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 하린 (시인)
27. 상상 테마26 - 색깔 이미지로 상상하며 시 쓰기
@ 소재나 모티브가 갖는 특징과 상상 적용 방법
색깔이 갖는 상징성이나 암시성은 대단하다. 빨강은 열정·흥분·과격·혁명·더위·혈액·일출·활력 등을 상징하고, 주황은 원기·적극·희열·활력·건강·밝음·만족·유쾌 등을 상징한다. 그리고 노랑은 희망·광명·팽창·명랑·금·부귀 등을 상징하고, 녹색은 휴식·엽록소·안식·평화·안전·중성·평정·여름·청춘 등을 상징한다. 또한 파랑은 서늘함·하늘·물색·우울·적막·냉담·고독·추위 등을 상징하고, 남색은 차가움·심원·냉정·염원·성실·깊은 물·깊은 계곡 등을 상징한다. 아울러 흰색은 순수·청결·소박·순결·신성·정직·정의·자유·공포 등을 상징하고, 검정은 허무·절망·침묵·부정·죄·죽음·엄숙·밤·슬픔·후회 등을 상징한다. 이렇게 상징성이 강한 색깔들을 바탕으로 상상을 적용해 시를 한 편 써보자.
상상을 적용할 때는 위에서 제시한 원형적인 상징성을 바탕으로 간절함을 암시해도 되지만, 시적 대상이나 화자의 개별적인 색깔 이미지를 바탕으로 상상하면 더욱 좋다. 예를 들어 가난하지만 적응력이 뛰어난 존재를 ‘카멜레온’에 빗대 이 시를 쓴다고 치자. 회사에서 존재감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면 그의 색깔은 ‘투명’일 것이고, 집에 갔을 때 분노를 삭이고 있다면 그의 색깔은 ‘붉음’일 것이다. 이렇게 개별 존재에 따라 색깔이 설정되어 시가 전개되면 색깔에 따른 재미있는 시가 탄생하게 된다.
또한 역발상이나 역설적 상상을 통해 검정을 이미지로 다룰 수도 있고, 흰색을 고독의 이미지로 다룰 수도 있다. “검정을 난 사랑해요/ 나만의 봄을 검정이 부추겨요/ 그러니 까마귀를 주세요/ 까마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아요/ 왜 넌 엄마의 태몽 속으로 날아왔니?”와 같은 낯선 구절로 시작하는 시도 쓸 수 있다. 이렇게 개별자의 상태에 따라 색깔 이미지를 활용해 낯설게 하기를 구현해야 한다. 색깔에 대한 역발상이나 낯설게 하기가 잘되지 않으면 두 가지 색깔을 혼용해서 시에 펼쳐도 되고, 투명이나 불투명에 관한 상상을 해도 좋다.
필자의 시를 통해 그 소재가 어떻게 상상과 만나 펼쳐지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자.
회색 검정 / 하린
아이들은 그 순간에도 동글동글 태어났지 싱싱한 과일을 고르듯 천사가 천사를 쓰다듬었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눈송이는 숨소리 하나씩 달고 내려와 녹도 슬지 않고 배경으로 쌓였지 고양이들도 조심스럽게 걸어갈 것만 같은 백색 위로 새벽 근무를 마친 어린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왔지 과일맛 사탕을 빨며 경쾌하게 쓸모를 빠져나오던 천진난만이란 아이가 순식간에 자란 느낌이랄까 그런데 데리러 온다던 애인이 오지 않는 거야 그때 비로소 회색은 시작되는 거지 폭설이 내려 백색을 덧칠해도 여자가 서성인 자리는 자꾸만 녹아내려서 불순물처럼 번져 갔지 눈발을 뚫고 앰뷸런스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지 여자가 출혈을 멈추지 않았을 가랑이를 떠올리는 건 위험한 일이야 순산한 미혼모의 기분과 난산한 기혼모의 기분을 알려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야 연애에도 감출 수 없는 진통이 있다고 믿으면 그만일 뿐 애매한 감정을 열 달 넘게 키우고 있으면서 애인은 왜 이중적인 호흡법을 숨기고 있었을까 여자는 자신에게 자꾸 되물었지 애인을 누가 나 대신 받아내고 있던 걸까 그런데 천사는 어느 애인으로부터 태어나는 걸까 ― 『1초 동안의 긴 고백』, 문학수첩, 2019.
1단계 - 스스로 점검하기 – 메시지 분명히 하기+내 시만의 장점 찾기
회색이란 백색과 흑색의 중간이다. 회색을 감정으로 치면 이중적인 감정 혹은 애매한 감정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 그런 이중적인 지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물론 정치적으로 사상적으로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니고, 어느 쪽인지 뚜렷하지 않은 경우 ‘회색주의’라고 하는 부정적인 용어도 있다. 그런 사회학적인 의미의 ‘회색’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의미의 ‘회색’ 감정에 대해 쓰고 싶었다. 그래서 탄생한 시가 「회색 감정」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어린 간호사는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품고 있다. 새벽 근무를 마치고 애인을 기다리는데 오지 않는다. 산부인과에서 천사를 받아내듯 아이를 받아내고 있기에 그는 순일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애매한 감정을 열 달 넘게 키우고” 있는 애인이 오지 않으니 순일한 감정에 이물질이 섞이고 만다. 그렇게 100% 하나의 감정으로 규정되지 못한 이중적인 감정을 표현하고 싶어서 ‘회색’을 차용했다.
이 시의 장점은 애매하거나 이중적인 감정을 상상을 통해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점이다. 감정의 문양이 간호사가 처한 상황을 통해 적극적으로 환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2단계 - 객관적 상관물(현상)을 찾기+관찰과 조사 정밀하게 하기
이 시에서 객관적 상관 현상은 출산이다. 출산을 하거나 출산을 돕는 행위가 간호사의 회색 감정을 두드러지게 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근무를 마치고 “경쾌하게 쓸모를” 빠져나오며 ‘천진난만’이 된 간호사. 애인이 오지 않자 회색 감정에 돌입하는데 그 감정으로 인해 자신의 ‘천진난만’이 점점 사라지게 될 것 같은 예감에 휩싸인다. 그녀는 “눈발을 뚫고 앰뷸런스 소리가 가까워”질 때, “출혈이 멈추지 않았을 가랑이를 떠올리는 건 위험한 일”이라고 감정을 경계한다. 회색 감정 상태에 놓인 “순진한 미혼모의 기분과/ 난산한 기혼모의 기분을/ 알려고 해서”도 안 된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그렇게 출산하는 행위는 간호사의 회색 감정을 두드러지게 하는 역할로 쓰였다.
3단계 - 확장하기 – 상상적 체험을 섬세하게 하기
이 시에 등장하는 간호사의 상황과 심리 상태는 전부 상상적 체험에 의해 형성된 것들이다. 필자는 3교대를 하는 산부인과 간호사들이 있다는 사실을 예전에 알게 되었다. 그 정보를 바탕으로 새벽에 퇴근하는 간호사의 상황을 상상했다. 일부러 어린 간호사로 설정한 이유는 순일한 감정을 부각하기 위해서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간호사이기에 아이를 받아내는 일이 천사를 받아내는 일과 같을 것이라는 추측을 했다. 그런 간호사에게 애인의 변심은 순일한 감정을 희석시키는 이물질이다. 그래서 마중 나오기로 한 애인이 오지 않는 상황을 개입시켰다.
* 또 다른 예문
있잖아요, 분홍 / 정진혁
분홍이라는 말 이제 좀 알 것 같아요 분홍으로 산다는 건 달콤하게 익어 가는 것 내 눈과 내 낱말들이 누군가의 한 잎 속에서 산다는 것
당신의 한 잎은 온통 숨결이어서 마음을 실어 나르는 수레여서 분홍 잎맥을 따라 스며든 시간들 사이여서
날마다 분홍 안에서 익숙해지는 몸짓 분홍을 입어요, 분홍을 먹어요, 분홍을 춤춰요 분홍은 나를 얼마나 멀리 밀고 가는지
있잖아요, 그거 알아요? 청평리라든지 덕적도 여수 부산 통영 무의도 같은 지명을 여기선 다들 분홍이라 불러요 한여름 배롱나무 산딸기 복숭아 떨어지는 꽃잎도 나는 분홍이라 불러요
분홍에서만 나를 느낄 수 있으니 뒤집혀도 분홍 분홍과 분홍 사이에서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둥긂이 되었지요
있잖아요 분홍 한 장을 넘기며 가장 낮은 곳 가장 높은 곳에서 울어 본 적 있나요? 한 잎의 분홍 앞에서 웃어 본 적 있나요
오늘은 분홍이 지는 곳까지 걸어가 봤어요 거기까지 가 보니 당신이 진짜 분홍이었어요 오뉴월 복중 같은 사내 하나가 그 속으로 들어가서는 영 나오지 않았어요 -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 파란, 2020.
백색소음 / 황유원
지우개를 한 번 갖다 댈 때마다 흰 공터가 생겨나고 거기 빛이 들어요 졸려요 엄마 품에 안기기엔 너무 나이들어버렸으니 말랑말랑한 지우개 가루 만지며 잠이 들까요 방금 막 열심히 지운 지우개의 가루는 따스해요 건조기에 넣고 돌린 수건들처럼 졸려요 안고 있으면 꿈은 여전히 온갖 선과 색채들로 가득하겠죠 꿈에서도 지우개가 필요할지 꿈에도 몰랐나요 몰랐나요 ‘존재는 소음으로 가득하다’라는 그 유명한 명제를? 몰라도 돼요 제가 방금 만든 거니까 건조기 돌아가는 소리 같은 생각들이 자꾸 쿵쾅거리며 머릿속을 들락거리는 밤 지우개를 손에 쥐고 잠을 자볼까 봐요 꿈의 한쪽을 하얗게 지워주고 나올까 봐요 너무 열심히 지우면 꿈 한쪽이 뜨거워지겠죠 그럼 전 또 집에 불이 난 꿈을 꿀 테고…… 괜찮아요 시커메진 곳엔 다시 새 지우개를 갖다 대면 되고 다 타서 재가 된 곳을 위해서라면 지우개를 수백 수천 개라도 사오면 될 테니 좋아요 좋아 다 못 지워도 좋아 어차피 다 지울 수 있을 리 없잖아 백색은 못 되더라도 어쩌면 백색소음에는 이를 수 있다는 믿음으로 밤새 흰 눈이라도 내린 듯 하얗게 하얗게 - 《현대시》 2020년 12월호
보라의 경계 / 이여원
떠돌던 보라색들이 눈 주위로 모여든다 흘기는 곳마다 보라색이다 멍든 것에서 최후에 배어 나온다는 보라 경멸의 색깔이 당신의 눈치채지 못한 곳마다 묻어 있다면 미움의 말끝마다 이미 멍이 들었다는 것이다 착각하는 보라 맞은 곳을 용서하듯 맞은 곳에서 빠져나오는 보라 우아함을 가장한 말투로 보라의 시간으로 옹졸한 마음에서 복수로 바뀌는 색 우리는 너를 보라로 물들기를 바래
보라는 보라를 보라로 느끼지 못하고 신음 뒤에 흘러나오는 색과 깻잎의 뒷면에 숨겨놓은 보라는 무얼 뜻하는지 알 것도 같지만 보라의 관계 해독제는 불평과 요청을 적절하게 섞는 일 당신이라는 주어를 당신 아닌 나로 전달할 때 비껴가는 회피의 색이 되고 또 다른 헤게모니로 나가는 길이 보라로 물들고 만다 - 《유심》 2015년 9월호
- 출처 :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더푸른, 2021.09)
* 하린 시인 1971년 전남 영광 출생.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 학위. 1998년 〈광주매일〉신춘문예 시 당선, 2008년 《시인세계》 등단.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 『1초 동안의 긴 고백』. 연구서 『정진규 산문시 연구』 시 창작 안내서 『시클』 시 창작 제안서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이것만 알면 당신도 현대 시조를 쓸 수 있다』 청마문학상(2011), 송수권시문학상(2015), 한국해양문학상(2016),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2020) 수상. 현재 중앙대 문화예술대학원 전문가과정 시 창작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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