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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기.혁.님 1번 진찰실로 들어오세요”
제 차례를 알리는 기계음에 기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에 앉아 넋 놓고 대기실에 걸린 TV를 시청하던 서원이 진찰실로 들어가는 기혁을 보았다. TV는 독감예방 주사의 중요성에 대해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서원은 그제서야 반곱슬의 이름이 유기혁임을 알 수 있었다.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기혁은 진찰실에서 나왔다. 그리곤 곧장 주사실로 들어갔다.
서원은 장난기가 발동하여 스리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주사실로 향했다. 서원을 막는 사람은 없었다.
살짝 열린 주사실 문을 과감하게 열고 들어갔다. 주사에 약을 넣고 있던 간호사는 깜짝 놀라 그만 약병을 떨어뜨릴 뻔 했다.
“들어오시면 안돼요”
“얘가 겁이 많아서 이렇게 옆에 있어줘야 해요”
간호사가 의아한 눈빛으로 기혁을 쳐다보았다.
서원은 바지가 반쯤 내려가 살짝 드러난 기혁의 엉덩이를 쳐다보았다. 얄미운 기혁에게 치욕감을 안겨주고 싶었다. 엉덩이 골쪽에 작은 점 하나가 보였다.
“변태새끼”
기혁이 혐오하는 눈빛으로 서원을 쳐다보았다. 서원은 생각보다 뻔뻔했다.
안 그래도 좁은 주사실이 건장한 두 남자로 인해 꽉 들어찼다. 간호사는 몸을 돌리기도 불편했다.
“나가 계세요”
“나가라 좀”
“예 죄송”
서원은 짐짓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주사실 문을 닫고 나왔다.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주사실에서 나온 기혁은 곧장 데스크로 가 처방전을 받았다. 서원은 휘파람을 불며 그를 따랐다. 둘은 병원 건물 1층에 위치한 약국으로 향했다.
“너 엉덩이 점 뭐냐?”
서원이 놀리는 말투로 기혁에게 물었다.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기혁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똥 덜 닦은 거다”
“더러운 새끼...”
“남자 엉덩이가 궁금하든? 그럼 니 궁뎅이나 보지 뭘 거기까지 쫓아 들어오고 그래?”
“너 엿 먹일라고 쫓아 들어간거다 왜?”
“너 뭐 때문에 나한테 그렇게 불만이 많은데?”
“허....”
서원은 기가 찬 표정으로 교복 바지를 걷어 올렸다. 아직 덜 빠진 멍이 정강이에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너 나한테 미안하다고는 했냐?”
“하지 않았어?”
“언제 했는데?”
기혁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미안하다”
하고 뒤늦은 사과를 전했다. 서원은 그 날처럼 할 말을 잃었다.
입을 합 다문 서원 대신 약사가 기혁을 불렀다.
“유기혁님”
*
“몇 시야?”
오뎅국물을 호로록 마신 서원이 물었다.
“그만 좀 물어봐. 니 시계 보면 되잖아”
“난 바빠”
쳐먹느라 바쁘지.
기혁은 휴대폰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2시 30분. 좀 전에 물어봤을 땐 2시 25분이었다.
“2시 반”
서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김말이 튀김을 한 입에 밀어 넣었다.
이 자식도 멀쩡한 척 하지만 만만치 않은 또라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는 기혁이었다. 동족의 감이었다.
기혁도 만두튀김을 한 입 물었다.
서원이 부른 배를 두드리며 분식집에서 나왔다. 만족스러운 포만감이었다. 뒤이어 지갑을 손에 쥔 기혁이 나타났다.
“무슨 분식을 12000원어치를 쳐먹어?”
“너 나한테 병원비 안 줬잖아~ 퉁 쳐”
“병원비가 이것보다 싸겠다”
“이자지 이자”
“메로나 사”
“이제 들어가야 되는데 뭔 소리야”
“너 그 때 메로나 안 사왔잖아”
“올 때 메로나!”
서원은 얼마 전 그 날, 병원 가는 자신에게 메로나 심부름을 시키던 기혁이 떠올랐다. 그냥 방귀나 먹일까 하다 얻어먹은 것도 있으니 기분 좋게 한턱 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형이 쏜다”
서원이 비장한 표정으로 분식집 바로 옆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기혁이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따랐다.
메로나를 하나씩 입에 문 두 남자는 근처 공원에서 다 먹어치우기로 했다.
정자와 나무 벤치 몇 개가 구비되어있는 작고 허름한 공원이었다. 그 가운데엔 관리가 되지 않은 그네 두 개가 어울리지 않게 비치되어 있었다. 서원은 자연스럽게 그네에 가 앉았다.
“그네 부서질 거 같은데”
“절대 안 부서져. 내가 얼마나 탔는데”
기혁은 그래? 하더니 곧장 빈 그네에 엉덩이를 붙였다. 딱딱하고 뜨거웠다. 해에 달궈진 탓이었다.
서원이 반쯤 남은 아이스크림을 깨물어 먹었다. 시원하고 달큰한 것이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었다. 기혁은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다 자연스레 고개를 돌려 서원을 보았다. 얼굴이 여름 열기에 익어 불그스름했다.
“너는 피부가 안 타?”
“나? 타는데? 많이 탔어”
서원이 남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채 교복 밖으로 훤히 드러난 두 팔을 슥슥 문질렀다.
“허연데”
“원래 잘 안 타. 그래도 올 여름엔 많이 탔어”
검게 탄 기혁에 비하면 하얀 두부 수준의 피부색이었다. 기혁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구릿빛 손이 길고 울퉁불퉁했다. 그리곤 아이스크림 막대를 쥔 서원의 손을 보았다. 기혁 못지않게 큰 손이 의외로 거칠었다. 손톱이 짧고 뭉툭했다.
피부만 하얗지 진한 이목구비나 손 같은 것들이 남성스러웠다.
“새끼야 뭘 자꾸 훑어봐”
서원이 소름 돋는다는 듯 자신의 양팔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기혁은 곧 관심어린 눈빛을 거두고 무신경하게 대답했다.
“못생겨서 쳐다본다”
“못생긴 얼굴이 궁금하면 거울 보던지”
자리를 털고 일어난 서원이 저 멀리 있는 쓰레기통에 막대를 휙 던져 넣었다. 꽤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대는 쓰레기통 안으로 깔끔하게 들어갔다.
정확히 골인한 것을 본 서원이 우쭐하는 표정으로 아직 앉아있는 기혁을 내려다보았다.
봤냐?
기혁은 잇새로 웃음을 한 번 흘리곤 보란 듯이 쓰레기통 앞까지 걸어가 막대를 버렸다. 서원은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오는 기혁의 눈에서 왠지 ‘유치한 새끼’라는 글자를 읽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쉬는 시간에 맞춰 들어온 서원에게 관심을 주는 인물은 단연 민규 뿐이었다.
“야 어디 갔다 와? 연락도 안 받고. 5,6교시에 선생님들이 너 찾는데 내가 소설 한 편 썼다”
“고맙”
“뭐하고 왔어?”
“밥 먹고 왔어”
“어디서?”
“분식집”
“떡볶이 지겹지도 않냐?”
“전혀”
서원은 책상 서랍에서 교과서를 꺼낸 뒤, 책들과 함께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휴대폰도 꺼냈다. 휴대폰은 서원에게 별 의미 없는 물건이었다. 남들 다 들고 다니니까 들고 다니는 짐에 불과했다. 민규가 연락이 안된다고 징징댔던 것이 당연했다. 서원은 학교에 온 후 지금 처음으로 휴대폰을 켜고 있었다.
부팅이 완료 되자 문자 아이콘에 ‘1’이라는 숫자가 나타났다. 서원은 아무 생각 없이 문자함을 열었다 표정이 굳고 말았다.
‘형아, 오늘 집에 일찍 들어와. 아빠 난리 났어’
10살짜리 동생이 보낸 문자였다. 아버지와 마주치고 싶지 않아 반에서 항상 제일 먼저 등교하는 서원이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걸어서 1시간 거리의 학교를 뛰어오는 것이 이른 아침 아버지와 얼굴을 마주하는 것보다 편했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도 그랬다. 고요한 집에서 유일하게 부산스러운 주방 안 엄마의 배웅을 받으며 등교했다. 서원은 자신이 등교한 이후 집 안에 한 차례 폭풍이 불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휴대폰 괜히 켰어.
금세 기분이 가라앉았다. 아까 밖에서 메로나나 먹고 있을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차라리 메로나나 하나 더 사먹고 들어올 걸 그랬다.
*
기혁은 책상에 엎드려 한참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하루 종일 코를 풀어댄 탓에 머리가 띵했다. 자는 동안에도 주체 없이 흐르는 콧물을 휴지로 틀어막고 겨우겨우 잠에 들었다. 앞에선 영어 선생이 한참 떠들고 있는 중이었다.
꿈속에서 기혁은 산을 오르고 있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코가 잔뜩 막혀 입으로밖에 호흡할 수 없었으므로 목이 메마르도록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다리 후들거리고 눈앞이 핑핑 돌았다. 기혁은 바로 옆에 있는 넓적한 바위 위에 앉아 숨을 돌리기로 했다.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고 물 한 병을 꺼내 꿀꺽꿀꺽 마셨다. 한 병을 다 비워냈는데도 갈증이 해소 되지 않았다. 기혁은 절망했다. 빨리 이 산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때,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이 새끼 내 등 위에서 뭐하는 거야!”
앉아있던 바위가 소리를 지르며 움직였다. 기혁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바위는 곧 사람의 모양으로 변하더니 김서원이 되었다. 기혁은 기가 찼다.
“너 뭐야?”
“너야 말로 뭐야! 내 등에 그 똥 묻은 엉덩이를 왜 걸치냐고!”
“누가 똥을 묻혔다고 그래?”
“니 엉덩이 골에 있는 작은 똥자국 말이야!”
기혁은 그만 풉 하고 웃어버렸다.
아까 내가 점 보고 똥이라고 했던 걸 믿은 거야?
배가 아프도록 웃어 재끼는 기혁을 서원은 노기서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뭐가 웃겨서 쪼개?”
“웃겨서 웃는다 왜?”
“그만 쳐 웃어!”
아이고, 배야!
기혁은 너무 웃어 맺힌 눈물을 슥 닦아내며 물었다.
“너 왜 여기 있어?”
“너야 말로 왜 여기 있는데?”
“몰라 길 잃은 거 같아”
“바보냐?”
서원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기혁의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몇 발짝 걸으니 거짓말처럼 출구가 보였다.
“저기로 나가면 돼”
“너는?”
“난 여기가 집이야”
“뭔 소리야. 같이 가자”
“너나 가”
“같이 가자니까?”
기혁은 서원을 여기 두고 가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에 강하게 그를 이끌었다.
“너나 가라고!”
서원의 외침을 끝으로 기혁이 벌떡 고개를 들었다. 교실은 평화로웠다.
기혁은 코에 꽂은 휴지를 빼고 책상 서랍 속에 아무렇게나 뭉쳐있는 휴지를 꺼내 코를 팽- 풀었다.
물이 마시고 싶었다.
*
늦은 밤, 야자까지 끝내고 온 서원은 10분 째 집 문 앞에 서있는 중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렇게 10분을 서있었다. 하얗게 질린 손에선 땀이 베어났다. 안에서 작은 소리라도 들릴라치면 서원은 몸을 움찔하고 떨었다. 정말 죽기보다 이 문을 열고 싶지 않았다.
마른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서원이 번호키 뚜껑을 밀어 올렸다. 띠리링- 하는 소리와 함께 번호판에 파란 불이 들어왔다.
9....
서원이 천천히 숫자 하나를 누르고 다음 숫자를 누르려는 순간 다시 한 번 띠리링- 소리가 나며 문이 벌컥 열렸다. 작고 동글동글한 얼굴의 서준이었다. 그 뽀얀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형아!”
“학교 잘 갔다 왔어?”
서원이 긴장을 숨기고 인자하게 웃으며 물었다.
“뭐 똑같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대답을 툭 던진 서준이 남몰래 눈짓으로 서원에게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앙증맞은 눈썹과 눈알이 열심히 움직였다.
“왔으면 안으로 들어오지 밖에서 뭐해?”
서준이 그만의 언어를 끝내기도 전에 낮고 굵직한 목소리가 어둡게 들려왔다. 서원은 서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후 현관으로 들어섰다. 서준이 불안한 눈으로 그의 옷깃을 꼭 쥐었다.
서원이 집에 들어서기 무섭게 리모컨이 날아들었다. 리모컨은 그의 어깨를 지나 벽에 거세게 부딪혀 박살이 나고 말았다. 서원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갖고 와”
불이 환한 안방에서 홀로 불안에 떨던 서원의 엄마가 남편의 한마디에 어깨를 움찔하며 탁자 위 가지런히 놓인 담뱃갑을 손에 쥐었다. 그러나 차마 방 밖으로 나설 수는 없었다.
“갖고 오라니까!”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온 집안을 뒤흔들었다. 서원은 이런 식의 대화가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혐오스러웠다. 서준은 서원의 뒤로 몸을 숨겼다. 서준의 머리 위로 단단한 손이 따스히 내려앉았다.
“방에 들어가 있어”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고 옷깃을 잡은 손가락만 꼬물대던 서준의 엉덩이를 서원이 톡톡 쳤다. 그제서야 꼬마는 쪼르르 제 방으로 들어갔다.
서원은 그가 도대체 뭘 봤길래 저렇게 노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집안 식구들이 자신 때문에 들들볶이는 건 끔찍하게 싫었다.
“이미 보셨으면서 뭘 가져오라고 하세요?”
“뻔뻔함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사실인데 뻔뻔할 건 또 뭐에요?”
남자는 숨을 골랐다. 너무 화가 나 말이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았다.
“너 지금 나이가 몇 살인데 담배를 입에 물어?”
아차, 싶었다.
“죄송합니다”
“니가 정신이 있는 새끼야? 어?”
또 다시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서준이 갖고 놀던 구슬이었다. 단단한 유리구슬이 서원의 볼록한 광대에 정통으로 부딪혔다. 아픔에 서원이 입술을 꼭 깨물었다. 기혁에게 정강이를 차인 후 엄살을 떨던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서원은 이 남자와의 싸움에서 잘못은 인정하되 비굴해지고 싶진 않았다.
“어떻게 돼먹은 집구석에 제대로 된 인간이 하나도 없어?”
제대로 된 인간이 하나도 없는 게 아니라 당신 하나가 제대로 안 돼먹었어.
서원은 당장이라도 불 지르듯 내뱉고 싶은 말을 꾹 참았다.
“계집년은 남편이 갖고 나오라는데도 들어 쳐 먹는 시늉도 안 하고 큰 아들이라는 새끼는 밖에서 양아치 같은 짓이나 하고 돌아다니고 작은 새끼는 계집애처럼 뻑하면 처 울기나 하고 아주 집안꼴 보기 좋다 좋아 어?”
누가 더 양아치 같은데?
동네 건달 같은 저속한 언행에 서원은 진절머리가 났다.
“어디서 눈을 부릅떠 새끼야 눈 안 깔아?”
서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머리에 열이 올라 두피가 벗겨질 것 같았다.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남자는 제게 반항하는 핏줄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무자비하게 손을 휘둘렀다. 굳은살 가득한 두터운 손에 얼굴이 수차례 가격 당했으나 그럴수록 서원은 더욱 더 고개를 빳빳히 세웠다.
“이 미친놈이 이래도 안 깔아? 이래도 안 깔아?”
안방에서 뛰쳐나온 가녀린 여인이 남자의 허리춤을 필사적으로 끌어안았다. 그녀의 눈물이 두 갈래, 세 갈래로 갈라져 바닥에 떨어졌다.
“그만 좀 하세요! 그만....!”
“그래 그렇게 병신 같이 살고 싶으면 내가 진짜 병신으로 만들어줄게 새끼야!”
“서원이 아빠!”
서원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찰에 온 얼굴이 빨갛게 물들고 입술이 다 터져 피가 흐를 때까지 서원은 가만히 맞고만 있었다.
몇 십분 후 숨이 찰 정도로 손찌검을 한 남자가 숨을 고르며 서원의 머리채를 잡았다.
“이 따위로 살고 싶으면 내 집에 기어 들어오지마”
제발 그러고 싶어요.
남자는 씩씩거리며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그 충격에 문이 부르르 진동 했다.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여인은 서원을 품에 꼭 안았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보다 작았기 때문에 젖은 얼굴을 어느새 자란 가슴팍에 묻었다.
“어쩌면 좋니....어쩌면 좋아”
“괜찮아”
서원이 어미의 여린 등을 토닥였다.
“오늘 친구네 집에서 자고 올게”
“어디? 어디로 가게?”
여인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아들을 잡았다.
“민규네 집에 가서 자고 내일 학교 갔다가 집으로 올게”
“이 늦은 시간에? 그냥 집에서 자. 응? 엄마가 어떻게든...”
“괜찮아. 민규 아직 밖에 배회하고 있을 걸?”
“.......몸 조심해야 한다. 어디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곧장 민규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 알겠지?”
“응”
아들의 힘없는 대답에 여인은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겨우겨우 추스르며 그의 큰 손을 꼬옥 붙잡았다. 미안함과 불안, 애정이 섞인 체온이 서원의 손을 휘감았다.
여름은 밤에도 춥지 않아 맘에 들었다. 조금 전 집에 들어갔던 행색 그대로 나온 서원은 아파트 단지를 벗어났다. 딱히 갈 곳이 없었다. 이 시간에 민규가 밖에서 배회하고 있을 일은 없었다. 학교 끝나면 집에 가서 발 닦고 자기 바쁜 것을 서원은 알고 있었다.
최대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정처 없이 발이 닿는 데로 한참을 걷다보니 학교 앞이었다. 매일 같이 걷는 이 길이 가장 익숙했던 것이다. 서원은 오늘따라 커 보이는 학교 건물을 굳게 잠긴 정문 입구에 서서 올려다보았다.
서원은 다시 걸었다.
낮에 왔을 때보다 지저분한 공원 안으로 들어서자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서원은 개의치 않고 그네에 앉았다. 삐걱, 삐걱 녹슨 비명을 내지르는 그네 위에서 힘차게 발을 굴렀다. 몸이 앞뒤로 부웅부웅 날았다. 이대로 정말 날아가고 싶었다. 눈을 감았다. 선선한 바람이 머리칼을 매만졌다. 쓰레기 냄새도 나지 않고 풀냄새만이 가득했다.
문득 발 구르는 것을 멈춘 서원이 가방을 열고 깊이 손을 넣어 뒤적거렸다. 익숙한 직사각형의 곽이 손에 잡혔다.
희미한 가로등 아래 동그랗고 작은 빨간불이 동동 떠올랐다.
서원은 천천히 다리를 다시 굴렸다. 그네가 작은 포물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이 밤에 웬 양아치가 그네 타러 여기까지 왔네?”
타닥닥, 발로 그네를 멈춘 서원이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추리닝에 슬리퍼 차림을 한 기혁이 공원 입구 쪽에서부터 건들건들 걸어오고 있었다.
“누구보고 양아치래”
“여기 금연구역인 거 몰라?”
서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 몰랐다. 여기가 금연구역이었어?
“구란데”
기혁이 딱딱한 얼굴로 조크를 날렸다. 그에 서원은 보란 듯이 담배 연기를 길게 후욱, 뿜어냈다.
“뭐하냐 이 시간에”
“그네 타잖아”
“진짜 그네 타러 여기까지 왔어?”
“그래”
낮에 그랬던 것처럼 기혁이 서원의 옆 빈 그네에 자리를 잡았다.
“집에 가 새끼야”
“지가 뭔데 가라마라야”
서원이 입을 삐쭉였다. 삐쭉이는 입술이 다 터져 피딱지가 져있었다.
“혼자 겨울이냐? 날도 습한데 입술이 다 텄어”
“무슨 상관”
어슴푸레한 불빛에 비친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선이 날렵했던 얼굴이 부어있었다. 광대엔 시퍼런 멍이 들어있었다. 기혁은 슬쩍 눈을 돌렸다.
“몇 시야?”
“몰라”
서원은 더 묻지 않았다. 몇 시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마음 속 파도가 잠잠해지길 기다렸다.
둘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끼익, 끼익 대는 오래된 철의 비명만이 둘 사이의 빈 공간을 메울 뿐이었다.
“나 간다”
“응”
기혁이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서원의 두 눈동자가 초점 없이 공허했다.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응”
“밤새?”
“어 좀 가라”
서원이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내저었다.
안 그래도 심난해 죽겠는데 좀 귀찮게 하지 말고 가.
걱정해줘도 지랄이야.
기혁은 코를 훌쩍이며 돌아섰다. 곧장 공원을 나서려했지만 누군가가 자꾸 발목을 잡는 느낌이었다. 공원에서 완전히 벗어나자마자 기혁은 다시 발을 돌렸다. 괜히 신경 쓰이는 무언가가 그곳에 남아 있었다.
예상과는 다르게 다시 돌아간 공원엔 인기척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 누군가 앉아있던 그네가 밤공기에 싸늘히 식어가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