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http://www.hh.em-net.ne.jp/~harry/perry_sketch.html]
(註) 에도바쿠후(江戸幕府) 시대의 '남녀 혼탕'의 모습이다. 이런 풍습이 언제 모두 사라졌는지?
<참고>
매슈 캘브레이스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Matthew C. Perry, 1794년 4월 10일 ~ 1858년 3월 4일)는 미국 해군 군인으로 이리 호 전투에서 활약한 미국 해군의 영웅 올리버 페리의 동생이다. 쇄국을 하고 있던 일본의 에도 시대에 함대를 이끌고 내항하여 미일 화친 조약을 통해 일본을 개항하게끔 만든 사람이다. 내항 당시의 막부는 네덜란드어 통역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문서에는 네덜란드 풍 발음의 '페루리(ペルリ, 한자로는 피리彼理)'로 표기되었다.
윌리엄 페리(William J. Perry) 전 북핵조정관은 그의 일가이다.
1852년 3월에 동인도함대 사령장관에 취임하여 일본을 개국하라는 지령(단, 발포는 금지되었다)을 부여 받았다. 동년 11월 필모어 대통령의 친서를 휴대하고 버지니아 주 노퍽을 출항했다. 프리깃함 미시시피호를 기선으로 한 4척의 함대는 카나리아 제도ㆍ케이프타운ㆍ싱가포르ㆍ홍콩ㆍ상해ㆍ류큐(오키나와)ㆍ오가사와라 제도를 경유하여 1853년 7월 8일, 우라가(浦賀)에 입항했다. 7월 14일에 막부 측이 지정한 구리하마(久里浜)에 호위를 거느리고 상륙하여 도다 우지요시(戸田氏栄)ㆍ이도 히로미치(井戸弘道)에게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여기에서는 구체적인 협의를 진행하지는 않은 채 개국의 요구를 한 것으로 보이며, 만을 며칠간 측량한 후 식료 등 함대의 사정도 있어서 막부에 다음해까지 유예를 주어 류큐로 돌아가 기항했다.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면서 미국에 극동사정이 전해지는 중이던 1854년 2월 13일에 기함 서스케하나호 등 7척의 군함을 이끌고 현재의 요코하마 시 가나자와 구 앞바다에 육박해 조약체결을 요구하여, 3월 31일에 가나가와에서 미일화친조약을 조인했다. 또 그 후, 나하에 기항하여, 7월 11일에는 류큐 왕국과도 미류수호조약을 체결했다.
귀국한 후는 원정기 등을 썼다. 만년은 가발을 착용했다. 1858년 3월 4일에 64세로 뉴욕에서 죽었다. 묘소는 로드아일랜드 주의 아일랜드 묘지에 있다.
[출처=위키백과]
첫댓글 지금도 혼탕이 있는것으로 알고있습니다.. 가끔 올라오는것 같은데요^^
헌데, 류구는 임진왜란때 망하지 않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