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화가로 꼽히는 겸재 정선(1676~1759)이 올해로 <신묘년풍악도첩>이란
첫 작품을 그린 지 꼭 300년이 되는 해다. 현존하는 <신묘년풍악도첩>은
겸제가 1711년 금강산을 첫 기행해서 그림 그림이다. 그 때 나이 36세. 조선 화단에
겸재란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서곡이었다.
겸재 정선은 50대 후반인 1734년 <금강전도>를 완성하면서 진경산수화의 새로운 화풍을 선보여,
그의 전성기를 활짝 연다. 사진 박은순 덕성여대 교수 제공
<신묘년풍악도첩>은 1712년 영조대의 최고의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친구 이병연이
금강산 초입의 금화현감으로 있으면서 삼연 김창흡과 겸재를 불러 금강산 여행을 한 게 계기가 됐다.
겸재는 말로만 듣던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보고, 채 감회가 가기 전에 12폭의 작품을 그려냈다.
그 그림이 신묘년에 그린 풍악도첩이라고 해서 <신묘년풍악도첩>으로 불린다. 이 작품은
겸재란 이름을 화단에 알리며 동시에 진경산수화의 새로운 화풍을 본격 구사하는 계기가 된다.
겸재는 평생 금강산을 세 번이나 기행하면서 직접 본 경치를 그림에 그대로 담는 기법을 사용했다.
사진은 50대의 대표작인 <금강전도>이다. 사진 박은순 덕성여대 교수 제공
사실 그 때까지 조선시대의 화풍은 성리학적인 관념론과 명분론에서 벗어나지 못한 관념산수화,
추상산수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관념론에서 벗어나 보다 보편적인
세계관과 구체적인 현실을 중시하게 된다. 즉 실제 본 대로 사실적으로 그리는 기풍으로 바뀌게 된다.
70대에 이르러 <인왕제색도>를 완성해 겸재는 화가로서 완숙의 경지에 이른다.
사진 박은순 덕성여대 교수 제공
겸재는 금강산을 다녀온 지 불과 1년 후인 이병연의 특별초청으로 아버지, 동생 등과 함께
또 다시 금강산을 기행한다. 2년 연속 금강산 구경을 한 겸재는 친구에게 보답을 하기 위해
내금강과 외금강의 진경 21폭을 그린 <해악전신첩>을 이병연에게 선물했다.
겸재 정선의 화첩에 있는 진경산수화.
이병연은 이를 소장하고 있으면서, 삼연 김창흡, 시인 조유수, 서화수장가 이하곤과
신정하 등 당대 명인들에게 돌려 보이며 시를 받아 넣었다. 겸재의 명성을 일시에 알리는
결정적 계기가 됐고, 겸재는 당장 호사가들 사이에 유명인사가 됐다.
겸재 화첩에 있는 진경산수화의 한 폭. 겸재 자신의 모습이라고 한다.
<해악전신첩>이란 이름은 이병연이 금강산과 주변의 명승들을 실제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린 것에 대한 경의와 감탄의 표현으로 붙인 것으로, ‘바다와 산의 본모습을
그린 그림’이란 뜻이다. 흔히 동양의 그림을 ‘전신’이라 부르고 여러 그림들을 모아 엮은
것들을 ‘전신첩(傳神帖)’이라 부른다. 아쉽지만 이 그림은 지금 전하지 않고 있다.
금강전도.
이 때부터 겸재는 문인화가로서 개성적인 화풍을 구사했고, 화가로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다.
한 순간에 조선의 명망 있는 화가로 이름을 올리자,
겸재의 집은 그림을 부탁하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겸재는 북악산 서쪽 기슭에서 1676년 1월 3일 태어난 기록은 있지만 성장 과정이나 가족 배경 등에 대한 흔적은 거의 없다. 14세 때 부친이 사망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으며, 결혼도 29세 때 했다. 당시 29세면 거의 손자 볼 나이에 해당한다.
금강전도
어릴 적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는 기록은 전해오지만 사제관계에 대한 기록도 없다. 그의 천재성을 바탕으로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대작과 졸작, 그리고 다작은 이러한 가능성을 뒤받침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화풍과 비슷한 화가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가짜 그림도 많이 등장하게 된다.
금강산 선유봉
30대 중반부터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겸재는 40대 들어 첫 벼슬길에 오른다. 화가로서 겸재의 명성이 높아지자 좌의정 김창집의 천거로 종6품의 관상감 천문학겸교수로 관직에 나갔다.
만폭동
관직에 진출함으로써 생활은 안정되고, 선비 문인으로 편입되는 시기가 40대 였다. 40대에는 <사계산수도> <구학첩> 등의 작품을 그리지만 아직 겸재 특유의 힘찬 화풍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혈망봉
50대 들어서는 왕성한 활동으로 그의 독특한 화풍이 빛을 발한다. 50대 중반 경인 1731년 인왕산 아래로 이사하면서 생활에 안정을 이루고 화풍도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겸재는 평생 금강산을 세 번 기행한다. 50대 후반인 1734년 완성된 <금강전도>를 통해 겸재는 자신이 창안한 진경산수화의 절정을 이룬다. 선비화가로서 그의 역량을 드러낸 작품이며,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백천동
50대 후반 들어 진경산수화라는 중국 화법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화풍으로 새 시대를 연 겸재는 60대부터 그의 전성시대를 활짝 맞는다. 1739년 <청풍계>, 1740년 <경교명승첩>, 1742년 <연강임술첩> 등을 잇달아 내놓으면서 조선 최고 화가로 자리매김한다. 중인 화가들도 점차 정선을 추종하는 시기였다.
초석정
70대 들어서는 완숙의 경지에 이르러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인왕제색도>를 1751년에 완성한다. 그리고 80세가 넘어 죽을 때까지 작품 활동을 계속한다.
덕성여대 미술사학과 박은순 교수는 “겸재는 학식과 신념을 겸비한 문인으로서 회화는 천기라는 통념에 도전하며, 회화의 성격과 의미, 격조를 한껏 격상시킨 도전적인 화가였다”며 “보수적인 문인들의 비판과 무시에도 불구하고 진경을 그리기 위해 평생 전국을 답사하고 회화적 기법을 연마하기 위해 평생 동안 사용한 붓이 무덤을 이룰 정도로 노력하는 조선의 대표적 화가였다”고 겸재를 평가했다.
청풍계지각
압구정
연광정
소악루
귀래정
박연폭
삼일포
장안사
낙산사
만폭동
구룡폭
정양사
금강대 사진 겸제기념관 제공
*항상 건강하시고 날마다 즐겁고 행복하소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