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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허장성세해서야
—조카의 1년 귀향창업을 두고
(흑룡강신문=하얼빈)=얼마전 한국에서 5년간 어렵게 로무생활을 하다가 귀국한지 1년만에 또다시 로무길에 오르는 오촌조카를 떠나보내고 나서부터 나는 가끔 실면증에 시달리군 한다. 그때마다 부모 없이 자란 오촌조카에 대한 책임감을 못다한 죄책감이 가슴을 아프게 후빈다. 애초에 바로잡아줘서야 했는데…
올해 35살인 오촌조카는 6년전에 7년간 근무하던 직장을 버리고 한국에 나갔다가 지난해초에 한 낯선 녀성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고향에 돌아온 조카는 여기저기 친척, 친구들 집에 인사한다고 찾아다니며 하루 이틀씩 묵어가군 하였다. 우리 집에도 먹을걸 한꾸러미 사들고 찾아왔다. 인사수작을 마친 그는 돈 5000원을 내놓으면서 약소하지만 필요한데 보태 쓰라고 하였다. 네 처지에 이럴 필요가 없다고 내가 야단을 쳐서야 4000원을 되돌렸다. 제딴에는 효성을 보인다고 한 일이겠지만 나도 한국에서 로무를 한적이 있는지라 그렇게 어렵게 벌어온 돈을 너무 허프게 쓰는 조카가 못마땅했다.
나는 조카에게 그동안 수고가 많았다며 안해될 사람을 데려왔으면 속히 결혼식을 올려야지 않겠는가고 하였다. 그런데 조카는 결혼식이고 뭐고 그저 이렇게 살면 된다고 씁쓸하게 말하였다. 도무지 리해가 되지 않았다. 앞으로 어쩔 계획이냐고, 원래 직장은 그저 그렇게 버리느냐고 묻자 조카는 직장은 해서 뭘 하는가고, 토끼꼬리만한 봉급을 받아가지고 어떻게 사느냐며 커피방을 하나 꾸릴가 하는데 되겠는가고 물었다. 여기선 아직 커피문화가 크게 보급되지 않은데다 자그마한 현성에 이미 커피방이 몇곳 있어서 잘 될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조카는 쓰다달다 말이 없었다.
며칠후 거리에서 조카를 만났는데 이미 커피방은 꾸렸다고 하였다. 그래서 따라가 보니 영업실은 그리 크지 않으나 화려하고 깔끔하게 장식이 되여 있었다. 복무원인듯한 녀성이 커피 두잔을 가져와 우리는 자리를 잡고 마주 앉았다. 손님들이 많이 오느냐고 물으니 그저 많지 않다고 답했다. 그러면 너희들 둘이 할거지 복무원은 뭘하려 두는가고 묻자 그래도 명색이 호픈데 남들이 봐도 복무원이 있어야지 않느냐고 말했다. 따져보니 월세 1000원에 복무원 봉급까지, 게다가 이런저런 세까지 합치면 도저히 수지가 맞지 않았다. 그래도 조카는 지금은 꺼꾸로 서지만 앞으론 좋아질거라고 장담했다.
조카는 내킨김에 아파트도 한 채 사겠다고 하였다. 네가 돈을 얼마나 벌어왔는지는 몰라도 내 생각에는 새집을 사지말고 우선 남들이 살던걸 싸구려로 사서 들었다가 사업이 안착되고 돈벌이가 잘 되면 그때 새집을 사도 늦지 않다고 타일렀다. 하지만 조카는 그래도 살바에야 남들이 보기에 뜨르르한걸 사야 된다고 우겼다. 남들이 보는게 중요한것이 아니라 너 체신에 맞게 처리하는게 중요하다고 말하려다 조카가 이미 마음을 굳힌것 같았고 또 다 큰 애 앞에서 이래라저래라 하기도 멋해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후 나는 드문드문 커피방에 가봤는데 여전히 손님이 많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조카가 새집을 샀다기에 따라가 보았다. 6층이였는데 80여평방미터로 객실, 침실, 서재, 주방, 화장실이 따로 있었다. 게다가 영상면이 1평방미터이상 되는 천연색텔레비전, 랭장고, 전자레인지, 건조기… 고급 가전제품진렬장을 방불케 했다. 거기에 벽에는 커다란 유화까지 사다 걸어 마치 부자집 별장 같았다. 이렇게 장식하자니 돈을 많이 썼겠다고 하자 한 20만원 들었다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였다. 나는 어처구니 없게만 느껴졌다. 살림집을 굉장히 차리기에 앞서 사업에 몰두하여 돈부터 벌어야 하는데 일이 거꾸로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날 저녁 나는 조카가 기어이 붙잡기에 거기서 식사를 하게 되였다. 간소하게 반찬 둬가지에다 술이나 한잔 마시면 되련만 조카는 핸드폰으로 음식점에다 고급료리를 수두룩히 주문하였다. 뭘 그렇게 많이 주문하느냐고 하자 친구들도 청한다는것이였다. 미구에 남녀청년 8명이 들어섰고 주문한 8가지 채도 집안까지 배달되였다.
조카는 지난번 집들이 할 때 빠졌던 친구들이라면서 오량액 2병과 깡통맥주 한 박스를 내놓았다. 술이 몇순배 돌자 그동안 말이 적던 젊은이들이 하나둘 말주머니를 풀기 시작했다. 집을 과연 잘 꾸렸다느니, 사내답게 통이 크다느니,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느니…거개가 조카를 춰주는 말이였는데 커피방영업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잠간사이에 오량액이 굽이 나자 이번에는 분주 2병을 꺼내였다. 술을 무척 즐기는 나였지만 어쩐지 술맛이 나지 않고 또 젊은이들 속에 오래 끼여 앉아있기가 멋적어 젊은이들더러 천천히 마시라고 하고는 안방으로 피하였다. 이러자 젊은이들은 마치 기다리기나 한듯 음향기를 틀어놓고 노래가락을 뽑기 시작했다. 한참후 누군가 2차는 제가 낼 터이니 노래방으로 가자고 제의했다. 그러자 일제히 환성을 올리며 만세까지 불렀다. 그들은 밥상도 치우지 않고 나더러 쉬라 하고는 바람같이 사라졌다. 홀로 남은 나는 누워서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그만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어느덧 밤 9시였는데 이때까지 걔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조카네 집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조카의 커피방에 들렸다. 손님 8명이 세패로 갈려 앉아있었는데 남녀 쌍쌍 두패는 커피를 마시며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사나이 넷은 맥주를 마시며 떠들어대고 있었다. 말씨를 들어보니 한국물께나 먹은 분들이였는데 식탁우에는 빈 맥주병만도 여라문개나 놓여있었다. 그런데 조카네는 여기도 없고 복무원만 혼자 한쪽옆에 오도카니 서있었다. 나는 커피 한잔을 시키고 그 애를 옆자리에 앉혔다. 하루에 손님이 몇팀이나 오느냐 묻자 그 애는 낮에는 별로 없고 밤에 손님들이 오는데 많은 날엔 대여섯팀 되고 적을 땐 한두팀밖에 안된다고 했다. 하루 매상고를 묻자 좋은 날엔 200~300원, 보통날엔 백원 안팍이라고 했다. 듣고보니 기가 막혔다. 아무리 따져봐야 남을 돈이 없어서였다. 월급은 제대로 주느냐고 묻자 한달에 500원 월급은 한번도 체불한적 없다며 그들 부부는 참 맘씨가 후더운 분들으라고 하였다. 그런데 조칸 어디 갔느냐고 짐짓 모르는체 물었더니 친구들과 술을 마시거나 마작을 놀거라고 하면서 친구들 때문에 가게에 안나올 때가 많고 또 때로는 과음해 며칠씩 앓기도 한다면서 이러다간 커피방이 망할지도 모른다며 나더러 충고를 주라고 했다. 커피방을 나서는 나의 다리는 천근만근 무겁기만 했다.
그 후에도 몇 번 커피방에 들렸지만 영업은 매양 그식이 장식이였다. 한번은 조카를 앉혀놓고 돈을 좀 벌어왔다고 허장성세 하지말고 정력을 영업에 몰부어야 한다고 준절히 타일렀다. 그런데 웬걸? 오늘과 같은 개방된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하려면 친구들을 넓게 사귀고 돈도 쓸 땐 팍팍 써야 한다나. 돈을 쓰더라도 도를 넘어서는 절대 안된다고 하자 삼촌과는 세대차이가 나 말이 안 통한다고 퉁을 놓았다. 말하자면 나의 의식이 시대에 뒤떨어졌다는것이다. 나는 속으로 개뿔도 모르는 자식이라고 꾸짖으면서도 함언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한달쯤 지나서 조카가 난데없이 승용차를 몰고 우리 집에 나타났다. 웬 차냐고 물으니 20만원을 주고 샀다는것이였다. 택시라도 할셈인가고 물으니 그게 아니고 일볼 때 몰고다니고 친구들이 필요할 때 도와주는데 참 편리하다고 했다. 순간 조카가 어딘지 모르게 구렁창으로 빠져든다는 생각이 뇌리를 쳤다. 하지만 이미 쏟은 물이라 안타깝기만 했다.
일은 점차 터지기 시작했다. 조카는 차를 몰고 다니며 때로는 과속으로 벌금, 때로는 교통규칙위반으로 벌금, 때로는 차를 구렁텅이에 처박아 차수리로 천여원… 돈 쓸 일만 련해련방 뒤따랐다. 이뿐만이 아니라 차가 있답시고 때로는 수십리, 지어 백여리 밖에까지 가서 술추렴을 하기도 했는데 한번은 농가의 염소를 깔아 당장에서 500원을 내놓기도 했다.
지난해 겨울이였다. 친구들과 노래방에 갔던 조카는 술이 거나해 화장실에 갔다온다는게 한족들이 노는 방으로 잘못 찾아들어갔다. 그러더라도 조용히 돌아나왔으면 문제가 없었으련만 취김에 그방에서 삿대질을 하며 흰소리를 쳐 그만 싸움이 붙었다. 말이 싸움이지 실은 조카 혼자 물매를 맞는 꼴이 되였다. 그 바람에 조카는 눈통이 터지고 코뼈가 끊어졌으며 갈비에 금까지 났다. 친구들의 부축을 받아 집에 돌아온 조카는 그자들의 버릇을 떼놓는답시고 파출소에 신고했다. 마침 조카와 친분이 있는 경찰이 나서서 배상비 3000원으로 조해를 시도했다. 그런데 조카가 말을 듣지 않자 파출소에서는 증거가 확실치 않다며 뒤로 물러섰다. 하여 사건 처리는 이붓애비 제사날 미루듯 질질 끌다가 후에는 주범이란 자가 종적을 감추는 바람에 문제를 해결받기는커녕 일전한푼도 받지 못하였다. 그동안 조카는 경찰들을 여러번 먹였지만 사건은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 조카가 크게 믿어왔던 돈도 인맥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일체는 수포가 되고 말았다.
조카는 이렇게 1년간 허영에 들떠 떠벌려 먹고 놀기만 하다보니 커피방의 경제장부는 거꾸로 섰고 한국에서 벌어온 돈도 밑굽이 드러났다. 막다른 처지에 이른 조카는 나에게는 말도 없이 커피방을 남에게 넘겨주었고 살림집도 수만원을 밑져가며 팔아버렸다. 그리고는 처리하지 못한 가전제품들을 우리 집으로 실어왔다. 나더러 팔아달라고 했지만 중고품이라 제대로 팔 재간이 없었다. 어찌다 겨우 랭장고 한대를 팔았는데 그것도 몇천원짜리를 고작 300원밖에 받지못하였다.
조카는 다시 한국에 나갈 잡도리였다. 다행히 그가 한국에서 자진신고해 돌아왔기에 수속은 별 어려움 없이 비자가 내려왔다. 비자를 받아쥐자 조카는 자가용을 팔려고 동분서주 했지만 8만원에도 살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조카는 5년간 한국에서 피땀 흘려 번 돈을 단 1년만에 훨훨 날려버리고 다시 빈털터리로 나앉고 말았다.
조카가 한국으로 떠나기 전 나는 그와 마주 앉았다.
“얘야, 이게 무슨 꼴이냐? 네 엄마 아빠가 구천에서 땅을 치며 통곡하겠다. 이제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라. 돈을 벌기만 해서 되는게 아니라 굴릴줄도 알아야 해. 그리구 절약하는것두 돈을 버는거야. 넌 한국인들이 무서운 깍쟁이라고 늘 비난했지? 따지고 보면 그게 현명한 처사야. 다시 한국에 가거들랑 돈만 버느라 하지말고 귀국해서 할 일에 대비해 돈버는 재간과 방법을 익히도록 해라…”
나는 목이 메고 눈물이 쏟아져 말을 잇지 못하고 조카의 손만 꼭 쥐여주었다. 조카도 그제야 무언가 깨달음이 있는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이렇게 조카네 ‘부부’는 금년 3월에 다시 한국으로 떠났다. 떠나면서 제 친구한테 맡겨놓은 승용차는 5만원에도 팔리지 않아 친구손에서 무료로 굴러다니고 있다. 완전히 애물단지가 되고 말았다.
한국에 나간 조카는 가끔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새 삶을 살아보겠다고 다짐한다. 그때면 나는 돈을 자기 피처럼 아끼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술 한가지라도 꼭 익히라고 거듭 당부한다. 조카가 이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어떤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날지 걱정되면서도 믿음을 앞세워 기대해 본다.
/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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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이네요 삼촌이 조카에대한 마음 앞으로 조카가 정신차리고 잘살리라 및어보아야지요. 돈을 버는것보다 돈을 아끼는방법을 먼저 배우라는 말도있자나요 돈은 아껴썰줄모르는 사람은 돈을아무리 많이 번다고해도 그돈은 하늘로 날아가는 돈이겠지요' 모든분들이 이글을보고 많은 생각을 가질거라고 및습니다.
좋은 글 퍼갑니다.
절절한 마음 읽기는 쉬워도 그뜻을 알고 행하기는 힘듭니다.조선족분들 돈벌어 소비에 쓰지마시고 돈버는데 투자해서 한국 다시 안가고라도 잘살게 해야 합니다.
정말 주변에서 많이 보아온 사실이예요 한국에서 아글타글 벌어온 돈을 짧은시간내에 탕진해버리고는 다시 한국행하는 분들을 보면 정말 마음아파요 한국에서 얼마나 힘들게 돈을 번다구요...
..................휴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