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치무라 간조 内村うちむら 鑑三(1861~1930)】 "내가 아는 우치무라 간조 선생"
내가 아는 우치무라 간조 선생. 함석헌
1
내가 우치무라 선생님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를 이야기하자면 아무래도 유영모 선생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유영모 선생님을 통해서 우치무라 선생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1921년, 내가 오산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때의 일입니다.
나는 나라가 망하고 일본이 총독정치를 펴고 있을 때 관립 평양고등보통학교엘 다니고 있었는데 3학년이 막 끝나려는 1919년 3월 1일에 3.1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나는 학생 대열의 선두에 서는 한 사람으로 운동에 참가했는데 계엄령이 선포된 다음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인 용암포로 돌아와 울분과 우수(憂愁)의 2년 동안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21년 봄,20살 되던 해에 다시 학업을 계속하려고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학했습니다. 오산학교는 3.1운동의 중심적인 지도자인 남강(南岡) 이승훈 선생님이 망해가는 나라를 건지려는 마음으로 1898년에 세운 민족정신과 독립운동의 본산으로 평판이 높은 학교였습니다.
그러나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많은 교사와 학생들이 체포되고, 학교 건물은 일본 헌병이 불을 놓아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로 화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이듬해, 졸업생들과 지방의 유지들이 이대로 놔둘 수 없다면서 일어나 초가지붕으로 된 가교사를 짓고, 다시 학생과 교사들을 모았습니다. 이것을 ‘부활 오산’이라고 불렀습니다. 내가 갔던 것은 그 부활한 지 2년째 되는 해였습니다. 내가 가보니 그 초라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꺼칠꺼칠한 아직 손이 가지 않은 재목에 흙을 발랐을 뿐인 벽을 친, 마룻바닥에 책상도 걸상도 없는, 거기에 사오백 명 학생들이 두리뭉개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모여든 저와 같은 중도 퇴학자들이 대부분입니다. 교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오산은 도시가 아니라 순 농촌이니까 말로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불편한 곳입니다. 3.1운동이라는 유사 이래의 혁명의 폭풍이 지나간 뒤였으니까 모두가 흥분하고 있어서, 아무래도 안정이나 질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충돌이나 타락이나 비관, 절망 같은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일본인 선생이 많은 관립학교에서 규칙주의에 얽매어 지내온 나의 눈에는 아주 이상하게만 보였습니다. 무엇인가가 이 혼돈을 하나로 묶어 추슬러 나가고 있었습니다. 이곳저곳에 앉기 만 하면 ‘옛날 오산’ 이야기뿐이었습니다.
부활 오산의 유지들이 그러한 혼돈 가운데서 신생의 길을 열어 나가기 위하여, 가리고 또 가려내어 새 교장으로 추대한 분이 유영모 선생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초창기의 오산에도 교사로 와 계셨던 때가 있었습니다만 그것은 선생님이 아직 20세밖에 안 되셨을 때였습니다. 나이가 선생님보다 연장인 제자였던 사람의 후일담을 들으면, 선생님은 ‘요한복음’ 강의를 하신 일이 있으셨는데 그 깊은 해석에 정말 놀랐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신생님은 1913년에 도쿄로 가셔서 물리학교에 입학하셨는데 얼마 아니 가서 생각이 달라지셔서 귀국하셨던 일이 있습니다. 도쿄에 계실 때 재일본 한국 YMCA의 총무인 김정식 선생이 활약하고 계셨던 관계로 우치무라 선생이 그곳에 오셔서 강연을 했는데 그것을 들은 일이 있으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뒤에 와서 안 일입니다. 1921년 9월에 유 선생님이 교장으로 부임해 오셔서 수신(修身) 시간에 저 유명한 어윈 정신박약아 양호원의 대니 이야기를 해 주셨을 때가 우치무라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때였습니다. 또한 유 선생님이『애음(愛吟)』이라는 소책자를 가지고 오셔서, 칼라일의 “So here has been another blue day…” 라는 시를 읽어 주신 일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우치무라 선생님 그분에 관한 자세한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대니의 이야기는 왠지 잊혀지지가 않았습니다. 후일 가시와기(柏木)집회에 나가게 되어 다시 한번 우치무라 선생에게 직접 그 이야기를 듣고는 더욱 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1962년,내가 미국에 처음으로 갔을 때 마침 퀘이커의 펜들힐에 잠시 동안 머무르게 됐으므로 그곳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그 양호원은 그 근처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만 별로 대단한 게 못 된다는 식의 말투였습니다. 결국 그때에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만 1979년 다시 미국엘 갔을 때에는 친절한 안내인이 있었으므로 가볼 수가 있었습니다. 가니까 그곳 직원이 문헌을 꺼내 가지고 와서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참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도 큰 기관이 되어버린 상태여서 우치무라 선생이 비질 청소와 마룻바닥 광내기 일을 일과로 하며 자기 정화를 위해 수고하시던 왕년의 모습은 찾아 볼 길이 없게 되어 있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그 커다란 건물의 구석구석에서,“He is a great man!”이라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2
유 선생님에게서 처음으로 대니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우치무라 선생이 지금도 생존해 계신 분인지의 여부로 몰랐었습니다. 또 물어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1923년 3월에 도쿄에 갔을 때도 시험 준비에 쫓기고 있던 탓도 있었습니다만 선생님에 관한 것을 수소문해 보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듬해 도쿄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김교신을 알게 된 후에 도,그가 우치무라 선생의 성경연구 모임에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었기 때문에 선생님에 관해 알아보지 않은 채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듬해가 되어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연히 김교신이 선생님 모임에 나가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길래 내가 깜짝 놀라서 “그럼 우치무라 선생이 아직 살아 계시단 말이냐?”라고 말하자, 친구가 웃으면서 “그야 물론 살아있지” 하고는 김교신을 만나 보라고 하므로 즉시 김을 찾아가서 나도 가시와기 모임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1925년 가을의 일입니다.
3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자랐고, 유영모 선생님에게서 여러 가지 말씀도 들었지만 무교회리는 명사(名詞)는 들어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 가시와기에 가서 제일 인상적이었던 것이 그 ‘무교회’라는 이름이었습니다. 또한 성경에 연구라는 말을 붙이고 있는 것을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아, 성경에 대한 태도는 이래야 하는 것이로군,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라면서 무조건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연구해야 하는 것임을 알고 성경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4
일본에 오기 전, 오산에 있을 무렵부터 저는 조금 사물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영모 선생님의 영향입니다. 선생님은 깊이 사색하는 분이십니다. 선생님의 대표적인 표어는 ‘진실’입니다만, 생명을 언제나 강조하여 그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나도 늦게나마 ‘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문제가 차차 머리를 들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3.1운동에 의하여 봉건적인 구시대의 잠에서 깨어나 일어서기 시작한 민중은 목적했던 독립은 쟁취하지 못했지만 실망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문화운동으로 이어졌는데 총독부의 정치가 문화정책이라 하여 표면상으로는 다소 완화되고, 자본주의 경제가 다소이긴 하지만 성장하기 시작했으므로 거기에서 자연히 사회문제가 발생하여 한국에도 공산주의가 들어왔습니다.
동시에 또한 한때의 민족주의나 또는 그리스도교 신자인 지사․투사라고 일컬으던 많은 사람들이 총독부와 타협하기도 하고 변질하기도 하였습니다.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에서는 관동대진재, 거기에 한국인 학살 사건까지 일어나 경제 불황을 타고 공산주의가 맹렬한 기세로 일어났기 때문에 일본에 가 있던 한국인 학생들도 많이 공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 무렵 도쿄 고등사범에도 한국인 학생이 50명 정도 있었습니다만 그리스도교 신자인 우리들은 상당히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자란 나였지만 번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스스로 진지한 태도로 자기 자신에게 묻는 때가 그야말로 적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정말 그리스도에 의하여 건짐을 받을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공산주의 혁명이야말로 나라를 건질 수 있는 길인가 하고. 그러한 번민이 우치무라 선생의 예언자 강의를 듣는 동안에 해결을 보고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앞으로 어떠한 사태 어떠한 변동이 일어나더라도 신앙을 버리지 않겠노라고 하나님 앞에 맹서 하였습니다.
5
나에게는 아주 커다란 결점이 있습니다. 의지가 약한 점, 수줍음을 많이 타는 점입니다. 그래서 매우 존경하는 선생님에게조차 질문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유 선생님이 처음에 오산으로 오셨을 때 무언가 선생님께 말씀을 드리고 싶은 심정이 들어 선생님이 계시는 방 앞에까지 가서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놓았다 했습니다만 결국은 그대로 돌아오고 만 일이 있습니다. 우치무라 선생님께도 개인적으로 마음을 열고 속이야기를 여쭈어보지 못했던 것이 후회됩니다. 그래서 그야말로 이것만은 절대로 들어봐야 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한국문제에 관하여 특별히 선생님의 생각을 들어본 일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일반에게 알려져 있는 문제에 대해서 내 의견을 말할 수는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치무라 선생이 처음에는 청일전쟁을 의전(義戰)이라고 말한 일. 그 후에 즉시 그렇지가 않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문제는 되지 않습니다만, 어째서 처음에는 그런 판단을 하시게 됐는지 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무력을 배경으로 하는 국가간에 야심 없이 일어나는 사건이 단 하나인들 있을 수 있을까? 전쟁까지는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남의 나라 일에 간섭하는 그 자체부터가 그것을 호의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그것을 어째서 모르셨을까? 아마 선생님 마음이 너무도 단순하셨기 때문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은 관동대진재 때의 한국인 학살사건에 관한 것입니다만, 당시에 선생님이 그 진상을 모르고 계셨다면 그에 대한 비판이나 질책을 하신 일이 없으시더라고 잘못이라고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중에라도 좋으니까, 선생님만한 영향력을 가지고 공정하게 그리고 엄격하게 질책이라도 해 주셨더라면 하는 아쉬운 생각에 대해서는 저도 동감입니다만, 그러한 일은 인간적인 판단만으로 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한국 병합의 문제입니다. 이것도 위의 문제와 같은 유의 것입니다만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좀 불만이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한국에서는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 선생이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김교신이 살아 있을 때 나와 둘이서 이야기하던 것을 하나 쓰겠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도 우치무라 선생과 몇 번인가 만난 일이 있습니다만,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한 일이 있습니다. 언제였던가 한국의 독립문제에 대해서 물어보았더니 선생님이 “영국의 스코틀랜드 같이 되면 되지 않겠는가?”라고 대답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두 사람은 좀 불만이었습니다.
6
끝으로 한 가지 덧붙일 것은, 한국인 특히 그리스도교 신자 중에 우찌무라 선생에 대한 적지 않은 오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너무도 일본주의라는 것입니다. 한때, 김교신과 김인서(金麟端)가 맹렬한 논쟁을 벌인 일이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후인 1956년에 내가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교회 비판을 발표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여기저기서 많은 반응이 있어가지고『사상계』지의 발행부수가 급증하였다는 말도 나돌았습니다만, 김인서 씨는 “이제 바야흐로 일본의 우치무라 총독이 무교회의 부하를 이끌고 한국을 점령하려 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물을 아는 사이라면 일소에 붙이겠지만 한일 관계에서 깊이 생각해야 할 점이 있음을 가르쳐 주는 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치무라 선생의 강한 애국심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7
종교관을 이야기할 때 나는 보편종교라고 말할 때도 있습니다. 존재하는 종교라고 말할 때도 있고 절대긍정이라고도 말합니다. 그것은 나의 종교사상을 나타내는 말들입니다. 그러나 나의 신앙에 대해 말한다면 나는 무교회에서 나온 일도 없고 퀘이커에 들어간 일도 없습니다. 나는 원래가 처음부터 무교회를 알고 있으면서 우치무라 선생에게로 간 것이 아니고 선생님께로 가서 무교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무교회라면 굳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살아있는 한 그 어떤 모양으로든지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만, 될 수 있는 대로 형식에 얽매어 굳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무교회는 우치무라에게서는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의 사람들에게는 자기 자신의 무교회가 있어야 합니다.
8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기 직전의 어느 날, 우치무라 선생이 집회에서 “세례는 받아도 좋고 안 받아도 좋다, 받아서 신앙이 강해진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세례를 줄 터이니까 와라.” 이렇게 말씀하시므로 나는 정해진 날에 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도 선생님을 모방하여 지금 누구에게든지 세례를 주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마사이께 진 선생은 내가 십자가 신앙에서 떠났다고 합니다. 그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의 생각으로는 떠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없이 어떤 그리스도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에서 떠난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해석을 나에게 맞도록 나 나름대로 다르게 했을 뿐입니다. 나는 우러르는 십자가보다는 져보자는 십자가 쪽에 섭니다. 그 점에서 나는 유 선생이나 간디에게 가깝습니다.
나는 귀국 후 처음에는 우치무라 식으로 집회를 하고 우치무라 전집을 곁에 놓고 참고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우찌무리는 우치무라이고 나는 나 나름대로 깨달아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전집은 일부러 덮어 두고 그 대신 성경을 놓고 나 나름대로 씨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점이 파악되기까지 그렇게 한 다음 선생님 책을 참고하였습니다. 나는 이것이 우치무라 식이며 우치무라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치무라는 내 속에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물론 위대한 우치무라의 모든 것을 내가 알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 모든 것을 알 필요는 없습니다. 장자의 말대로 “鷦鷯巢於深林 不過一枝 偃鼠飮河 不過滿腹”일 것입니다. 내가 우치무라에게서 내 나름으로 흡수하여 살아간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우치무라도 내 안에서 영원히 살아서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교회 정신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9
현대 세계는 한 마디로 말해 하나님을 내쫓은 세계입니다. 3,4백년 내려오는 동안에 하나님을 부정하고 인본주의를 자랑하며 하나님이 없는 정치, 교육, 학문, 예술, 오락을 하고, 세속주의 문명을 찬양해온 대가(代價)를 지금 와서 치르고 있는 것이 현대입니다. 쫓아낸 하나님을 다시 모셔와서 받드는 길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치무라는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일본뿐 아니라 인류 전체 속에서도 그이만큼 하나님의 존재를 보여준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우치무라의 신앙사상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시대와 장차 올 시대를 살려낼 오늘의 말씀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치무라의 애국심은 우치무라에게는 그것으로 좋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그의 애국심을 그대로 이어받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의 국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상입니다. 현대에 와서 인류의 고뇌는 이 낡아빠진 지배주의 국가주의를 탈피하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을 하지 못한다면 인류는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한 가지 생각이 되는 것은 동양정신을 재음미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동양에 수천 년 동안 길러 오신 심오한 정신문명을 요 수백 년 동안 기술 중심의 서양문명에 무릎 꿇게 내버려 두신 것은 이유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10
그를 위해서 우치무라를 현해탄 위에 걸린 다리로 보고, 한때 서로 잘못된 관계를 가졌던 두 민족이 세계를 파멸에서 건져낼 정신운동을 일으키면 어떻겠습니까? 만일 10억의 중국이 옛 국가주의를 탈피하지 못한다면 세계에 미래는 없는 것입니다. 그 중국을 건지는 일이 우리의 과제라고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우치무라 선생은 “금후 1천 년의 역사는 남반구에 있다”고 예언하셨습니다. 남반구로 가는 길은 아시아에 있습니다. 유교, 힌두교, 불교, 회교, 조로아스터교의 아시아가 살아남지 않는다면 남반구를 구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1983년 10월 29일
‘우치무라전집’ 월보 제39호 (이와나미 서점, 1983년 12월), 씨알마당 1995년 10월호(번역;조형균)
저작집 30; 10-223
전집 20;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