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 출신 탈북민들,
대북 확성기 영향력 커…
체제 비판보다 날씨, K팝 등 선호
'10년이란 길고 무료한 군 생활을 거의 유일하게 달래주는 고마운 존재'
VOA(미국의 소리)
한국 정부가 북한 정권의 ‘오물 풍선 살포’에 대응해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 여부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북한군 출신 탈북민들은 확성기 방송의 긍정적 역할이 많다고 말했습니다. 북한 장마당 세대 군인들은 특히 K팝과 뉴스를 크게 반길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김영권 기자가 보도합니다.
[확성기 방송]“(종소리) 북한 동포 여러분 여기는 자유의 소리 방송입니다. 이 소리는 자유와 평화, 그리고 희망을 알리는 종소리입니다.”
한국이 지난 2011년 대북 확성기를 통해 북한에 방송했던 ‘자유의 소리’ FM 방송의 일부입니다. 북한군 출신 탈북민들은 정보의 사각지대인 최전방 북한 군인들에게 확성기 방송은 단비와도 같다고 말합니다. 10년이란 길고 무료한 군 생활을 거의 유일하게 달래주는 고마운 존재란 것입니다.
2012년 AK 소총과 총탄, 수류탄까지 휴대하고 비무장지대(DMZ)를 넘어 한국에 망명한 정하늘 씨입니다.
[정하늘 씨] “잠복근무 나가면 심심하진 않았다. 그런 얘기를 했었고요. 그런 것들이 북한 군인들한텐 긍정적으로 들리죠. 왜냐하면 한국의 아이유라든가 가수들이 불러주는 노래를 들으면서 북한의 군인들은 최전방에서 한국의 문화를 조금씩 간접적으로 접하는 거죠. 그러면서 흥얼거리기도 하고.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실제로 DMZ를 넘어 한국에 망명한 일부 북한군 병사들이 ‘소녀시대’ 등 한국의 유명한 걸그룹 노래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습니다. 과거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통해 한국에 망명해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던 O 씨도 지난 2020년 워싱턴을 방문해 가진 행사에서 이런 경험을 공유했습니다.
[녹취: O 씨]“제가 어느 순간부터 한국이나 자유에 대한 동경을 하기 시작했어요. 드라마나 영화, 노래를 통해 많은 한류를 접했고, JSA에서 특히 군 복무하던 시절에 캐나다나 프랑스, 영국, 중국 이쪽에서 관광 오시는 분들을 보며 아, 저런 게 자유로구나 하고 느낀 결과 어느 순간부터 자유를 동경하게 됐던 것 같아요.”
한국의 대북 확성기 방송은 1963년 박정희 정부 때 시작됐습니다. 북한이 김일성 주석의 지시로 전년인 1962년 휴전선 일대에 확성기를 먼저 설치하자 맞대응으로 시작했고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채택으로 중단됐다가 1983년 북한 정권의 아웅산 폭탄테러 이후 재개됐습니다.
이어 2004년 남북 군사합의를 통해 중단된 뒤 2010년 북한의 천안함 폭침, 한국군 장병 2명이 크게 다친 2015년 목함지뢰 사건, 이듬해 북한의 4차 핵실험 등 중대 도발이 있을 때마다 철거와 재개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다 남북이 합의한 2018년 4월 판문점선언 이후 지금까지 방송은 중단됐습니다.
한국군 관계자들에 따르면 고출력 스피커를 장착한 대북 확성기 방송은 청취 거리가 10~30km에 달합니다. 성능이 약해 한국군 진영에서 소리가 윙윙거리며 잘 들리지 않는 북한의 확성기와는 비교 자체가 안된다는 것입니다. 한국은 이런 고출력 확성기를 2018년 철거 직전 50개(고정형 10개, 이동형 40개)를 운용하고 있었습니다.
방송 내용도 다양합니다. 한국 국군심리전단에 따르면 2017년 기준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 등 100여 곡의 노래가 반복적으로 송출됐고 일기예보, 국제뉴스 등 다양한 소식이 하루 8시간 정도 송출됐습니다. 익명을 요구한 북한 최전방 출신 탈북민 J 씨는 앞서 VOA에 한국의 이등병에 해당하는 ‘상등병의 편지’가 군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매우 높았다고 전했었습니다.
[김광석 ‘이등병의 편지’]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는 날.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 밖을 나설 때. 가슴 속에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지만, 풀 한 포기 친구 얼굴 모든 것이 새롭다…”
북한 군인들의 인권 문제를 다룬 책을 올가을 영문으로 출간할 예정인 북한 공병 군단 출신 엄영남 씨는 3일 VOA와의 통화에서 확성기 방송은 북한 군인들에게 “남한에 대한 신뢰를 쌓게 하는 강력한 무기”라고 말했습니다.
[엄영남 씨]“영향력이 크죠. 서로 체제 선전하고 욕하는 그런 내용이 아니라 뉴스를 전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하다못해 날씨, 스포츠 경기, 예를 들어 올림픽에서 북한이 이기고 지고. 북한은 이긴 경기만 내보내거든요. 이런 것을 통해 뉴스를 전달하니까 신뢰를 하기 시작한단 말이에요. 아 저거 거짓말이 아니구나. 군인들이 신뢰하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에 김정은을 안 믿고 남한을 더 선호하게 될 수도 있는 현상이 있기도 하고 실제로 그래서 넘어온 사람도 있고. 심각한 거죠. 북한 정권 입장에선.”
엄 씨는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 이후 김정일과 김정은 부자가 아닌 장마당에 의존해 성장한 이른바 장마당 세대가 현재 군대에 복무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엄영남 씨]“장마당 세대는 소녀시대 웬만하면 다 알고. 최근에 블랙핑크랑 정말 유명하잖아요. 그런 것을 모름지기 (입대 전) 들었을 수 있단 말이에요. 그렇게 몰래몰래 들었던 노래들이 대북 확성기 스피커를 통해 나온다고 생각해 봐요. 자기도 모르게 따라 부른단 말이에요.”
황해도 해주의 4군단에서 3년간 군 복무를 했던 평양 엘리트 출신 이현승 씨는 “DMZ와 거리가 있어 확성기 방송은 듣지 못했지만 일부 고참 군인들은 안테나를 돌리거나 자전거 배터리를 돌려 남한 방송을 시청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이 씨는 자신도 몰래 음악을 녹음해 듣곤 했었다며 요즘의 장마당 세대 병사들은 훨씬 더 한국 음악이나 정보에 목마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현승 씨]“(저는) 녹음한 음악을 듣곤 했었단 말입니다. 몰래. 밤에 근무 설 때 들으면 잘 들립니다. (그러면) 여러 생각이 나죠. 북한 국경 DMZ에 근무하는 친구들도 그런 노래나 방송을 들으면 진짜 여러 가지 생각이 날 거라고 봅니다.”
1979년 서부전선을 통해 망명한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앞서 VOA에 “북한에서 남조선 방송을 듣는 것은 반역자로 처단하는 대상인데 전선에서 마음 놓고 방송을 들으니까 상당히 자유스러운 맛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탈북민들은 대부분 체제 비판보다 객관적인 뉴스와 일기예보, 월드컵 축구 등 스포츠 결과, K팝 등을 추천했습니다.
한국에서 남북한 군인들의 상황 등을 비교하는 유튜브 채널 ‘북시탈’을 운영하며 최근 북한군 병사들의 실상을 담은 단편영화 ‘두 병사’를 제작한 정하늘 씨는 장마당 세대는 훨씬 더 세상에 관심이 많다면서 한국이 이들에게 “지속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yE3NhlMzlk
남북 관계 유불리에 따라 정치적 도구로 활용할 게 아니라 북한 주민과 군인들의 인권을 중심에 두고 확성기 방송을 지속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정하늘 씨]“정부가 그렇게 강력하게 거부하고 싫어하는 이유는 그게 엄청난 자신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재개한다면 계속 지속적으로 쭉 했으면 좋겠습니다.”
[ 2024-06-04, 07: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