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하재봉에게 영화감독 지망생 김인식을 소개해 준 사람은 시인 유하였다. 93년이었다. 김인식이나 유하, 혹은 나도, 그 당시에는 영화가 밥벌이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 만난 뒤 1년도 지나지 않아서, 유하는 자신의 베스트셀러 시집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를 시인 진이정과 함께 각색한 뒤 감독으로 데뷔했고, 나는 KBS-TV [전국은 지금]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영화 소개 프로그램을 맡아 본격적으로 영화평론을 시작했다. 그러나 김인식이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것은 그보다 10년이 더 지난 뒤였다.
유하가 김인식을 데려온 것은 이유가 있었다. 파리의 영화학교 ESEC(으젝)을 졸업한 그는 졸업 뒤에도 파리의 나이트클럽이나 시네마 테크를 근거지로 유랑하다가 장정일의 소설 [아담이 눈뜰 때]를 영화로 만들어 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고 귀국했었다. 그러나 그 영화는 김호선 감독에게 돌아갔고, 실패했다. 일본의 요미우리 신문 사설에까지 등장했던, 한국의 신세대 감성을 대표하는 소설과 50대 영화감독의 감성은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인생에서 가정법은 적용될 수 없는 것이지만, 반성적 의미를 부각시키는 수단은 될 수 있다. 만약 김인식이 그 영화의 감독으로 데뷔했다면? 나는 그가, 장선우 감독과 함께 90년대 한국 영화의 한 축을 이루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왜냐하면 유하가 김인식을 나에게 소개시켰을 때, 김인식은 [아담이 눈뜰 때]가 무산되자 그동안 쓴 소설을 책으로 낼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나에게 해설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단숨에 원고를 읽었다. 문장은 조금 거칠었지만, 내러티브는 힘 있게 전개되었고 무엇보다 캐릭터가 놀랍도록 선명하게 살아 있었다. 그가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인지 기대가 되는 빛나는 감성이었다.
두 번째 만났을 때, 나는 그가 내 고등학교 후배라는 것을 알았다. 김인식의 첫 소설 [어디에서나 슬픔은 반짝인다]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그러나 아직도 그가 소설을 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최승자 시의 한 구절을 제목으로 차용한 그 소설은, 김인식이라는 예술가의 감성을 세상에 신고한 작품이었다.
93년 스포츠조선에 1년 동안 연재한 뒤 95년에 두 권으로 출간된 내 소설 [쿨재즈]의 영화화 이야기가 나왔을 때, 나는 주저 없이 김인식을 감독으로 추천했다. 그러나 그 기획은 몇 군데 영화사를 전전하다가 끝내 무산되었다. 우리는 펀딩을 받기 위해 같이 제작자를 만나러 뛰어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데뷔하기까지 김인식은 더 많은 시간을 견디어야만 했다. 지난 10년동안 그가 영화 만들 것이라는 말을 나는 열 번 가까이 들었다. 한 번은 그가 시나리오를 쓰는 호텔에 간 적도 있다. 그는 노트북 컴퓨터와 프린터까지 호텔 방에 놓고 프로듀서와 함께 시나리오의 마지막 탈고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유레일 패스][바이올렛][태크노] 등이 그렇게 레디 고 직전까지 갔던 영화들이다. 또 한 번은 [댄스 댄스 댄스]라는 영화의 감독을 맡았다고 한국에서 발행부수가 가장 많은 신문의 박스기사로까지 나왔었다. 나는 그날 축하 전화를 했었는데 물론 그 작품들은 모두 중간에 엎어졌다. 기획된 영화의 10편중 1편 정도만이 겨우 개봉되는 게 현실이다.
그는 이미 초등학교 때 앞으로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말했었다. 청년시절 문학과 미술을 하기도 했지만 개인작업보다는 공동작업이 더 생리에 맞는 것 같았고 결국 그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는 영화로 방향을 정했다. 다시 초등학교 때의 꿈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그러나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것은 도박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노력한다고 된다는 보장도 없다. 무엇보다 영화감독이 되기까지 백수로 살아야만 한다. 데뷔한 뒤에도 대부분은 대기업 사원의 평균연봉보다도 못한 돈으로 생활해야 한다. 그래서 오랫동안 지원해 준 가족들에게 그는 감사하다고 말했다. 막내로 태어난 것도 그에게는 행운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로드 무비]가 나왔다. 세계 영화계에서 아시아 영화에 가장 정통하다고 알려진 평론가 토니 레인즈는 [오해받은 걸작이며 미래의 고전]이라고 [로드 무비]를 극찬했다. 그 영화는 벵쿠버 영화제, 로마 영화제 등 10여개 해외 영화제에 출품되었고 김인식에게 청룡영화상 신인감독상을 받게 했다.
나는 [로드 무비]를 보고 십년 전 그의 소설에서 느꼈던 직관이 틀린 것이 아니었다고 확인 했다. 각각의 쇼트는 매우 뛰어난 미학적 쾌감을 안겨 준다. 지금까지 이렇게 뛰어난 미장센을 보여준 한국 감독은 없었다. [로드 무비]의 화면은 투박하고 거친 느낌을 준다. 슈퍼16미리로 찍어서 디지털로 바꾼 다음, 다시 35미리 필름으로 키네코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그 느낌은 펀드 매니저였다가 주가 폭락으로 거리에서 부랑아 생활을 하는 주인공 석원의 황량한 내면과 닮아 있다. 산악인이었다가 자신의 내면에 잠복한 동성애를 깨닫고 노숙자 생활로 전락한 대식이 석원을 사랑하면서, 남자 동성애 문제를 핵심 소재로 끌어들인 [로드 무비]는 인간과 인간의 소통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로드 무비]는 싸이더스의 차승재 대표가 제안한 아이템이었다. 2천 년대에는 우리나라에서도 게이 무비가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차승재는 제의했고 김인식은 처음에 거절했다가 그 제안을 받아들인 뒤 1년에 걸쳐 시나리오를 썼다. 그러나 게이 무비라고 알려지면서 캐스팅에 어려움이 있었다. 캐스팅이 안되니까 펀딩이 되지 않았다. 이번에도 엎어지나 생각하고 있을 때, 정찬과 황정민이 캐스팅되었다.
순제작비 8억, 홍보비 포함해서 15억원의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제작비 대비 가장 고급화 된 화면을 만들어낸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세련된 화면은 문학과 미술을 했던 김인식의 예술적 감성에 의해서 가능했다. 그러나 남자 동성애를 소재로 했다고 알려지면서 배급사와 극장주들은 회피하기 시작했다.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다. 그러나 나는 [로드 무비]가 한국영화 지형도 안에서 가장 독특한 영화로 기억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김인식의 두 번째 작품은, [로드 무비]를 눈여겨 본 김혜수의 러브 콜이 시작되면서 [얼굴 없는 미녀]로 급물살을 탔다. 김인식의 컴퓨터 속에는 수 십 편의 시나리오가 숨겨져 있지만, 이미 TV 드라마로 만들어졌던 [얼굴 없는 미녀]의 리메이크를 시도한 것은 김혜수가 캐스팅 된 것이 첫 번째 이유일 것이다. 김혜수는 지금까지 많은 작품을 했지만 그녀의 필모그래피에는 딱히 기억될만한 영화가 없었다. 그러나 [얼굴 없는 미녀]로 비로소 연기자 김혜수를 알렸다고 나는 생각한다.
평단의 거의 일치된 호평을 받았던 [로드 무비]와는 다르게 [얼굴 없는 미녀]에 대해서는 평가가 양분되었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이미지의 과잉이다. 그는 소득 수준 10만불 정도를 가정하고 만든 영화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런 점에서 비판을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경계성 장애를 앓고 있는 여주인공의 거주 공간이나, 그녀를 치료하고 있는 정신과 의사의 공간은 매우 세련된 화면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관객들에게 친절하고, 쉽게 이해되리라고 생각했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말하는 관객을 보고 그는 당황스러웠다. 관객들이 뇌의 칼로리를 소비해 가면서 적극적으로 영화보기를 바랐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다. 전국 70만 명은, 김혜수의 지명도와 그녀의 노출씬으로 화제가 된 것에 비하면 아쉬운 성적이지만 [로드 무비]에 비하면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다.
[얼굴 없는 미녀]는 지난 11월 12일부터 개최된 이탈리아 토리노 영화제의 경쟁부문에 초청되었다. 토리노 영화제는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이 각색상, 민병훈 감독의 [벌이 날다]가 대상을 받으면서 국내에 알려졌다. 김인식과의 이 인터뷰는 그가 토리노로 출국하기 이틀 전, 그리고 그의 다음 작품인 [러브 바이러스]를 탈고한 날 밤에 이루어졌다.
[러브 바이러스]는 짝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서울과 홍콩을 배경으로 짝사랑이 실패하면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들을 소재로 하고 있다. 예정대로 진행된다면 내년 봄에 촬영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아주 끔찍한 결말을 시나리오로 썼었는데, [얼굴 없는 미녀]를 만든 뒤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수정했다. 김인식은 [얼굴 없는 미녀]를 만들면서 자신 안에 내재된 어둠을 털어버린 것 같다고 스스로를 분석했다. 좋은 영화는 감독 자신의 정서적 치유 기능을 갖고 있다.
[러브 바이러스]는 스타일 면에서 많이 다르다. 인물들의 내면을 이미지로 드러냈던 지금까지 방식과는 다르게 다이얼로그가 많고 배우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로드 무비]가 자연친화적으로, 그리고 [얼굴 없는 미녀]가 인공적 셋트에서 찍혀졌다면, 핸드 헬드 카메라를 적극 이용해서 새로운 방식의 연출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자신의 영화에 투자한 제작자에게 적어도 손익분기점을 넘겨줘야 하는 의무가 있으므로 흥행에 대한 고민을 안 할 수는 없지만 자기 목소리를 잃을 수는 없다는 그의 말은, 거대 자본이 지배하는 영화산업 안에서 갈등하는 예술가의 결연한 의지로 읽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