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빛이 참 따뜻했던 강신호 회장님과의 인연 그 온화한 미소에는. 그 나직한 말씀에는. 내 가슴 속에 옹이처럼 박혀있던 땡비나 악바리 기질이 잠시 물러나게 하는 힘이 있으셨다. 박선영(前 국회의원) 페이스북
그때 나는 새파랗게 젊은, 아니 치기어린 여기자였다. 눈에 뵈는 게 없다,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 당돌하고 겁이 없었다. 나이든 남자 기자들 속에서 유일한 여기자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지나치게 충실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더 독하게 굴었다. 일부러. 갓 30살을 넘긴 어린 나이에 보건사회부, 지금의 보건복지부를 출입할 때다. 유례가 없던 일이다. 보사부 출입은 부장 승진 직전쯤의 고참 차장이나 돼야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여기자는 나 하나. 그때는 보건복지 관련 기사가 봇물 터지듯 나오던 시기라 주요 언론은 2진도 두고 있었다. 그러니 잠깐만 한눈을 팔면 '물 먹기' 일쑤던 시절, 나는 무시당하지 않고 낙종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뛰던 시절이기도 했다. 다들 나를 악바리, 땡비라고 불렀지만 내 인생 최고의 시절이기도 했다. 특종이 팝콘처럼 터지던 때였으니까. 동시에 보사부 국장들은 슬금슬금 나를 피하고, 남자 기자들도 나를 경계하기 시작하던 그때, 유독 그분은 내게 따뜻했다. 그 눈빛이 참 따뜻했다. 제약협회장이던 강신호 회장님. 기자실에 들를 때나, 기자단과 식사를 함께 할 때 강 회장님은 늘 나를 특별 대접하셨다. 말씀이 많지도 않으셨다. 그저 온화한 표정에 미소를 띠셨지만, 내 가슴 속에 옹이처럼 박혀있던 땡비나 악바리 기질이 잠시 물러나게 하는 힘이 있으셨다. 그 따뜻한 눈빛에는. 그 온화한 미소에는. 그 나직한 말씀에는. 그분이 바로 국민피로 회복제 박카스로 유명한 동아제약의 강신호 회장이셨다. 얼마 후 나는 독일로 떠났고, 오래지 않아 방송국도 떠나면서 그분은 내 뇌리에서도 떠났다. 30여 년도 더 흐른 어느 날. 평소 알고 지내던 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의학이나 약학 등을 공부하는 탈북 대학생들을 추천해달라고. 수석문화재단에서 장학금을 주겠다고. 그래서 30여 년 만에 강 회장님과 다시 인연이 이어졌다. 사재를 털어 장학사업과 평생교육사업을 하기 위해 강신호 회장님이 만드신 수석문화재단에서 탈북 대학생들을 돕기 시작한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다시 만날지 알 수 없는 인연은 이렇게 이어졌고, 나는 오늘 강 회장님 영안실에 다녀왔다. 향년 96세. 서울의대를 나와 제약회사를 일구고, 인재를 양성해온 강신호 회장님 영전에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두 줄로 길게 늘어서서 한참 동안이나 차례를 기다려야 입장이 가능할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외국인들도 적지 않았다. 권력을 누렸던 분도 아니다. 그렇다고 유명인도 아니셨다. 물론 박카스는 유명하지만, 그 박카스를 만든 분을 일반인들은 모른다. 그런데도 쏟아지는 빗속에 사람들은 줄을 서서 그분께 마지막 인사를 할 순서를 말없이 기다렸다. 강 회장님의 은덕이 얼마나 넓고 깊게 작용했었는지를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마지막 떠나는 사람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여주신 강신호 회장님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한다. 안녕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