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운사의 보물창고, 미타전(彌陀殿)과 대웅전(大雄殿)
▲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미타전 |
대웅전 뜨락 동쪽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미타전이 자리해 있다. 미타전
의 주인장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로 절의 제일 보물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이 홀로 봉안되어 있다. 그는 원래 명부전에 얹혀 살았으나 1995년 몸 속에서 온갖 진귀한 보
물이 쏟아져 나오자 지금의 미타전을 손질해 그의 전용 공간으로 삼았다. |
▲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보물 1649호 |
서방정토가 있다는 서쪽을 바라보고 앉은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나무를 조각하여 금색으로 도
금을 입힌 것으로 높이 118cm, 무릎 너비는 92cm이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근래 조성된 것처럼 젊어 보이나 그런 겉모습과 달리 고려 후기에 조성
된 나이 지긋한 불상으로 개운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특히 1995년에 그의 몸 속에서
발원문을 비롯한 고려시대 문서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오면서 그의 오랫동안 숨겨졌던 정체가
드러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그의 가치도 몇 곱절이나 높아졌다.
우선 불상의 모습을 살펴보면 머리는 검은색으로 꼽슬인 나발이며, 머리 정상에 무견정상(無
見頂相, 육계)이 두툼히 솟아있다. 이마에는 하얀 백호가 찍혀있고, 눈썹은 무지개처럼 구부
러져 있으며, 눈은 지그시 떠서 정면을 바라본다. 코는 작고, 입술은 붉으며, 검은 수염이 얕
게 표현되었는데, 얼굴은 갸름하면서도 살이 있어 보이며, 두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져 중생
의 고충에 귀만 기울인다.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두 손은 아미타9품인(阿彌陀九品印)의 하나인 하품
중생인(下品中生印)의 변형을 짓고 있으니 이는 화성 봉림사(鳳林寺)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
물 980호) 등 고려 후기 아미타불 수인과 비슷하다.
개운사에서 마련한 목조 대좌(臺座)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데, 체격이 당당해 보이
며, 오른발을 왼쪽 무릎 위에 올려 발바닥을 드러낸 이른바 길상좌(吉祥坐)를 취하고 있어 눈
길을 끈다.
불상의 몸을 가린 법의(法衣)는 통견의(通肩衣)로 신라시대 법의보다 두터워 보이며, 옷 주름
은 그럴싸하게 접혀 있다. 양쪽 어깨를 옷으로 가리고 가슴 부분은 드러냈는데, 가슴 밑에 표
현된 승각기는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띠 매듭이 없다. 이런 형태는 화성 봉림사 목조아미타
여래좌상과 서산 개심사(開心寺)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 1619호),
서울 수국사(守國寺) 목
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 158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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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동일한 것으로 착의법과 주름이
거의 일치한다.
이 불상은 이렇게 단엄(端嚴)한 상호와 세련된 조각 기법, 장중하면서도 균형감 있는 조형 감
각, 긴장감 넘치는 선묘(線描), 보존 상태 양호로 완성도 높은 고려 후기 불상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그가 순도 100% 고려 후기 불상임이 밝혀진 것은 바로 그의 몸 속에서 나온 유물들 덕
분이다. |
▲ 아미타여래좌상 뱃속에서 나온 중간대사 원문 (문화재청 사진) |
불상 뱃속에서는 3장의 귀중한 발원문(發願文)이 나왔다. 이중 '중간대사 원문(中幹大師 願文
)'은 1274년에 작성된 아미타여래좌상 개금(改金) 발원문으로 문서의 크기는 '54x56cm'이다.
이 문서는 1274년에 아산 축봉사(竺鳳寺)에 있던 본 불상을 개금하면서 남긴 것인데, 이를 통
해 불상의 원래 위치를 알려주고 있으며, 그의 조성 시기는 늦어도 1273~1274년, 이르면 13세
기 초/중반임을 귀뜀해 준다. (1274년 이전에 제작됨)
특히 이 땅에 남아있는 고려 후기 불상 중 가장 오래된 중수원문(重修願文)으로 개심사 목조
아미타여래좌상 중수원문(1280년)보다 6년이나 빠르며 13세기 불상이 거의 없는 현실에서 더
욱 가치를 발한다.
그리고 '최춘 원문(崔椿 願文)'은 금불복장조성 발원문으로 '56x55.5cm' 크기이며, '천정 혜
흥 원문(天正 惠興 願文)'은 불상을 개금하면서 작성한 10종의 대원(大願)을 담은 발원문으로
'37x220cm' 크기인데 이들 2장은 1322년에 작성되었다. 현재 중간대사 원문을 비롯한 발원문
3장은 신변 보호를 위해 조계사 옆에 있는 불교중앙박물관에 가 있으며, 목조아미타여래좌상
과 발원문 3장은 한 덩어리로 보물 1649호로 지정되었다.
발원문 외에도 전적(典籍)류 28점, 문서 13점도 발견되었다. 불상 뱃속에 나온 유물을 복장유
물(腹臟遺物)이라 부르는데, 1995년 아미타여래좌상이 있던 명부전에 정신 나간 도둑이 들어
와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의 절반 정도를 훔쳐갔으며 아미타여래좌상 뱃속까지 손을 대어 사리
장치가 든 후령통(候鈴筒)까지 가져갔다. 이로 인해 본의 아니게 불상의 뱃속이 강제로 개방
된 것이다. 이때 개방된 뱃속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오래된 경판(經板) 15점, 옛 사경(寫經) 7
점, 조선시대 목판본 불서(佛書) 6책, 다라니 8종, 탁본 1점, 족자 1점, 그리고 발원문 3점
등 총 41건 58점이 빛을 보았다. 실로 엄청난 유물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전적 28점 중 22점은 9세기부터 13세기에 간행된 오래된 경전이고, 나머지 4종 6책은 조선 때
간행된 목판본이다. 오래된 22점 가운데 목판본 도장(道藏)인 '영보경(靈寶經)'과 필사본 '보
살보행경(菩薩本行經)'을 제외하고 모두 대방광불화엄경으로 지금까지 수습된 단일 불상의 복
장유물 가운데 가장 수량이 많다.
이들 유물을 통해 1274년 개금 이후 4번 이상 중수를 벌였음이 밝혀졌으며, 신라 후기부터 고
려시대를 거쳐 조선까지 다양한 시대의 불경과 문서들이 들어있어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신라 후기와 고려 초에 간행된 불경들은 그 수량이 매우 적은 상태로 그 부족분을
채워줄 수 있는 귀중한 존재이다. 그래서 발원문과 별도로 전적류 21점은 '개운사
목조아미타
여래좌상 복장 전적'이란 이름으로 보물 1650호로
지정되었다. 이들은 현재 발원문을 따라 불
교중앙박물관에 가 있다.
그리고 나머지 16건 33종은 별도로 '개운사 목 아미타불좌상 복장일괄'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
방유형문화재 291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원래 복장유물 전체가 이 등급에 있었으나 2010년
4월에 발원문과 전적 21점을 따로 떼어내 보물로 지정하면서 3개의 다른 이름과 등급을 지니
게 된 것이다. 그만큼 이 불상과 불상 뱃속에서 튀어나온 유물이 유별나고 대단하기 때문이다.
현재 지방문화재 복장 유물은 개운사와 불교중앙박물관에 있으며, 아쉽게도 복장유물 어느 것
도 만나지 못했다. 보존 관리상 개방을 거의 안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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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파일이 준 고마운 선물, 개운사 괘불(掛佛) |
대웅전 뜨락에는 아기부처상 외에도 매우 보기가 힘든 괘불까지 왕림을 하여 나를 무척 들뜨
게 하였다. 그렇다면 괘불이 도대체 무엇이건데 나를 그렇게 기쁘게 했을까?
괘불은 조선 중기부터 등장하는 커다란 불화(佛畵)로 초파일과 절의 주요 행사일에만 잠깐씩
외출을 나온다. 그러기 때문에 왠만한 운으로도 만나기가 어려우며 그나마 만날 확률이 높은
날이 초파일이다. 내가 평소에도 많은 오래된 절을 돌아다님에도 초파일에 무조건 절 답사에
나서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레어템<raretem, rare(희귀한)+item(물건)의
합성어>인 괘불을
보고자 함이다.
허나 초파일이라고 100% 외출을 하진 않는다. 이번 초파일에 4곳의 절집을 갔지만 겨우 개운
사에서만 괘불을 봤을 뿐이다. 확률로 따지면 1년에 정말 1번 정도 보는 꼴이다. 그러니 괘불
을 만났다면 꼭 복권을 사기 바란다. 레어템 중의 초레어템을 만났으니 말이다. (당첨은 장담
못함)
개운사 괘불은 1879년에 제작된 것으로 석가불과 지장보살, 나한(羅漢) 등이 그려져 있다. 저
녁이 다가옴에 따라 그 큰 그림이 절반 정도 둘둘 말려져 있는데 괘불 밑에는 그의 거처인 길
쭉한 괘불함이 입을 벌리며 그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린다. 하지만 괘불은 그리 들어가고 싶은
눈치는 아닌 것 같다. 함에 들어가면 긴 시간을 갇혀 지내야되기 때문이다. 괘불 앞에는 중생
이 진상한 과일과 떡이 놓여져 있고 복전함이 무려 2개씩이나 설치되어 적지 않게 옥의 티를
선사한다. |
▲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본 괘불의 뒷모습
붉은 색의 문자는 무엇인지 모르겠다.
▲ 개운사 대웅전 |
개운사의 법당인 대웅전은 1993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
다. 2006년에 단청 불사를 했으며, 선방 다음으로 큰 건물(정진관 등의 현대식 건물은 제외)
로 뜨락보다 3~4m 정도 높게 석축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다진 탓에 무척 우람해 보인다. 건
물 내부에는 석가3존불과 후불탱화, 팔상도 등의 여러 그림이 깃들여져 있는데, 이중 팔상도
와 신중도, 현왕도, 지장시왕도는 지방문화재이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그림이 봉안된 위치
는 변경될 수 있음) |
▲ 대웅전 가운데 칸에서 굽어본 뜨락과 관불의식의 현장
개운사의 좁은 하늘을 가득 채운 연등이 저 밑에 보이니 마치 오색 구름 위에
올라선 기분이다.
▲ 대웅전 석가3존불과 후불탱화
조그만 석가불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좌우에 거느리며 중생들의 하례를 받는다.
그 앞에는 불단이 무너질 정도로 온갖 음식과 과일들이 진상되어 있다.
▲ 개운사 감로도(甘露圖) -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212호 |
감로도는 물과 육지에서 방황하는 영혼과 아귀(餓鬼)를 위로하고자 부처의 법을 강론하고 음
식을 베푸는 수륙재(水陸齋)를 위한 그림이다.
신중도 이상만큼이나 등장 인물이 많고 무대가 넓어서 복잡하기 그지 없는데 그림 상단에는 7
명의 여래(如來)와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 아미타내영도(阿彌陀來迎圖)를 배치했고, 하단에
는 의식 장면과 아귀상, 지옥상, 윤회하는 중생도 등 6도중생이 담겨져 있다. 산수와 구름으
로 적절히 경계를 그었고, 다채로운 모습의 인물들과 적/녹/청/황/백색이 어우러진 색감과 안
정적인 필치(筆致), 충실한 풍속 묘사 등이 돋보인다.
이 그림은 1883년에 조성되었으며, 원래가 영가(靈駕)를 위한 그림이라 그 앞에는 죽은 이들
의 위패와 영정이 가득해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
▲ 개운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213호 |
대웅전 동쪽 벽에는 법당 수호용으로 걸린 신중도가 걸려있다. 신중도란 불법(佛法)을 수호하
는 신들의 무리를 담은 것으로 등장 인물이 너무 많아 그야말로 정신을 쏙 빼놓는다. 그림 중
앙에는 제석천(帝釋天)과 천룡(天龍) 등이 자리해 있고, 그 주위로 무장을 한 신들이 배치되
어 있는데 1870년에 제작된 것으로 액자 안에 소중히 담겨져 있다. |
▲ 개운사 팔상도(八相圖) -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214호 |
팔상도는 부처의 일대기를 출생부터 열반까지 8개의 그림으로 정리한 것으로 1883년에 조성되
었다. 그림의 보호를 위해 액자 안에 담겨 있으며, 각 부분에 대한 설명은 쿨하게 생략한다. |
▲ 개운사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215호 |
지장시왕도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중심으로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 저승
의 10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멤버들이 담겨진 것으로 1870년에 제작되었다. 지장보살
밑에는 동자 2명이 그의 육환장(六環杖)과 두건을 들며 서로를 바라본다. |
첫댓글 둘레길을 두번이나 그냥 걸었는데
역사를 알고나니 또 가 봐야 되겠다는 맘이 앞장섭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운산둘레길도 거닐만하죠.
엊그제 개운산 걸었습니다. 잘 봤습니다
이렇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