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치 물억새 완상
시월 둘째 화요일은 한로 절기였다. 구월까지 유래가 없던 폭염에 시달리다 시월에 들어 날씨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하다. 일교차가 커지고 선선해 긴팔 티나 셔츠를 입어야 했다. 엊그제부터 나는 이마가 시려 모직으로 된 헌팅캡을 쓰고 다닌다. 여름과 겨울은 길어지고 봄가을은 짧게 지나는 형국이다. 일 년 중 바깥 활동에 가장 좋은 때가 요즘같이 15도에서 25도 사이지 싶다.
백로에 이어 추분이 지났고 보름 뒤 다가올 상강이 기다린다. 들녘은 누렇게 익은 벼가 추수를 앞두었는데 산간에는 억새가 피어나고 강가에는 물억새와 갈대에서 꽃이 피는 때다. 억새와 물억새는 외양이 비슷한데도 서식지가 산이면 억새고 물기가 많은 강가에 자라면 물억새인데 후자는 키가 더 높이 자랐다. 갈대는 꽃이 피면 먼지떨이처럼 보푸라기가 많이 달려 지저분해 보였다.
억새, 물억새, 갈대와 더불어 유사한 달뿌리풀이 있다. 달뿌리풀은 강가에서도 보지만 산간 계곡 흔하게 자랐다. 습지를 좋아해 물억새와 갈대를 닮아 보여도 눈여겨 살피면 구별되었다. 달뿌리풀은 잎줄기가 빼곡하지 않고 성글어 듬성듬성했다. 불리는 이름에 ‘달’이 붙어도 달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고 ‘달리다’에 어원을 둔 냇바닥에 ‘달려가는 뿌리’라는 뜻으로 보면 될 듯하다.
내 젊은 날 교직 입문을 밀양에서 시작해 그곳 일대 명산을 두루 다녀봤다. 마침 산행 경험이 풍부한 선배와 한 학교 근무한 인연으로, 그분과 영남 알프스로 통하는 가지산과 재약산 일대를 올라 빗속에 텐트를 치고 야영하기도 한 적 있다. 가을이면 간월산에서 신불산으로 이어지는 산등선에 피는 억새꽃은 장관이었다. 중년까지 그곳을 찾아 올랐으나 이제는 마음에만 그려본다.
억새 군락지로 통하는 또 다른 곳이 창녕 화왕산이다. 산정에는 테뫼식 석성이 있기도 한 유서 깊은 화왕산성은 곽재우가 임진왜란 때 왜적을 방어한 곳으로 알려졌다. 성내에 연못과 신령스러운 바윗돌은 창녕을 본관으로 쓰는 조(曺) 씨 득성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등산로는 읍내에서 오르는 코스와 옥천 관룡사에서 오르는 코스로 나뉘는데 산정에는 이즈음 억새가 장관일 테다.
억새 군락지로 통하는 명산은 해발 고도가 높아 이제 추억 속에 간직하며 생활권에서 가까운 물억새 군락지를 대체재로 삼아 완상한다. 지난 주말 찾아간 을숙도도 물억새가 꽃을 피우면 볼 만하다. 자주 나가는 주남저수지 둑길에도 물억새를 볼 수 있다. 물억새가 장관을 이루는 또 다른 곳은 창원 시민들의 식수원을 뽑아 올리는 대산 정수장 강변 여과수 취수정이 있는 구역이다.
화요일 이른 아침 창원역 앞으로 나가 1번 마을버스를 탔다. 출근 시간대와 겹쳐 미니버스 자리는 만석이라 서서 가는 이들도 있었다. 대산 일반산업단지에 이르자 승객들은 모두 내려 혼자 신전 종점에 닿았다. 마을회관 앞에서 골목을 빠져나가자 농가 주택 잘 가꾼 화단에 핀 맨드라미가 인상적이었다. 붉게 익은 석류는 담장을 드리우고 늦게까지 피는 분홍 장미와 능소화도 봤다.
상옥정 60번 지방도 교차로에서 강둑으로 나가자 본포에서 흘러온 강물이 수산으로 향해 너울너울 흘렀다. 강 건너편은 밀양 반월과 곡강이었다. 강가에는 생태 교란 밉상으로 찍힌 가시박 덩굴이 무성했다. 본포교에서 수산교 구간은 4대강 사업 때 굴삭기가 모래흙을 퍼내지 않은 유일한 곳이다. 창원 시민들의 상수원이 되는 강변 여과수를 뽑아 올리는 취수정이 있는 데여서였다.
내리막 강기슭에서 비탈을 오르자 몸을 숨긴 장끼가 퍼드덕 날아올라 내가 깜짝 놀랐다. 자전거길을 따라 걸으면서 드넓게 펼쳐진 둔치의 물억새는 바라봤다. 군데군데 뽕나무와 야생 복숭아나무가 자랐으나 물억새가 단연 우점종이고 갈대도 섞였다. 제1 수산교까지 걸어 모산에서 들녘으로 들어 들길을 걸었다. 비닐하우스 오이 농장에서 상품에서 처진 오이를 챙겨 가술로 갔다. 24.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