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은 몸값순이 아니잖아요' 92 시즌 신인들의 활약상은 이 한마디로 요약될 수가 있다. 유난히도 고졸 신인 투수들의 활약이 두드러진 반면에 입단 당시 거액의 몸값을 챙기면서 많은 기대를 모았던 대형투수들의 활약은 미미하기 그지 없었다.
1. 무서운 10대 돌풍
92년 롯데는 2년 연속 홈구장 관중 100만 돌파와 더불어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를 거치면서 84년 이후 8년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우승까지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면서 창단 이래 최고의 한해를 보내게 된다. 롯데 돌풍의 주역은 다름아닌 92 프로야구 최고의 히트 상품 염종석이었다.
부산고를 졸업하고 곧바로 프로무대에 뛰어든 그는 기존의 투수들을 무색케 하는 엄청난 활약을 선보이는데 입단 첫 해 그는 17승 9패, 방어율 2.33(1위)를 기록하며 신인왕을 차지함은 물론 선동렬이 부상으로 중도하차하며 무주공산이 된 골든글러브에서도 송진우,이강철 등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는 영광을 안게 된다.
염종석의 돌풍이 워낙 거셌던 탓에 실력만큼의 찬사를 받지 못했던 또다른 고졸 신인이 있었다. 대전고를 졸업하고 빙그레에 입단한 정민철이었다. 그의 활약상 역시 돌풍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14승 4패 7세이브, 방어율 2.48을 기록하며 단숨에 송진우와 더불어 빙그레 마운드 쌍두마차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비록 입단 첫 해 신인왕 타이틀은 염종석에게 내주었지만 8년연속 두자리 승수를 거두는 등 기복없는 활약을 선보이며 99시즌 우승이후 일본으로 진출하는 영광을 얻게 된다.
원주고를 졸업하고 태평양에 입단한 안병원 역시 염종석이나 정민철 만큼의 성적을 거두진 못했지만 (10승 8패), 최연소 완투승,최연소 완봉승의 기록을 수립하는 등 화제를 일으키며 태평양 마운드의 새로운 희망봉으로 자리하게 된다.
2. 거액 몸값 신인들의 잇다른 부진
92 시즌이 시작하기 전만 해도 신인왕 타이틀의 초점은 국가대표 출신의 두 대형투수 정민태와 지연규에게 모아졌었다. 동산고-한양대를 거쳐 1억 6천만원 이라는 당시 신인사상 최고 계약금(종전 박동희의 1억 5천만원)을 받고 태평양에 입단한 정민태는 시즌 초반 반짝 활약하며 태평양의 단독선두 돌풍에 한 몫을 담당하지만 어깨부상으로 시즌을 마감하게 되고 태평양의 성적도 추락하게 된다. 그가 남긴 성적표는 1승 3패 방어율 3.81. 계약금이 무색할 정도로 초라한 성적이었다. 정민태의 어깨를 발판삼아 상위권 도약을 꿈꾸던 태평양으로선 당시 그의 도중하차가 너무나도 아쉽게만 느껴졌다.
천안북일고 - 동아대를 거쳐 8,000만원의 계약금을 받고 빙그레에 입단했던 지연규 역시 빙그레의 차세대 에이스로 상당한 기대를 받았었다. 그러나 허리부상으로 인해 기대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재활훈련을 통해 재기에 성공한 정민태와는 대조적으로 숱한 부상에 시달리며 결국 97년에 유니폼을 벗게 된다. 그러나 그는 2001 시즌을 앞두고 한화의 신인 공개 테스트에 응모 다시 유니폼을 입게되고 아마 시절의 화려했던 명성을 되찾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중이다.
대구상고 - 계명대를 거쳐 7,000만원의 계약금을 받고 삼성에 입단한 김태한은 성준 이외에 마땅한 좌완투수가 없어 고민하던 삼성 마운드에 숨통을 틔워줄 유망주로 주목 받았었다. 그러나 입단 첫 해 그는 고작 3승(7패) 밖에 거두지 못하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
3. 타자 부문
타자 부문에서 유일하게 돋보였던 신인은 신일고 - 중앙대를 거쳐 삼성에 2차지명으로 입단한 외야수 동봉철 이었다. 입단 첫 해 삼성의 주전 중견수 자리를 꿰차면서 정교한 타격을 과시하였던 그는 0.317 타율에 홈련 11개를 기록하며 기대 이상의 활약을 선보인다. 당시 삼성의 김성근 감독은 그를 두고 '현역 타자중 가장 밀어치기에 능한 선수'라고 평할 정도로 그는 매서운 타격 솜씨를 선보였다.
부산고 - 고려대를 거쳐 롯데에 입단한 신인 유격수 박계원은 공격에서는 그다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였지만(타율 0.245), 짜임새 있는 수비를 과시하며 박정태와 더불어 안정된 내야 수비망을 펼치면서 롯데의 우승에 숨은 공헌을 한다. 당시 유격수 부문에서 돋보이는 성적을 보인 선수가 없던 바람에 그는 골든글러브 까지 수상하는 행운을 거머쥐게 된다.
4.돌하루방의 깜짝 돌풍
포철공고 - 영남대(중퇴)를 거쳐 삼성에 입단한 신인투수 오봉옥은 최초의 제주 출신 선수로서 입단 당시부터 화제를 모았는데, 그가 출전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행운의 승리를 거두게 되면서 더더욱 팬들의 관심을 모으게 된다. 차곡차곡 행운의 승수를 챙기던 그는 시즌 막판에는 코칭 스태프의 전폭적인 지원아래 선발투수로도 출장, 규정이닝을 간신히 채우며(126 2/3 이닝) 13승 무패의 성적을 기록,프로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무패 승률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비록 행운의 승리와 코칭 스태프의 관리하에 이루어진 승률왕이라는 비판도 따랐지만 무패 승률왕은 앞으로도 이루어지기 힘든 기록임에는 틀림없다.
5. 결 산
92 시즌 프로야구판을 뒤흔들었던 고졸 신인 투수들의 돌풍은 각 구단의 스카우트 형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대학때 어깨를 혹사당한 투수들보다는 싱싱한 어깨와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고졸 투수들을 선호하는 풍조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는 2년뒤 억대 고졸 신인들이 탄생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첫댓글 동봉철선수..울팀에서 한때 뛰었던거 같은데...맞나요?...가물가물...^^ 그당시 오봉옥선수 밀어주기는 무쟈게 얄미웠었는데...^^;
네 97년에 뛰었죠 동봉철선수만큼 파란만장했던 선수도 드물죠...
염종석은 프로첫해 92시즌이후...200이닝을 넘게 넘진 후유증을 강하게 실감하면서 평범한투수로 몰락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