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롯이 주님만을 향해 산 사제생활 42년
지난 2월 3일자로 일선 사목생활 42년을 마감하고 은퇴한 대구대교구 이재명(李在命· 바오로) 신부는 그 이틀 후 인터뷰를 요청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더니 사제 30명이 함께 공동생활을 하는 바오로사제관 자랑부터 한다.
“여기가 대구의 동쪽인데 마치 ‘에덴의 동쪽’과 같습니다.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사제 30명이 함께 사는 공동체는 우리나라는 몰론 전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마치 천국에 온 것 같습니다.”
그 목소리가 너무 맑고 좋아하는 모습이 전화선을 통해 보이는 듯 했다. 대구시 남구 봉덕 3동 1329-54 앞산 중턱의 삼정골, 공기 맑은 곳에 지어진 바오로사제관. 옛 선목대신학교 교수회관을 리모델링해 마련한 바오로관에는 은퇴사제 10명과 특수 사목하는 사제 20명 등 모두 30명이 기쁘게 살아간다. 현재 특수 사목을 하는 젊은 사제들은 현직에서 은퇴한 선배 사제들을 깍듯이 모시며 존경하고, 원로사제들은 젊은 사제들의 활기찬 모습에서 힘을 얻으며 아낌없는 사랑을 나눈다. 참으로 아름다운 공동체다.
“사제는 죽어도 사제입니다. 은퇴가 있을 수 없지요. 그러나 이제 컴퓨터를 한참 보면 눈이 아프기도 하고, 젊고 똑똑한 신부들이 많으니 우리처럼 나이 들면 일선에서 물러나는 게 맞습니다. 대구대교구만 하더라도 신품 받고 7년이 지나도록 보좌신부 하는 사람 많습니다. 그분들에게 왕성한 사목열정을 쏟을 수 있는 기회를 줘야지요. 그래야 교회도 젊어지지 않겠습니까?”
한국천주교 여러 교구에서는 일선 보직 신부들에게 65세 이상이면 은퇴를 허용하고, 70세 정도에 일선에서 물러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 신부의 생년월일이 1943년 7월 10일이니 거의 70에 가까운 인생 연륜을 쌓았다. 그 가운데 42년을 일선 본당신부와 군종신부, 교구청 관리국장, 제1대리구 주교대리직 등을 맡아, 아침 일찍 주님 포도밭으로 나간 일꾼처럼 열심히 일했다. 신심 깊고 겸손하며 검소한 자세, 그리고 몸에 밴 사랑실천과 공사(公私)가 분명한 생활태도는 이 신부에게 항상 따라붙는 수식어다.
지난 1월 29일 연중 제4주일 11시 마지막 임지가 된 대곡본당 교중미사를 퇴임감사미사로 봉헌하던 날, 대부분 본당에서 교중미사를 봉헌하는 바쁜 시간인데도 교구장 조환길(타대오) 대주교와 교구 및 다른 교구 사제 30여 명이 이 신부의 퇴임을 아쉬워하며 축하하는 미사를 함께 봉헌했다. 참석한 수많은 신자들은 총회장의 잔잔한 송별사를 들으면서 눈물을 훔치며 훌쩍였다. 동료 사제들이나 신자들도 이 신부가 지난 세월을 어떻게 살아왔고, 또 앞으로 남은 이승에서의 사제생활을 어떻게 살아갈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이 미사 봉헌하면서 입고 있는 이 제의는 제가 처음 신품 받을 때 입은 제의입니다. 죽어서 관 속에 들어갈 때도 입고 갈 겁니다. 지금은 비록 이곳을 떠나지만 저는 언제까지나 사제로 살아가겠습니다.”
이 신부의 퇴임미사 답사는 참석자들을 더욱 숙연하게 했다. 영원한 사제를 생각하면서.
유서 깊은 가실성당 부지 기증한 가문의 후손
이 신부는 해방되기 2년 전에 대구시 남구 남산동에서 태어났으나, 본적은 달성군 화원읍 인흥골(지금은 대구시 달서구 본리동)이다. 구두를 만들고 수리하는 제화공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아버지 이운형(李運炯 · 테오도르 · 1910~1946년)님과 어머니 김인연(金仁連 · 비비안나 · 1916~2004년)님 사이의 2남 2녀 가운데 셋째, 맏아들로 태어났다. 1946년 온 나라에 장티푸스가 번져 많은 희생자들이 속출할 때 아버지도 그 병에 걸려 숨졌다. 당시 남산동 본당 주임사제였던 고 장병화 주교는 “우리 본당에 참혹한 초상이 났습니다. 30살 어머니와 아홉 살, 일곱 살의 두 딸과 세 살 아들, 그리고 배 속의 아이까지 남기고 이 테오도르님이 선종했습니다.”며 교우들에게 이 씨의 사망 소식을 알릴 정도였다. 이렇게 아버지가 일찍 선종하시고 남동생마저 다섯 살 때 죽어 홀어머니와 두 누나와 함께 어렵게 유년과 소년 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 어머니 품에 안겨 장래 꿈을 묻는 어머니 질문에 선생님이 되겠다고 대답했다. 그 이유를 묻는 어머니에게 소년 이 신부는 “선생님이 되면 꼬마들에게 위세 부리고 때릴 수도 있으니 좋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가 호된 꾸중을 듣고 매를 맞으며 엄한 벌을 받았다. 아무리 귀한 아들이지만 불순한 동기를 말하는 자식을 용서할 수 없었던 어머니였다. 그리고는 “무조건 신부가 되어라.”고 어머니는 명했고 아들은 어머니의 뜻에 순명했다. 이 신부는 그 이후 “나는 신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중학교 입학 때는 전국에서 유일한 소신학교였던 서울의 성신중학교에 입학하는 절차를 몰라 놓쳤으나, 1958년 평생 친구요 인생의 동반자인 성주본당 주임 이강언(바오로) 신부와 함께 성신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신부 수업을 시작했다. 1961년 가톨릭대학교에 무난히 진학한 뒤 1969년 12월 15일 대구대교구 주교좌 계산동성당에서 고 서정길 대주교로부터 신품을 받은 뒤 외길 사제의 길을 걸어왔다. 신품성사를 받은 직후 어느 지인이 이 신부에게 “왜 사제가 되었느냐?”고 묻자 “제 인생 전체를 걸고 하느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사제가 되었노라고 말해 사제로서 어떻게 살겠다는 결심을 분명히 했다.
어머니 김 씨가 외아들이 된 이 신부에게 “무조건 신부가 되라.”고 명한 데는 가문의 굳은 신앙심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김 씨 가문은 가락국의 원조인 수로왕(首露王)의 후예로서 김해 김 씨 삼현파(三賢派)다. 아버지 김용민(金容旼 · 마태오)님과 어머니 이명희(李明姬 · 안나)님 사이의 6남매 가운데 둘째 딸로 경북 칠곡군 왜관읍 낙산 3동 가마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 씨 가문이나 어머니의 전주 이 씨 가문 모두 병인박해 직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매일 아침, 저녁 기도는 물론 새벽 미사를 봉헌하는 독실한 신앙생활을 가풍으로 이어왔다. 김 씨의 할아버지 김희두(金熙斗 · 베드로 · 1872년 7월 2일~1949년 12월 28일)님은 박해의 여파로 천주교를 멀리하는 사회 분위기와 완고한 집안 어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열다섯 어린 나이에 자진해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선구자다. 김희두님은 23세 때인 1895년 계산동 성당에 이어 영남지역 두 번 째이며 조선교구 열 한 번 째 본당인 왜관읍 낙산동의 가실성당 부지를 매입해 당시 대구본당 초대 주임이던 프랑스인 김보록(金保綠 · 아킬레오, 바오로 로베르) 신부에게 기증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런 가문이다 보니 친가와 외가에서 사제, 수도자가 10여 명이나 나왔다. 이 신부 역시 신자촌이기도 한 가마골의 외가에 자주 가 어린 시절부터 신앙생활이 몸에 배었다. 외할머니 이명희님은 특히 아무리 귀여운 외손자라도 매일 새벽 4시에 깨워 찬물에 세수하고 아침기도를 바친 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산 너머 가실성당까지 데리고 가 미사에 참례토록 했다. 대부분의 구교우 집안이 그렇듯이 남자는 신부나 수사, 여자는 자라 수녀 되는 것을 으뜸으로 여기는 집안 분위기에 이 신부도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몸에 밴 사랑의 실천과 공사(公私) 분명한 사제
이 신부가 신품받던 당시 우리 사회의 시급한 과제는 가난에서 탈출하는 것이었다.
“전쟁의 아픈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고 군사쿠데타의 여파까지 겹쳐 국민들의 고통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습니다. 부제반 때 동기들끼리 신부가 되면 어떤 일부터 치중해야 하는지에 대해 많이 토론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신자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라는데 의견이 모아졌지요. 그때 마침 서울 동교동에 신용협동조합 교육원이 생겼습니다. 당시 부흥부 고위 관리이던 박희섭씨가 출장갔던 캐나다에서 신용협동조합을 배우고 와서 세운 것입니다. 우리 동기들 모두 보름 동안 교육 받고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합숙 훈련이 원칙이었으나 부제들은 특별히 혜화동 신학교에서 출퇴근하는 형식으로 교육 받을 수 있게 배려해 줘 막 도입된 신용협동조합 교육을 잘 받을 수 있었습니다. 박 원장은 그 대신 신부가 되면 누가 제일 먼저 본당에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는지 경쟁하도록 부추겼습니다.”
이 신부 동기들은 박 원장의 권고에 따라 서품 후 전국 각지로 가서 열심히 신용협동조합 결성에 힘썼다. 삼덕동 본당이 첫 임지가 된 이 신부도 신용협동조합 설립에 온 정성을 쏟아 전국에서 본당 단위의 신용협동조합 1호를 세웠다. 고리대금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던 신자들에게 싼 이자로 생활자금을 빌려주던 신용조합의 인기와 신뢰도는 하늘을 찔렀다. 첫 주임으로 발령 난 안강본당으로 가서도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어 신자들의 고단한 생활을 도왔다. 이후 육군 군종신부를 거쳐 동인동, 덕수, 수성동, 평화동, 교구 관리국장, 두산, 내당동, 주교좌 계산동 본당 겸 제1대리구 주교대리, 대곡동 본당을 거치는 동안 언제나 신자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살피고 도와주려고 온 힘을 쏟았다.
“가난하게 자라서인지 체질적으로 낭비하지 못해요. 수성동과 마지막 본당인 대곡동 본당은 막 성당을 신축한 뒤에 가게 돼 빚이 많았습니다. 빚을 갚아야 했기에 신자들에게도 내핍을 강조해 굉장히 미안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빚을 다 갚고 오히려 성당 발전기금까지 조성하고 떠나 올 수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요. 신자들도 뒤늦게 빚도 갚고 기금도 조성한 사실을 알고 좋아했습니다. 교구청 관리국장 시절에는 효성여중 · 고교와 대건중 · 고등학교, 그리고 앞산 이 자리에 있던 대신학교를 옛 유스티노 신학교 자리인 교구청 옆 대건중 · 고교 자리로 이전하는 일을 맡아 고생했지만 보람도 큽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말없이 깔끔하게 처리하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한 번은 어느 추운 겨울 날, 자취하는 친척집에 갔다가 너무 고생하는 가족들을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끼고 있던 가죽 장갑과 목도리를 그냥 두고 간 적이 있다.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그 친척들이 나중에 장갑과 목도리를 두고 갔으니 돌려주겠다고 하자 깜빡 잊고 그냥 왔으니 기왕에 그렇게 된 거 그대로 쓰라고 했다. 일부러 두고 간 것이 분명한데도 그렇게 말한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믿음 아래 그렇게 사랑을 실천한 이 신부다. 이런 일은 친척이나 아는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건 물론 아니다. 제1대리구 주교대리직을 스스로 물러난 일이나 정년 1년을 앞두고 은퇴한 모습에서 보듯이 있을 자리와 물러날 때를 잘 분별하는 이 신부이기도 하다.
“사제 생활을 하다보면 딴 생각할 때도 많습니다. 개인적인 욕심을 부릴 때도 있고, 인정받고 싶을 때도 있으며, 편안하고 싶을 때도 있지요.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오직 주님만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요즘 인기에 영합하는 포풀리즘에 기우는 경우를 종종 보는데 그래선 안 됩니다.”
사제에 대한 이 신부의 생각은 이렇게 짧고 분명하다. 그러나 많은 걸 담고 있다.
글 최홍운 alsemffp34@naver.com
사진 인영오 05ems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