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www.fmkorea.com/6910207333
카와리지 (카와리즈파)
لج
무함마드 사후 이슬람 최초의 내전이자 수니파와 시아파가 갈라지게 된 계기인 제1차 피트나(656-661)에서 생긴 분파
3대 칼리파 우스만이 암살당한 후 생긴 이슬람 최초의 내전인 제1차 피트나에서 4대 칼리파이자 무함마드의 사위 알리에 대적하던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가 패배에 직면하자 병사들의 창 끝에 쿠란 구절을 달고 협상을 제안한다.
1차 피트나에 대해 자세한건 다른 사람이 쓴 글 참조바람
수니파와 시아파가 나뉘어진 이유
같은 무슬림들끼리 더 이상의 유혈 충돌을 벌이고 싶지 않았던 알리는 이를 수용한다.
알리의 부하들 대부분은 이를 받아들였으나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 주축이 된 급진/강경파들은 "하나님의 심판 대신" 무아위야의 책략에 넘어가 다 이긴 전쟁을 싱겁게 끝내는 것처럼 보이는 알리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진영에서 이탈하여 알리에게 참회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알리는 이슬람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서 마땅히 한 선택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이를 거부했다.
이에 실망한 급진파들은 "하나님 외에 심판은 없다"를 구호로 삼으며 이탈하였는데, 정통성을 중요시하던 수니파와 시아파와 달리 무함마드의 혈통은 물론이고 인종과 출신 상관 없이 누구나 칼리프가 될 수 있다는 평등 사상을 주장하였고 자기들끼리 칼리프를 뽑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중에서 과격파들은 자기들만이 진짜 무슬림들이며, 엇나간 무슬림들(알리 포함)은 불신자이고 심지어 뉘우치지 않으면 죽여도 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중 일부는 무고한 민간인들까지 알리를 따른다는 죄목으로 몰아 남녀노소 죽이기 시작했다.
알리는 카와리지와 여러번 교섭을 시도했지만 결국 유혈충돌로 벌어졌고, 보다못한 알리는 쿠파에서 출정하여 미래의 바그다드 동쪽에 위치한 나흐라완에서 카와리지 군대를 격파하였다.
그러다가 661년 모스크에서 기도하던 알리가 카와리지 자객에게 독검으로 암살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이 천하의 미친짓으로 인해 카와리지는 수니파와 시아파 모두에게 공공의 적이 되고 만다.
카와리지들은 자신들의 적이었던 무아위야가 정권을 잡은 뒤 여러차례 반란을 일으켜 게릴라전을 하며 저항했고 제2차 피트나에서도 다시 발흥하나 하나둘씩 진압되었다. 아바스 왕조에 이르어서는 과격파들은 거의 다 진압된다.
이들 중 이븐 이바드를 필두로 과격행동을 반대하고 타협한 온건파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후예가 훗날 수니파, 시아파를 이은 제3종파인 이바디파(현재 오만에 대부분이 모여있음)가 된다.
다만 이바디파 또한 누구나 이슬람교를 이끌수 있다는것까지는 동의하지만, 카와리지와 엮이는 것은 싫어하며 철저히 구분한다.
현재는 여러 이슬람 신학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IS같은 테러리스트들이나, 무슬림 형제단같은 꼴통 근본주의자들을 비판할때 현대의 카와리지라고 하는 경우가 많으며, 하디스에서 무함마드가 카와리지(혹은 현대의 테러리스트들)를 예언하며 말했다는 다음 구절을 인용한다.
"말세에 너희들 가운데 어리고 미성숙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사람들의 말을 최대한 활용할 것이며 마치 화살이 사냥감의 몸체를 꿰뚫고 그것을 포기하는 것처럼 이슬람을 떠날 것이다. 그들의 믿음은 목구멍을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보는 곳마다 죽이도록 하라. 그들을 죽인 것은 심판 날에 보상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본마다 다름)
대충 젊고 무식한 놈들이 넘어가는 것이 현대의 극단주의자들, 테러리스트들과 비슷하다는 주장이다.
(일부 아랍 역사학자들은 비록 방향이 엇나가 행동은 과격했지만 일종의 혁명가나 평등운동가들이었다고 재평가하기도 한다.)
첫댓글 오 신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