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비틀스의 앨범 타이틀이 발음됐을 때 같은, 그런 청각적인 뉘앙스
를 재현해 보고 싶어 제목을 따왔다는 <바닐라 스카이>는 제목의 의미와 작명 의도에서 원작인 <오픈 유어 아이즈>와의 관계, 그리고 영화에 적잖은 영향(영향이라기 보다는 거의 삼켜버렸다고 해야 옳을)을 미친 대중문화의 자장을 드러낸다. 영화에서 톰 크루즈가 설명하듯이 모네의 그림 제목인 바닐라 스카이는 아주 보기 드문 아름다운 하늘의 경관을 일컫는다. 그것은 데이빗(톰 크루즈)과 소피아(페넬로페 크루즈)가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길바닥에 쓰러진 데이빗을 일으켜 세우고는 그의 일그러진 얼굴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장면)에서 진짜로 등장해 이것이 실재하는 현실이 아니라는 암시를 던져준다. 그리고 데이빗이, 이제껏 현실이라고 믿은 게 사실은 자신이 만들어낸 가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눈을 뜨기'로 결심하는 마지막 장면에 다시 등장해 암시를 확고한 사실로 바꿔놓는다.
여기까지는 물질화된 기억을 다룬 <오픈 유어 아이즈>와 같은 맥락에 놓인다. 그러나 카메론 크로우가 '바닐라 스카이'라고 발음하는 순간 느끼는 뉘앙스를 환기시키고 싶었다고 말했을 때 거기서 예시로 언급되는 것은 비틀스이다. 그것은 고유명사 비틀스가 아니라 20세기의 팝음악과 대중문화를 압축해 지시하는 대명사로서의 비틀스이다. 그리고, 그건 다름아닌 카메론 크로우의 영역이다. 10대이던 70년대부터 「롤링스톤」에 기고를 해온 카메론 크로우는 드럭과 섹스 록의 세계를 자양분 삼아 성장했고, 대중문화에 대한 탐식과 애정에 근간해 살아온 사람이다(90년대 초 시애틀의 얼터너티브 신에 대한 소고 <싱글즈>와 70년대 록 신을 그린 자전적인 영화 <올모스트 페이머스>를 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바닐라 스카이>는 그의 다른 어떤 영화보다도 이 같은 문화적 배경에 근거해 다양한 코드와 인용을 나열하고 있다. 오프닝 신에서 데이빗이 잠에서 깨어나 출근 준비를 하는 장면만 보더라도 이는 쉽게 알 수 있다. 알람곡은 레디오헤드의 『키드 A』이며, TV에는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사브리나>가 틀어져 있고, 벽에는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와 트뤼포의 <쥘 앤 짐> 포스터가 붙어 있다. 거실엔 조니 미첼과 모네의 그림이 걸려 있고, 하우스파티에서는 홀로그램으로 등장한 존 콜트레인이 연주한다. (아울러 루퍼, 바슬로나, 시규어 로스, 스피릿츄얼라이즈드, 비키 카, 제프 버클리, REM으로 이어지는 카메론 크로우의 최신곡 모듬 테이프도 선물 받을 수 있다.)
단순한 취향의 나열과 과시욕이라고 보기엔 지나칠 정도로 많은데다가 중구난방이어서 여기엔 숨은 의도가 있는게 아닌지 생각하지 않을 수 정도다. 물론, 있긴 하다. 영화 속에서 반복 언급되듯이 모든 것은 '데이빗 에임즈가 디자인한' 것이다. 즉, 그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온갖 것들을 재료 삼아 조립, 구성, 창조된 세계인 것이다. 다름 아닌 그가 언제 어딘가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의 재탕, 모방인 것이다. 하물며 그의 사랑조차도. 사랑하는 여인의 이미지,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던 아름답던 순간이 그가 여태껏 즐겨온 문화적 취향의 짜집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오픈 유어 아이즈>에서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가 리얼리티와 버추얼 이미지의 구분이 없는 세계에 집중한다면 카메론 크로우는 그 재료, 즉 잿밥에 관심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런 시도의 결과는 낙담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쥘 앤 짐>의 잔느 모로와 흡사한 페넬로페 크루즈나, 밥 딜런의 1963년 앨범 『The Freewheelin' Bob Dylan』의 재킷 사진대로 재연된 열애 장면, <알라바마 이야기>에서의 그레고리 펙으로 형상화된 아버지라니). <바닐라 스카이>가 결말에 이르러 지금껏 데이빗이 현실이라 믿어온 이미지와 그 원본을 대차대조표를 짜듯이 비교해 보여주는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지나치게 친절한 설명은 그 연상작용이 동의하기 힘든 것이라는 자백에 다름 아니다(수수께끼 문제 자체가 그다지 공평하지 않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게다가 데이빗이 "그때 그 차(카메론 디아즈가 운전하던)를 타지 않았더라면"라고 가슴을 치며 후회하는 장면을 거듭 보여주면서, 인생에 놓인 무수히 많은 작은 선택의 순간들을 중요하게 여기라는 교훈까지 전달하려고 할 때는 정말이지 넌더리가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닐라 스카이>가 따분한 영화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준 것은 결과적으로 톰 크루즈다. 그렇다. 오늘날 할리우드의 최고의 스타. '뇌쇄적인 미소와 뇌쇄적인 몸, 뇌쇄적인 사업본능을 가진 남자.' 그런데 <바닐라 스카이>에서는 '일그러진 얼굴'의 톰 쿠르즈를 볼 수 있다. 그를 스타덤에 앉혀준 완벽한 미소를 비추던 거울은 흉측하게 일그러진 몰골만을 보여줄 뿐이다. 바야흐로 왕자가 개구리로, <미녀와 야수>의 야수로 탈바꿈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것이 톰 크루즈의 스타 페르소나에 있어서 변화를 꾀하려는 시도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바닐라 스카이>는 스타의 (끝을 모르는 광대한) 나르시시즘에 대한 공개적인 홀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놀라 다르기스가 지적했듯이 톰 크루즈는 데이빗 보위나 마돈나처럼 화려하고 에로틱한 '혼자'일 때 가장 섹시하고 매혹적이다. 상대 여배우와 성적인 스파크가 일지 않는 건 새 연인인 페넬로페 크루즈와도 마찬가지다.)
<오픈 유어 아이즈>에서 에두아르도 누리에가가 미모를 무기 삼아 여자들을 꼬시던 상대적으로 피와 살이 느껴지는 인간이었던 반면, <바닐라 스카이>의 톰 크루즈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멍청한 자선가(citizen dildo)로 불리는, 마치 호르몬이 지배하는 세상에 잠시 내려온 '천사', 즉 또 다른 환영이자 이미지에 불과하다. "그는 여전히 아름답지만, 때로는 정말 환영같다. 여전히 배우지만, 그는 가장 아득한 스타다. 톰 크루즈는 지금껏 그랬듯이 앞으로도 톰 크루즈일 것이다. 그러나 그게 누구인지는 이제 알 수 없어졌다."(마놀라 다르기스) <바닐라 스카이>는 <미션 임파서블 2>에 이어 다시 한번, 톰 크루즈가 디지털 시대에 인간이 당면한 잉여상태(디지털 시대가 배우를 불필요하게 만들 것이라는 예언. 한낱 이미지에 불과해진 인간)에 가장 적합한 배우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