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섬진강과 지리산의 추억
사과 한개 값이 5,000원이랬다. 지난주 나들이길 슈퍼에서 무심코 믿고 샀던 만원어치 밀감 예닐곱개, 속까지 터져 있어 바보놀음을 하고 말았다.
예전 과일나무 꽃들은 피는 순서가 있었다. 매화꽃, 살구•자두꽃, 배꽃, 사과꽃, 감꽃...(순서가 맞나?) 그러나 지구 온난화를 핑계로 그 순위가 무너져 버렸다.
게다가 심각한 기후변화는 과일나무의 생육과 결실을 위협한다. 과일 값이 비싼건 지난해 개화와 수확기를 앞두고 비가 많이 내린 탓이라했다.
외국산을 수입하려 해도 절차가 복잡해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 엇그제 들은 가부좌튼 관계자들의 항변이다. 과일 수확기가 언젠데 해바뀌어 꽃피는 시절에 그걸 말하나? 두둘겨 맞아도 머리 터지지 않으니 철밥통이라 일컫는가?(ㅋㅋ) 결국은 생산자보다 유통단계 마진이 대부분 커져 버렸단다.
봄꽃 애기 하려다 엉뚱한 곳으로 흘렀다. 이때쯤이면 섬진강변의 하얀 매화꽃과 노란 산수유가 생각난다. 지리산 산자락이 길게 뻗어내려 바다로 이어지는 푸른물결 섬진강변은 언제보아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마음의 고향이고 싶은 것이다.
지리산 골따라 상큼한 봄내음 섞인 바람이 불어오면 하얀 백사장의 은모래는 더욱 찬란하게 빛났다. 강변의 버들강아지며 갈대들의 기지개 켜는소리에 바위밑에 숨어있던 참게가 기어나오고, 철만난 향어떼가 물살을 가르며 힘차게 화개골로 치올랐던 시절이다.
노고단과 피아골의 찬바람 그치기를 기다려 피어난 구레의 산수유와 푸른 강줄기를 따라 뒤질세라 활짝핀 광양과 하동의 하얀 매화꽃들은 도회 사람들의 가슴속에 고향의 향수를 불지폈다.
평일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화개장터를 한바퀴 돌아 들깨가루 잔뜩넣은 참게탕 점심(쐬주는 삼가)하고, 운전대 느긋하게 곁눈질하며, 강변따라 내려오는 드라이브는 가히 경춘가도를 능가하는 우리나라 강변도로 경관 중의 으뜸인 사실을 아무도 부인하질 못할 것이다.
꽃길 걷던 추억, 70년대 말이었다. 처음 들어간 부산의 직장동료 대여섯명과 함께 섬진강변 꽃구경과 쌍계사 여행을 나섰다.
자가용이 없던 시절 시외버스로 하동읍에 도착했다. 화개장터행 버스는 끊겼고, 노송 울창한 송림을 한바퀴 돌아본 후 여관방에 갇혔다.
혈기왕성 젊은이들의 놀이는 없었을까? 즐길건 술밖에 없었다. 소주 맥주 박스채 사다두고 마셔대다 그것도 무료해졌다. 내기, 아니 말하자면 술잔받기를 했다. 화투를 쳐서 꼴찌는 소맥선택 술잔을 받고, 일등은 안주를 받아 다음을 위해 비축했다. 당연히 꼴찌에겐 안주가 없다.
소위 주당들이니 그깟 잔쯤이야! 그러나 자장 가까워지니 화장실 출입이 잦아졌다. 소주, 맥주 중 어느 것이 덜 부담스러울까? 글쎄다. 저마다 전공이 다르니...
종목을 추가했다. 빈방을 뒤져 수거해온 남은 물(주전자)들...처음엔 물을 선택했다. 그런데 갈수록 목구멍은 그걸 더 꺼려했고, 장기들은 차라리 맥주 마시고 화장실 다니기를 주문했다.
다음날 잠못 잔 눈비비며 화개장터를 거쳐 쌍계사를 갔었던 기억만 남았고, 세월흐른 훗날 이삿짐 정리하다 빛바랜 사진을 보았더니, 강가로 봄나들이 나온 동네 아가씨들과 쑥스런 표정으로 함께 찍은 사진들이 남았더라. 그 나이대엔 당연 꽃보다 아가씨였으리라.
나는 쌍계사 북쪽에 인연이 많았다. 함께 술마시다 먼저 가벼려 원망스런 후배의 고향(의신)이 있고, 맑은 개울물 내려다 보며 걷던 서산대사길, 독사 많아 아찔했고 장마로 물깊었던 대성골 계곡산행, 빨찌산 이현상의 마지막 흔적지 빗점골 탐방산행, 아무튼 지리산 종주 등을 통해 많이 오르내렸던 곳이다.
그곳 덕평봉, 칠선봉 아래 대성골은 아직도 화전민의 흔적이 남아있고, 언젠가 정상 아래 나이차 나는 남녀 무속인이 머물고 있던 영신봉으로 향하는 등산길은 매우 험난하다.
특히 제주 4.3사건으로 발생한 빨찌산 전투, 북으로부터 배신당한 충청도 사람들, 남로당 이현상, 김삼룡과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의 마지막 순간이 아직도 궁금하다. 빗점골은 이현상이 항거한 최후의 비트였다.
나는 지리산을 수차례 종주했고, 코스마다 오르면서 그때마다 민족의 갈등과 아픔을 간직함에 숙연한 마음이 들었었다.
꽃보다 행복, 봄이면 화사한 꽃은 피건만 이제 잊혀져 가는 아픈 역사와 세월들, 그건 그렇다치고 남은 우리들의 진정한 행복이란 과연 무엇일까?
가진 것 많아 무한의 꽃길 걷는 가정?
조건없이 지속되는 친구와의 우정,
가난속에서의 작은 행복찾기...
사람들은 아직도 진정한 그것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 그깟 비싼 5,000원짜리 사과 못먹으면 어떠랴? 꽃피는 시절이면 보라색띈 하얀 사과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냥 좋기만 할것을...
글 쓰고싶단 충동일던 중년에 내게 술잔 권하던 그 후배를 떠올리며, 빗점골을 올라보고 소설을 쓴답시고 긁적거린 초안이 있어 올려보았다. 그 마지막 부분이 이랬다.
(빗점골의 눈물)
정미는 빗점골로 올라왔다. 어질 적부터 오르내렸던 곳이지만 오늘따라 나무하나 바위하나가 모두 슬퍼 보인다. 지리산자락 형제봉과 벽소령을 머리로 하고, 긴 세월을 지켜오며 이유야 어떻든 가난과 서러움을 가슴속에 간직한 사람들이 계곡을 그 안타까움의 핏물로 바위와 골짜기를 적셨던 그날들, 불쌍한 부모님의 영령들이 작은 오두막집 굴뚝 연기를 타고 올라 이 골짜기에 소리 없이 스며들었을 그곳이다. 어려서 전해 듣고, 아저씨가 이야기 하던 이현상이라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그 사람이 마지막 삶을 다한 이 바위틈...
정미는 마지막 하늘을 보기 위해 높은 바위능선으로 올라갔다. 철모르는 산새는 정미의 마음을 읽은 듯 구슬프게 울어댔고, 먼 하늘 구름도 고개를 돌리려는 듯 빠르게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건너편 덕평봉과 칠선봉이 안개 속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지점, 정미는 눈을 감고 높은 절벽 바위위에 섰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아저씨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고 눈을 감았다. 한참 후에 메아리가 돌아 왔을 때에는 정미의 육신은 바위 아래로 떨어져 내린 후였고, 경미의 영혼은 어느새 어머니와 아버지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다.
정미의 머리에선 붉은 선혈이 흘러내려 바위와 풀숲을 적시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만큼은 무척이나 평온해 보였다. 그녀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남긴 한과 빗점골에서 흘린 수많은 사람들의 핏물과 눈물을 가슴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