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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소설이 그린 허구세계, 우리가 읽는 현실세계
- 그 유치한 아름다움, 또는 거기에 담긴 진정성 -
정출헌(부산대 한문학과)
1. 고전소설에 대한 우리의 상식과 재검
고전소설을 무슨 재미로 읽고, 왜 읽어야 하는가? 이런 물음이 어리석고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막상 요령 있게 답하려고 하면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 문학이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과도 같이. 그러나 우리 고전문학사에서 고전소설이 차지하고 있는 만만치 않은 비중을 염두에 둔다면, 위의 물음은 피해가기 어렵다. 게다가 고전소설에 대해 갖고 있는 우리의 통념까지 감안한다면! 참으로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이는 고전소설을 위한 옹호, 또는 공정한 자리매김의 노력은 불가피하다 하겠다. 19세기 말, 한국을 찾은 한 서구의 이방인은 우리 고전소설을 두고 이렇게 평한 바 있다.
이러한 책[고전소설; 필자 주] 두세 권만 읽으면 전부 읽은 거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간혹 가다가 아주 신선한 풍경 묘사나 그럴싸한 특징의 파악이 보이고, 풍자적인 의도가 없지도 않은 것을 볼 수도 있지만, 묘사 수법이 늘 같아서 곧 싫증이 나게 되며, 인물의 특징도 과장되는 나머지 읽는 이의 얼굴을 찌푸리게 하고 만다. 어떤 때는 이야기의 줄거리가 환상적인 경향으로 바뀌어 뜻하지 않은 急變이 일게도 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 너무도 많고 인물들 사이의 관계도 별로 긴밀하지 않아 우리네 아동용 寓話 중의 가장 졸작보다도 오히려 재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낯 뜨겁다. 그러나 이런 혹평을 낯선 이방인의 무지에서 비롯된, 또는 악의에 찬 폄하로만 치부하지 말자. 오히려 여기에도 일말의 진실은 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고전소설을 읽고 제출한 학생들의 감상문을 접할 때마다, 아니 고전소설 연구를 업으로 삼고 있는 나 자신조차 이런 생각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건, 평면적인 인물의 성격, 판에 박힌 듯한 사건의 전개, 한결같은 권선징악의 결말 등 우리가 예전부터 귀가 아프도록 들어온 고전소설 특징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선조들은 프랑스 어린이가 읽는 우화 가운데 졸작보다 재미없다는 이런 고전소설에 무척이나 열광했다. 우리가 고전소설에 대해 던지는 엉뚱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바로 이런 양자간의 크나큰 거리감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토록 재미없는 이야기에 왜 그리 열광했는가의 문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에 대한 답을 마련하기에 앞서 고전소설이 고전문학사에서 수행했던 예사롭지 않은 몇몇 역할에 보다 주목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그건, 고전소설의 두드러진 특징적 국면이자 고전소설을 우리 고전문학사에서 결코 소홀히 여길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첫째, 소설은 그것이 성행하던 당대에는 문학사의 주류에 들지 못한, 아니 비주류 문학에도 끼기 어려웠던 저급한 문학 장르였다. 성리학적 문학관이 위세를 떨치던 당대의 문학적 토양을 볼 때,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는 하다. ‘小說’이란 命名에 각인되어 있듯, 이름 자체에 이미 폄하의 태도가 짙게 배어있는 것이다. 소설을 稗說 또는 諺稗라 부르기도 했는데,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렇듯 저급한 장르로 취급받던 소설이 지금은, ‘소설의 시대’라는 말이 웅변하듯 문학사의 주류를 점하고 있다. 문학사의 가장 변두리에 위치했던 소설이 어떻게 해서 문학사의 중심부로 당당하게 진입할 수 있었는가는 놀라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소설이란 장르의 문학사적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완고한 중세적 문학관을 뚫고 정점에 오른, 고전소설의 범상치 않은 생명력에 보다 유념해야 마땅하다.
둘째, 비주류 문학 또는 문학으로 취급받지도 못한 소설이 문학사의 꽃으로 부각된 사실도 놀랍지만, 그것이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더욱 놀랍다. 소설은 인류가 향유했던 문학 양식 가운데 가장 늦게 탄생한 문학 장르의 하나였다. 서구의 경우를 빌어 말한다면, 소설의 발생은 근대의 성립 또는 자본주의의 성장과 궤를 같이 했던 것이다. 소설의 역사란 이처럼 몇 백 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일천한데, 우리의 경우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매우 늦게 출발한 소설 장르가 그토록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조선후기 상품화폐경제의 확산을 우선적으로 꼽아야 할 것이다. 우리 인류가 향유한 문학 장르 가운데 가장 먼저 상품화폐경제의 논리에 맞춰 창작-유통을 경험한 것은 다름 아닌 소설이다. 이처럼 소설의 성장이 상품화폐경제의 성장과 유사한 궤적을 그리게 된 까닭은, 소설이란 장르가 인간의 잠재된 욕망을 끝없이 부추기는 데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화폐가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하면서 근대 자본주의를 일구어냈던 것처럼. 그런 점에서 소설이야말로 근대문학으로의 진전을 선도했던 장르라 할 수 있고, 근대적 지평 위에서 욕망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도 여전히 긴요한 장르라 할 수 있다.
셋째, 널리 알려진 것처럼 근대 이전의 사회는 철저하게 신분적 위계에 따라 인간과 인간의 사회․경제․정치적 관계가 결정되던 사회였다. 그리고 그건 문학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른바 양반사대부 남성은 자신의 문학 활동을 한문이란 표기문자로 수행했던 데 반해, 하층 남성이나 여성은 언문이란 표기문자로 수행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한문문학과 국문문학은 단지 표기 수단에서만이 아니라 세계관․미의식에 있어서도 일정하게 구분되곤 했다. 이런 차별적 문학 행위는 표기 수단의 차원을 넘어서서 문학 갈래에서도 뚜렷이 구별되는 바다. 예컨대, 漢詩가 상층 사대부를 문학적 향유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면, 民謠는 하층민을 문학적 향유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계층간/갈래간의 넘나듦이란 그다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예외적 현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지만 고전소설의 경우는 다르다. 비록 한문소설과 국문소설의 구분이 있고, 향유 대상에 있어 일정하게 구분되기도 하지만 소설은 이들 양자의 영역을 수시로 넘나들었다. 실제로 국문 표기와 한문 표기의 전환이 고전소설처럼 빈번한 경우란, 우리 고전문학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들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상층/하층을 넘나들며 문학적 교류를 활발하게 이룰 수 있었으니, 고전소설이 어떤 문학 장르보다 민족 구성원 전체의 정서를 풍부하게 담아낼 수 있었다고 말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고전소설은 이처럼 매우 하찮은 문학 갈래에서 가장 중심적인 문학 갈래로, 가장 늦게 출발한 문학 갈래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문학 갈래로, 그리고 상층과 하층의 깊은 단절을 뛰어 넘어 문화적․정서적 소통을 가능케 한 문학 갈래였다. 그 점, 고전문학의 여러 갈래 가운데 고전소설을 결코 가볍게 취급할 수 없는 이유이다. 동시에 고전소설이 이룩한 가장 인상 깊은 문학적 성취의 국면이기도 하다. 완고한 중세적 문학관을 뚫고 근대문학의 총아로 발 빠르게 성장하면서, 민족 구성원 전체의 정서를 두루 포괄해나간 갈래가 바로 고전소설이었던 것이다.
2. 새롭게 음미해보는 고전소설 감상법
고전소설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모리스 쿠랑의 혹독한 소감은 뭐란 말인가? 프랑스에서 건너온 그 낯선 이방인은, 우리의 서책에 대해 참으로 관심이 많던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이들을 읽고, 꼼꼼하게 정리하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짧은 체류 기간 동안 우리 고전문학의 속내를 정확하게 간파하기란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오늘날 우리들이 갖고 있는 고전소설에 대한 통념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그의 발언은 조목조목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그를 통해, 우리는 고전소설의 매력을 새롭게 음미하는 단서를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간혹 가다가 아주 신선한 풍경 묘사나 그럴싸한 특징의 파악이 보이고”
- <심청전>의 탁월한 형상과 그를 가능케 한 현실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
판소리계 소설은 우리 고전소설 가운데 가장 우뚝한 현실주의적 성취에 도달한 유형으로 꼽힌다. 그 점은 우선 거창한 명분과 관념적 열정에 지배되는 영웅의 세계로부터 세속적 삶의 지평으로 서사적 관심을 이동하면서 당대 현실의 모순을 날카롭게 포착할 뿐 아니라, 중세적 관념의 틀이 편의적으로 배제했던 인간 존재를 새롭게 주목했다는 점에서 발견된다. 특히, <심청전>에는 많은 비극적 肖像들이 등장하고, 그들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게 만들곤 한다. 앞 못 보는 지아비의 처자로 평생 고생하다 딸 낳은 지 칠 일만에 세상을 버렸던 ‘곽씨부인’, 어린 딸을 안고 동네 아낙네를 찾아 젖동냥을 다녀야 했던 ‘심봉사’, 눈먼 아비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망망대해에 던져야 했던 ‘심청’이 그들이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심청전>은 어떻게 그려내고 있었던가?
작품은 양반의 후예였던 심학규가 家運이 불행하여 이십에 眼盲하게 된 사실을 간략히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의 몰락과 불행이 ‘우연’처럼 서술되고 있지만, 반드시 그렇게만 보아 넘길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양반들이 대거 몰락했던 조선 후기의 사회상이 투영되어 있고, 그 몰락은 정신적․신체적 파멸까지 수반하며 가속화되었던 것은 아닐까? 곽씨 부인이 병으로 죽게 되는 불행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처럼. 곽씨 부인의 죽음 내력은 이러했다.
이때에 곽씨 부인 산후 손데 없어 찬물로 빨래허기 왼갖 일로 과로를 허여 놓으니 뜻밖에 산후별증이 일어나 아무리 생각허여도 살 길이 없는지라.
사십이 넘은 老産임에도 산후조리조차 도와줄 손대기가 없어 몸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궁핍, 그녀의 죽음은 조선후기 하층 부녀자가 겪었던 비극의 한 정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밭에서 아이를 빠뜨리고 다시 김을 매었다는 우리 어머니와 그로 인해 처자를 앞세웠던 우리 아버지. 곽씨 부인의 돌연한 죽음으로 깊은 공감을 자아내며 작품을 펼쳐갈 수 있었던 데는, 당대 민중의 현실 체험에서 환기된 이같은 정서의 일체화에 힘입은 바 컸다. 이처럼 <심청전>은 몇 세기에 걸쳐 진행된 조선 후기 양반층의 몰락이라는 사회 모순과 고난에 찬 하층민의 삶을, 때론 인과적으로 때론 짤막한 한 구절에 집약했던 것이다. 판소리계 소설이 장면 장면을 얼마만큼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었던가?
집이라고 들어서니, 부엌은 적막허고 방안은 텡 비었난듸, 향내 쑥내만 피어 있다. 방 가운데 우뚝 서서 한참 동안을 생각더니, 심봉사 발광증이 나 앉었다 선뜻 일어나며 문갑 책상을 두루쳐 메여다가 와직끈 아그르르르르 쾅 콰광탕 부딪치며, 쓰던 수건 빗던 빗첩을 모두 주어 내던지더니마는, “아서라, 이것이 쓸 데가 없다. 이것 두어 무엇 허겄느냐?” 정신 없이 문을 툭 차더니 부엌으로 충충 내려서며, “마누라, 거기 있소? 거 어디 갔소? 허어, 내가 미쳤구나.” 방으로 다시 들어와 방 가운데 주저 앉어 우두머니 앉었을 제,
평생을 의지하고 살았던 부인을 땅에 묻고 집으로 돌아온 뒤, 미친 듯이 날뛸 수밖에 없었던 심봉사의 애절함이 여실하다. 적막한 부엌, 텅 빈 방안, 그리고 초상 치른 집에 밴 향내. 멍함, 발광, 자문자답, 그리고 다시 멍함. 신파조의 말 한마디 사용하지 않고 정황과 행위만으로 아내 잃은 심봉사의 애통한 심사를 곡진하게 드러내는 표현 기법이 무척이나 돋보인다.
이후, 심봉사는 귀덕어미의 설득에 정신을 되찾아, 부인네를 찾아다니며 젖동냥으로 심청을 길러내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하나 있다. 심봉사의 인물 형상에 대해서다. 많은 연구자들은 심봉사를 비속하고 철없고 골계적인 인간으로 이해해 왔다. 앞서 지적했던 대로, 사회 경제적 몰락과 신체적 불구가 그를 정신적 파탄으로까지 몰아간 측면이 없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심청을 죽음으로 몰고 간 계기가 그의 분별력 없는 시주 약속이고 보면, 그같은 설명이 타당한 듯도 하다. 하지만 그 대목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추위와 굶주림에 떨며 혼자 기다리던 심봉사,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어린 딸,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불길한 생각들. 기다리다 못해 마중을 나갔던 심봉사는 물에 빠져 죽을 뻔하다 천우신조로 살아난다. 몽은사 화주승에게 공양미 삼백석의 시주를 약속하는 것은 이같은 일련의 삽화가 그려지고 난 뒤이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사리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했던 심봉사의 처사를 근엄하게 꾸짖기보다, 그의 판단력을 마비시켰던 일련의 상황을 이해하며 읽어야 옳지 않을까? 그때 그에게 눈을 뜰 수 있다는 말보다 절실한 것이 무엇이 있을 것이며, 그같은 절박한 심리를 이용해 오기까지 발동시키는 화주승의 술책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그리 많겠는가? 그러나 이내 “몹쓸 놈이 죽지도 않고 못난 짓만 허네 그려”라며 자신의 경솔함을 뼈아프게 뉘우치는 심봉사, 그야말로 凡夫의 전형일 터다. 그에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여기서 人情物態를 겉으로 드러난 면만이 아니라 처한 상황과 관련지어 은밀히 감추어진 心底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충동적 행위까지도 눈에 보이듯 그려내는 판소리계 소설의 描破力을 실감하게 되는데, 이는 인간에 대한 충실한 이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것이리라.
판소리계 소설은 이처럼 몇 구절로 숱한 내력을 개괄화하거나, 놀랍도록 생동한 장면을 제시하고 있거나, 진실한 인간 이해에 토대한 묘사를 구사하거나, 터무니없는 듯한 삽화를 교묘하게 활용하는 등 그 형상화 방법이 실로 다채롭다. 이같은 형상화를 두고, ‘이면을 그린다’라는 말이 쓰이기도 하는데, ‘이면’이란 ‘리얼리티’란 의미이다. 판소리 광대들은 ‘이면’, 곧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 남다른 공력을 기울여 왔다. 기실 판소리만큼 숱한 실험과 단련을 거쳐 완성시킨 예술이란 흔치 않다. 수백 년간, 수백 명의 광대들이, 수백만의 관객 앞에서, 수백 번 부르면서 고치고 다듬는 과정을 되풀이하여 완성시킨 것이 바로 판소리이다. 판소리가 당대의 현실 및 인정물태를 그토록 생동하게 그려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과정을 거친 결과이다. 판소리는 매우 거칠고 다듬어지지 못한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 불필요한 군더더기란 거의 없을 만큼 정련된 민중 연행예술인 것이다.
“풍자적인 의도가 없지도 않은 것을 볼 수도 있지만”
- 深重한 풍자의 정신, 또는 그를 넘어선 <토끼전>의 진지한 질문
흔히, 고전소설은 1,000여 종을 오르내린다고들 한다. 아마도, 그 가운데 영웅소설류가 가장 큰 다수를 차지할 터다. 거기에서 우리는 무능한 군주․부친․남편을 종종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야말로 흐트러진 봉건국가의 질서를 되돌리려는 중세적 영웅소설의 저류에 깔려있는 풍자 의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쿠랑이 그걸 두고 말하는 것은 아닐 듯하다. 그보다는 조선후기의 세태를 비판적 시각으로 읽고 있는 일련의 풍자소설을 염두에 둔 것이리라. 실제로 <배비장전>․<황새결송>․<이춘풍전> 등에서는 지배층으로 군림하던 양반, 관원, 가장의 허위의식이 신랄하게 풍자된다. 하지만 단순한 세태 풍자의 수준을 넘어서서 봉건국가의 모순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데까지 나아간 경우도 없지 않다.
제기를 붙고 발기를 갈 녀석. 뱃속에 달린 간을 어찌 내고 들인단 말이냐? 미련하더라, 미련하더라, 너의 용왕 미련터라. 너그 용왕 실없기 날 같고, 내 미련키 너그 용왕 같거드면 영락없이 죽을 것을, 내 밑궁기 서이 아니드면 내 목숨이 살아가랴? 병든 용왕을 살리랴 허고 성한 토끼 내가 죽을소냐. 내 돌아간다, 내가 돌아간다. 백운청산으로 내 돌아간다. … 별주부 곰곰 생각을 해 보니 저놈한틔 속절없이 돌렸구나. 하릴없어 수궁으로 들어가 버리고. 그때여 토끼란 놈은 살어왔대서 금잔디 밭에 가 대그르르 궁글며 귀를 털고 생방정을 떨고 한 번 놀아 보는듸, … 예 듣던 청산 두견, 자주 운다 저 새 소리. 타향 수국 갔던 벗님 고국 산천을 돌아오니 어찌 이리도 반갑냐. 예 먹던 머루 다래를 오도독 오도독 깨물면서, 요리로 깡짱 저리로 깡짱, 깡짱 깡짱 뛰고 논다.
死地에서 살아나온 토끼가 용왕의 미련함과 탐욕을 신랄하게 욕보인 다음, 다시 살아난 기쁨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신나게 그려내는 대목이다. 실제로 이 대목을 부를 때면, 부르는 광대도 흥겹거니와 듣는 청중도 마냥 흥겹다. 그런 흥겨운 웃음바다가 경망스런 토끼의 노래와 춤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웃음바다에는 미련하기 짝이 없는 용왕에 대한 ‘노골적인 핀잔’과 병든 용왕 살리랴고 성한 내가 죽을 수 없다는 ‘번뜩이는 각성’이 뒤섞여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김태준과 같은 연구자는 전래하는 兎龜說話에 우스운 골계와 지저분한 해학을 가한 작품이라고 형편없이 폄하했지만, 사실 <토끼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겉으로 드러난 웃음에 매몰되지 않고 작품에서 구사되고 있는 독특한 판소리 문법에 유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판소리의 서사구조는 울리고 웃기는, 곧 비장과 골계의 반복이라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토끼전>은 비장의 자리에 풍자를 대신 배치한다. 그리하여 전편을 웃음으로 끌고 가지만, 거기에는 ‘냉소적인 웃음’[풍자]과 ‘유쾌한 웃음’[골계]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냉소적인 웃음을 유발하거나 그 대상이 되는 것이 주로 용왕, 별주부, 그리고 수궁의 여러 신하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처럼 그들의 행위가 한판의 웃음거리로 전락하게 되는 대목에 이르게 되면, 토끼의 희생을 요구하던 봉건지배층의 위선적인 회유나 억압이 비집고 들어올 틈새란 없다. 사실, <토끼전>이 봉건해체기의 소설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바로 이 지점이다. 모든 것을 웃음바다로 만들어 버리고 있지만, 진정 웃음거리가 된 것은 무엇인가? 또한 동물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지만, 그들이 寓意하고 있는 것은 현실세계의 누구인가? <토끼전>은 웃음과 우화의 형식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개개인의 삶을 구속하던 차별적인 인간관과 그에 기초한 봉건체제의 모순을 나갈 수 있는 지점까지 최대한 밀고 나가 戱畵化했던 것이다. 게다가 <토끼전>의 결말은 참으로 문제적이다. 바로 토끼의 저 신명나는 춤과 노래 때문에 그냥 지나치기 십상인 별주부의 向方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보통 요즘의 <수궁가> 창자들은 “별주부 곰곰 생각을 해 보니 저놈한테 속절없이 돌렸구나. 하릴없어 수궁으로 들어가 버리고.”라 처리해 버리고 말지만, 그처럼 간단히 처리하기엔 별주부란 인물은 참으로 복잡하고도 착잡한 인생이다. <토끼전>의 결말이 이본마다 달라지는 주된 원인도 바로 별주부 때문이다. 여기서는 별주부 해석의 한 극점을 보여주는 사례를 들어본다.
자라 하릴없어 탄식 왈, “간특한 토끼에게 속고 하면목(何面目)으로 돌아가 왕을 보리오. 차라리 죽음만 같지 못하다.”하고 글을 지어 바위 위에 붙이고 머리를 바위에 땅땅 부딪치어 죽었더라. 이때 왕이 자라를 보낸 후 소식 없음을 고이 여겨 자라의 형 대사성 거북을 별정하여 그 곡절을 알아오라 하니, 거북이 즉시 수변에 이르러 살펴 보니, 바위 위에 글을 지어 붙이고 그 곁에 자라의 시체 있거늘, 거북이 잔잉히 여겨 통곡하고 자라 시체와 글을 거두어 가지고 돌아와 복명한대 왕이 불쌍히 여겨 예단(禮緞)을 내려 안장하니라.
토끼가 한바탕 놀다 나 몰라가 떠나버리고 난 뒤, 별주부가 보여준 행동이다. 많은 연구자들은 맹목적인 충을 보인 자에 대한 조소의 시각으로 별주부의 죽음을 읽었지만, 위의 경우에 있어서는 전혀 적절치 않다. 오히려 별주부는 더할 나위 없는 충신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며, 그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는 영웅적 인물의 최후가 자아내는 悲壯에 가깝다. 물론, 자라가 충성스런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고 해서, 위에서 살핀 토끼의 승리를 구가하는 대목이 약화되거나 생략되는 경우란 거의 없다. 토끼는 토끼대로 긍정되고 자라는 자라대로 긍정되는데, 이러한 서술시각은 분명 목숨을 걸고 대립했던 두 인물을 어정쩡한 화해로 얼버무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결말로 끝맺는 이본은 무척 많으며, 이는 어떤 식으로든 적절한 설명이 필요함을 우리에게 환기시켜 준다.
이같은 결말을 두고 19세기 양반 좌상객의 개입에 의해 민중적 기반을 갖고 있던 판소리가 굴절․왜곡된 것이라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존하는 이본의 상황을 보거나 19세기 전반에 연행되던 <토끼타령>을 듣고 기록한 감상을 보거나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닌 듯하다. 자라는 누가 보아도 긍정적인 인물로 볼 만한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고, 아니 상층이나 하층을 막론하고 별주부를 맹목적인 충의 화신으로 치부해 버릴 수 없는 정서를 많든 적든 지니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사태의 실상일 듯하다. 그리하여 토끼의 일방적 승리로 작품을 끝내지 못한 채 별주부의 행방에 깊은 관심을 두었던 것이고, 그 결과 다양한 결말 구조를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부패한 용왕의 터무니없는 강요를 신랄하게 조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용왕을 위해 온몸으로 헌신한 별주부를 함께 싸잡아 조롱하지 못한 까닭은, 조만간 허물어져 버릴 봉건국가의 운명을 예감하면서도 이런 사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결정하지 못한 당대인의 착잡한 정치의식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런 진단이 정당하다면, <토끼전>은 우화의 형식을 빌려 봉건국가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정치적인 입장을 묻고 있는 것이라 바꿔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토끼전>이 보여주고 있는 다양한 결말은 바로 그에 대한 합의를 마련하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문학적 현상인바, 요즘도 답변하기 어려운 진지한 물음이기도 하다.
“묘사 수법이 늘 같아서 곧 싫증이 나게 되며”
- 반복과 변용의 유구한 전통과 <오유란전>이 다다른 한 극점
전근대의 문학 양식인 고전소설은 주로 구술과 청취라는 방식을 통해 향유되었다. 詩와 歌의 분리가 근대시의 주요한 징표였던 것처럼, 朗讀과 黙讀은 소설의 전근대와 근대를 가르는 주요한 징표이기도 했던 것이다. 고전소설에서 흔히 발견하게 되는 律文이라는 특징적 문체, 상투적인 묘사 방식, 시간의 단선적 흐름, 줄거리의 반복적 요약 등은 대부분 그런 문학 환경에서 배태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건, 근대 이전 서구소설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그걸 트집 잡아 ‘싫증이 난다’는 모리스 쿠랑의 투정은, 근대소설에 익숙한 한 서구인이 그릇된 잣대를 들이밀어 내린 편견 또는 오만에 가깝다. 물론 고전소설 작품들을 읽다보면, 비슷비슷한 묘사 수법으로부터 인물 설정, 사건 전개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반복되는 게 사실이긴 하다. 그래서 한 두 장만 넘겨보면, 결말까지 훤히 짐작할 수 있다. 마치, 아침마다 방영되는 텔레비전 연속극처럼.
그럼에도 우리는 왜 그런 뻔함에 몰두하는가? 사실, 우리가 깊이 되물어야 할 대목은 바로 이것이다. 비슷한 구조가 주는 ‘반복의 안도감’, 그러나 독자의 기대 지평을 때때로 벗어나곤 하는 ‘변용의 새로움’! 가장 판에 박힌 고전소설 유형으로 거론되는 영웅소설을 흥미 있게 읽는 독법은 바로 그 지점이다. 얼마간의 비약을 무릅쓰고 그걸 미화한다면, ‘패러디의 미학’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사정은 이러하다. 유수한 고전문학 작가의 문집을 보노라면, 漢詩가 가장 많아 수백 수천에 달한다. 얼핏 보면, 또는 한시의 전통에 익숙지 않은 눈으로 보면, 모두 그게 그것 같기도 하다. 사실, 이황의 시 한 편을 주희의 문집 속에 끼워 넣을 때 그걸 가려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들은 너무나 흡사한 작품을 너무나 많이 썼다. 그러나 누구도 그걸 두고 독창성이 없다느니 또는 모방이라느니 하는 비난을 가하지 않는다. 이황의 위치 때문이 아니라 기존의 문학적 관습을 준용하되, 거기에 얼마간의 변용을 가하는 것이야말로 한시 미학의 精髓이기 때문이다. 박지원이 말한 저 유명한 선언, 곧 法古創新이란 것도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이런 전근대적인 문학 전통에서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하긴, 작가의 개성 또는 독창성을 강조하는 지금의 문학적 풍토를 들먹이며 지난 시절을 얕보거나 지금의 우리들을 너무 자만해서는 안 될 터다. 몇 백 년이 지난 뒤, 범범한 독자들이 우리 시대의 소설가인 박경리와 박완서의 작품 세계를 명확하게 구분할 것이라 장담할 수 있겠는가? 불과 몇 십 년 지났을 뿐인데 요즘 대학생들이 남진과 나훈아를 구분하지 못한 채 그저 ‘뽕짝 가수’로 묶어 버리는 것처럼, 그때쯤 되면 박경리와 박완서도 ‘아주 낡은 근대’의 여성작가로 취급될 것임에 분명하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묘사 수법이 비슷하다고 또는 결말 처리가 한결같다고 너무 탓하지 말자. 그보다는 그런 한결같은 반복을, 당대의 문학사적 맥락에 유의하면서 그때 그들은 그곳에서 무슨 변용을 일구고 무슨 흥미를 느꼈는가를 진지하게/겸손하게 따져보자.
더욱이 그런 반복과 변용의 극점을 일군 작품들도 여럿 있는데, <오유란전>이 그 가운데 하나다. 이는 春坡散人이 창작하고, 竹泉居士가 證釋한 작품이다. 이름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들은 변변찮은 양반인 듯하다. 필사(또는 저작) 시기가 1858년이었는데, 주목할 바는 춘파산인이 이를 ‘戱著’했다는 표현이다. 소설에 대한 폄하의 뜻이 담긴 것이지만, 작품의 성격상 좀더 유의할 만하다. ‘장난스럽게’란 표현이 특히 그러하다. 기실, 이 작품은 그들에게 잘 알려져 있던 典範을 자신의 시각에 의거해 교묘하게 비틀고 있다. 고전소설, 특히 전기소설의 창작에서 패러디란 한시와 마찬가지로 매우 중요한 창작 기법이었다. 하지만 여기서의 그것은 매우 과격하면서도 격렬하게 구사된다. <오유란전>에서 전기소설의 체취를 맛볼 수 있는 대목은 많지만, 죽었다던 오유란이 밤에 이생 앞에 나타나는 대목일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전기소설의 초기적 면모를 보여주는 <최치원전>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전기소설의 비약적인 발전을 자극한 <전등신화> 가운데 <애경전>과 같은 작품에서 촉발 받은 바다.
만일 저승에서라도 나의 뜻을 알아주어 다시 한번 만날 수 있도록 하여 주신다면, 趙郞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하여 愛卿이 전생의 인연을 이은 것처럼 하겠습니다. 글로 하고자 하는 말을 다할 수 없고, 말로도 낭자를 생각하는 뜻을 다할 수 없사오니, 오호 슬프기 한이 없소이다.
사실, 전후 맥락을 모른 채 읽는다면 참으로 애끊는 슬픔을 자아낼 법하다. 실제로 여기에 거론되는 조랑이나 애경이니 하는 말은 바로 <애경전>의 사연을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작품은 <전등신화> 가운데 가장 슬프고 애틋한 남녀의 사랑, 특히 생사를 넘나드는 만남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오유란전>에서는 이 착잡한 삽화를 끌어들이면서 완벽한 喜劇을 연출하고 있다. <오유란전>이 전기소설의 서사문법을 변용, 나아가 전복시키고 있다는 것을 이런 국면을 일컫고 있는 것이다. 이런 대목도 있다.
“나를 유혹한 사람도 이생이옵고 나를 병들게 한 사람도 이생이옵니다. 그러하오나 나는 살아서 이미 이씨의 사람이 되었거니와 죽어서도 또한 이씨의 혼백이 될 것입니다. 이씨는 경성의 거족으로 조만간 반드시 등룡할 것이며, 벼슬을 제수 받아 이곳을 지나갈 것이온대, 나를 여기에다 묻어 이생이 거친 무덤을 한번이라도 돌보게 해준다면, 어찌 황천에 있는 외로운 혼령인들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어디선가 본 듯한 유언이 아니던가? 그렇다, 변심한 연인을 향해 자신의 삶과 사랑을 절절하게 토로한 배도가 주생에게 했던 그것! <오유란전>은 바로 <주생전>의 애끓던 사연을 끌어들여 이렇듯 우스꽝스럽게 만들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유란전>에서 구가하고 있는 전복의 대상은 전기소설만이 아니다. 보다 직접적인 대상이 있으니 그것은 판소리계 소설이다. <오유란전>과 같은 유형의 한문소설로는 <芝峰傳>․<丁香傳>․<鍾玉傳> 등이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女色과는 담을 쌓고 지내던 양반(의 자제)이 주변 사람의 共謀에 의해 망신을 당한다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물론 이런 일련의 작품 구조는 新參禮란 오랜 전통에서 그 연원을 구할 수 있을 듯하다. 고참이 신참을 길들이는 ‘못된’ 의식 말이다. 하지만 <오유란전>이 보다 직접적으로는 참고한 것은, 이런 신참례의 의식을 민중의 시각으로 전복시킨 <강릉매화타령>․<배비장타령>이다.
또 한 가지 웃을 일이 강릉책방 골생원을 매화가 속이려고 백주에 산 사람을 거짓되게 죽었다고 훨씬 벗겨 앞세우고 상여 뒤를 따라가며 이 사람도 건드리고 저 사람도 건드리며 자지에 방울차고 달랑달랑 노는 것이 그도 또한 굿일레라.
지금은 전해지지 않지만, 신재효가 전한 <강릉매화타령>의 한 구절이다. 기실, 이들 판소리계 소설이 풍자의 대상을 발가벗기면서 노리던 극적 효과는 위선에 가득 찬 양반층의 허위의식을 만천하에 폭로하는 것이었다. 또는 다음과 같은 대목도 우리에게 익숙한 구절이다.
그날 밤중에 역졸 여남은 명이 마패를 높이 들고 각각 몽둥이를 가지고 삼문을 두드리며 일시에 소리내어 외쳤다. “암행어사 출두요!” 우레와 번개가 백리 밖에 진동하고, 천지가 한 성안에서 뒤집혀지는 것과 같았다. 관노와 이방은 일을 단속하느라 이리저리 분주하고, 좌수와 별감은 가정에서 놀라서 눙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갈팡질팡 어쩔 줄 모르는 것이 마치 솥물이 끓는 것과 같았다. … 감사는 본래 해학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잘하는 사람이었다. 황급한 상황 속에서도 계월이의 가는 허리와 사타구니 사이를 손가락질하며 희롱의 말을 했다. “추위를 당하여 감기가 들었느냐? 어찌 그리도 콧물을 많이 흘리느냐?” 계월이 슬쩍 돌아보며 대꾸했다. “사또께서는 당상관에 오르시어 관작을 수여받았습니까? 어찌 그리 불같은 불알이 우뚝 섰으며 큼직하십니까? 그러하오나 이같은 위급한 때를 만났는데도 희롱의 말이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바라건대 좀 정신을 차려 무사하시기를 도모하십시요.”
민중연행예술의 정화인 판소리 12마당 가운데 <춘향가>에서 암행어사가 출도하는 대목, 그리고 <변강쇠가>에서 옹녀와 변강쇠가 첫날 밤 서로의 성기를 가지고 희롱하던 기물타령이 생각나지 않는가? 이들은 탐학한 수령에 대한 민중의 징치, 그리고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던 중세인의 성적 욕망을 공공의 장소에서 폭로하던 빛나는 대목들이었다. 하지만 현재 온전하게 전하지 않는 <강릉매화타령>과 <배비장전>에서 그런 모습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오유란전>에서는 그런 신랄한 풍자의 정신을 맛보기 어렵다. 깊은 슬픔을 한껏 웃음판으로 몰아가고, 날카로운 풍자를 부드러운 웃음판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 이것이 전기소설과 판소리계 소설의 서사문법을 과격하게 패러디한 실상이다.
“인물의 특징도 과장되는 나머지 읽는 이의 얼굴을 찌푸리게 하고”
- 너무 심한 과장 또는 부분의 독자성이 지니고 있는 내적 논리
흔히, 고전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대부분 선인과 악인으로 양분된다고 한다. 그리하여 선인은 선인의 최대치로, 악인은 악인의 최대치로 과장되기 일쑤다. 흥부와 놀부가 그렇고, 곽씨부인과 뺑덕어미가 그렇다. 특히, 뺑덕어미야 말로 그의 악행을 드러내기 위해 그 외모조차 극단적으로 그려진다. 사실, 그녀는 조선후기 유랑하는 하층 부녀자의 한 전형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악처의 표본이라거나 골계를 위한 조역이라는 점에서만 주목을 받았다. 나아가 전체 줄거리와 무관하게 덧붙은 판소리의 독특한 서사구조, 곧 ‘부분의 독자성’을 입증하는 자료로 인용되기도 했다. 실제로 그녀는 웃음 유발을 위해 의미 없이 삽입․부연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과연 그러한가? 하지만 그녀는 골계를 위한 소도구가 결코 아니었다.
[1] 그때 마침 근촌에 사는 아주 흉악한 홀어미 하나가 있으되, 이름은 뺑덕어미요 별호는 뺑파라. 얼굴이 고금 일색일는지 만고박색일는지 몰라도 꼭 이렇게 생겼던 것이다. 생긴 모양을 볼작시면 말총같은 머리털은 하늘을 가르치고, 됫박 아미에 홰눈썹과 우먹눈 주먹코요 메주볼 송곳턱에 입은 크고 입술 두터 큰 궤문을 열어논 듯, 써래 이 드문드문 혀는 늘어진 짚신짝이요, 두 어깨는 떡 벌어져 키를 거꾸로 세워논 듯, … 심봉사 좋아라고 달려들어 질끈 안더니, “아이고 내 꿀단지야, 말소리만 들어도 이렇듯 어여쁠 제 말하는 입모습과 태도를 보았으면 안 미칠 놈 뒤 있겠느냐. … 밤이면은 마을 돌고 낮이면은 낮잠 자기, 쌀 퍼주고 떡 사먹기, 벼 퍼주고 엿 사먹고, 의복 잡혀 술 먹기와 빈 담배대 손에 들고 오고가는 행인들게 담배 달라 힐란허기, 멱삭잡고 어린 양에 젊은 중놈 유인허기, …
[2] 환과고독 사궁 중에 홀애비가 으뜸이라. 타도 타관 낯선 곳에 이 신세를 어이 하리? 이왕에 도망을 갈라거든 있던 곳에서 도망을 가지, 수백 리 떠나와서 이 지경이 웬일이냐? … 현철하신 곽씨부인도 북망산에다 묻어 놓고, 출천대효 심청이도 인당수로 보냈넌듸, 너 같은 년 간다 하여도 나 못 살질 만무허고나. 에라, 요년아, 잘가거라. 나 혼자 살란다, 잘 가거라. … 주점 밖을 나서더니 그래도 생각이 나서 “어따, 요년아 몹쓸년아. 세상 천지으 몹쓸년아. 눈뜬 가장 배반키도 사람치고는 못할 텐데, 눈 어둔 날 버리고 니가 무엇이 잘 되겄느냐? 네 멋대로 잘 가거라.”
심청이 인당수로 떠나가고 난 뒤 얻은 뺑덕어미의 외모와 행실을 늘어놓은 대목과 황성 맹인잔치에 가던 중 뺑덕어미가 젊은 황봉사와 눈이 맞아 도망친 뒤의 심봉사 탄식 대목이다. 대목 [1]은 그야말로 고전소설에 등장하는 최대 몹쓴 존재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과장이란 참으로 극에 달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걸 지켜보며, 웃는다! 하지만 [2]의 대목은 문제적이다. 이 대목이 청중에게 주는 정서는 어떤 종류인가? 도망친 뺑덕어미의 그릇된 처사에 대한 분노인가, 아니면 그나마 의지해 살던 마지막 희망마저 놓쳐버린 심봉사의 절망에 대한 동정인가? 둘이 확연히 나뉘는 것은 아니지만, 후자가 더 큰 비중으로 다가온다. 필자는 명창 안숙선의 <심청가> 공연에서 관객이 두 번 우는 것을 보았는데, 한 번은 곽씨 부인이 죽은 뒤 심봉사의 탄식 대목이었고 한 번은 바로 이 대목이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끝없는 추락을 거듭하던 심봉사가 겪어야 했던 또 한 번의 절망적 추락. 사실 앞서 뺑덕어미의 못난 외모와 몹쓸 행실을 그토록 장황하게 열거한 까닭은 그것 자체로 조선후기 하층 유랑민의 단면을 풍속화적 차원에서 생동하게 그려낸 것이지만, 그것을 이 대목과 관련지어 해석해 본다면 그처럼 못 생기고 행실 나쁜 여자일지언정 심봉사에게는 마지막 依支處였다는 사실을 말해 주기 위한 복선이 아니었을까?
기실 판소리 문학의 탁월성은, 삶에 대한 관심․포착이 단편에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조선후기 현실에 대한 문학적 형상화에 역동성․총체성을 부여해주도록 배치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이는 각각의 삽화들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듯하지만 실은 전체적인 맥락과 내밀한 관련 아래 위치되어 있을 뿐 아니라, 등장인물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의 몫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데서 확보된다. 잡다한 사건과 다양한 인물의 얽힘과 풀림을 그대로 펼쳐 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된 지향 속에 결집시켜 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가운데 미숙한 부분도 있고, 그 독특한 문학성에도 불구하고 소박한 차원의 산물임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할 부분도 있다. 하지만 이들을 판소리의 한계라 손쉽게 지적하기 이전에, 민중적 상상력이 일궈낸 현실주의적 형상화 방식을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오늘날 우리의 빈곤한 상상력을 먼저 반성할 일이다.
“이야기의 줄거리가 환상적인 경향으로 바뀌어 뜻하지 않은 急變이 일게 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 너무도 많고”
- 현실성과 환상성의 결합 방식, 또는 환상으로 담은 <흥부전>의 현실성
고전소설의 특징 가운데 으레 꼽는 것은 환상적 결구이다. 현실주의적 성취를 가장 잘 보여주는 판소리조차, 그런 결구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주의적인 창작 방식으로 진행되던 전반부는, 갑작스런 후반부의 환상적 결구로 인해 상호 모순되는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런 환상적 급변과 도무지 있을 수 없을 법한 상황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은, 아마도 <흥부전>에서의 ‘신비로운 박’이라는 설정일 것이다. 그곳의 주인공인 놀부에겐, 삼강(三綱)이니 오륜(五倫)이니 하는 윤리도덕이란 하찮은 것으로 보일 따름이었다. 돈버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까지도 재산 모으는 데 방해가 된다고 쫓아내는 데 있어서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물론 그의 이같은 행위를 역사적으로 볼 때, 중세 사회를 해체해가는 데 일조를 하고 있다는 긍정적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 경제적인 이익의 추구는, 이제까지 모든 사람에게 질곡으로 작용하던 봉건적 윤리규범이나 가치와 갈등․대립하면서 이를 여지없이 깨뜨려나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놀부가 취하고 있는 삶의 태도는 공동체사회의 모순을 심화시켜나가면서, 황금만능주의라는 사고방식을 확산시키고 있던 역기능을 간과할 수 없다. 그로 인해 당대 민중은, 비록 물질의 힘이 급속도로 무게를 더해가는 시대를 살아갔으면서도 놀부가 보여주는 삶의 방식을 단호하게 거부하게 된다. 작품 후반부에서 길게 펼쳐지는 놀부에 대한 징치는 인간간계를 황폐화시키는 재물의 폐해에 대한 민중들의 반감, 바로 그것이다.
그렇지만 놀부의 파멸과정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제비의 ‘놀부박’이라는 우연적이거나 신비로운 힘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보다는 이제까지 자신을 일으켜 세워준 재물에 대한 탐욕이, 역으로 자신을 파멸로 이끌어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잘 알려져 있듯, 그는 많은 재물을 얻을 수 있다는 욕심 때문에 스스로 제비다리를 부러뜨린다. 재앙을 자초한 셈이다. 제비가 가져다 준 박씨를 심어, 화(禍)가 구체적인 현실로 실현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박통을 탈 때마다 재물을 빼앗겼지만 다음 박에는 분명 재물이 잔뜩 들어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버릴 수 없었던 것은 그의 탐욕 때문이었다. 박을 그만 타자는 삯꾼과 아내의 만류를 무릅쓰고 ‘흥하면 흥하고 망하면 망한다(成則成 敗則敗)’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던 놀부의 놀라운 집념, 이것은 탐욕에 가득 찬 자가 으레 지니고 있는 한탕주의이거나 도박근성에 다름 아니다.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한다는 격언처럼, 놀부야말로 탐욕으로 일어선 자 탐욕으로 망한다는 말에 해당된다 할 만하다. 이런 점에서 신비로운 박을 등장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놀부의 성장과 파멸이 보여주는 삶의 궤적은 현실생활의 법칙을 충실히 지키고 있는 셈이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탐욕스런 놀부가 이른 지점은 어디였던가?
별안간 박속에서 모진 바람이 쏘아 나오며 벽력같은 소리가 나더니, 똥 줄기는 천군만마(千軍萬馬)가 달려오는 듯, 태산(泰山)을 밀치고 바다를 메울 듯, 삽시간에 놀부 집 안팎에 가득하니, 놀부 부부 온 몸이 황금덩어리가 되어 달아나 멀찍이서 바라보니 온 집이 똥에 묻혔는지라. 만일 왕십리 거름 장사가 알게 되면 한 밑천 잡게 되었더라.
황금만을 좇던 놀부 부부가 누런 똥을 뒤집어 써 ‘황금덩어리’가 되고 말았다는 이 대목에서 우리는 황금만능주의자의 말로를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놀부의 처절한 파멸에 대해 <흥부전> 작자는 한 마디의 동정적 언사도 내비치지 않는다. 대신, “이런 일도 또 있는가? 이러할 줄 알았으면 동냥할 바가지나 가지고 나오면 좋을 뻔하였구나? 하고, 뻔뻔한 이놈이 처자를 이끌고 흥부를 찾아가더라.”라는 냉소로 작품을 끝맺고 있을 따름이다. 놀부에 대한 증오심이 얼마나 깊었는가를 말해준다.
그런 면모를 염두에 두고 전반부에서 빈부의 양극화로 초래된 문제를, 후반부에서 제비가 가져다준 박을 통해 해결하는 <흥부전>의 구조를 좀더 꼼꼼하게 읽어보자. 사실, <흥부전> 전편을 읽어나갈 때, 우리들은 전․후반의 분위기가 판이하게 달라진다는 사실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흥부의 고난이 전반부에서 눈물겹도록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데 반해, 후반부에서는 기쁨에 넘친 환상적 빛깔로 채색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흥부가 겪던 절대적 궁핍이 신비로운 존재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곧 절망적 현실의 역설적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제비가 가져다준 박은 피눈물 나게 분투하는 흥부에 대한 당대 민중의 보답이었고, 거기에는 그네들이 꿈꾸던 세상의 모습이 담겨 있다는 점을 보다 주의 깊게 읽어내야 한다.
사정은 이러하다. 선량한 동생 흥부가 못된 형 놀부에게 쫓겨날 때, 모두 “군자 같은 그 심덕(心德)에 어디가면 못살겠나, 암데 가도 부자 되지.”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렇기는커녕 거지 행색으로 전전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를 지켜보던 그들은 “세상에 공도(公道) 없소.”라며 당대 현실에 대한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건강한 삶을 매몰차게 저버리고 마는 현실에 대한 깊은 회의와 비판적 시선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대 민중들은 성실히 살아가면 반드시 보답을 받고 자기만 잘살기 위해 악행을 저지르면 언젠가는 대가를 치른다는 삶의 이치, 곧 자신들이 꿈꾸던 올바른 세계를 제비박을 통해 형상화했던 것이다. 이것이 신비로운 제비박을 두 차례나 끌어들였던 진정한 이유다.
먼저, 흥부박을 보자. 흥부가 켠 박통 속에는 ‘전곡(錢穀)’과 ‘비단’과 ‘고루거각(高樓巨閣)’이 들어 있었다. 그것들이 가난한 민중들에게 있어 긴요한 식의주(食衣住)였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 더욱이 ‘많이 나왔다’라는 말로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품목 하나하나를 지루할 정도로 길게 나열하고 있는 표현수법은 주목할 만하다. 이에 대한 당대인들의 원망(願望)이 얼마나 컸는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보다 눈여겨보아야 할 사실은, 흥부가 단지 많은 재물을 소유하는 것에 그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놀부보다 몇 배 부자가 된 흥부의 태도를 보자.
얼씨구나, 돈 봐라. 잘난 사람은 더 잘난 돈, 못난 사람도 잘난 돈. 생살지권(生殺之權)을 가진 돈, 부귀공명이 붙은 돈. 이놈의 돈아, 아나 돈아. 어디를 갔다가 이제 오느냐? 얼씨구나 좋을시고. 둘째 놈아 말 듣거라. 건넌 마을 건너가서 너의 백부님 오시래라. 경사를 보아도 형제 볼란다. 얼씨구나 좋을시고, 지화자 좋을시고.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 박흥보를 찾아오오. 나도 내일부터 기민(饑民)을 줄란다. 얼씨구나 좋을시고.
박에서 쏟아져 나온 돈을 보고 흥부가 기뻐하며 부르던 ‘돈타령’의 일부인데, 그의 입을 빌어 표현된 당대인들의 소망스런 세계는 어떤 모습이었던가? 돈의 많고 적음으로 인간됨이 평가된다는 사실을 누가 모를 것이며, 생사여탈권까지 지닌 돈을 누가 마다할 것이랴? 흥부야말로 돈 없는 설움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실감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졸지에 부자가 된 흥부는 자기가 당한 설움을 되갚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돈 때문에 자기를 쫓아낸 형을 불러 기쁨을 함께 하고자 했으며, 자기처럼 가난한 사람을 당장 내일부터 구제하겠다고 한다. 흥부가 부르던 이 노래는, 돈이 초래한 황폐화된 인간관계를 회복하여 모두가 함께 잘사는 세상을 꿈꾸던 민중의 소망이 아니겠는가?
다음으로 놀부박을 보자. 놀부는 열 세통의 제비박에 의해, 아니 실은 끝없는 자신의 탐욕 때문에 파산하게 된다. 흥부박이 세통에 지나지 않는데 비해, 네 배가 넘는 박을 설정한 것에서 놀부를 징치하고자 했던 민중의 적대감을 엿볼 수 있다. 보다 흥미로운 사실은, 놀부가 재물을 빼앗겨가는 구체적인 과정들이다. 놀부박 안에는 수백 수천의 거지떼, 풍각쟁이패, 사당패, 초라니패, 짐꾼들을 비롯하여 양반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이들이 때로는 완력(腕力)으로, 때로는 놀이값으로, 때로는 점쳐준 대가로, 때로는 속량(屬良) 대가로 돈을 뜯어가는 것이다. 왜 하필 이들인가? 여기서 우리는 작품 서두에 열거된 놀부의 심술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의 심술은 이루 다 열거하기 어렵지만, ‘궁반(窮班) 보면 관 찢기’, ‘걸인 보면 자루 찢기’, ‘초라니패 소고(小鼓) 도둑’, ‘옹기짐의 작대기 차기’ 등등을 우선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놀부박에서 나와 놀부를 파멸로 몰아가던 인물들은 그에게 온갖 수모를 받아야만 했던 바로 그들이었다. 더욱이 이들은 놀부와 같은 몇몇 부류가 경제적으로 성장하며 산출시켰던 조선후기 농촌사회의 구조적 희생자들, 곧 하층 유랑민들이기도 했다. 이제 그들 개개인이 당했던 수모를, 수백 수천 명이 함께 모여 비로소 몇 배로 분풀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진 자들은 본래 ‘단합된 무리’를 가장 두려워하는 위인이 아니던가?
그런 점에서 제비 다리를 제 손으로 부러뜨려 재앙의 씨앗을 뿌리고 중간에 그만두어도 될 박을 탐욕으로 계속 타다 결국 파멸하고 만 것이 자업자득이라면, 이들에 의한 파멸이야말로 ‘진짜’ 자업자득이라 하겠다. 우리는 여기서 조선후기 내내 끊이지 않던 민란을 연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흥부전>에서는 이를 그처럼 살벌하게 다루고 있지 않다. 여기서 잠시 놀부박의 한 대목을 보기로 하자.
박이 딱 쪼개져 노니, 박통 속에서 남사당패, 여사당, 거사, 초라니패, 각설이패, 모다 이런 것들이 나오것다. “야, 거 나오던 중 기중 낫다마는, 그럼 어디 한번 놀아봐라.” “아이 샌님, 그렇게 함부로 얼른 노는 것이 아니올시다.” “그럼 어쩐다냐?” “여기서 한번 우리가 노는 데 행하(行下:구경값)가 천냥이올시다.” “뭣이, 천냥이여? 아따, 너무 비싸다.” “아따, 샌님도. 이왕 없어진 돈, 뭣이 그리 아까워서 그래 쌓소. 천냥 주고 한번 재밌게 노시요.” “그려. 어디 한번 노는 구경이나 해보자. 한번 놀아 봐라.”
온갖 놀이패와 실랑이를 벌이고, 그들이 벌인 흥겨운 놀이에 웃고 즐기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놀부는 자기 전 재산을 탕진하고 만다. 이런 방식을 취하는 까닭은 원수 같은 놀부의 파멸을 통쾌하게 여기던 민중들에게 신명나는 놀이판을 마련해 주기 위한 문학적 배려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재물에 그토록 악착같던 놀부가 놀이판에 빠져들게 되는 것은 나름대로 현실적인 근거가 있다. 졸부들이야 예나 지금이나 유흥과 쾌락을 한 번 맛보면 끝내 헤어나지 못하게 마련이 아니던가?
“인물들 사이의 관계도 별로 긴밀하지 않아 우리네 아동용 우화 중의 가장 졸작보다 재미없다.”
- 인물과 인물의 치밀한 관계를 무섭도록 설계한 <구운몽>에서의 한 사례
<구운몽>은 작가가 김만중으로 밝혀져 있는 고전소설이다. 그리고 그것은 夢外의 성진과 夢中의 양소유라는 참으로 같고-다른 주인공의 절묘한 인물 설정, 그리고 양소유를 중심으로 한 여덟 여인의 관계가 흥미롭고도 진진하게 그려져 있다. ‘遠方 書生으로 서울에 올라와 의탁할 만한 후원자를 만난’ 양소유는 자신의 뛰어난 능력과 혁혁한 가문의 결합을 배경으로 급속한 지위상승을 경험하고, 급기야 황실의 駙馬가 되기에 이른다. 거기에는 정경패와 이소화란 두 여인이 관계를 맺고 있었다. 양소유는 정경패와 이소화와의 결연을 통해 자신이 꿈꾸던 부귀공명을 성취할 수 있게 되고, 그러기에 여덟 여인과의 만남 가운데 이들과의 결연과정을 그리는 데 작가의 역량이 가장 많이 투여되고 있다. 대신 이들을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뒤 작품 전면에서 사라졌던 진채봉이나 계섬월을 비롯한 미천한 신분의 여섯 여인은, 전체적으로 볼 때 양소유의 성취과정에 얻어지는 부수적 인물로 그려진다. 이런 성격이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그들과의 최종적인 邂逅를 그리는 대목에서다. 전반부 6회[2-9회]는 양소유가 여덟 여인을 만나는 개별화된 사건을 다루고 있고, 후반부 6회[10-15회]는 개별화된 만남이 통합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여덟 여인과의 結緣이 첫 번째 만남에서는 한결같이 후일을 기약하고 헤어진 뒤, 작품 후반부에서 비로소 최종적인 邂逅를 통해 마무리되는 것이다.
물론 첩이 되는 여섯 여인과의 만남 하나하나는 각기 다채로운 면모를 간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인 해후를 서술하는 대목에 이르게 되면서 그들의 장식적인 성격이 강화되어 나타나고 있어, 양소유의 결연과정을 다룸에 있어 별도의 고찰이 요구된다. 그 과정을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양소유 삶에 있어 절정을 이루는 지점은 역시 土藩의 亂을 평정하고 돌아온 때일 것이다. 그의 영화로움은 다음과 같이 그려진다.
恩旨를 내리사 양소유로 大丞相을 삼고 魏國公을 봉하며, 食邑 삼천 호, 黃金 일만 근, 白金 십만 근, 蜀錦 십만 필, 駿馬 일천 필 등을 상으로 주셨으며, 그 밖의 진귀한 보물들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었다.
여기에 더하여 정경패와 이소화를 각각 좌우부인으로 맞아들이고, 그들의 몸종이면서 자신과 전에 인연을 맺은 바 있던 진채봉과 가춘운까지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때다. 이에 이르러 양소유는 노모를 서울로 모셔 오게 된다. 태후와 황제는 그의 모친을 위하여 金銀采緞 열 수레를 내리고, 만조백관들을 청하여 3일 동안 잔치를 여는 특전을 베풀어 준다. 양소유는 그것도 부족하여 ‘황제가 거처하는 곳과 비등할 정도로 화려한 집’에 모친을 모시고, 다시 사흘간의 大宴을 베푼다.
그런데 기생 출신 계섬월과 적경홍과의 해후가 이루어지는 곳은 이 모친 獻壽宴에서다. 승상이 두 공주와 더불어 玉杯를 들어 대부인께 獻壽하려던 차에, 문지기가 “문 밖에 두 여자가 와서 대부인과 승상에게 名帖을 드리나이다”라 아뢴다. 계섬월과 적경홍이었다. 양소유가 이들을 맞이하여 그 가진 재주를 보이게 하자, 이들은 동시에 일어나 「霓裳羽衣曲」에 맞추어 구슬 신을 신고 석류 무늬가 아름답게 새겨진 소매를 휘날리며 춤을 추어 잔치의 흥을 한껏 돋군다. 獻壽宴의 절정이 이로 인해 이루어졌음은 물론이다. 한편 백능파와 심요연과의 해후 역시 그들이 越王과 벌이던 성대한 樂遊原 會獵에 홀연 油壁車를 타고 찾아와 이루어지고, 결국 양소유의 聲勢를 한껏 드날리게 해 주도록 설정되어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처럼 이들 네 여인은 양소유의 성취를 보다 화려하게 장식하는 보조적 인물로 기능하며, 각기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사실 양소유 삶의 역정에서 볼 때, 작품 후반부는 지리할 정도로 장황하게 두 공주와의 成禮, 모친의 獻壽宴, 월왕과의 樂遊原 會獵 및 태후의 罰酒 장면으로 채워진다. 이들 모두는 양소유가 추구하던 부귀영화의 성취를 한껏 드높여 주는 향연으로서의 성격이 짙다. 그러기에 정점을 향해 치달으며 양소유와 그를 둘러싼 여인들이 빚어내던 긴박감 넘치던 사건과 다채로운 형상은, 질탕한 잔치 분위기에 압도되어 점차 생동감을 잃고 만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같은 소설적 긴장감의 상실에도 불구하고 작가의식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은 바로 이 대목들이다. 이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국면은 정경패나 이소화와 처지가 현저하게 달라, 이들만큼 독자적인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던 여섯 여인에 대한 형상화 방식이다. 이들이 양소유의 현실적 성취를 위한 한 계기로서, 나아가 그같은 성취의 화려함을 드높여 주는 장식적 기능을 맡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들의 열악한 신분 때문이다. 신분에 따라 여덟 여인과의 결연이 차별적으로 이루어지던 양상을 <구운몽>의 독자였던 李蔚山宅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팔선녀 다 남악 위부인의 시녀로 죄를 얻고 인간 적강함에 사주와 팔자며 궁달귀천을 처음부터 같이 점복할 일이거늘, 어떤 이는 난양공주 정소저 되고, 어떠한 이는 진소저 되고, 어떠한 이는 가춘운 계섬월이 적경홍이 심요연이 되고, 어떤 이는 백릉파 되니 저승에서 복선화음을 어찌 그리 고르게 못하였는고. 염라전 지장왕이 각각 뇌물 받고 길흉을 점지하여 뇌물의 다과를 보와 많은 자는 어려서부터 좋게 나서 좋게 길리어 양소유께 돌아가며, 적은 자는 차등이 있게 점지함인가?
閻羅殿 地藏普薩이 뇌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신분의 차이를 두어 환생시켰다는 식의 희화적인 방향으로 감상평이 이어지고 있지만, 李蔚山宅은 같은 여성으로서 여덟 여인이 동등하게 대우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느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런 사실을 작중 인물인 정경패는 이렇게 고백한 바 있다.
제자 여덟 사람은 처음에는 비록 南北에서 각기 태어나고 東西로 흩어져 살았으나, 커서는 한 사람을 한 집에서 함께 섬기게 되면서 義氣가 相合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물건에 비유하자면, 한 나무에 핀 꽃이 비바람에 흔들려 혹 宮殿에 떨어지고, 혹 閨閤에 흩날리며, 혹 陌上에 떨어지고, 혹 山中에 날리며, 혹 시냇물을 따라 江湖에 이르게 되었으나 그 근본을 말하면 하나의 뿌리를 같이 한 것입니다.
위 인용문은 정경패와 이소화가 桃園結義를 본받아 양소유의 처첩이 된 8명이 형제처럼 지내자고 제안하여, 관음보살 앞에게 고한 서약문의 한 대목이다. 이같은 내용이 황제나 명문귀족의 딸[落於宮殿, 飄於閨闔]로 태어난 ‘이소화와 정경패’, 거리의 여자[墜於陌上]로 삶을 꾸려가야 했던 기생 ‘계섬월과 적경홍’, 변방 오랑캐 땅[飛於山中]에서 살던 ‘심요연과 백능파’, 그리고 주인을 따라 양소유를 함께 섬기게 된[隨溪流而達江湖] 몸종 ‘가춘운과 진채봉’, 이 네 부류로 묶이는 여인들의 현실적 처지를 비유하고 있는 것임은 물론이다. 그들 모두는 각기 다른 신분으로 태어난 자신의 처지를 우연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연처럼 보이는 그네들의 운명은 기실 작가 김만중에 의해 작품 서두에서부터 이미 네 부류의 신분으로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말을 마치고 손에 든 복숭아 꽃 한 가지를 선녀들의 앞에 던지니, 네 쌍의 짙붉은 꽃봉오리가 明珠로 변하여 상서로운 빛이 땅에 가득하였다. … 팔선녀는 각기 그 하나씩 주어들고 성진을 향하여 燦然한 웃음을 보내며 몸을 솟구쳐 허공으로 사라져 갔다.
‘네 쌍의 복숭아 꽃’이 여덟 개의 구슬로 변했다는 연화봉에서의 스쳐지나가는 듯한 이 언급은, 팔선녀가 환생해서 양소유와 맺는 관계를 결정지어 주는, 실로 의미심장한 복선이었다. 여덟 명의 여인들은 각기 다른 처지로 인간 세상에 태어나 양소유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게 되는 것, 이런 인간관계에 대한 묘사는 참으로 끔찍할 정도로 정교하다.
3. ‘해피앤딩’과 ‘황당함’까지 옹호해야 하는 까닭
고전소설은 거의 대부분이 해피앤딩이다. 유치하게 보일 법하다. 그러나 결코 유치할 수만은 없다. 이를테면 판소리계 소설의 결말부야말로 해피앤딩의 결정판인데, 그것의 의미가 결코 가볍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흔히, 판소리계 소설은 봉건해체기의 징후를 여러 측면에서 문제 삼고 있던 민중연행예술의 빛나는 성취로 일컬어진다. 창을 잃어버린 실전 7가가 상품화폐경제가 확산되며 분비한 조선 후기의 일그러진 인물군상에 대한 풍자에 힘을 쏟고 있었다면, 현재까지 공연 현장에서 불리고 있는 전승 5가는 당대의 일그러진 인물과 변화된 세태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면서 중세사회를 떠받치고 있던 충, 효, 열과 같은 봉건 윤리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사태를 표면에서 진단한 것이기는 하지만, “「춘향가」는 烈을 권장하고, 「심청가」는 孝를 권장하고, 「박타령」은 友愛를 권장하고, 云云”한 정현석의 언술은 이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물론 이들 작품이 봉건적 이념을 표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좀더 내밀하게 들여다보면 그것의 위기적 상황을 제기하여 그 허구성을 극적 방식으로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토록 떠받들던 貞節을 지배층 스스로 부정하는 자기모순, 孝를 죽음이라는 최대의 불효로 구현할 수밖에 없는 역설적 현실, 友愛라는 도덕으로 더 이상 통제할 수 없게 된 재물에 대한 불타는 욕망을 문제로 설정하여, 그런 이념들의 形骸化된 몰골을 여지없이 폭로했던 것이다. 그러고 난 뒤, 이들은 강요에 의한 정절이 아니라 자발적이고도 수평적인 애정으로서의 信義, 교조화된 효의 묵수가 아니라 肉親愛에 기반을 둔 인간 본연의 자연스런 情理, 재물의 소중함을 배척하지 않으면서도 모두가 공존하는 大同의 삶을 모색하는 것으로 그 대안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렇게 제시된 대안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춘향과 이도령의 결합, 심청과 심봉사의 해후와 개안, 흥부의 성공과 놀부의 파멸은 모두에게 합의된 결말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결말에 이르는 과정이 대개 낭만적 또는 환상적인 방식으로 결구되어 있어 현실감을 떨어뜨리는 면이 없지 않고, 그래서 현실의 총체적인 모순구조를 은폐하는 것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또는 설화와 로맨스의 낙인이 깊숙이 찍혀 있는 증거로 간주하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인간다운 미래를 향한 지칠 줄 모르는 민중들의 염원과 그를 향한 폭발적인 잠재력이 내장되어 있으며, 더욱이 그들이 합의한 결말의 당위성은 아직까지 한 번도 거부되거나 의심받아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쨌든 이제는 시효를 상실하여 폐기 처분해 마땅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민중연행예술로서 판소리가 구축해 온 이런 결구 방식은 보다 깊이 탐구할 필요가 있다. 특히, 결말 대목에 이르면 으레 축제분위기가 연출되는데, 그곳에는 이제까지 등장한 많은 인물들이 한꺼번에 나와 한 바탕의 걸판진 춤판을 벌이곤 한다. 월매가 신명나게 벌이는 한바탕의 잔치마당이나 전국의 맹인이 벌이는 잔치마당이 그러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때 그곳에서 두터운 ‘사회적 통합감’, 곧 중세적 질곡이 더 이상 주인공을 비롯한 우리 모두를 억압할 수 없다는 점을 함께 확인하며 새롭게 태어난다. 춘향과 이도령의 극적인 해후가 이루어지는 <춘향전>의 대단원을 직접 보기로 하자. 사실, 그 결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읽고 또 읽는다. 그건, 이런 이유가 아닐까?
구례 현감(縣監) 오줌싸며 쥐구멍에 상투 박고, “누가 날 찾거든 벌써 갔다고 하여다고.” / 전주 판관(判官) 갓을 뒤집어쓰고 “어느 놈이 갓 구멍을 막았단 말이냐?”하며 개구멍으로 달아나고 / 본관(本官)은 똥을 싸고 내아(內衙)에 들어가서 다락에 들어앉아 “문 들어 온다, 바람 닫아라.” / 대부인(大夫人)도 똥을 싸고 실내부인(室內夫人) 똥을 싸서 온 집안이 똥빛이라. 하인 바삐 불러, “거름장사 바삐 불러 똥을 대강이나 치워다고.”
똥오줌을 질질 싸며 허둥대는 남원현감, 전주판관, 남원사또, 그리고 남원사또 변사또의 어머니와 부인이 벌이던 추한 행태와 몰골. 하지만, 얼마 전까지 그들은 얼마나 무시무시하던 호랑이들이었던가? 당대 민중들은 행세를 한답시고 으스대던 자들의 허둥대던 대목을 힘차고 빠른 휘머리 장단에 얹어 흥겹게 불렀다. 그건 신명나는 민중의 한바탕 축제였다, 다시는 이들이 자신의 위에서 군림하며 위세를 부리지 못하게 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그리고, 그런 다짐의 해피앤딩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고전소설의 유치함을 꼽을 때, 황당함은 으레 꼽히는 목록이다. 실제로 옛사람들은 황당한 이야기를 매우 즐겼던 것 같다. 자유자재로 도술을 부리는 이야기, 죽은 여인과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 이승과 저승을 마음대로 넘나드는 이야기, 등등. 하지만 우리의 선조만 그건 것은 아니었고,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오죽했으면 공자가 “군자는 모름지기 괴이한 이야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며 경계했겠는가? 그렇지만, 옛사람들만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즐겼던 것은 아니다. 우리 주변을 한 번 둘러보자. 고전소설들과 방식과 느낌은 다르지만, 정도에 있어서는 결코 뒤지지 않을 황당한 이야기가 수없이 떠돌고 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삶과 죽음조차 뛰어넘어 사랑을 나누는 <사랑과 영혼>은 과연 상식적으로 납득할 만한가? 외계인이 우주선을 타고 지구에 내려와 어린아이와 감동적인 우정을 나눈다는 <E.T.>는 또 어떠한가? 아니, 빗발처럼 쏟아지는 총탄 사이를 휘젓고 다니며 악인을 물리치는 헐리웃 액션은 황당하지 아니한가?
어찌 보면, 황당함이란 예나 지금이나 우리를 흥분과 긴장 속으로 빨아들이는 힘을 지닌 묘약(妙藥)인 듯도 하다. 사실, 문학이란 고도의 상상력이 요구되는 예술양식이다. 그 가운데서도 서사문학은 상상력을 보다 절실히 필요로 한다. 때문에 우리는 이런 서사문학을 통해 간절히 소망하던 꿈을 이룰 수도 있고, 사모하던 연인과 사랑을 나눌 수도 있고,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일로 만들어 볼 수도 있다. 그렇다고 겉으로 드러난 그 황당함에만 정신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황당한 줄거리 안에 담긴 옛사람들의 진심(眞心)을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고전소설의 첫장을 열었던 나말여초의 <수이전>부터 황당함은 단골 메뉴이기도 했다. 그것은 황당하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하다. 죽었던 자가 사랑하는 이의 슬픔으로 되살아나기도 하고,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마음에 불이 일어 불귀신이 되기도 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짐승이든 귀신이든 진정을 주고받는다는 내용이 그러하다. 그럼에도 그 황당한 사랑이야기는 핍진하게 읽힌다. 왜 그러한가? 그것은 황당함, 아니 풍부한 상상력이 주는 감동 때문이리라. 이들 이야기에는 산 자와 죽은 자, 미천한 자와 고귀한 자, 인간과 동물, 그리고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상상력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인간 중심의 관점이나 이해타산에 얽매이지 아니한, 바로 그 싱그러운 상상력!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혹 유치하게 보일 법도 하다. 하지만 인간과 자연, 삶과 죽음을 함께 아우르는 그 너른 상상력은 신선하면서도 건강하다. 세속의 때가 묻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겠다. 지금은 어떠한가? 우리는 꿈을 잃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다는 말을 자주 한다. 아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오염된 꿈을 꾸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기에 건강하면서도 지칠 줄 모르는 옛사람들의 자유로운 꿈이 더없이 그립다. 요즘, <해리포터>라든가 <반지의 제왕>의 황당함이 전세계인을 열광시키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자유로운 꿈을 되찾기 위해, 고전소설의 황당함을 좀더 사랑해야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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