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소
어머님께서 암으로 3개월밖에 못 사신다는 의사의 통보를 받고, 어
머님을 병원에서 구급차로 모시
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같이 타신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63세의 나이가 630세 정도나 들어 보이는 농부의 슬픈 얼굴,
내 아버지 '이기진'님은 하얀 시
트에 누워 눈만 둥그러니 떠 바라
보시는 어머니 '남기순'님의 손을 잡고 천둥 같은 한숨을 토해내며 울음을 삼키고 계십니다.
다음 날, 아버지와 아들이 소를 팔기 위해 새벽길을 나섭니다.
그 병원에서는 3개월이라 하지만
, 서울 큰 병원에 한 번 더 가보자
는 아버지의 말씀에, 집에서 기르
던 소를 팔기 위해 아버지는 어미 소, 나는 송아지를 잡고 새벽의 성황당 길을 오릅니다.
아버지는 저만큼 앞에서 어미 소
를 끌고 앞서 가시고 나는 뒤에서 송아지를 끌고 뒤를 따르는데, 새
벽의 차가운 공기를 뚫고 이상한 흐느낌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새벽의 산새 소리 같기도 하고, 새벽 바람에 스치는 갈대 소리 같
기도 하고….
내가 그 소리의 정체를 알아낸 것
은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아버지
가 연신 팔뚝으로 얼굴을 닦으시
는 모습을 보고난 뒤였습니다.
아버지가 소의 고삐를 잡고 우시
는 것 이었습니다.
소의 고삐를 움켜쥐고 흐느끼며 우시는 늙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
며, 나도 송아지를 잡고 얼마나 울었는지....
처음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고, 아
버지가 우시는 모습을 보았습니
다.
일본강점기와 6·25 피란 시절에
도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으셨다
는 아버지가 이 새벽 장터로 가는 성황당 고갯길에서 새벽을 깨우
며 흐느끼십니다.
아버지는 울음을 자식에게 보이
기 싫으셨던지 연신 "이랴!" 소리
로 울음을 숨기시며 길을 재촉하
십니다.
내가 해병대 훈련소 수료식 날,
청자 담배 두 보루를 들고 인천에
서 머나먼 진해까지 밤새 기차를 타고 면회오시어 멋쩍은 듯 자식
에게 담배를 주시며
"이거 네 엄마가 사준 거니까 조
금씩 피워!" 하시던 나의 고마운 아버지.
너무 마른 나의 모습을 보고
“이놈아, 힘들면 높은 사람에게 힘들다고 얘기해” 하시며 근심 어린 모습으로 내 손을 잡아주던 아버지.
아! 그때 처음 아버지의 손을 잡
아보았고, 그때 처음 아버지의 슬
픈 눈망울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걸었을까, 안개가 걷히고 우시장이 나타납니다.
소를 팔고 시장의 순댓국집에 아
버지와 앉았습니다.
순대 한 접시를 시켜놓고 소주
한 병을 주문했습니다.
"송아지 끌고 오느라 애썼다.
참 정이 많이 든 소인데 이 소들
이 네 엄마를 살릴 지 모르겠다.”
아버지께서 소주잔을 나에게 주
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강민아! 네 엄마 소원이 뭔 줄 아
느냐?"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곰
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엄마와 28년을 살면서 아직 엄마 소원을 들어본 적도 없었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조금은 궁금하기도 했
습니다.
아버지는 한참을 망설인 후 입을 여셨습니다.
“너 장가가는 거 보고 눈감는 거
야."
아! 어머니 소원이 내가 장가가
는거라니....
아버지에게 몇 잔의 소주를 더 청해 마시며 깊은 생각에 잠깁
니다.
그래, 어머니의 소원을 한번 들
어드리자.
하지만 결혼은 여건이나 현실로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우선 결혼할 상대여자가 없고, 가
진 돈과 직업도 없으며, 인물도 변변치 못해 약속은 그저 약속에 그칠 수밖에 없는 씁쓸한 현실이
었습니다.
소를 팔아 치료한 보람도 없이 어머니는 큰 병원에서도 가망이 없어 다시 퇴원하여 집에서 쉬시
며 이제 병원에서 제시한 3개월
에서 한 달이 남은 상태입니다.
그런 와중에 어머니의 마지막 소
원을 들어주라는 하나님의 도우
심인지 형님이 다니는 교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여자가 있으니 선을 한번 보라고
...
어두컴컴한 부천역 지하 다방에
서 딱 한 번 얼굴을 보았습니다.
나는 사실 그때 무엇을 따지고 무엇을 내세울 형편이 못 되었습
니다.
그리고 사실 여자의 얼굴을 쳐다
볼 용기도 없었습니다.
다음 날 빠른 엽서 한 장을 보냈
습니다.
“우리 어머님께서 앞으로 한 달
밖에 못 사십니다.
그래서 나는 한 달 안으로 결혼해
야 합니다.
이것이 어머님 소원이며 유언이
기 때문입니다.
싱거운 얘기지만 열흘 안으로 결
혼해 주실수 있나요?"
그리고 답신이 왔고, 우린 결혼을 하였습니다.
교회에서 예식을 하는데 어머님
께서 병원차를 타고 오셨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앉으신 어머님께
서 웁니다.
아버지도 울고
나도 울고
내 아내도 울고…
사정을 아시는 하객들과 주례 목
사님도 울었습니다.
신혼여행을 뒤로 미루고, 인천 연
안부두에 가서 김소월 시인의 시 '엄마야누나야'를 부르며 친구들
과 어울렸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어머님은 보름 후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그해 가을 어머니를 그
리다 어머니 곁으로 가셨습니다.
동갑 나이에 한동네에서 태어나
시어 63세의 같은 해 봄과 가을
에 돌아가신 두 분..
남들은 복받은 분이라 얘기하지
만 허울 좋은 이야기요.
그 힘들고 아프게 살아온 삶 하늘 밖에 누가 알리오.
부모님의 산소를 양지 바른 곳에 모시고 비석에 "하나님 아버지, 불쌍한 우리 부모님의 영혼을 받
아주시옵소서, 이렇게 새겨놓고,
그래도 이제라도 효도하는 것은
형제들끼리 잘 지내고 서로 사랑
하는 것이 작은 책임 아닌가 하며 다짐하며 살고 있습니다.
나는 결혼 후 장모님을 어머니처
럼 생각하며 30년을 함께 한집에
서 살고 있습니다.
이젠 장모님과도 함께 늙어갑니
다.
그리고 신혼여행도 못 가고 결혼 첫날부터 어머님 곁에서 정성을 다한 아내를 위하여 10여 년 전
부터 해마다 해외 신혼여행을 다
녀오곤 합니다.
아버님!
이제 낙엽이 지고, 그 낙엽이 아
버지 산소에 눈처럼 쌓이는 겨울
이 오면 아버님의 산소에 다시 찾
아 뵙겠습니다.
아버지,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