자체가 무엇이 행복인지 증명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마더 데레사의 삶이 그랬고 이태석 신부님의 삶이 그랬습니다.
이분들의 삶을 보며 많은 사람은 ‘저런 삶이 진짜 행복일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하고 그 광야의 삶으로 나아올 결심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삶을 살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이분들이 먼저 세상의 행복에 길들지 않은 누군가를 만났다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회개의 세례는 먼저 그 길을 간 사람이 가지 못한 사람에게 길을 내주는 것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히말라야’(2015)는 엄홍길 대장과 박무택과의 우정을 그립니다.
엄홍길 대장으로부터 산을 배우고 싶었던 박무택은 지옥훈련을 거쳐 엄홍길 대장과 극한의 어려움을 견뎌내며 둘도 없는 친구가 됩니다.
그런데 엄홍길 대장은 세계 최초 16좌 등정을 코앞에 두고 더는 산을 타서는 안 된다는 진단을 받게 됩니다.
이에 박무택이 대장이 되어 에베레스트를 등정합니다.
이 과정에서 박무택 대장은 동료들을 구하려다 조난합니다.
폭풍이 몰아치는 악천후로 베이스캠프에 있었던 어떤 누구도 그들을 구하러 오르지 않았습니다.
책도 쓰며 가족과 삶을 즐기고 있었던 엄홍길 대장은 소식을 듣고 이들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산을 오르기로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쓸데없는 도전이라며 말립니다.
명예가 따르지 않는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시체를 찾는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후배를 추운 그곳에 홀로 둘 수 없었던 엄홍길 대장은 아픈 다리에도 그들의 시신을 찾아 내려옵니다.
어떤 명예도 없는 도전. 다만 우정을 지키기 위한 두 달이 넘는 도전이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엄홍길 대장은 박무택 대장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16좌 등반을 완주합니다.
살다 보면 현실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길을 낼 것인가의 선택이 참으로 많이 찾아옵니다.
이때 현실에 안주하는 삶은 아무런 길도 내지 못하지만,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성격을 지닌 사람은 새길을 냅니다.
그런데 그 길이 이 세상으로 내려오시지 못하는 그리스도를 세상으로 내려오게 만드는 길이 됩니다.
길을 내는 사람들의 특징은 지금 여기에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더 높은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항상 이렇게 묻습니다.
“이것이 최고의 행복인가?”
이 질문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이 길을 개척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영화 ‘메이즈 러너’(2018)는 실험용으로 기억이 삭제되어 한 공간에 갇혀 살아야 하는 젊은 청년들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토마스만이 길을 알 수 없는 미로와 무서운 괴물을 무릅쓰고 그곳을 탈출하려 합니다.
그런 그를 보고 그를 따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지금 자신들의 세상에서 계급을 정하고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 둘의 투쟁은 끝이 없습니다.
다만 희생이 따르더라도 나가는 길을 찾게 된 토마스는 다른 이들도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게 해주는 길을 만들어줍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은 세상의 틀에 갇혀 사는 학생들에게 책상 위로 올라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왜 이 위에 섰을까?
이 위에선 세상이 무척 다르기 보이지.
잘 알고 있는 거라도 다른 시각에서 봐라.
틀리거나 바보 같아도 반드시 시도해라.”
키팅 선생님이 학교에서 쫓겨나자 학생들은 교장 선생님의 위협에도 책상 위로 올라섭니다.
누군가 길을 내주지 않으면 아무도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없습니다.
지금 세상이,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좇고 있는 돈이 행복의 정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 이해할 수 없다면 행복할 수 없다고 여기십시오.
그래서 행복에 대해 다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은 결국엔 주님의 길을 고르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남들이 하니까 다 따라 해서는 안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다른 사람이 다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것과 반대되는 광야의 삶에서 행복을 찾았습니다.
지금의 행복이 최선인지를 끊임없이 물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행복을 위해 찾아간 그 길로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그 길은 다른 이들이 그리스도라는 행복을 만나게 하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나를 기다리고 계신 하느님>
오늘은 대림 제2주일입니다.
대림초 두 개에 불이 당겨졌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 만큼 빛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어두운 마음에 주님의 빛이 환히 비춰지길 희망하며 기쁨의 성탄으로 한 발 더 내딛기를 빕니다.
피아노 조율은 언제 해야 합니까?
피아노 조율은 연주가 끝난 다음에 하는 것이 아니고 ‘중요한 연주 앞에서’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렇게나 산 다음에 후회하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하기 전에 우리의 삶을 조율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데 함부로 헛되이 삽니까?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여정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바로 나를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신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지상적인 마음가짐에서 하늘을 향한 마음으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는데,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였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들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을 보리라’”
이 말씀은 곧 마음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보를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삶의 양식을 바꾸고 하느님께로 향한다는 것은 분명 광야에 길을 내는 것 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마음 보따리를 바꾼다는 것은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일이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단호한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남의 잘못은 잘 보지만 자기 허물은 보지 못하는 연약함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니 결국 돌이킬 마음도 없는 것입니다.
사실 고해성사를 자주 보지 않는 사람은 고백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비출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거울을 보며 외모를 단장하듯이 하느님의 말씀에 마음을 비춰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은 영혼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한번 살펴보십시오.
우리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골이 패인 것은 없는지?
혹 골이 있다면 그 골을 메워야 합니다.
서로의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좋은 점과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다른 그를 ‘나와 틀리다’ 고 단죄하며 거리를 둡니다.
그러나 이유가 어찌 되었든 잘못되었으면 고쳐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분명 골짜기는 메워져야 합니다.
산과 언덕들도 낮아져야 합니다.
높아지려고 하는 마음, 교만함이 있었다면 겸손함으로 낮아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내려오신 그 마음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던 그 모습으로, 간음한 여인의 처지로 내려가서 허리를 굽혀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시던 그 예수님의 마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리고 굽은 데는 곧아져야 합니다.
마음이 굽으면 모든 사람과 사물이 다 굽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물이 굽으면 그 그림자도 굽어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굽은 마음을 곧게 하십시오.
시기와 질투로 보면 증오와 저주를 낳게 되고 영혼이 망가집니다.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고, 인정해 주는 올곧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아울러 거친 길은 평탄케 해야 합니다.
거친 마음은 상처만 남깁니다.
남이야 손해를 보든 말든 나만 잘살면 된다는 생각은 위험합니다.
“화는 불입니다.
뜨거운 불입니다.
그러나 그 불로는 방을 따뜻하게 할 수도 밥을 지을 수도 없습니다.
나무를 태울 수도 쇠를 달굴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속만 태울 뿐입니다.”
(이규경)
잘못된 열심은 영혼에 상처만 남긴다고 했습니다.
분수에 맞지 않는 기대로 화를 키워서는 안 되겠습니다.
시리아의 성 이사악은 “죄인이든 의인이든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회심하는 이들을 가장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돌이키는 일은 한두 번에 끝날 일이 아닙니다.
매일이 마음을 돌이키는 회개의 때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마태 10,22)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죄기 드러날 때 고백하는 것은 회개가 아니라 자백입니다.
회개는 자발적인 것입니다.
아무도 내 죄를 알지 못하고 추궁하지 않는데도 하느님 앞에 부끄러워 고백하는 것입니다.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하고 권고합니다. (필리피 1,10-11)
따라서 하루하루가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는 나무랄 데 없는 축복의 날 되길 희망하며, ‘내가 바라는 하느님’을 기대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나’로 거듭날 수 있는 한 주간 되길 바랍니다.
한 알코올 중독자가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가정을 살리기 위해 알코올 중독자 부인에게 성경을 한 권 주면서 하느님을 믿으라고 권했습니다.
부인은 열심히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부인은 성경을 통해서 많은 위로를 받고 그것을 보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의 신앙을 비웃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한 남편이 집에 들어와 아내의 손에 있는 성경을 빼앗아 난로 속에 집어 던져 버렸습니다.
“어디 네 성경이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보자.”
다음날 아침 남편은 난로 속의 재를 치우다가 타다 남은 성경 몇 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눈에 딱 들어오는 성경 구절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은 마태복음 24장 35절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 순간 남편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두려웠습니다.
심한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결국 그는 살아있는 말씀에 두 손 들고 주님 앞에 나오게 되었답니다.
오늘 복음의 끝부분의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6)는 말씀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향한 우리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야겠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 할 준비를 갖추고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일까?’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를 생각하며 아기 예수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회개의 핵심은 하느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잘못했다고 발만 동동 구르고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라 전과는 다른 삶의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회개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내가 그분을 알기 전부터 나를 사랑하셨고 용서해 주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을 향한 삶의 추구로 주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지나치게 세상과 땅만 바라보지 않고 머리를 들어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은혜가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교부 떼르뚤리아노는 말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죽는 날까지 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회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척도입니다.”
교황 요한바오로 2세께서는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회개는 한없이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다시 발견하는 데서 얻어지는 결실입니다. 자비의 하느님! 너그러우신 사랑의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끊임없는 회개의 원천”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쪼록 주님께서 언제나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진정한 회개의 잣대는 다름 아닌 삶의 변화입니다>
대림 제2주일이자 인권 주일입니다.
인간은 존재 자체로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피조물임을 자각하는 주일입니다.
인간은 첫째가는 하느님 피조물이기에 그 어떤 제도나 이데올로기보다 우선해야 하는 가치 있는 존재임을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신분, 국적, 빈부 여부를 떠나 생명을 지닌 한 그 어떤 인간이라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주일입니다.
오늘 특별히 실직이나, 사업의 실패 등 경제적 파탄으로 인해 깊은 수렁 속에서 고생하시는 분들, 너무도 막막해 앞길이 전혀 안 보이는 분들, 희망을 상실한 분들을 위해서 특별한 관심과 기도가 필요한 주일입니다.
직원을 소중히 여기는 경영 마인드로 유명한 한 경영자의 외침은 어려운 이 시대 모든 경영인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귀담아 들어야 할 소중한 '생명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리해고를 통한 인원 감축!
우선 인건비를 대폭 줄여보자는 마인드인데, 결코 바람직한 해결책이 아닙니다.
서로를 위해 피해야 할 유혹입니다.
그로 인해 예견되는 피해자들의 고통과 국가적 손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저희 회사는 인원 감축이라는 뼈아픈 해결책이 아니라 3교대를 4교대로 늘리는 고용 증대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잉여 시간을 직원 교육과 재충전에 투자한 결과 생산성 향상, 안전사고 감축, 노사 화합이란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이 회사 경영자의 인본주의적 사고방식, 근로자들과 고통을 분담하려는 마음 씀씀이가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이 회사에서 사직서를 쓰면 최고 책임자와 면담을 거쳐야 한답니다.
그리고 최고 책임자로부터 "도대체 왜 사직서를 썼느냐? 좀 더 함께 일할 수는 없겠냐?"는 듣기 행복한 만류의 말을 들어야 한답니다.
요즘같이 어려운 시기, 무리한 방법보다는 함께 고통을 분담하고, 함께 나누고, 함께 협력하는 방법을 통해 우리 앞에 놓인 이 난관을 함께 견디고 함께 안개 속을 헤쳐나가는 우리 가정, 우리 직장,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은혜로운 대림 시기도 어느덧 두 번째 주일로 접어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세례자 요한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자비로운 아버지의 따뜻한 시선으로 우리 주변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이웃들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그들의 인간성 회복을 위해 노력하도록 합시다.
죽음과도 같은 고통 앞에 망연자실하게 넋을 잃고 앉아있는 이웃들 삶을 개선시키는 구체적 ‘구원의 손길’이 됩시다.
진정한 회개의 잣대는 다름 아닌 삶의 변화입니다.
억압받는 이웃들을 향한 적극적 투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관대한 나눔, 그것은 회개의 가장 좋은 표시입니다.
우리 삶이 그저 단순한 하나의 반복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들을 향한 끝없는 개선의 길, 나날이 성장하고 쇄신되는 참된 회개 생활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 희망, 기쁨, 회개, 사랑>
“그리움이
깊어지면
병이 된다 하지만
당신 향한
내 사랑은
기도가 되고, 별이 됩니다.
당신
영혼의 하늘에
빛나는 별이 되어, 수호천사 별이 되어
언제나
당신을
비출 것입니다.”
새날 밤마다 잠 깨면 일어나 우선 바라보는 하늘의 별입니다.
초겨울 하늘의 별은 유난히 총총히 빛납니다.
대림 2주일 역시 밤하늘의 빛나는 별들을 바라봤을 때 떠오른 24년전 별이란 시였습니다.
그대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노래한 기도시입니다.
우리만 주님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그 이상으로 우리를 그리워하고 사랑하십니다.
우리 영혼의 하늘에 빛나는 별로, 수호천사 별로 떠올라 언제나 우리 광야 인생 여정을 비춰 주는 주님이십니다.
바로 결정적 역사의 시점에 광야의 요한에게 떠오른 주님의 별이었습니다.
흡사 영롱하게 빛나는 대림초 둘이 "깨어 살라!" 촉구하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별처럼 느껴집니다.
오늘 복음 시작을 보면 티베리우스 황제를 비롯하여 5명의 역사적 실제 인물이 나오는데, 바로 요한의 출현이 우연이 아닌 하느님 섭리의 필연적 역사적 사실임을 알립니다.
때가 되자 말씀의 빛나는 별이 광야의 요한에게 떠오른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요한에게 내렸다.’
결정적 순간의 장면이 아름답고 신선한 충격입니다.
그대로 대림의 광야 여정중인 우리의 체험처럼 생각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요한의 출현은 대림 광야 여정 중의 우리에게 참 깊은 깨우침과 가르침을 줍니다.
광야 여정 하니 문득 2014년 안식년 중 산티아고 순례 여정이 생각납니다.
대림의 광야 여정 역시 우리 인생 여정을 요약합니다.
산티아고 순례여정 중 목적지 산티아고에 가까워질수록 기쁨이 더해지듯 우리의 인생 광야 여정 역시 주님의 집에 가까워질수록 날로 기쁨이 더해짐을 은연중 느낍니다.
아, 대림의 광야 여정은 귀가 여정으로 바로 죽음 준비를 위한 주님의 자비로운 배려임을 깨닫습니다.
전례의 아름다움은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합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은 교회 전례의 아름다움을 통해 환히 드러납니다.
바로 이런 전례 은총이 광야 여정중인 우리 삶을 날로 아름다움으로 빛나게 합니다.
지난주에 이어 아침 성무일도 세 후렴의 아름다운 가사와 곡도 잔잔한 위로와 기쁨을 줍니다.
“시온산은 우리 힘과 피난처이니, 구세주는 그의 성과 보루가 되리라.
성문을 열라.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도다.
알렐루야.”
“목마른 자는 물있는 데로 가거라.
만날 수 있을 때에 주를 찾으라.
알렐루야.”
“보라, 우리 주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시어, 당신 종들의 눈을 밝혀 주시리라.
알렐루야.”
지난 주일에 이어 오늘 대림 제2주일 하루도 끊임없는 기도노래로 바치려 합니다.
이런 교회의 전례 은총이 광야 여정중인 우리를 ‘알렐루야’로 시작해 ‘알렐루야’로 끝맺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별처럼 아름다운 주님 찬미로 시작하여 주님 찬미로 끝나는 알렐루야 광야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광야 인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림시기요,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믿는 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주님을 기다렸다 기쁨으로 맞이하는 대림의 날입니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는 주님 명령에 응답하여 아름다운 대림 광야 여정이 되기 위한 네 구체적 처방을 제시합니다.
첫째, 희망입니다.
대림의 희망입니다.
대림의 광야라지만 희망의 빛이 환히 길을 비춥니다.
우리가 가는 대림의 여정은 바로 영원한 도반,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자 희망이신 주님과 함께 하는 여정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바룩 예언자는 우리 모두 희망의 옷으로 갈아입을 것을 권합니다.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바 교회요, 교회의 지체들인 우리 하나하나입니다.
“예루살렘아,
슬픔과 재앙의 옷을 벗어 버리고,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입어라.”
“예루살렘아,
하느님에게서 오늘 의로움의 겉옷을 걸치고, 영원하신 분의 영광스러운 관을 네 머리에 써라.”
“예루살렘아, 하느님께서 하늘 아래 어디서나, 너의 광채를 드러내 주시고, ‘의로운 평화, 거룩한 영광’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너를 부르실 것이다.”
“예루살렘아,
일어나 높은 곳에 서서, 동쪽으로 눈을 돌려 보아라.”
얼마나 고무적인 희망찬 말씀인지요!
한마디로 희망으로 빛나는 옷을 입고, 관을 쓰고 동쪽으로 눈을 돌려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형제들을 보라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빛나는 희망의 옷을 입혀 주시고, 희망의 관을 씌워 주십니다.
둘째, 기쁨입니다.
대림의 기쁨입니다.
대림의 희망에 저절로 따라오는 대림의 기쁨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 맞이하는 기쁨입니다.
바룩 예언자의 말씀이 우리의 기쁨을 배가합니다.
기쁨의 예언자 바룩입니다.
외적 환경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샘솟는 기쁨입니다.
“주님이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바로 오늘 화답송 후렴도 이를 입증합니다.
우울이나 심각함은 결코 영성의 표지도 아니고 하느님께 모독이 됩니다.
“하느님의 명령으로 숲들도 온갖 향기로운 나무도, 이스라엘에게 그들을 드리우리라.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서 나오는 자비와 의로움으로, 당신 영광의 빛속에서 이스라엘을 즐거이 이끌어 주시리라.”
얼마나 은혜롭습니까!
이스라엘이 상징하는 바, 미사은총을 가득 받는 우리들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대림 광야 여정을 축복해 주시는데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기쁨의 예언자 바룩에 이어 기쁨의 사도 바오로가 옥중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필리비 교회 신자들은 물론 대림시기를 지내는 우리 모두를 향한 바오로의 축복의 기도입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기도할 때마다 늘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여러분이 첫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좋은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까지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주님 만날 날이 하루하루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성탄을 앞둔 대림만이 아니라 죽음도 이렇게 기쁨으로 맞이했으면 소원이겠습니다.
셋째, 회개입니다.
특히 대림은 회개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요한입니다.
우리의 세례를 늘 새롭게 하는 회개와 용서입니다.
바로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것이며 그분의 길을 곧게 하는 회개의 구체적 실천입니다.
이사야의 주님 말씀을 받아 그대로 전하는 요한의 주님 말씀이 그 구체적 상징적 처방입니다.
“골짜기는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바로 이것이 회개의 혁명, 피흘리지 않는 사랑의 혁명입니다.
우리 사이의 불평등으로 깊어진 골을 메우는 것이며, 교만의 산과 언덕을 겸손으로 깎아 낮추는 것이며, 거짓과 위선, 허영과 왜곡으로 굽은 길은 곧게 하고, 불화와 불평불만으로 거친 길은 평화와 안정의 평탄한 길로 바꾸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모든 피조물, 모든 중생,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봅니다.
그대로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약한 자들을 도와주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절망한 자들에게 희망을 주시고, 당신께 마음을 연 모든 이들에게 생명을, 진정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일에 참여하는 우리의 회개의 실천입니다.
바로 회개의 구체적 실천은 대림시기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새삼 대림시기 역시 은총의 선물임과 동시에 실천해나가야 할 과제임을 깨닫습니다.
넷째, 사랑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회개의 열매가 사랑과 겸손입니다.
무엇보다 오실 주님을 열렬히 사랑하며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주님 기다리는 그리움의 설렘에 잠 깨어 쓰는 날마다의 강론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사랑이 감동스럽습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은 이처럼 형제들에 대한 사랑으로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남녀의 성적 사랑을 초월한 보편적 형제 사랑입니다.
얼마나 주님을, 형제들을 사랑하는 바오로인지요!
바로 다음 말씀 역시 시공을 초월하여 필리비 신자들을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한 바오로 사도의 간곡한 순수한 아가페 사랑이 가득 담겨 있는 ‘사랑의 결정체’같은 말씀입니다.
“사실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애정으로 여러분 모두를 몹시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증인이십니다.
그리고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 더 풍부해져,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때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부디 이런 사랑 충만한 대림 광야 시기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바오로의 말씀에 그대로 공감하니 강론을 쓰는 제가 흡사 바오로가 된 기분입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회개한 영혼들에게 선사되는 겸손, 지식, 이해, 분별의 지혜등 풍부한 축복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광야의 대림시기, 우리의 영원한 도반 이신 희망의 주님을, 기쁨의 주님을, 회개하게 하는 주님을, 사랑의 주님을 선택하여 열렬히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행복한 대림 광야 여정을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오소서, 주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평화,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새날,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기에 결혼한 조카도 많고 또 자녀를 낳아 저로서는 이른 나이에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조카들이 모두 열심히 살고 있기에 다들 자기 자리에서 나름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카 중 한 명이 조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법정 분쟁까지 가게 되어 큰 손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무척 속상했습니다.
조카에게 큰 손해를 안겨 준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괜히 미워졌습니다.
무엇보다 사제인 제가 조카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줄 것이 없다는 사실이 더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기도 중에 이런 생각이 떠올려졌습니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구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을 제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조카의 일은 제가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은 기도이기에 열심히 기도로만 함께하는 것입니다.
걱정은 되지만 굳이 걱정에 휘말려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세속적으로는 솔로몬 왕 이후로 한 번도 두각을 드러낸 적이 없었습니다.
특히 로마의 황제 티베리우스가 세계를 통치하고 있었고, 유다 땅은 로마인의 총독 본시오 빌라도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본시오 빌라도 밑에서 로마에 아부하는 헤로데 일가의 3형제가 유다 땅을 나누어 영주로 있었습니다.
또한 종교적 지도자 구실을 하던 이스라엘의 대제관직도 카야파의 손에 들어가 하느님의 백성은 세속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죄를 뉘우치고 세례를 받으라는 구원의 소리가 광야에서 들려왔습니다.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는 구약시대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요르단강 주위의 지방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하면서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독립을 시도해 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 하는 일에만 집중합니다.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받아들일 준비를 시키는 것, 회개하고 죄의 용서를 받도록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이가 정치적인 한계에서 벗어나, 하늘 나라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더 큰 가치 안에서 참 행복의 길을 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위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또 반드시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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