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전투 당시 조선군과 청군의 실제 병력 규모
청군의 실제 병력 규모과 홍이포 배치 수량
조선군이 강화도 방어에 투입한 총 전력은 1,600명의 병력과 34척의 함선으로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강화도 전투에 투입된 청군의 전력은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하여 추론을 해볼 시간입니다.
인조실록을 보면 강화도 전투 당시 청군은 도르곤이 지휘하는 3만 명의 병력이 홍이포를 마구 쏘아대는 바람에 강화도를 방어하던 함대와 지상군이 와해되어 패전했다고 언급되어 있고, 추가적으로 수레에 실을 만한 크기의 '삼판선' 수십 척과 홍이포를 작전에 투입하였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기록에 따르면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정규 병력은 팔기만주/팔기몽고가 약 1만 명, 우전초하(이후 八旗漢軍)가 약 1만 명, 공유덕, 경중명의 天佑兵과 상가희의 천조병이 합계 1,900∼2,000명, 그리고 외번몽고 병력이 약 12,000명 등으로, 합계 약 34,000명 정도였다는 결과가 있는 것을 보면 실록의 기록처럼 3만 명이 강화도 전투에 투입되기는 상당히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는 丙子胡亂 당시 淸軍의 構成과 規模을 저술한 구범진-이재경의 논문 내용과 이어지며 기존의 128,000명 설 대신 실제 동원 병력이 5만 명 미만이었다는 결론을 낸 바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논문에 따르면 강화도에 투입된 병력이 3만 명이라는 것은 터무니 없는 소리가 되어버립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강화도에 투입된 청군의 병력 규모가 얼마나 되는 지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될텐데, 이는 청 측이 남긴 여러 기록들을 토대로 한 번 재구성을 하여 추정을 해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보통 청의 기록은 일반적으로 군사 작전의 주요 지휘관이 누구였는지, 또 어떤 부대가 얼마나 많은 병사를 투입했는지를 모두 언급하는 것이 통례입니다. 여기서 강화도에 투입되었을 것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이들은 명의 수군 출신으로 청에 투항한 공유덕, 경중명의 天佑兵과 상가희의 천조병 정도인데 전후 논공행상을 정하는 기록을 보면 이들이 강화도에 투입된 기록은 아예 나오지 않습니다.
즉 강화도에 투항한 주력 명군 수군 전력은 아예 가지도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입니다. 이들이 수송 임무에만 나선 것이 아니냐, 라는 의문도 있을 수 있는데 청의 논 공행상 관련 기록은 강화도에 처음 상륙한 청군의 선박이 양황기 소속 만주 팔기가 지휘하던 것이라고 아예 언급되어 있으므로 투항한 명군 등이 이를 수송했다는 것은 매우 가능성이 낮은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실제 투입된 병력은 2월 5일 홍타이지의 서신을 보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가 있습니다.
-팔기에 80척의 작은 배를 만들게 하여, 睿親王과 安平버일러에게 니루마다 10명씩의 甲兵을 주어 조선 왕의 아들과 처가 있는 강화도를 쳐서 취하라고 보내었는데...-
위의 서신 내용은 홍타이지가 도르곤과 두두에게 맡긴 병력이 니루마다 10명 씩이었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병자호란 당시 만주 팔기와 몽고 팔기의 니루 숫자가 총 320~330개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약 3,200~3,300명 가량의 병력이 강화도 전투에 투입이 되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다만 丙子胡亂 당시 淸軍의 構成과 規模을 저술한 구범진-이재경의 논문에 따르면 만주 팔기에만 국한되었을 가능성도 있는데, 이렇게 되면 만주팔기의 니루 숫자가 약 240개 정도였으므로 차출된 병력은 2,400명까지 크게 떨어지는 결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즉 강화도 전투 당시 청군은 최소 2,400명에서 최대 3,300명 수준이었다는 추론이 가능한 셈입니다. 그렇다면 투입한 선박의 숫자는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인조실록에서는 청군이 강화도 침공 당시 투입한 삼판선의 숫자를 수십 척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대체적으로 80여 척이었다는 인식이 있습니다만, 조선의 다른 기록들이나 청이 가도 정벌을 위해 자신들이 강화도 공격에 사용했던 선박을 구체적으로 몇 척을 돌려달라고 했던 것을 본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남급이 저술한 강도록에는 청군의 선박 숫자가 40여 척에 불과하다고 언급했고, 조익 역시 병정기사에서 청군의 선박을 30여 척이라고 저술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승정원일기에서도 마부대가 가도 정벌을 위하여 강화도에 작전 이후 버려둔 선박을 돌려달라고 요청했는데 이 때 이 숫자가 44척입니다.
이로부터 청 측 기록의 80척이 실제를 거의 두 배로 과장한 숫자라는 사실을 파악알 수 있습니다. '남한일기' 정월 30일 경의 82척이라는 기록도 강화부성에 있던 내인과 내관 등이 포로로 잡혀있는 동안 청군의 과장된 숫자를 전해지면서 와전이 되었을 공산이 큽니다.
결과적으로 강화도에 투입된 청군의 선박은 44척이라는 숫자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상당히 작은 이 선박들은 말을 태우기가 어려웠으며, 이 때문에 상륙을 실시한 청군의 주력 병종은 보병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보통 기병까지 상륙을 시키려면 비교적 대형선박류가 많이 필요하며, 조선의 경우 공마들을 바칠 때 대형 선박류를 이용하여 매우 조심스럽게 말을 수송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청군의 소형 삼판선들로는 이들의 주력이었던 기병을 실어나르기가 매우 어려웠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알아볼 것은 과연 강화도 전투 당시 청군이 투입한 홍이포의 수량이 얼마였느냐 인데, 사실 조선 측이나 청 측 기록에서 강화도에 투입한 양 측 포병 전력이 얼마나 되는 지에 대해서 남긴 기록이 없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심히 난감합니다만, 청군이 병자호란 직전 보유한 홍이포의 총 수량과 남한산성에 배치했던 홍이포 수량을 파악한다면 어느 정도 추정은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보통의 사가들이나 병자호란 관련 매체들을 보면, 강화도 함락 당시 조선의 방어군이 청군이 사격한 홍이포에 의하여 거의 궤멸을 당했다는 듯이 언급하고 있으나 사실 청군이 전체적으로 보유한 홍이포의 수량은 46문에 불과했습니다.
그 중 공유덕, 경중명, 상가희가 운용한 홍이포는 총 16문이며, 우전 초하의 홍이포 30문 중 청 본국의 성채에 설치하지 않고 출정 시 수레에 싣고 다니던 것은 18문이었으니 병자호란 당시 원정군에 투입된 홍이포는 총 34문인 셈입니다.
46문 중에 12문 만 본국 방어를 위해 남겨두고 전체 주력 포병 전력의 74%에 달하는 전력이 조선을 정벌하기 위하여 통째로 투입된 셈이죠. 어마어마한 수량인데, 이 중 남한산성에 배치된 수량은 다음과 같습니다.
-3, 4일 전에 오랑캐는 望月臺 밖에다 대포 3자루를 설치하여 성을 향해 쏘아대었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약 10여 자루를 더 설치하고, 또 南隔臺 밖에다 7∼8자루를 설치하여 연달아 쏘아댔다. 포환의 큰 것은 모과만 했고, 작은 것은 거위알과 비교하여 약간 컸는데, 능히 10여 리를 날아서 맞는 것은 여지없이 부숴버렸다.-
이는 남급의 남한일기에 수록된 것으로 최소 21문에서 최대 26문이 남한산성에 배치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 10여 자루라는 글귀가 어느 정도 수량인지는 모르겠으나 문자 그대로 10문이면 최소 수량으로, 15문 가량이라면 최대인 26문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예비전력으로 남은 홍이포의 숫자는 8문~13문 가량입니다. 여기서 한 번 더 살펴볼 것은 강화도 침공 당시 홍이포 운용으로 전공을 세워 포상을 받은 사람이 장성덕 이라는 인물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장성덕이라는 인물은 계급이 1개 니루를 지휘하는 계급에 불과했으며, 홍이포를 전문으로 다루던 우전초하의 니루가 31개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홍이포가 얼마나 투입되었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공교롭게도 당시 우전초하 보유 홍이포의 총 보유 수량이던 30문과 거의 차이가 없죠. 따라서 포대를 맡은 장수가 1개 니루를 지휘하던 계급에 불과했다면, 강화도 작전에 투입한 대포도 그에 맞추어 1문에 그치지 않았겠느냐는 추측도 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홍이포와 장군포' 를 투입하여 조선군을 상대했다는 도르곤의 보고를 고려하면 홍이포가 1문 뿐이었다고 보기도 곤란하므로, 대략 2∼3문 정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정도의 추정이 무난해 보입니다.
물론 이는 추정일 뿐이니 실제 수량은 이보다 더 많을 수도 있겠으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홍이포가 강화도 함락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기에는 상당히 무리한 감이 있다는 점입니다.
적어도 병자호란에 관한 한, 청 측의 사료는 개별 작전 투입 병력이 100명 전후의 소수일지라도 그 지휘관의 이름과 숫자까지 꼼꼼히 기록하고 있는데, 심지어 전황 보고를 전달한 전령의 경우 2∼4명의 전령을 그 이름까지 일일이 밝히고 있을 정도입니다.
보통 홍이포 1문 운용에 있어서 4~5명의 운용 병력이 필요한데 만약 2~3문 이상의 홍이포를 투입했더라면 그 운반 및 운용을 위해 적잖은 수의 우전초하 병력을 작전에 투입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경우 청의 기록이 우전초하의 투입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즉 홍이포가 아주 소량으로 운용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죠. 사실 조선 측 기록을 들여다보아도 청군이 홍이포를 아주 많이 운용했다는 식의 기사는 없습니다. 조선 측 기록에 언급된 청군의 홍이포 포격은 갑곶 북쪽 해상의 강진흔이 지휘하던 소함대와 대안의 갑곶을 겨냥한 것 뿐이죠.
조선 수군의 함선 가운데 홍이포에 피격된 사실이 기록으로 정확히 확인되는 것은 강진흔의 기함 1척 뿐이며 장신이 지휘하던 함대의 기록과 관련해서는 그들을 향한 청군의 홍이포 발사를 언급한 것이 전무합니다.
덧붙혀서 매우 흥미롭게도 서신에서 홍타이지는 강화도 작전에 대해서 '飛船 80척' 의 기민한 기동을 조선 수군이 막지 못하였다고 하였을 뿐, 홍이포의 위력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강화도 침공 당시 투입된 홍이포의 숫자는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결론을 내리자면, 강화도 침공 당시 청군의 병력은 최소 2,400명에서 최대 3,300명이었으며, 투입한 선박의 숫자는 44척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삼판선의 크기가 매우 작아 팔기 소속 기병이 아닌 보병이 주력 병종으로 운용되어 전투에 임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또한 홍이포 역시 청군이 보유한 전체 46문 중 34문이 조선 원정에 투입되었고, 이 중 최소 21문~26문이 남한산성에 배치되었으며 실제로 강화도에 투입된 홍이포는 많아야 2~3문 내외라는 것이라고 추정을 할 수 있겠네요.
출처
승정원일기
전사편찬위원회,「丙子胡亂史」,1986
병자호란 시기 강화도 함락 당시 조선군의 배치 상황과 청군의 전력, 구범진
丙子胡亂 당시 淸軍의 構成과 規模, 구범진-이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