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무장군인 법원 난입 사건 발생 ← 1964년 7월 2일 법원 및 동아일보사 난입사건의 피고들에 대한 결심공판이 열렸다. 1964년 5월 21일 새벽 공수단 제1특전단 소속 최문영 대령이 지휘하는 장병 8명과 공수단 출신 민간인 2명이 완전무장하고 법원에 난입, 소동을 벌였다. 이들은 20일 낮 서울대학교 운동장에서 벌인 한일 굴욕외교반대 학생총연합회가 주최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성토대회’에 참가한 주모학생들에 대한 구속영장을 많이 기각했다는 연락을 받고 정치근 담당검사와 양헌 판사에게 압력을 넣기 위해 법원청사에 난입했으나 양 판사가 퇴근했다는 말을 듣고 성북구 동소문동에 있는 양 판사 집까지 찾아가 위세를 과시, 공무중인 판사를 협박했다. 또 6월 6일 새벽 최 대령등 제1공수특전단 소속장교8명이 술을 마신 후 순찰 도중 동아일보사에 침입해 숙직중인 김광희 기자에게 법원난입 사건으로 구속당한 황길수 대위 등에 대해 인신공격성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약45분간 폭언을 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 7월 10일 제6군관구계엄보통군법회의는 법원 및 동아일보사 난입사건의 판결공판을 열고 주모자 최문영 피고인에게 징역 5년, 관련자 4명에게는 3년의 실형을 선고하고 장교의 지시를 받아 행동한 하사관등 13명은 무죄를 선고했다.
[1991년] 인도 라지브 간디 폭탄테러로 사망 ← 인도 네루가(家)의 세번째 지도자였던 라지브 간디. 라지브 간디 전 인도총리가 1991년 5월 21일 남부의 타밀 나두주에서 지방유세 도중 자살폭탄 테러로 사망했다. 이에 따라 지난 1947년 인도가 영국에서 독립한 후 40여 년간 인도를 통치해온 네루 일가는 가족중 3명을 비명횡사로 잃은 비운의 가문이 됐다. 라지브 간디는 인도 초대 총리인 네루의 손자이자 인디라 간디의 아들이었다. 라지브 간디의 어머니인 인디라 간디 전 총리는 시크교도인 자신의 경호원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으며, 동생 산자이 간디 역시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졌다. 네루 전 총리의 외동딸이었던 인디라 간디는 당초 두아들 중 권력지향적 성향이 강했던 차남 산자이 간디를 후계자로 지목했었다. 그러나 산자이가 뜻밖의 죽음을 당하자 평소 정치에 무관심했던 장남 라지브 간디가 정계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인도는 라지브 간디의 암살사건으로 정치적 혼란상태에 빠져들었고, 경제적으로도 파산직전까지 몰려 국정의 방향타를 잃고 혼란을 거듭했다. 이러한 국가 비상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인도 국민의회당은 라지브 간디의 미망인인 소냐 간디에게 당 총재를 제안, 적극 권유했으나 그녀가 이를 거절. 인도 독립 1세대 정치인인 나라시마라오 전 외무장관이 임시총재로 그 역할을 대신했다. 2004년 현재 국민의회당 당수인 소냐 간디는 5월 18일 총리지명 포기의사를 밝힌 바 있다.
[1982년] 영국군, 포클랜드 상륙 1982년 5월 21일 영국군이 이스트포클랜드 북부해안에 위치한 포트산카를로스 근처에 상륙하면서 포클랜드 전쟁의 기선을 잡게 되었다. 포클랜드는 아르헨티나 동해안에서 480Km 지점에 위치한 제도로 19세기초부터 아르헨티나가 영유권을 주장해왔다. 그러나 1833년 영국이 이 제도를 점령·통치하면서 분쟁이 시작되었다. 1982년 아르헨티나는 영국과의 협상을 포기하고 군사적 행동에 나서 4월말까지 포클랜드 제도에 1만 명 이상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대처 총리가 이끄는 영국 정부는 포클랜드 주변을 전쟁지역으로 선포하고 4월 25일부터 반격에 나서 5월 21일 이스트포클랜드 상륙작전에 성공했다. 5월 31일 영국군은 포클랜드 제도의 수도인 스탠리를 포위했고, 6월 14일 이곳에 주둔하던 아르헨티나 수비대가 항복하면서 포클랜드 전쟁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1921년] 사하로프 Andrey Dmitriyevich Sakharov 출생 1921년 5월 21일 태어남 / 1989년 12월 14일 죽음 사하로프는 수소폭탄을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소련의 핵물리학자이며 인권운동가이다. 모스크바국립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소련 과학 아카데미에서 이고르 탐의 지도 하에 이론물리학을 연구했고, 1947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흐루시초프의 지시로 핵무기를 개발하는 극비 팀에 참여해 수소폭탄 제조에 필요한 주요 문제들을 풀어냈다. 1953년 수소폭탄 실험이 성공하자, 그 공로로 32세의 나이에 소련 과학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핵무기가 인류와 자연에 미치는 위험을 우려한 그는 1961년 흐루시초프에게 열핵폭탄의 대기중 실험을 비판하는 편지를 보낸 것을 시작으로, 점차 체제 비판의 폭을 넓혀갔다. 1968년 에세이 <진보, 공존, 지적인 자유 Progress,Coexistence,and Intellectual Freedom>를 발표해 핵무기 감축과 양대 체제의 화해를 촉구했다. 이로 인해 그는 군사 관련 연구에서 제외되었고, 많은 특권을 상실했다. 1970년에는 인권위원회를 창설해 인권운동에도 참여했다. 1973년 소련의 방송들은 그를 반국가적인 학자라고 매도했다. 1975년 그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자 그에 대한 공적인 비난은 더욱 거세졌다. 결국 1980년 그는 니주니노브고르트로 유배되었지만 1986년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면서 풀려났다.
[1911년] 소설가 정비석[鄭飛石] 출생 1911. 5. 21 평북 의주~1991. 10. 19 서울. 주로 여성의 애정윤리를 다룬 대중소설을 썼고 만년에는 역사소설을 썼다. 본명은 서죽(瑞竹). 1922년 일본대학 문과를 중퇴하고 귀국하여 〈매일신문〉 기자로 근무했다. 8·15해방 후 〈중앙신문〉 문화부장을 지낸 뒤, 일정한 직업 없이 소설창작에만 전념했다. 1951년 국제 펜 클럽 한국본부위원장, 1965년 관광정책심의위원, 1970~71년 국제 라이온스 협회 한국지구 총재 등을 역임했다. 평소 '소설은 읽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50여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원고지를 메운 철저한 장인정신의 소유자였다. 고희(古稀)를 넘긴 이후에도 왕성하게 글을 쓰다가 80세로 죽었다. 1935년 시 〈도회인에게〉·〈어린 것을 잃고〉와 소설 〈여자〉·〈소나무와 단풍나무〉를 발표한 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졸곡제 卒哭祭〉가 입선되고, 이듬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성황당 城隍堂〉이 당선되어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졸곡제〉는 죽은 아내와 과거에 나누었던 애정을 회고하는 내용이고, 〈성황당〉은 깊은 산 속에서 숯을 구워 생계를 꾸려나가는 순이를 통해 원시 자연의 건강함을 보여준 작품이다. 이후 발표한 작품은 성격에 따라 3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현실에 대한 지식인의 고민과 사상적 갈등을 그린 〈저기압〉(비판, 1938. 5)·〈이 분위기〉(조광, 1939. 1)·〈삼대〉(인문평론, 1940. 2) 등이 있다. 둘째,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난 일을 주제로 한 〈강태공〉(조선문학, 1939. 3)·〈귀불귀 歸不歸〉(동아일보, 1939. 3. 1~17)·〈고고 孤高〉(문장, 1940. 3) 등이 있다. 셋째, 화려한 명성을 얻게 된 대중소설로, 〈자유부인〉(서울신문, 1954. 1. 1~8. 6)·〈애정무한〉(1957)·〈여성전선〉(1974) 등이 있다. 대표작 〈자유부인〉은 단순한 연애소설이 아니라, 8·15해방 이후의 퇴폐풍조를 날카롭게 그린 세태풍속소설로 당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황산덕(黃山德)과 '자유부인논쟁'을 불러일으켜 사회문제로까지 비약되었다. 그의 나이 50세 이후에 쓴 역사소설로 〈명기열전〉(1977)·〈민비〉(1980) 등이 있고, 〈한국경제신문〉에 1981년 6월 2일부터 1989년 7월 23일까지 8년여 동안 잇따라 발표한 〈손자병법〉·〈초한지 楚漢誌〉·〈김삿갓 풍류기행〉 등이 있다. 소설집으로 〈청춘의 윤리〉(1944)·〈성황당〉(1945)·〈고원 故苑〉(1946) 등 80여 권이 있고, 수필집으로 〈비석(飛石)과 금강산의 대화〉(1963)·〈노변정담 爐邊情談〉(1971), 평론집으로 〈소설작법 小說作法〉(1946)이 있다.
[1889년] 독립운동가 차천모 [車天模] 출생 1889(고종 26). 5. 21 평북 의주~1936. 4. 27. 1918년 12월 같은 마을에 사는 일제의 밀정 주계주(朱啓柱)를 응징하려다 체포되어 태형(苔刑)에 처해졌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의주 수진면(水鎭面) 면사무소 앞 광장에서 주민들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벌인 뒤 김이호(金履浩)·송영보(宋榮甫) 등과 함께 주계주를 처단하기 위해 그의 집을 습격했으나 이미 도피하고 없자 집을 방화했다. 그뒤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 독립투사들의 안내역으로 국내 잠입을 도왔다. 1920년 군자금 모집 등의 목적으로 국내에 밀파되어 평안도지방에서 활동하던 중 6월에 체포되었다.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언도받아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26년 11월 사면으로 출옥했다. 1927년 전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 하다가 봉천에서 죽었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471년] 독일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위대한 화가·판화가 뒤러 (독일 화가) [Durer, Albrecht] 출생 1471. 5. 21 뉘른베르크 황제령 자유시~1528. 4. 6 뉘른베르크. 수많은 그의 작품에는 제단화와 종교화, 많은 초상화와 자화상, 동판화 등이 있다. 〈요한의 묵시록 Apocalypse〉 연작(1498)과 같은 목판화는 그의 다른 작품들보다 고딕 미술에 대한 취향이 더 많이 나타난다.
초기생애와 교육배경 헝가리를 떠나 1455년 뉘른베르크에 정착한 금세공인인 대(大)알브레히트 뒤러와 뉘른베르크 출신 바르바라 홀퍼 사이에서 2번째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공방에서 제도공으로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1484년 13세 때 그린 뛰어난 자화상(빈 알베르티나 소장)과, 이미 후기 고딕 양식의 세련미를 보여주고 있는 1485년의 〈음악의 천사들과 성모 Madonna with Musical Angels〉(베를린 국립 프로이센 문화재관리재단 박물관 동판화실 소장)에서 그의 성숙한 솜씨가 엿보인다. 1486년 아버지의 주선으로 화가 겸 목판 삽화가인 미카엘 볼게무트(1434~1519)의 도제로 들어가 볼게무트의 공방에서 3년을 보낸 뒤 한동안 여행을 했다. 1490년 뒤러는 최초로 유명해진 작품인 아버지의 초상화(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소장)를 완성했는데, 이 작품에서 이미 그의 독특한 회화 양식을 엿볼 수 있다. 뒤러는 여행중에 네덜란드와 알자스, 스위스 바젤 등을 방문한 듯하며, 바젤에서 그의 작품으로 확인된 최초의 목판화 〈사자를 치료하고 있는 성 히에로니무스 St. Jerome Curing the Lion〉(바젤 미술관 동판화실 소장)를 제작했다. 1493~94년에는 잠깐 동안 스트라스부르에 있다가 책 삽화를 그리기 위해 다시 바젤로 돌아갔다. 1493년 양피지에 그린 이 시기의 초기 걸작으로 엉겅퀴 1송이를 들고 있는 자화상(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이 있으며, 여러 작은 종교화들(독일 카를스루에 국립미술관에 그중 하나가 있음)도 이 시기의 것들이다.
첫번째 이탈리아 여행 1494년 5월말 뒤러는 뉘른베르크로 돌아가서 곧 상인의 딸 아그네스 프레이와 결혼했다. 뒤러는 1494년 가을에 처음으로 이탈리아로 여행가서 1495년 봄까지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티롤 지방 남부의 알프스 산맥을 주제로 대담하게 그린 많은 수채화들은 그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들로 꼽힌다. 이탈리아 여행은 뒤러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후 10년 동안 제작한 소묘와 회화, 판화들의 대부분에는 이탈리아 미술에서 받은 영향이 직접, 간접적으로 나타나 있다. 베네치아에 있는 동안이거나 아니면 아마도 이탈리아에 가기 전에도, 그는 이탈리아 중부 출신 대가들의 동판화를 본 듯하다. 이 미술가들 중 피렌체 화파의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가 젊은 뒤러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다. 세속적이고 우의적이며 종종 자기도취적인 이 시기의 그림들은 이탈리아 양식을 변형시킨 것이거나 새로운 시대의 자유로운 정신이 숨쉬는 완전히 독자적인 창작품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그는 폴라이우올로의 〈데이아니라의 강간 The Rape of Deianira〉(코네티컷 뉴헤이븐 예일대학 미술관 소장)에서 헤라클레스의 형상을 본떠 〈헤라클레스와 스팀팔루스의 새 Hercules and the Birds of Stymphalis〉(뉘른베르크 국립박물관 소장)를 그렸다. 르네상스 전통에 따라 그린 완전히 신화적인 이 그림은 그의 작품 중 이례적인 것이다. 1498년경에 그린 〈드레스덴 제단화 Dresden Altarpiece〉의 가운데 패널은 이 그림과 비슷한 양식으로 되어 있고, 만테냐의 영향을 보여준다. 뒤러가 자유롭게 채택한 것의 대부분은 베네치아에서 알게 된 좀 더 서정적인 화가 조반니 벨리니(1430~1516경)의 영향도 엿보인다. 뒤러가 르네상스 정신을 점차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두드러진 작품은 1498년에 그린 자화상(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이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르네상스의 고귀한 이상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을 묘사할 때 약간 자만에 차서 인생을 대하며 유행하는 의상을 차려입은 멋진 젊은이로 그리기를 좋아했다. 틀에 박힌 중간색 단색 배경 대신에 그는 창문이 열려 오른 쪽에서 빛이 들어오고 있는 실내를 묘사했다. 창문을 통해 산과 먼 바다의 조그마한 풍경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세부 묘사는 동시대의 베네치아파와 피렌체파의 회화작품들을 뚜렷하게 암시한다. 실내에 있는 자신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어 예술가 자신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또 다른 세계인 멀리 보이는 광활한 풍경과 자신의 세계를 구별하고 있다. 판화에서는 소묘와 회화에서보다 이탈리아 양식을 천천히 받아들였다. 1498년에 발표된 〈요한의 묵시록〉 연작들의 환상적인 목판화들에는 후기 고딕 양식의 요소들이 강하게 나타나며, 1498년경부터 나온 〈예수 수난 Great Passion〉연작의 초기 목판화들에도 그 영향이 미치고 있다. 그래도 뒤러가 고전주의와 인문주의에 영향을 받은 좀 더 새로운 관념을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근본적으로 이탈리아 양식을 추구하고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목판화 〈삼손과 사자 Samson and the Lion〉(1497경)와 〈카쿠스를 정복하는 헤라클레스 Hercules Conquering Cacus〉 및 목판화 연작인 〈성모 마리아의 생애 The Life of the Virgin〉(1500~10경)에는 이탈리아 양식을 추구하는 경향이 뚜렷하며, 상당수의 동판화 작품들도 동일한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그의 판화 작품들이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의 양식은 1500년경까지 고딕 양식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 사이를 계속 오락가락했다. 그렇게 끊임없이 노력하다가 마침내 그는 명쾌한 방향을 찾아냈다. 1499년에 오스볼트 크렐을 그린 감동적인 반신 초상화들(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소장)과 뉘른베르크의 투헤어 귀족가문의 인물 3명을 그린 초상화들(독일 바이마르 미술관, 카셀 국립미술관 소장) 및 1500년에 그린 〈젊은 남자의 초상 Portrait of a Young Man〉(알테 피나코테크 소장)에는 확고한 양식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뒤러의 양식이 통합되는 이 시기에 그의 예술에서 이탈리아 미술 양식의 요소는 인체의 구조를 기하학적으로 묘사하려고 한 베네치아의 화가이자 판화가인 야코포 데 바르바리와 만나게 되면서 심화되었다. 그의 영향을 받아 뒤러는 1500년경, 진정한 르네상스 양식에 따른 인체 비례의 문제에 골몰하기 시작한 듯하다. 그의 노력이 가장 응축되어 나타난 최초의 작품은 〈아담과 이브 Adam and Eve〉(1504)라는 거대한 동판화였는데, 여기에서 그는 인간의 신비한 아름다움을 지적으로 계산된 이상적 형태로 나타내고자 했다. 모든 면에서 뒤러의 미술은 고전적인 경향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 고전적 경향의 가장 중요한 그의 작품들 가운데 하나가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그린 〈세 왕의 제단화 Altar of the Three Kings〉(1504)이다. 5개의 독립된 장면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이탈리아 양식의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뒤러의 지성과 상상력은 이탈리아 미술을 능가했다. 가운데 패널인 〈동방 박사들의 경배 The Adoration of the Magi〉(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소장)의 대담하고 자연스러우면서 부드러운 구상과 〈북치는 사람과 피리부는 사람 Drummer and Piper〉 및 〈욥과 그의 아내 Job and His Wife〉(쾰른 발라프 리하르츠 미술관 소장)를 그린 양쪽 패널의 독창적이고 틀에 박히지 않은 사실주의는 이처럼 성숙한 양식에서 나온 것이다.
2번째 이탈리아 여행 1505년 가을에 뒤러는 이탈리아로 2번째 여행을 가서 1507년 겨울까지 머물렀다. 그는 또 다시 베네치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베네치아의 초기 르네상스 회화의 대표적인 거장이자 말년에는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을 구사했던 조반니 벨리니의 작품에 크게 감동했다. 이 시기에 뒤러가 그린 남녀의 모습에는 벨리니가 특히 즐겨 그린 아름답고 부드러운 초상화 양식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뒤러가 그린 가장 인상적인 작은 그림의 하나인 〈동방박사들과 어린 예수 Young Jesus with the Doctors〉(1506) 벨리니가 만테냐의 〈신전에 나타난 예수 Presentation in the Temple〉(베를린 국립 프로이센 문화재 관리 재단 박물관 소장)를 자유롭게 각색한 작품을 생각나게 한다. 뒤러의 작품은 세세한 것들을 상세하고도 뛰어나게 묘사한 대가의 역작이다. 이 그림의 전경에 있는 노인이 들고 있는 책의 한 면에는 '5일간의 일 Opus quinque dierum'이라는 글이 씌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뒤러는 세부적인 소묘가 요구되는 이 힘든 작업을 5일만에 해냈음이 틀림없다. 이렇게 빨리 그린 것보다 예술성이 훨씬 더 뛰어난 작품은 완전히 벨리니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듯한 젊은 남녀의 반신 초상화들(1505~07)이다. 이러한 회화작품들에서는 부드럽고 생생한 표현 및 순수한 예술적 기교와 주제의 유연성이 엿보이는데, 만약 뒤러가 벨리니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이러한 성과를 거의 얻지 못했을 것이다. 1506년 베네치아에서 뒤러는 성 바르톨로메오 교회에 있는 독일인들의 장례 예배당에 걸 거대한 제단화 〈장미 화환의 축제 The Feast of the Rose Garlands〉를 완성한 후, 그 해 말에 볼로냐로 갔다. 8일내지 10일간으로 추정되는 이 짧은 여행 기간 중 그는 근처의 에밀리아로마냐에서 베네치아파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미술 집단과 조우하는 기회를 가졌던 것 같다. 뒤러가 독일로 돌아가기 직전에 베네치아에서 그의 오랜 친구이자 인문주의자인 빌리발트 피르크하이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1506. 10)에서 자주 인용되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면, 그가 얼마나 이탈리아를 자신의 예술적·인격적 고향으로 여기고 있었는가를 잘 알 수 있었다. "오, 이제 태양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으니 얼마나 춥겠는가 ! 나는 여기에서 신사로 지내지만 고향에서는 한낱 식객에 지나지 않을 것이네."
2번째 이탈리아 여행 후의 발전 ← 성 삼위일체에 대한 경배 늦어도 1507년 2월 쯤 뒤러는 뉘른베르크로 돌아가 2년 뒤에는 동물원 맞은편에 집을 얻었다. 그는 대체로 독창적인 그림을 그리면서도 이탈리아 여행에서 받은 예술적 인상 때문에 계속 고전적인 원칙을 적용했다. 2번째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 그린 회화작품들 중에는 〈1만 명의 순교 Martyrdom of the Ten Thousand〉(1508)와 〈성 삼위일체에 대한 경배 Adoration of the Trinity〉(1511)가 있는데, 두 작품 모두 군중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이 시기의 소묘들은 만테냐를 생각나게 하며, 엄격하고도 단순한 옷주름의 전반적인 선들을 통해 고전적 완벽성에 이르려는 뒤러의 노력을 드러내 보여준다. 2폭 제단화 〈아담과 이브〉(1507,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는 이보다 더 단순하고 웅장한데, 여기에서 두 사람은 어둡고 황량한 배경을 등지고 고전적인 편안한 자세로 조용히 서 있다.
아담과 이브→ 1507~13년 뒤러는 동판화로 〈예수 수난 Passion〉 연작을 완성했으며, 1509~11년에는 목판화로 〈예수 수난 Small Passion〉을 제작했다. 이 두 작품들은 모두 광활함과 고요함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1513~14년에는 그의 가장 뛰어난 동판화인 〈기사와 죽음과 악마 Knight, Death and Devil〉·〈서재에 있는 성 히에로니무스 St. Jerome in His Study〉·〈멜랑콜리아 I Melencolia I〉을 만들었는데, 이 3점의 동판화는 가로와 세로의 길이가 각각 24.2~24.8cm와 19.1cm로 크기가 거의 같다. 이 동판화 작품들에 관한 문헌들은 매우 풍부하고 복잡하며 때로 견해가 상반되기도 하지만 이 작품들의 모호하고 암시적인 세부 도상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많은 논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동판화 작품들은 아마 함께 해석되도록 의도되었다고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뒤러가 이 3점의 뛰어난 동판화 작품들에서 그의 예술적 재능을 한껏 발휘하려고 했으며, 그것을 성취했다는 것에는 대체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세련된 형태 및 풍부한 구상과 분위기가 고전적으로 완벽한 전체 작품에 스며 있다. 자신의 어머니를 그린 뒤러의 가장 표현이 풍부한 초상 소묘(베를린 국립 프로이센 문화재 관리 재단 박물관 동판화실 소장)도 이 시기에 속한다.
막시밀리안 1세 밑에서의 활동 1512년 2월 4일부터 4월 21일까지 뉘른베르크에 있는 동안 뒤러는 황제 막시밀리안 1세에게 고용되어, 1519년까지 주로 황제를 위하여 작업을 계속했다. 그는 당대 가장 뛰어난 독일 미술가 몇 명과 공동으로 황제의 기도서 가장자리에 소묘(베를린 국립 프로이센 문화재 관리 재단 박물관 동판화실, 뮌헨 국립 판화 전시관, 프랑스 브장송 시도서관 소장)를 그려 넣었다. 그는 또한 철판을 사용해 많은 에칭들을 완성했는데(1515~18), 이 작품들은 그의 숙달된 에칭 솜씨와 풍부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한편 막시밀리안 황제를 칭송하는 기념비적 목판화들이다. 약간 방대하고 장식이 요란스러운 이 목판화 작품들에서 뒤러는 자신에게는 낯설지만 고객의 성향에 따라 자신의 창조적 상상력을 억지로 꿰어 맞출 수밖에 없었다. 〈루크레티아 Lucretia〉(1518,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소장)와 막시밀리안 1세의 초상화 2점(1519, 독일국립박물관, 빈 미술사박물관 소장) 등 공식적으로 선보인 많은 작품들 외에도 이 10년 동안 뒤러는 더욱 매력적인 그림들을 비공식으로 더 많이 제작했다. 그는 다시 여행을 떠나 1517년 가을에는 밤베르크에 머물렀으며 1518년 여름에는 아우크스부르크에 가서, 그 전 해에 교황의 면죄부 판매를 고발한 95개항의 규탄서를 비텐베르크 성의 교회 문에 붙인 마르틴 루터를 만났다. 뒤러는 그 뒤 루터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이듬해 5월이나 6월에는 피르크하이머와 함께 스위스에서 잠시 지냈다. 뒤러는 1515년경 이미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전성기 르네상스의 뛰어난 화가 라파엘로와 서로 작품을 주고 받았다.
네덜란드로의 마지막 여행 1520년 7월, 뒤러는 아내와 함께 네덜란드를 두루 여행하기 시작했다. 10월 23일 아헨에서 막시밀리안 1세(1519. 1. 12 죽음)의 뒤를 이은 황제 카를 5세의 즉위식에 참석하여 당대 독일 미술계에서 자신에 버금가는 신비하고 극적인 화가인 마티아스 그뤼네발트를 만나 그에게 여러 점의 동판화 작품을 선물했다. 네이메헨과 쾰른을 거쳐 안트웨르펜으로 되돌아와서 1521년 여름까지 거기에 머물며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화가들과 사귀었다. 1520년 12월 젤란트에 들렀다가 1521년 4월에 브뤼주와 겐트를 여행하여 거기에서 미켈란젤로의 〈성모 마리아 Madonna〉뿐만 아니라 15세기 플랑드르의 대가인 얀 반 에이크와 후베르트 반 에이크, 로히에 반 데르 웨이덴, 휘고 반 데르 구스 등의 작품을 보았다. 뒤러가 네덜란드를 여행하면서 그린 스케치북에는 매우 섬세하고 사실적인 소묘들이 많다. 여행 기간이나 그 비슷한 시기에 그린 몇 점의 그림들의 예를 들면, 〈안나 셀브드리트의 초상 The Portrait of Anna Selbdritt〉(뉴욕 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과 성〈히에로니무스의 반신 초상화〉(1521, 리스본 국립박물관 소장), 예전에는〈베른하르트 반 오를레이라고 하던 베른하르트 폰 레스텐의 작은 초상화〉(드레스덴 미술관 소장) 등은 분위기가 네덜란드파와 비슷해 보인다.
마지막 작품들 ← 네 사도 1521년 7월쯤 뒤러 부부는 뉘른베르크로 돌아왔지만, 뒤러의 건강은 이미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몇몇 유명인사의 초상화를 그렸고 중요한 인물들의 초상을 동판화와 목판화로 여러점 제작했으나, 이론적·과학적 저술과 삽화 그리기에 여생을 바쳤다. 그의 가장 뛰어난 회화작품 중 하나인 〈네 사도 Four Apostles〉(성 요한, 성 베드로, 성 바울로, 성 마르코)는 1526년에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 뒤러는 화가로서 최고 절정의 수준에 도달했다. 그는 자신의 솜씨에 언제나 만족했으나 이로 말미암아 단순하면서도 표현이 매우 풍부한 폭넓은 그림을 그리려는 이상이 위축되지도 않았다.
뒤러는 1528년에 죽어 뉘른베르크에 있는 성 요한 교회의 묘지에 묻혔다. 그가 독일의 가장 영향력있는 미술가 중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그를 따르는 수많은 제자들과 모방자들로도 명백하게 증명된다.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의 미술가들조차 뒤러의 판화 작품들을 자주 모사했다. 뒤러가 국제적으로 얼마나 유명했는가는 피렌체의 미술가인 조르조 바사리(1511~74)가 쓴 〈이탈리아의 뛰어난 건축가·화가·조각가들의 생애 Lives of the Most Eminent Italian Architects, Painters and Sculptors〉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그 책에서 바사리는 알브레히트 뒤러를 '진실로 위대한 화가이자 가장 아름다운 동판화의 창작자'라고 묘사하면서 그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대부분의 유명한 이탈리아 미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뒤러도 아마 스스로를 '미술의 제1인자'라고 여긴 듯하며, 그의 자화상들은 명백히 자신의 비범한 재능을 확신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E. Rumber 글 / 金錦美 옮김)
[2004년] ‘부부의 날’ 제정 2003년 12월 18일 민간단체인 '부부의 날 위원회'가 제출한 '부부의 날 국가 기념일 제정을 위한 청원'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면서 2004년부터 법정기념일로 제정되었다. 날짜는 해마다 5월 21일이다. 5월 21일에는 가정의 달인 '5월에 둘(2)이 하나(1)가 된다'는 뜻이 들어 있다. 부부의 날은 1981년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 결혼기념일'을 한국식으로 바꾼 것으로, 1995년부터 기독교를 중심으로 기념일 제정운동이 전개되었다. 제정 목적은 부부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화목한 가정을 일구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부부의 날은 핵가족시대의 가정의 핵심인 부부가 화목해야만 청소년문제·고령화문제 등 각종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법정기념일이다. 공휴일은 아니다. 부부의 날 위원회에서 지역별 부부축제, 부부음악제 등을 열고 부부 사랑고백 나눔의 시간 등을 갖는다. 그밖에 영호남 부부, 장수 부부, 남북 부부, 국제 부부 등에 대한 시상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1998년]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 사임 수하르토(Suharto, 1921~ )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1998년 5월 21일 짤막한 사임성명 발표로 32년간에 걸친 기나긴 철권통치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가 사임을 발표하는 장면은 인도네시아 국내는 물론 CNN에 의해 전세계에 생중계됐다. 권좌에서 쫓겨나는 늙은 독재자의 회한과 최후의 변을 전세계인들이 지켜본 것이다. 이날 오전 9시에 시작된 사임성명에서 77세의 늙고 고집스러운 독재자는 실제 국민 앞에 무릎을 꿇지는 않았지만 그토록 오랫동안 2억 국민 위에 군림한 ‘전제군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유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으나 어쩔 수 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나한테 어떠한 실수들과 부족한 점 및 실패들이 있었다면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고 국민에게 용서를 빌었다. 국어인 바하사 인도네시아어로 사임성명을 발표한 수하르토는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서인지 ‘사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대신 잘 쓰지 않는 ‘용퇴’라는 표현을 썼다. 사임의 변 또한 완곡하기만 했다. 수하르토의 사임후 B J 하비비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1990년]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고법 기·예능보유자 명고수 김득수 사망 본명 김영수(金永洙). 전남 진도(珍島) 출생. 7세 때부터 이웃에 있던 신청(神廳:일종의 藝技조합으로, 작고한 광대 ·예인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향을 지내며 국악을 전수하던 곳)을 드나들며 소리를 배우면서 북과 인연을 맺었다. 12세 때 진도 신청에 와 있던 이동백(李東伯)에게 소리를 배우고, 15세 때 집을 나와 목포 ·부산 ·울산 등지를 전전하면서 소리를 가르치다가, 서울로 올라와 명창 김창룡(金昌龍)의 문하생이 되었다. 이어 정원섭(丁元燮) ·한성준(韓成俊) 등 명고수로부터 고법을 배웠으며, 1930년대 중반 동일창극단 ·조선창극단 ·국극협단 등을 따라 전국 순회공연에 참여하면서부터 본격적인 고수의 길을 걸었다. 1956년 예원국극단을 창단, 운영하였으며 1964년 서울시국악관현악단 악장, 1970년 한국국악협회 부이사장을 지냈다. 1고수 2명창(一鼓手二名唱)이라는 고수의 중요 역할보다 1청중, 2고수, 3명창이라는 말로 청중과의 호흡을 더욱 강조한 그의 철저한 예인정신은 가족에게도 영향을 끼쳐, 1남 3녀 중 장녀를 뺀 3자녀로 하여금 각각 국악작곡 ·아쟁 ·가야금 등 예인의 길을 걷게 하였다.
[1989년] 89로터리클럽 세계대회 서울서 개막 '89로터리클럽 세계대회가 1989년 5월 21일부터 나흘간 서울에서 열렸다. 로터리세계대회는 1910년부터 1년에 한번씩 각국을 돌며 개최되는 연례행사로 이번 서울대회는 로터리 사상 최대규모였다. 1백20개국으로부터 4만2천여명이 참가했다. 개막식은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가졌으나 대회참가자가 많아 두 번에 나눠 거행했다. 봉사를 모든 산업활동의 기초로 삼고있는 로터리가 창립된 것은 1905년. 미국의 변호사 폴 해리스가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선의와 우정’이란 신념아래 친구인 석탄광업자 실베스터 실, 광산기사 가스로아, 양복점 주인 쇼래 등과 함께 모임을 만들어 각 회원의 사무실을 순번으로 돌아가며 회합을 갖기 시작한 것이 로터리의 시원이다. 한국 로터리는 지난 1973년 ‘로터리 장학재단’을 설립해 무의촌 진료, 장애자 봉사활동 등 이웃에 대한 봉사와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사업을 펼쳐왔다.
[1902년] 일본 제일은행 부산지점, 1원권을 발행 한국에 유통시킴
제조 : 일본 대장성 인쇄국 발행 : 일본 제일은행, 한국내 각 지점 발행개시 : 광무(光武) 6년(1902) 5월 20일
그밖에 2007년 유시민 보건복지부장관이 장관직 사퇴를 발표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이 공공기관 감사들의 남미 외유 파문 사과 2007년 장동익 전 의사협회장 영장 기각 2007년 이철행 원불교 종사 별세 2007년 기획예산처가 공공기관 감사의 해외연수 중간 조사결과를 발표 2007년 장재국 전 한국일보 회장 횡령등 혐의 불구속 기소 2007년 이양희 성균관대 교수 유엔아동권리위원장 당선 2007년 민노당 노회찬 의원 불구속 기소 2007년 아시아나항공 박지성 후원계약 맺고 홍보대사로 2006년 청와대 김병준 정책실장 사의 표명 2005년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별세 2004년 ‘양심적 병역거부’ 첫 무죄 판결 2004년 백혈병 극복한 이호씨 산악인 허영호씨와 유럽 최고봉 ‘엘브루스’ 등정에 성공 2004년 한국계 첼리스트 구세라씨 줄리아드 석사 2년 연속 수석, 윌리엄 슈만상 수상 2000년 대한극장 철거 1999년 방일영 조선일보사 전 고문, 금관문화장 수여 1996년 탄자니아 여객선 빅토리아호에서 전복 돼 5백여명 사망 1991년 인도 라지브 간디 폭탄테러로 사망 1987년 시인 김해강 사망 1984년 앰네스티 인터내셔날 엘살바도르에서 5년간 4만명이 학살되었다고 보고 1984년 재경대학 총장, 학원사태관련 공동성명 발표 1982년 전두환 대통령 개각 단행 1981년 새세대육영회 창립(회장 이순자) 1980년 국무총리서리에 박충훈 임명 1977년 미국 카터 대통령 철군계획 반대한 주한미군 참모장 싱글러브 소장 해임 1975년 박정희 대통령 김영삼 신민당 총재와 청와대에서 회담 1974년 산야 태국 내각 총사퇴 1963년 국제 공산당 해산 1961년 혁명정부 용공분자 2천, 깡패 4,200여명 검거 발표 1961년 미국 앨러배마주 인종차별반대 폭동 1960년 대한교육노조연합회 결성 1960년 괌도에서 2차대전 중 살아남은 일본인 발견 1959년 내각책임제개헌안 공고 1958년 탈모 비누, 군납사건 발생 1957년 인도서 아시아 최대의 우라늄광 발견 1956년 미국 수폭투하 실험 성공. 비키니섬서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1943년 뉴질랜드 한국 승인 1934년 이라크의 키르쿠크 유전에서 팔레스타인 하이파항까지의 석유파이프라인 완성 1923년 평양시내 전차 개통 1920년 멕시코의 카란사 대통령, 우파연합 반란세력에 암살 1907년 중국혁명동맹회 광동성 황강봉기 실패 1906년 알프스산맥을 뚫는 싱플로터널 개통식(이탈리아.스위스 국왕 참석) 1904년 프랑스 정교분리문제로 대교황청관계 악화 바티칸대사 소환 1904년 FIFA(국제축구연맹) 창립 1895년 멕시코의 대통령(1934~1940)카르데나스 츨생 1889년 1959년 최초로 축전지를 만든 프랑스의 물리학자 플랑테 사망 1871년 신미양요 1871년 파리코뮌 ‘피의 일주일’ 시작 1860년 네덜란드의 생리학자 에인트호벤 출생 - 심장의 전기적 성질을 발견한 공로로 1924년 노벨 의학상 수상 1851년 프랑스의 정치가 부르주아 출생 - 국제연맹 결성 추진으로 1920년 노벨 평화상 수상 1844년 프랑스 화가 루소 출생 1762년 사도세자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사망 1506년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