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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백제 토론방 Re:계백의 황산벌 전투 재구성
소호금천씨 추천 0 조회 1,216 11.08.26 07:50 댓글 4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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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8.27 03:39

    첫댓글 물런 저도 추측에 불과하니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백제의 마지막은 여러각도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작성자 11.08.27 10:17

    그럼요 당연하신 생각입니다..저기 위의 본문도 사료에 주어진 내용을 결과에 맞추어 가장 근접하게 나름대로 조합한 것이기 때문에 딱히 정답이라고는 주장하지는 않습니다...전쟁과 병법에 통달하신 선조들의 깊은 내막을 문외한인 우리들이 어찌 다 알겠습니까?...^^*

  • 11.08.27 13:42

    백제 5방 중 동방은 득안성이고..각 방의 우두머리는 방령이고 관등은 달솔로 알려져 있습니다..
    삼국사기엔 의자왕이 계백에게 5천결사대를 주고 방어했다고 하는데...충상과 상영에게 5천 중앙군을 주고 득안성에 있는 계백의 지방군과 합심하여 신라군과 대항하라는 식으로 해석해야죠..삼국사기를 보면 큰 전투는 좌평이 이끄는 중앙군을 보내고 지방군과 합동작전을 펴는 작전이었음을 고려해야 합니다....

    또한 지금 황산벌 격전지라고 알려진 주변엔 많은 산성들이 있습니다..백제본기와 신라본기에서는 ‘堦伯’으로 기록하고 있고 계백열전 과 관창열전엔 階伯으로 기록되어 있죠..

  • 11.08.27 13:59

    이 당시에 16세이면 성인으로 봐야하고..보통 15세 이상이면 군사편제에 충당되었던 시기였던 걸로 아는데요..어리다 라뇨..ㅜ.ㅜ
    서민의 자제도 아닌 부총사의 자제이며, 부장를 전장에서 사로잡았는데, 그냥 돌려보낸다..글쎄요..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군요.

  • 작성자 11.08.27 15:04

    堦=階는 동일한 섬돌 "계:자 이므로 표기상의 차이지만 동일하다고 보면 되고, 물론 논문에서도 격전부근의 산성들이 있어서 계백이 산성에서 방어를 하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더러 있습니다만.....그런데 그렇게 되면 공성전을 펼쳐야 하는데 기일도 많이 걸리고 사상자도 많이나며 함락시키기도 힘들어 많은 공성장비가 필요한데 공성전을 펼칠 이유가 없지요 .차라리 일부 병력만 빼어내어 성 입구를 틀어막고 나머지는 그냥 소정방과 합류를 위해 직행을 해버리겠지요...성안에 백제군이 성입구를 막은 신라군을 격파하고 나오면 그때 전투를 벌여도 공성전 보다야 훨씬 수월한 전투가 되겠지요.

  • 작성자 11.08.27 15:03

    그렇지 않아도 나이 문제인데....이 부분은 그리운길님의 주장에 동의 합니다...사료상 계백이 그렇게 말했다고 나와 있으니 그 문제를 가지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만 계백이 보기에 관창이 나이에 비해 잘생기고 매우 童顔(동안)이어서 차마 죽이지 못하는 심정을 탄식한게 아닌가?...그리고 그것이 구전이나 고전으로 전해져 내려온 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만 .."관창의 나이가 어려서 되돌려보냈다"라는 내용은 본인의 창작이 아니고 사료상의 내용일 뿐입니다...^^*

  • 작성자 11.08.27 15:15

    그리고 "삼국사기를 보면 큰 전투는 좌평이 이끄는 중앙군을 보내고 지방군과 합동작전을 펴는 작전"을 고려하시라고 말씀 하셨는데 반드시 관등이 높은 사람에게 왕이 군사를 내어 주라는 법도 없고 이미 의자왕이 계백에게 5,000의 군사를 내어 주었다면 총수는 계백이고 황산벌 전투의 총책임자는 계백입니다..관등이 높은 충상의 부대는 5,000결사대에 편제된 것이 아니라 별도의 지원 군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신라군 5만의 정예부대를 이끈 총수가 대각간 김유신이지 결코 태자 김법민이 아니라는 것과 같은 내용으로 보시면 이해 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 11.08.27 17:24

    사료는 은유적 표현이고 승자측의 기록이란 점을 고려하면서 해석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階=堦 섬돌계 라고 하였는데..벼슬계 도 되고..의미심장한 건 뒤에 伯 는 =百 와 통합니다..(한자사전)..즉, 수백을 거느릴 수 있는 품계 라고 볼 수 있죠..일반명사가 세월의 흔적을 머금으면서 고유명사가 된 경우로 볼 수도 있어서 적은 것이구요..

    의자왕 20년 조엔 달솔(達率) 상영(常永) 등이..라고 나와 있고,,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 11월조에는 좌평(佐平) 충상과 상영, 달솔 자간(自簡)에게는 .....삼국사기 본기를 나름대로 해석하면,,

  • 11.08.27 17:25

    삼국사기 본기를 나름대로 해석하면,,나당연합군에 대항하는 작전을 얘기할땐 상영은 달솔이었다가,, 포로가 될땐 상영은 좌평이었다는 것으로 판단 되어지죠..
    달솔에서 좌평으로 승진하여 황산벌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다고 해석되어지죠..

    전쟁 전에 지휘계통을 무시하는 파격적인 인사를 할 확률도 적을 뿐만 아니라..백제본기에서 나당연합군과 대항하기 전에 계백의 업적은 전무하며,, 당나라 예봉이 아닌 신라의 예봉을 꺾어야 한다고 작전을 수립하여 파견 된 사람이 상영인데...계백을 원수로 파격 인사 할리는 희박하다고 봐야죠

  • 작성자 11.08.27 19:13

    물론 사료중에 은유적 표현과 승자위주의 기록은 원칙적으로는 맞지만 모든 내용을 그렇게 맞추어 해석하는 것도 아니됩니다..그리고 작전회의 상영은 달솔이 맞습니다..그러나 항복할때는 좌평이었지요.(충상은 제외)..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지요..안그래도 의자왕이 어렵게 5,000결사대를 구할정도로 군사가 없어 겨우 계백에게 주어 황산벌 전투를 맡겼는데 달솔 상영이 스스로 군사를 모집하여 전투에 참전하겠다고 나서니 눈물겹도록 고마워서 에라이 "죄평"승진이다 라고 할 수도 있는 문제이지요..좌평이 2명일지라도 왕이 보다 낮은 달솔을 원수로 지정하면 계급이나 관등에 상관없이 원수가 되며 3군을 지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 작성자 11.08.27 19:16

    계백과 충상.상영이 같은 진영에 있지않은 것으로 추측되는 내용은 관창을 석방하고 죽여 되돌려 보낸 내용이 계백 단독으로 행하기 때문이지요...비록 역사는 승자의 기록일지라도...의심될 부분이 거의 없는 내용이 바로 황산벌 전투입니다..또한 처절하게 항쟁하여 신라군에게 많은 희생을 강요했던 계백의 존재를 완전히 악역으로 만들든지? 아니면 구전으로 조차도 전하지 안도록 말살시켜야 하며, 4번 패배를 절대로 남겨서는 안되겠지요!...그리고 황산벌 전투의 총수를 계백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상영이 신라와 먼저 싸우자고 큰소리 쳤다고 반드시 상영에게 총사를 맡겨야 된다는 법칙도 없습니다.

  • 작성자 11.08.27 19:17

    아마도 충상과 상영이 관등이 낮은 달솔 계백에게 총수(원수)를 맡은게 배알이 튀틀려서 계백처럼 전투를 하질 않고 쉽게 항복해 버린 것이 아닌가? 라고 추측하는게 오히려 엇비슷해 보이기는 합니다만....^^*

  • 11.08.29 20:27

    글쎄요...웬지 감정적으로 치우치는 것 같아서 조금은 아쉬운 점이 있긴 하지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 당시엔 중앙군에서 대규모의 지원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군에서 지원 할 수 없는 상황이고,..그 연장선상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황산벌은 백제 동방의 소속이 었고 ..의자왕이 동방 방령인 계백에게 군사 5천으로 황산벌 또는 황산 주변의 산성에 가서 적의 예봉을 꺾으라는 뜻이고...좌평 충상과 상영은 소규모의 군사와 더불어 동방에 보내면서 지휘 감독 하라는
    식으로 해석하는게 자연스런 해석이라고 말하는건데...조금 감정적으로 흐르는 것 같아서...여기서 그만 했으면 합니다..

  • 11.08.29 20:28

    다음 토론에선 좀 더 생산적인 토론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작성자 11.08.30 11:01

    아이고 그리운길님 제 답변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였다면 정말로 미안합니다..당시 충상과 상영입장에서 저는 좀 유머식으로 표현한 것인데...어쩜 자세히 보니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어 보입니다...절대로 무성의하거나 다른 감정으로 쓴 답변이 아니니 널리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11.08.27 21:05

    탄현에서 황산벌입구에 다다르면 좌우 몇군데 백제성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황산벌을 조금 지나다 보면 또 성이 있지요. 계백장군의 5천의 군사로만 신라군을 상대했다고는 생각들지 않습니다. 윗분의 말씀대로 산성이면 군사일부만 떼어 틀어막으면 되고 백제군이 평야에 진을 쳤더라도 10분의1밖에 안되는 적을 상대하기는 여러가지로 쉽습니다. 그러나 백제 지방군 5천여의 군사가 합세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3영을 나눠 황산벌 입구와 그 뒤에 있는 산성에 진열을 꾸렸다면 신라군도 그냥 지나치기는 힘듭니다.

  • 작성자 11.08.28 21:38

    홍사준, 지헌영, 성주탁선생들도 황산벌에 관한 논문들이 있는데 님의 말씀대로 근처 산성들에다가 삼영을 설치했다고도 합니다..그런데 산성에다가 영을 설치했다면 오히려 방어는 쉽겠지만 역공이나 견재를 하는데는 불리하다고 봅니다..험한 지형에 영을 차렸다는 기록일뿐!!..논문대로 산성속에다 영을 차렸다면 그에따른 전투기록이나 상황설정이 도무지 적합하질 않습니다. 논문 역시 산성과 관련하여 전투상황을 설명하지 못하고 도자기, 기와등의 유물로는 계백의 3영과의 연결이 설명될 수도 없는 것이지요 .

  • 11.08.27 21:13

    신라 5만군대에 1만명 정도는 식량을 운송하는 보급부대의 성격을 띈(당나라군이 먹을 식량까지 잔득 짊어지고 오는) 부대가 아니었는가 저는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 부대인원들은 휴대하기 가장 편한 허리에 찬 무기 이외에 장창이나 방패,활 등등은 수레에 같이 짊처럼 실어 나르는 상황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로마군단이 그랬기에.. 그러기에 효과적인 대형을 짜서 전투를 벌이기 힘들기에 보급부대를 호위하는 부대까지 편성을 따로 합니다. 적진 한복판에 진공할 경우는 더더욱 필히요. 다섯배가 많은 병력이라지만 그 1/5은 보급부대, 그리고 적어도 3천 ~5천은 그 보급부대 뒤를 호위로 빠지면 백제군을 상대하는 신라군의 주력은

  • 작성자 11.08.28 21:36

    "신라 5만의 대군을 당나라군이 먹을 식량까지 잔득 짊어지고 오는 보급병" 정도로 주장한다면 본기와 열전에 나타나는 精兵이라는 용어부터 먼저 이해하시라고 할 수 밖에 없군요!!!

  • 11.08.27 21:25

    3만~ 3만 5천.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게. 그 길다란 신라 보급부대의 행렬을 보호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 백제 산성들의 높이가 해발 2백 ~ 3백미터 정도 밖에 안되어 치고빠지는 작전을 펼치기에 용이한 성들이었습니다. 신라대장군김유신장군님이 쓴 글을 보았는데 당군이 백제군을 더많이 상대하게하기 위해 약속한 날짜를 의도적으로 하루 늦춰 진공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셨는데 백제군과의 전투에서 4번 패배한 기록을(신라의 기록들을 참고하였겠죠. 김부식이 말입니다.) 그것도 10/1밖에 안되게 백제군의 숫자를 기록하면서까지요. 아마 김유신장군의 심중이 신라인 전체의 이심전심이 아니었나 하고 말입니다. 그걸 당나라에 숨기기

  • 11.08.27 21:33

    위해 그렇게 관창이란 인물을 희생양을 만들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김유신장군은 그 당시 백제의 사정을 훤히 알고 있었지 않았나 쉽습니다. 혹시 전투 중에 계백이 처자식을 죽이고 전장터에 왔던 사실도 알고 있지 않았던 건지..
    그 사실만으로도 직관적으로 이제 저 계백의 부대만 격파하면 끝이란 생각이 들었을거고 좀더 시간을 끌었던게 아니가 합니다.

  • 11.08.27 21:41

    만약 상영등이 계백과 같이 용맹이 싸웠다면 백제가 망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계백보다 상영,충상이 자신의 부하 인명들을 살리기 위해서 순순히 항복했다고 봅니다.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는 백제의 운명에 단지 지방군 5천의 군사로 대세를 거스럴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성웅 이순신 장군처럼 나라를 꼭 지킨다는 비장한 확신에서 사즉생을 행한 것과 사즉사 - 즉 죽을 수만 생각하고 처자식을 죽이고 나간 장군이 추앙을 받는 게 심히 이상합니다. 혹시 신라가 계백을 포악한 인물로 그리기 위해 그런 사실을 지어냈다고도 의심이 가는데 ... 오히려 그런 사실로 계백이 역사에서 대단한 존재로 부각되는 것 같군요.

  • 11.08.27 21:42

    제 처자식을 죽이고 전장터로 간다며 나를 따르라 고함치는 장군이 있다면 저는 말단 이등병이라도 총으로 그 놈부터 죽이고 싶군요

  • 작성자 11.08.28 13:32

    물론 다양 생각은 존중합니다만 "신라가 계백을 포악한 인물로 그리기 위해 그런 사실을 지어냈다고도 의심"이라는 논리는 계백을 포악한 인물로 가공하는 방법치고는 다소 모자라는 그냥 음모론적인 것 이외는 달리 이해하기가 힘든 논리로 보입니다...계백이 처자식 죽인 내용은 권근의 사론과 동국통감의 찬자 그리고 안정복 선생의 사론이 있으니 제가 언급은 생략하겠습니다..댓글이 한꺼번에 너무 많아 오히려 혼란스러우니 3개 이하로 부탁드리며 3개 이상일 경우 본문형식으로 부탁드립니다...^^

  • 11.08.28 23:06

    황산벌 전투에서 아무래도 양측이 3대로 나누어서 전투를 치른 것 자체는 소호금천님의 의견에 저도 대체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관창이 '돌발현상'을 벌인 것이라고는 볼 수는 없습니다. 일종의 '사간'과 유사한 것으로 보이는 (자기 자신의 목숨을 버릴 각오로 하는 간첩) 것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삼국기'라는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장창부대간의 전투에서 10대1 아니 적어도 5대1이 넘어가는 질량이 붙어버리면 대책없이 무너지는게 현실입니다. 계백의 부대는 아마도 10대1이상의 질량을 못 버텨서 결국 전멸해버렸다고 봐야 합니다.

  • 작성자 11.08.29 12:14

    사간(死間)이라함은 허위정보를 우리쪽 간첩에게 믿게하여 그 허위정보를 적에게 전달하는 간첩을 말하는데 때로는 이중첩차가 이에 해당되기도 합니다...그런데 관창의 사건과 연결시키기에는 너무 비약적으로 보입니다만....^^

  • 11.08.28 23:09

    장창부대간의 질량전을 대표적으로 본다면, 니우포르트 전투(1600년)의 에스파냐 테르치오 대 네덜란드 선형진의 파이크부대간의 전투를 볼 수 있습니다. 2대1이상의 질량전이 되면서 네덜란드군은 파이크전에서만은 완벽하게 무너져버렸죠. 아마 황산벌 전투에서도 그런일이 벌어졌을 겁니다. 실제로 황산벌, 즉 논산은 이런 파이크전이 벌어지기에는 한반도에서 전북 김제와 맞먹는 공간을 자랑합니다. 즉, 황산벌전투는 보병부대의 '질량전'이 벌어졌고, 즉, 병력대비 10대1이 넘어가면서 '한계상황'이 넘어간 계백의 백제군이 무너지면서 전투가 신라군의 승리로 끝났다고 봅니다.

  • 작성자 11.08.29 12:25

    오호~질량전이라는 용어는 감은 대략 잡히는 듯 하나 생소한 용어라 새로운 것을 접하게 되는군요!...인적 물량공세로 돌격!. 즉 좁은 공간에 화재등이 발생했을때 한꺼번에 탈출구를 찾는 정도의 인원이 몰리는 것을 연상해도 되는지요?...그런 공격이라면 상대의 군사들을 깔아 뭉개는 것인데, 그에 앞서 아군의 앞의 군사는 뒤따라 돌격하는 군사들에게 밟히고 깔리는 대형사고의 자중지란도 있을 수도 있는 것은 아닌지요?...그것은 무대뽀 공격에서만 가능할 것 같습니다..그런데 진법으로 정렬하여 맨 앞열 군사가 사상을 당하거나 힘이 빠지면 뒤로 빠지고 다음 열에서 공격하고 계속 그런 식으로 전투를 치루는 것으로 압니다만..^^

  • 11.08.29 19:12

    질량전이란게 한 부대의 인원비를 대충 생각하시면 됩니다. 테르치오 파이크부대는 최소 1천단위, 틸리의 테르치오는 2천이 넘어가는 파이크병을 자랑했습니다. 즉, 윙드 후사르등의 돌격 혹은 파괴력을 보병부대에서 발휘하기 위해서는 '기동성이 떨어지는 대신 대량의 파이크병에 의한 인적 물량공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틸리는 바로 이 대규모 파이크병에 의한 초대형 테르치오 단위를 (1개 테르치오당 3천이상)를 구성하여 신교도 테르치오에게 30년 전쟁 초기에 연전연승을 거둡니다.

  • 11.08.29 19:11

    물론 '대형사고' 같은 자중지란도 발생합니다. 그러나 좀 잔인하게 말해서 그 정도 병력손실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돌격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또한 소호금천님께서 언급한 대로 진법으로 정렬하면 정석대로 하면 대열간 교대전투를 합니다만, 그런 경우는 전투 초기에 주로 발생하고 '어느 쪽 대열이 무너지는 순간' 그 다음부터는 각 전선간 배치된 부대의 인원수 즉, '부대의 질량'에 의해 압도당해버리기 시작할 겁니다. 황산벌전투는 처음에는 한계상황을 간신히 막아내는 백제군이 버티다가, 결국 어느 시점부터 신라군의 병력에 질량전이 벌어지면서 그대로 무너졌다고 보면 됩니다.

  • 작성자 11.08.30 10:29

    아~그렇게도 고려해 볼 수 있겠네요...질량전이라 자세한 설명 고맙습니다...손자병법에서는 병세편에 적용되는데 서양식 전투방법의 질량전으로 설명해 주시니 상당히 구체적이라 이해하기가 쉬우며 손자병법의 병세편 이해에도 많은 도움이 됩니다....^^*

  • 11.08.29 18:43

    여기서 발제를 하시는 분들은 역사를 공부하시는 이들을 교육하는 분들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제가 발제를 할 정도의 용기는 없습니다. 어떤 내용을 말하려면 역사서의 구절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주장해야하는데 역사서엔 문외한이고, 금방 끝나버릴 미천도 없는 제가 발제라니요. 말씀하신데로 다양한 생각으로만 받아주십시요.
    제가 여기에 방문하는 목적은 역사지식을 더 넓히기 위함이니, 두서없는 내용의 글이라도 댓글을 달아주시면
    저로선 감사할 따름입니다.

  • 11.08.29 18:56

    의문이 드는 것이. 김유신장군 뿐만 아니라 신라인 전체가 당나라군이 백제군과 더 많이 싸워 주길 바랬을 겁니다.
    그러나 황산벌 싸움은 10:1 어찌보면 싸움이 안되는 병력비였습니다. 근데 어떻게 4일 동안 갈 수가 있고 신라군이 4번 패할 수가 있었을까요? 백제군이 산성이 아니라 황산벌 평지(나즈막한 언덕에라도 있었다고 해도)에서 진을 치고 전투를 벌였다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 11.08.29 19:06

    평지에서 양 전병력이 전투를 별여(대회전) 하루(오전에서 어두워지는 저녁까지) 동안 결판나지 않은 전투가 없습니다. 그게 한쪽 병력이 10만이든 20여만명이 넘더라도 말입니다. 혹시 인류역사상 그런 전투가 하나라도 있었나요? 전병력이 서로 대치하다 서로 기세를 살피려 기회만 보다 작은 소규모 접전을 벌이고 물러나는 상황이었다라고 보면 작은 소규모 접전도 전투이니 만약 그런 전투가 있었다면 그것도 전투이니 승패를 논할 수 있겠지요.
    아니면 기병이 주력이거나 전투를 벌이는 주위가 숲이라든지 어느 한쪽의 견고한 성채나 성이 있었다면 계속 몇 일이 아니라 몇달이라도 이어질 수 있겠으나

  • 11.08.29 19:13

    양쪽의 전병력이 사활을 걸고 전투를 벌이다 한쪽이 밀리기 시작하면 특출난 장군이나 부대가 있지 않은 이상
    그것으로 끝입니다. 더군다나 기병이 주력이 아니고 보병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지요. 한 번 등을 보이고 무거운 무기는 버리고 도망가기 바쁜 군대가 어떻게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전투를 벌일 수 있을까요? 3영 3군데서 따로따로
    약간의 거리가 떨어진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다고쳐도 그게 평지라면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도미노 현상으로 한군데만 무너져도 그것으로 끝이라고 봐야죠. 겨우 5천의 병사를 3등분한 병력인데요...

  • 11.08.29 19:16

    20만 대군이 정면대결한 필리피 회전(기원전 42)가 하루동안 결판나지 않은 회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상, 최대 회전으로 봉천회전을 들 수 있습니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4개군 25만, 러시아군 5개군 32만이 정면대결하여서 (일본군 전선 140킬로미터, 러시아군 전선 110킬로미터) 총 13일에 걸친 대회전이 벌어집니다. 결국 1905년 3월 10일 일본군이 최종승리합니다. (이날은 이후 전전 일본제국 육군기념일이 됩니다.) 즉, 대회전의 경우, '하루에 결판나지 않은 전투도 꽤 있습니다.) 20만 대군 이상의 전투로는 케네베레츠 전투 (1597), 호침 전투 (1621), 라이프치히 전투 (1813), 등이 있습니다.

  • 11.08.29 19:36

    필리피회전 기억이 가물가물한데요^^. 창,칼,활로 싸우던 고대 전투를 위주로 생각을 하고 싶구요. 물론 하루만에 끝나지 않은 전투들도 꽤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전투는 위의 말씀드린 상황이나 아니면 양쪽의 병력비가 비슷하거나 서로 우열을 가리기 힘든 접전에서 서로 물러나는 상황들이 따로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백제의 경우 5천 결사대(이후에 칭한 내용이겠지만) 이름 만으로도 결코 후퇴는 생각하지 않는 부대라고 봐야합니다. 그렇지만 결코 신라가 실제 제대로 대결해서 패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케네베레츠 전투등 말씀하신 내용을 한 번 찾아봐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11.08.29 19:25

    그래서 역사서 내용 그대로 진행되었다면 백제군은 평지가 아니라 3곳의 산성에 주둔했었을 거란 생각이 드는 것이구요. 그렇다 하더라도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후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인들이 10:1로 싸워 겨우 이겼다라는 결코 자랑할 만한 내용이 아닌데도 강조한 다른 배경이 있을거란 심중을 말씀드린 겁니다. 처자식을 죽이고 전장터에 나간 계백의 이야기도 그에 맞물려 생각이 드는군요. 당시 신라인들을 생각하면 당나라를 깜쪽같이 속인다고해도 놀날 일도 아닌 것 같군요.

  • 작성자 11.08.30 10:39

    uwybfeiwdqof님의 주장에도 공감되는 부분이 많습니다...지금 님께서 댓글을 달아놓은 것을 그대로 본문으로 옮겨 주셔도 전혀 손색없는 좋은 내용인 자신의 글이 됩니다...다만 댓글 수가 너무 많으면 님의 의견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기 난해하고 앞의 댓글들의 주장과 대비하기가 곤란해서 가급적이면 3개 이상을 달지 말라는 이곳 카페에서 권장하는 요청입니다...좋은 토론 감사합니다...^^*

  • 11.08.31 08:14

    uwybfeiwdqof님 소호금천씨님 말씀대로 꼬리말 수칙 준수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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