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열매를 맺고 계십니까?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인이 이루어야 할 궁극적인 목표가 되며, 마지막 예언을 성취시킬 남은 무리의 탄생과 직접 연관되는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막연하게만 알던 성령의 열매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성령의 열매를 실제적인 삶 속에서 어떻게 맺을 수 있을까요? 이번 호 신앙 기사는 독자 여러분에게 성령의 열매에 대하여 확실하게 가르쳐드릴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생애에 성령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는 데 크게 기여하는 기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 편집실 -
신앙 5부: 성령의 열매 오래 참음은...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히 10:36). 오래 참음과 인내는 마지막 남은 무리와 매우 관련이 깊은 단어이다. 요한계시록에는 여자의 남은 자손, 곧 마지막 시대에 나타날 하나님의 참 백성의 특징을 “인내”를 가진 자들이라고 언급하고 있다(계 14:12, 12:17).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 믿음을 가지려면 인내가 필요하다. 자아를 쳐서 복종하고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려면 인내가 필요하다. 또한, 마지막에 하나님의 참 백성에게 다가올 어려운 핍박과 짐승의 표의 환란을 견디려면, 또한 하나님의 성품을 우주에 증거하는 하나님의 산 증인의 성품을 이루기 위해서는 오래 참음과 인내가 필요하다. 인내는 견고하게 서 있는 불굴의 자세를 의미하며, 정금같이 연단되어 나오는 산실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으려면... 1) 시련을 견디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약 1:3). 오래 참음이란 고난을 참고 견디는 것인데, 이 말은 사물이나 사건과 관련된 인내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지만, 인간에 대한 인내의 의미가 더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인내란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것인데, 특히 인간 사이에서 야기되는 문제와 어려움을 불평 없이 참아내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골 3:12). 오래 참음은 감정을 거스르는 일을 견뎌내는 속성이며(고후 6:6; 골 1:11; 3:12), 그것은 부당한 취급을 당했을 때에도 보복할 생각을 품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인내와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는 데 필요한 것은 시련이라고 말하고 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약 1:2~4). 욥은 이 사실을 알았으므로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의 가는 길은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 하신 후에는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 23:10).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인내의 성품을 기르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재목으로 자라게 하시기 위하여 때때로 고난과 시련을 허락하신다. 인생의 고난은 우리 성품에서 불순물과 거친 것을 제거해 내는 하나님의 일꾼들이다. 이들에 의해 채석되어 깎이고, 끌로 새기어지고, 갈리고 다듬어지는 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또 돌을 가는 연마기 속으로 들어가 갈리는 것도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 속에 들어간 돌은 하늘 성전의 제자리를 채우는데 부족함이 없이 준비되어 나온다. 쓸모없는 물건을 위해서는 주님께서 그처럼 신중하고 철저한 작업을 하지 않으신다. 오직 그분의 보석만이 궁전의 식양대로 다듬어진다. 그분께서 시련과 환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히 12:10)기 위함이다. 감당하기 심히 어렵고 가혹하게 보이는 시련이라도 일단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그것이 인내의 열매를 맺게 하는 축복임이 판명될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시련을 당하기 전보다 시련을 통과한 후에 더 밝고 깨끗한 영적인 시력을 가질 때가 있으며, 믿음으로 시련을 잘 견딘 후에 더욱 겸손하고 오래 참는 사람이 된다. 세상의 미움과 핍박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섭리의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게 되어, 세상의 좁은 길을 걸으며 고난의 도가니에서 정결하게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동안 쓰라린 투쟁을 경험한다. 그들은 극기를 감내해야 하며 처절한 실망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인내를 기르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가 됨으로 후에 그분의 영광에 참예하는 자가 된다. 우리가 대항한 모든 시험과 우리가 용감하게 견딘 모든 시련은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을 주며 품성 형성이라는 과업을 달성하게 한다 2) 하나님과 예수님의 인내를 배우라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출 34:6).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완악한 죄인까지도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 우리는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하나님의 인내를 많이 명상해야 한다. 우리의 부족함과 죄 됨을 오래 참고 기다려주시는 그분의 인내와 자비를 생각하고, 우리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 오래 참아야 한다. 우리에게 해를 입히는 사람들이나 원수 같은 사람들에 대하여 부드러운 정신과 끈기 있게 참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내적인 믿음과 성령의 충만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표시이다. 종종 성숙한 사람들은 아직 미성숙한 사람들을 참아 주기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자신도 지금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수년의 세월이 걸렸음에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단계에 도달하는 동일한 시간을 주기를 원치 않는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부당한 대우와 억울한 처사를 오래 참아야 한다. 우리는 억울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복수하고 싶어 하고 항거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셨다. 공의로 심판하실 하나님께 자신과 모든 억울하게 당한 일들을 맡기셨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오래 참으신 예수님의 인내로 오늘 우리가 구원의 축복을 누릴 수 있지 않은가? 박해나 고통을 당할 때 즉시 분노하거나 복수하지 않고, 모욕, 조롱, 부당한 비난을 당하고 억울하게 당할 때 성도들은 오래 참음으로 반응해야 한다. 신앙의 일로 믿지 않는 배우자나 가족에게 모욕을 당하고 억울한 대우를 받을 때에도 역시 믿음으로 오래 참아야 한다. 개인의 삶에서 이러한 특성에 도달하려면 연습과 하나님의 은혜, 자아를 부인하고 성령님의 속삭임에 복종하고자 하는 자원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닮는다면 오래 참을 것이다 신앙 6부: 성령의 열매 자비는…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 4: 32). 자비란 친절로 나타나는 사랑이다. 인내는 참는 사랑이며, 자비는 활동적인 사랑이다. 종종 인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자비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가 하는 친절한 언행으로 나타난다. 자비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과 같은 박애적이고 인자한 행위와 관대함과 너그러움과 인자한 성격을 의미하며, 작은 일들에서 나타내는 사랑, 곧 다른 사람의 감정과 개성을 존중해 주는 사려 깊은 태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인격을 의심하는 말을 하지 않는 인격, 다른 사람의 좋은 자질에 주의를 기울여주는 마음이다. 자비는 격할 수 있는 상황에서 사랑과 연합을 일으키며, 슬픔과 죄악이 만연한 곳에 축복과 기쁨을 가져다주고,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도움과 치유의 손길을 내민다. 삶 속에 나타나는 자비라는 성령의 열매는 우리 주위를 유쾌하게 해주며,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이끌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령의 도구가 된다. 자비는 다른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가족이 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 자비의 열매를 맺으려면…
1) 예수님의 생애를 표준으로 삼으라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골 3: 12). 자비의 표준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 속에 들어 있다(마 5:43~48 참조).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는 것은, 오 리를 가자고 하는 사람과 십 리를 가주고, 속옷을 벗어달라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내주며,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자를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지 않는, 일상생활에서 사람이 나타내는 사랑의 행위와 자비의 성품을 가리킨다. 그런 하늘 아버지의 품성과 사랑을 우리에게 보이려고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셨다. 그분의 전 생애는 무아의 봉사의 생애였다.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한”(마 20:28) 것이 그분의 모든 행동의 교훈이었다. 거룩한 자비의 간청을 경시하는 모든 영혼을 품으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사귀들린 자들을 불쌍히 여겨 해방해주시며, 그분의 사랑을 조소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시는 사랑과 자비는 예수님의 모든 생애를 통해 나타났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모든 사람을 섬기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봉사하시는 자비의 법칙으로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비의 율법대로 사셨으며 그분의 모본을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셨다. 2) 자비의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라 사람의 마음은 날 때부터 냉랭하고 어둡고 사랑이 없다. 사람이 자비와 용서의 정신을 나타낼 때는, 언제나 자기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마음에 역사하는 성령의 감화를 통해서 하게 된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 4: 19). 그러므로 우리는 자비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자비의 근원이시다. 그분의 이름은 “자비롭고 은혜롭”(출애굽기 34장 6절)다. 그분은 우리를 우리의 가치에 의해 취급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지 묻지 않으시고, 우리를 가치 있게 해주기 위하여 당신의 풍성한 사랑을 부어 주신다. 그분께서는 원한을 품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벌을 주려 하지 않으시고 구속하려 하신다. 당신의 섭리를 따라 나타내시는 엄격함도 실은 완악한 자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의 고통을 씻어 주고 그들의 상처에 향유를 발라 주고자 심히 갈망하신다. 자비한 사람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들이다. 무한한 사랑이신 하나님과 일치되는 마음을 가진 모든 사람은 남을 교화시키기 위해서는 힘을 쓰되 남을 정죄하지는 않는다. 영혼 속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면 언제나 자비가 흘러넘치게 될 것이다. 불쌍한 자들, 고난 중에 있는 자들, 압박당하는 자들에게 동정을 보이며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자비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에 힘들거나 불쾌한 일이 닥칠 때 자비롭게 반응하기로 선택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자비의 은혜를 나타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신앙 7부: 성령의 열매 양선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엡 5: 8~9). 양선이란 “어질고 착하다”는 의미가 있는 말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선한 자세를 가리킨다. 양선은 예수님의 대표적인 온유한 사랑의 성격이다. 성경에서 ‘양선’은 선한 행동을 나타낼 뿐 아니라 거룩함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양선은 하나님의 특성이다. 선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성경에 친절, 관대, 인자, 자비, 긍휼, 오래 참으심 등으로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모든 피조물을 대하시는 그분의 친절하심과 관대하심에 나타나 있으며(시 145:9, 15~16), 죄인들을 인도하여 회개케 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시 100:5, 롬 2:4), 그리고 곤경으로부터 죄인들을 구원해 내시고 절망 중에 있는 자들에게 친절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나타난다(시 107: 136, 106:1, 44~46). 그리고 죄를 고집하는 자들에게도 계속 친절을 나타내 보이시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노하기를 더디 하심(출 34:6, 시 78:38, 요 3:10~4:11, 롬 9:22, 벧후 3:9)으로 표현된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최상의 표현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주신 사실에 나타나 있다. 갈보리산 십자가에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분명히 확증해주신 최상최고의 증표이다. * 양선의 열매를 맺으려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본받으려면 인간의 마음의 본바탕이 변해야 한다. 인간의 마음은 죄로 부패하였으며 죄 가운데에 머물러 있다. 그러므로 인간 본연의 마음에서는 선한 의도를 내기 어렵다. 거듭난 마음이 아니면 선을 행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하나님 은혜의 역사로 마음이 새로워지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마음이 부드러워져야 선을 행할 수 있게 된다. 새롭게 거듭날 때 죄의 부패성이 사라지고 어린아이와 같은 부드러움과 깨끗함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 낸 선은 가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임재해 계셔서 우리의 의가 되실 때 우리의 행위는 의롭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은혜 속에 거하지 않으면 쉽게 완악해질 수 있는 우리의 실체를 알고 그분의 은혜 속에 항상 거하며, 우리 마음속에 언제나 은혜의 단비가 내리도록 성령의 역사 하심을 간구해야 한다. 이 일이 아무리 힘들고 고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매일 그분의 은혜로 우리 자신을 씻고 정결하게 해야 하며 그분 안에 살아야 선한 일을 행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사는 삶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어야 한다. 이런 은혜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거룩해져 가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며, 선한 일 양선을 남에게 베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행동이 ‘선하다’고 말하기 전에 우리의 동기가 옳아야 한다. 선량한 사람이란 하나님을 향한 그의 내면의 헌신과 사랑으로부터 바른 행동이 우러나오는 그런 사람을 가리킨다. 참된 양선이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부자격자에게까지 선행을 베푸는 것이다. 양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체험한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데, 자아에 관한 관심보다 ‘남에 관한 관심’과 배려로 나타난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귀중함을 알고,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웃을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양선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신앙 8부: 성령의 열매 충성은… “오직 선한 충성을 다하게 하라” (딛 2:10). 성경에서 충성이라는 단어는 “신실함”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충성은 변함없이 믿음을 고수하는 것인데, 흐트러짐이 없이 신의를 지키는 ‘충절’, 믿는 바를 확신하고 정로에 머무르는 ‘지조’, 변경할 수 없는 원칙이나 목적에 대해 충실한 ‘정절’, 결정한 것에 대해 흔들리지 않고 밀고 나아가는 ‘결의’ 등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충성은 특히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목적한 바에 대해 흔들림 없이 굳게 서는 것을 말한다.
* 충성의 열매를 맺으려면... 1) 신실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본 받으라 “주는 일향 미쁘시니”(딤후 2:13).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다. 성경에 쓰인 “미쁘시다”는 뜻은 신실하시다는 의미로서, 하나님은 미쁘시다는 표현이 여러 곳에 등장한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찬양하고 있다.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 (시 89:8),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시 36:5),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시 89:33),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애 3:23).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한결같다. 하나님은 인간과 지구를 창조하시기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신실하시다. 그분은 과거에 그러하셨듯이 장래에도 변함없이 신실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하나님께서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끝까지 이루시는 속성에 잘 나타나 있다.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지키신 하나님,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을 지키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계획하신 그분의 약속을 지키신다.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는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신 신실하심이 드러나 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한 치의 오차도 없다. 별들이 정해진 길을 따라 광활한 궤도를 운행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경륜은 조급하거나 지체되는 법이 없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계획과 약속은 정확한 시간에 성취된다. 하나님께서는 빽빽한 흑암과 연기 나는 풀무의 표상을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노릇할 것을 보여 주셨으며, 그들이 사백 년간 거기서 머무르게 될 것이라고 밝히셨다.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 15:14)고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로 ‘그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다(출 12:41). 또한, 하늘의 회의에서 그리스도의 강림의 시간이 작정되었던 그때, 때를 알리는 우주의 시계가 그 시각을 가리켰을 때 예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베들레헴에 탄생하셨다. 이 세상을 정확하게 운행하시는 얼마나 신실하신 하나님이신가!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같이 신실해야 한다. 엉키고 뒤틀린 삶 속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며 사는 방법을 배우고 그분의 신실하심을 신뢰해야 한다. 모든 세세한 일에까지 충실하신 주님께서는 작은 일에 충성하는 일꾼을 좋아하신다. 예수님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일꾼에게 많은 것을 맡기신다(마 25:21). 하나님은 작은 일을 대하는 일꾼의 태도에 관심이 많으시다. 우리의 충성은 하나님을 향한 충성과 이웃을 향한 충성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머지않아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인데, 그날에 부끄럼 없이 주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각자에게 주어진 달란트, 곧 재능, 건강, 시간, 물질 등을 잘 활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야 한다. 어떤 것, 얼마를 맡았는가보다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충성을 기억하시고 훗날에 큰 상급으로 갚아주실 것이다. 2) 진리를 깨달으라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계 2:10). 마지막 짐승의 표 환란과 핍박을 견디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는 일에는 충성이 요구된다. 그런데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충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를 알고 깨달아야 한다. 성경이 제시하는 명확한 진리를 깨달아 알고, 복음이 무엇을 요구하는지에 대한 확신이 들어가면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에 대한 충성은 저절로 생기게 된다. 이 시대에 알아야 할 진리, 곧 우리를 변화시키고 마지막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재림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킬 진리를 알게 될 때,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가르치는 그대로의 정확하고 순수한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그것은 놀라운 확신과 기쁨을 주게 되어 하나님께 충성하고 싶은 욕망을 끌어 오르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명확한 진리는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시대의 심각성을 깨우쳐 주고 있다. 곧 다가올 환란과 또 재림을 위해 어떤 성품을 준비해야 하며, 어떻게 자아를 이기고 죄를 승리하며, 어떻게 예수께서 가지셨던 믿음을 가지고 살 수 있는지 가르쳐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이 그분의 사업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 무관심하고 불충실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온 우주는 말할 수 없이 큰 관심을 두고 선악 간에 대쟁투의 마지막 장면을 주목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지금 영원한 세계의 경계선에 접근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각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엘리야와 다니엘과 같이 자기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임을 고백하기를 부끄러워 않는 충성스러운 증인들을 가지고 계셨다. 그리고 지금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그들은 진리에 충실하게 서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누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인가?”라고 물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자기의 뜻과 계획을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굴복시킨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을 소중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충성할 것이다. 3)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재림을 기다리라 충성심은 재림을 기다리는 태도와 연관되어 성경에 나타난다. 예수께서는 재림과 말세에 대하여 언급하시며,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 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마 24:44~46)고 하셨다. 그런데 악한 종들, 불신실한 종들은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생각한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마 24:48). 악한 종들, 충성 되지 않은 자들은 항상 주님의 재림이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세상에 빠져 살아갈 것이다. 주님은 악한 종들이 이러한 생각을 하고 "노비를 때리고, 먹고 마시며 취할 것"이라고 하셨다. 불충실한 자들은 바벨론의 오류와 가짜 복음에 취해 주님의 재림을 믿지 않거나 주님이 오실 때가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면서 맡겨진 일에 불성실할 것이다. 주님은 이러한 불신실한 종들에게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날"과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시간"에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죄를 승리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과 은혜를 믿는 참된 믿음으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일, 주님의 재림을 촉진하기 위해 충성스럽게 복음을 전하며 사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행해야 할 의무이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 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다. 믿음과 충성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의 삶에 역사할 때 저절로 생겨난다 신앙 9부: 성령의 열매인 온유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5). 우리는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온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온유”(gentleness, meekness)는 부드러움, 순함, 친절, 정다움, 과격하지 않음 등의 뜻을 가진 단어로, “온화하고 부드럽다”는 의미이다.
* 온유의 열매를 맺으려면... 1) 예수님의 생애를 명상하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마 11:29). 온유는 예수님 성품의 대표적인 특성이다.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비천한 인간의 본성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생애는 온유와 겸손 그 자체였다. 아버지 영광의 광채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빌 2:6,7)기로 작정하셨다. 지상 생활 동안 그분께서는 왕으로서 사람들에게 군림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며 사셨다. 자신을 비우신 예수께서 행하시는 일에는 어디에도 자아가 나타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예수님의 이런 온유한 특성을 가질 수 있을까? 우리는 매일 예수님의 생애에 나타났던 온유와 겸손함을 명상하고 쳐다보아야 한다. 바라보는 대로 변화된다. 예수님을 닮고 싶으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분의 말씀을 읽고, 그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분과 가까이 동행하여야 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을 쳐다보는 사람은, 다니엘이 인자와 같은 이를 바라보았을 때 그랬던 것처럼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단 10:8)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의 순결하시고 고결하고 아름다운 성품과 생애를 바라보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이 그분 앞에서 빛을 잃어버리며 자신의 무가치함을 깊이 느끼게 될 것이다. 그분의 성품과 자신의 성품을 비교해 볼 때 우리는 우리의 추한 성품에 대해 부끄러워질 것이다. 우리가 온유하거나 겸손하지 못한 것은, 그렇게 해야 할 만큼 예수님에 대해 생각하거나 그분에 대해 명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의 본성을 보면 언제나 자기 과시를 위해 애쓰고 투쟁을 위해 준비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해 배운 사람은 이기심과 교만과 지배욕을 멀리한다. 자아가 성령의 지배 아래 굴복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제일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전전긍긍하지 않게 된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밀어낼 생각도 품지 않게 된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발아래 앉는 것을 제일 높은 자리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참고 온유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이 귀하게 여기는 특성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연민이나 조소를 자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온유를 천국에 들어가는 첫째 조건으로 삼으신다.
2)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진정한 의미에서 온유한 사람이란 자아에 대해 죽는 법을 배운 사람이다. 온유는 자아가 비워진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특성이다. 예수께서는 그분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우기 원하는 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온유한 사람은 자아 중심적이지 않고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지 않은데 이러한 태도가 바로 마음에 쉼을 찾게 하는 열쇠이다. 결국, 우리가 겪는 온갖 소란과 소동은 자아를 먼저 생각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추구하는 데서 기인하지 않는가? 사도 바울은 이런 경험에 대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라고 고백하였다. 우리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자아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언제나 그것이 굴욕과 모욕을 당하지 않게 하려고 방어 태세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죽고 우리의 생애가 그리스도로 더불어 하나님 안에 감추어질 때는, 무시나 경멸을 조금도 개의치 않게 될 것이다. 비난에 대하여 귀머거리가 되고, 조소와 모욕에 대하여는 소경이 될 것이다. 우리는 자아를 비우기 위해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자신의 뜻과 의지를 성령의 지배 아래 굴복하고 겸손하게 성령의 음성에 따라야 한다. 비록 그 일이 힘들고 고되더라도 자아를 못 박기 위해 주님의 은혜와 확고한 결심 아래서 밀알처럼 땅에 묻혀야 한다. 온유는 자신의 악함에 대해 진심으로 통회하고 애통해 하는 사람에게 열리는 열매이다. 자신을 주님께 바치고 우리 속에 예수님께서 거하실 때, 온유와 겸손의 열매는 열릴 것이다. 온유의 열매는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참된 능력의 근원 되시는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분의 성결의 아름다움에 매료될 때, 그리하여 우리의 성품이 그분의 것처럼 될 때, 지적인 능력으로 고안할 수 없고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참으로 귀중한 보물인 온유와 겸손의 열매가 열릴 것이다신앙 10부: 성령의 열매인 절제는…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고전 9:25). 절제는 영어로는 “self control”이라고 하는데, 극기, 자제, 의지력 등으로 표현될 수 있다. 바울이 절제의 열매를 제일 마지막에 언급한 것은, 절제의 훈련 없이는 바울이 지금까지 말한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나으니라"(잠 16: 32)라고 말하고 있다. 자기를 복종시키고 자기를 통제하는 일은 성을 점령하기보다 어렵다는 뜻이다.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절제가 어렵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욕망을 억제함을 뜻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성령을 거스르는 육체의 소욕을 억제하고 다스리며 지배하는 자제력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알맞게 조절하여 방종하지 않도록 통제함을 말하는 것이다. * 절제의 열매를 맺으려면... 1) 하나님의 은혜로 극복하라 마지막 여자의 남은 무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절제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이기는 자, 세상을 이기는 자, 죄를 승리하는 자들만이 마지막 선과 악의 대 쟁투에서 살아남고, 사단과 죄악을 정복하고 이기는 자만이 하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으며, 또한 연단과 훈련을 받고 자제하는 법을 배운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온전하신 성품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십사만 사천의 특성을 보라.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 14:5)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입에 거짓이 없고 흠이 없다는 뜻은, 그들은 자신을 제어하고 다스릴 뿐만 아니라 말에 흠이 없는 자라는 말인데, 곧 그들은 철저하게 극기하고 자제한 결과로 그런 아름다운 특성을 이룬 사람들이다. 자아를 부인하고 정욕과 식욕과 욕망을 극복하려면 절제가 필요하다. 더 나아가 감정과 생각을 절제하고 주어진 시간을 절제하여 하나님께 바치며, 악한 말이나 열매 없는 육체의 일에 참여하지 않고 낮에와 같이 방정하게 행하는 데는 철저한 극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순결하신 성품을 이루기 위해서는 상당한 절제와 엄격한 자제와 극기가 요구된다. 그런데 이런 절제의 열매 또한 우리의 힘으로 맺기가 어렵다. 비록 우리가 의지를 가진다 해도 우리에게는 힘이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극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능력과 은혜를 받을 때에 진정한 절제는 가능하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만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저열한 본성을 정복하라고 가르치신다.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극기의 모본이셨다. 우리가 예수께서 승리하신 것처럼 승리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를 쳐다보아야 하고, 그가 사탄을 대적하신 것처럼 악을 대적해야 하며, 그가 기도하신 것처럼 기도해야 하며, 그가 고민하신 것처럼 고민해야 한다.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승리는 자신에 대한 통제이다. 우리의 선천적인 성향들은 제어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예수께서 이기신 것처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절제하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하라. 우리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우리로 모든 일에 능하게 하실 것을 믿고 그분의 능력 속에서 절제의 열매를 맺으라. 2) 생활에서 절제를 실천하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전 6:19).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기 위하여서 우리는 우리의 몸을 제어해야 한다. 몸을 건강한 상태로 보존하는 것, 그리하여 살아 있는 기계의 각 부분이 조화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병든 몸이나 균형지지 않은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다. 식욕과 정욕이 완전한 통제하에 있지 않으면서 영적인 성장을 증가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먹는 일에 절제가 실행되어야 인내심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데, 먹는 일에나 마시는 일에서 부절제로 방종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이루는 일이 어렵다. 우리가 승리하는 사람이 되려면 일상생활, 특히 식생활에서 절제해야 한다. 우리가 생명의 법칙을 범하며 살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다. 육욕에 방종하고 또 계속적인 정욕의 해로운 방종 때문에 병든 몸과 혼란한 지성은 몸과 영의 성화를 불가능하게 한다. 사도 바울은 성공적인 그리스도인 성품의 완성을 위하여 몸의 건강 상태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라.”(고전 9:27)라고 말했다. 부절제하는 사람은 인내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다. 술을 마시는 것만이 부절제가 아니다. 부절제하게 먹는 것, 곧 너무 자주, 너무 많이, 또한 너무 양분이 많으면서도 건강에 좋지 못한 음식을 먹는 것이나 건강을 쓸데없이 소모하는 것도 부절제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께서 받으실 만한 상태가 되게 하려고, 즉 그분의 소유가 되는 저들의 몸과 정신으로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처지에 이르기 위하여, 관심과 열심을 가지고 식욕을 만족하게 하는 일을 거부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진리의 아름답고 명료함을 그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진리를 생활에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신체적인 건강은 우리가 먹는 것으로 유지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의 식욕이 성화된 마음의 통제 아래 있지 않고, 또한 우리가 먹고 마시는 모든 면에 절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이루는 일에 실패하게 될 것이다. **마치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생애에서 이룬다는 것은, 삶 속에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풍성하게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성도들이 균형 있고 아름다운 성품을 소유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매우 기뻐하시며, 그들을 자랑스럽게 우주에 들어 올리실 것이다. 잘 연마되고 흠 없는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며, 이런 성품이 준비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마에 그분의 인을 치실 것이다. 지금은 마지막 여자의 남은 무리의 성품을 준비할 때이다. 만약 우리의 생애에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겸손하게 통회하고 애통한 마음으로 주님께 굴복하며 아름다운 주님의 성품을 이루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독자 여러분의 생애에 성령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기를, 십사만 사천의 흠 없는 성품이 온전하게 형성되기를 기도드린다 바이블맨: 초대 교회 시대의 일곱째 날과 우리 시대의 일곱째 날과는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질문 :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은 안식 후 첫날 곧 일요일에도 예배를 드린 것 같습니다.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쌔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니"(행20:7). 이 본문에서 "떡을 떼려 모였다"는 뜻은 초대 교회 예배의식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시대에 사도들은 일요일에도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였다는 겁니다. 이것으로 안식일 논쟁은 일요일이냐 토요일이냐의 율법적 혹은 형식적인 것이 돼서는 안 되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안식일 논쟁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사실인가요?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행 20:7). 정확한 역사가로 정평을 받고 있는 누가는 부활 후 30여 년이 지난 A.D. 63년경까지의 사도 교회 역사를 기록한 사도행전에서 적어도 84회 이상 안식일이 준수되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반면, 첫째 날인 일요일에 관한 언급은 이곳 한군데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처럼, “자기의 규례대로” 드로아에서 안식일을 보내고 “안식 후 첫날(토요일 저녁)”에 모였습니다. 그 모임은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특별히 모인 성만찬을 겸한 송별집회였습니다. 행 20:6-13절의 전체 문맥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피곤한 유두고가 창에서 떨어지는 일화가 나옵니다. 일요일 아침부터 그날 밤까지 말씀을 나눈 것이 아니라 토요일 저녁부터 밤중까지 계속한 것입니다. ⑴ 안식 후 첫날은 토요일 밤 새 번역 성경: “토요일 밤에, On Saturday night”(NEV). ⑵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이방인이면서도 유대력사용(눅 23:54-56 참조) 성경이 말하는 하루의 개념은 “저녁부터 그 다음 날 저녁까지”입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 1:5).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을 지킬지니라” (레 23:32).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은 금요일입니다. 그 사건에 대한 누가의 기록을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금요일 : “이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눅 23:54) “그날은 안식일을 준비하는 금요일이었는데 안식일이 곧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현대인의 성경, 눅 23:54) 안식일 :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 (눅 23:56) 일요일 : “안식 후 첫날 새벽에…무덤에 가서” (눅 24:1) 예수님은 금요일 오후 3시경(막 15:34, 유대시간 9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을 금요일 밤이라 하지 않고 안식일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금요일 오후 해가 지고 저녁이 되면서부터 일곱째 날(안식일)이 되는 것입니다. 금요일은 성일(聖日)을 예비하는 날이요, 토요일은 성일이고, 일요일은 성일 다음 날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사건은 십자가와 부활이고, 중요한 날은 안식일입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 사건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날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야 합니다. “그날은 안식일 전날, 곧 안식일을 준비하는 금요일이었다.” (현대인, 막 15:42)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출 20:8)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눅 24:1)
⑶ “안식 후 첫날(μια των σαββατων)”이라는 말은 유대력의 용어 로마력을 썼다면 dies solis(일요일)이라는 용어를 썼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안식 후 첫날,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 다섯째 날, 예비일(금요일), 안식일. 이렇게 날짜계산을 했습니다. 안식일은 그들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이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눅 23:54-56). 안식일이 거의 되는 시간은 언제입니까? 금요일 저녁입니다. 마찬가지로 안식 후 첫날은 토요일 저녁부터 시작합니다.
(4) 송별집회 사도 바울은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는 계획에 따라 급히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안식 후” 곧 토요일 밤에 다시 모여 성만찬을 겸한 애찬을 나누며, 말씀을 자정이 넘도록 들었는데, 이렇게 밤늦게까지 모인 까닭은 이튿날 날이 새면 바울이 떠나기 때문에 특별집회로 모인 것이었습니다(행 20:7.8). 그 다음 날 바울은 육로로 32km 길을 걸어 앗소로 가서, 뱃길로 먼저 가 기다리던 누가 일행을 만나 여행을 계속하여, 미둘레네 → 사모 → 밀레도에 수요일에나 목요일쯤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서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하여 특별집회를 해 심금을 울리는 설교를 했습니다(행 20:14-38).
(5) 안식일 준수 이와 같은 문맥을 이해할 때, 사도는 안식일에는 결코 길을 떠나지 않고, 자기 규례대로 신자들과 함께 예배드리며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곧 “안식 후…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20:7) 밤중까지 특별집회를 했고, 밀레도에서는 주중인 수요일이나 목요일인데도 다시 에베소의 장로들을 위해 특별 집회를 한 것입니다. 이 두 집회가 모두 그렇게 촉박하고 간절했던 이유는, 그것이 바울의 마지막 여행으로 다시는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행 20:37,38). 그러므로 문맥에서 분명하게 사도 바울이 여행 중에도 철저히 지킨 날은 안식일이며,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은 여행을 떠나는 평범한 날이었음이 분명합니다(교회역사가, Augustus Neander). 일요일을 준수하는 탁월한 교회사가인 네안더도 사도행전 20장의 사건이 일요일을 성수했음을 입증하는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아래와 같이 솔직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 성경 구절은 전적인 확증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도의 촉박한 출발이 이 작은 교회로 하여금 형제애가 넘치는 송별 식사를 위해 모이게 했을 것이고, 이 경우 특별한 축제가 아니었을지라도 사도는 이때에 그의 마지막 말씀을 전달하였을 것이다.” 사랑의 편지: 씨앗 씨앗
강영은 터널처럼 두른 깜깜한 어둠을 의아해하지 마십시오. 이름 없이 땅속에 묻혀 있음을 한탄하지 마십시오. 빨리 싹을 내고 싶다고 초조해하지도 마십시오. 부풀어 올라 터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불평하지도 마십시오.
왜 그렇게 말없이 웅크리고 있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왜 그리 손발 묶인 듯 답답하게 있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왜 그렇게 침묵하기만 하냐고도 묻지 마십시오. 왜 빨리 싹 하나 피워 밀어내지 못하냐고도 묻지 마십시오.
어둠이 왜 두렵지 않겠습니까? 적막 속에 갇혀있는 것이 왜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햇빛과 하늘을 이고 춤추는 것이 왜 기다려지지 않겠습니까? 다 썩어 존재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이 왜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어둠 속에서 홀로 싸운 그 몸짓으로 영혼이 살찐다는 것을 오랜 침묵 끝에 터지는 생명이 더 충만하다는 것을 견뎌낸 고뇌와 시련이 더 힘찬 싹을 밀어낼 것을 깊이 익고 오래 썩은 후에라야 더 아름다운 꽃이 필 것을 나는 압니다.
잘 압니다. 땅 위로 올라오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이제부터가 시작인 것도… 딱딱한 흙덩이 몸으로 헤쳐내야 함도, 비바람과 폭풍우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잘 압니다.
잎들 떨쳐내고 가지 전정되는 아픔을 겪을 것을 압니다. 가지들 꺾이는 비바람 속에서 몸 흔들릴 것을 압니다. 무정한 발길질과 비웃음 기다릴 것도 압니다. 짓궂은 바람의 장난으로 흙바람 뒤집어쓸 것도 압니다.
그러나 싹 틔울 기쁨에 꽃 피울 기쁨에 열매 맺을 기쁨에 그리고 밝은 햇빛 몸으로 받고 더 높은 하늘로 자랄 기쁨에 모든 것을 잊을 수 있기에
밝는 날 어깨와 가슴에 더 많은 꽃과 열매를 달게 되리라는 걸 알기에 오래 삭힌 몸에서 절로 터져 나올 잎과 꽃으로 숲을 달굴 것을 알기에 훗날 황량한 들판에 떼 지어 들어설 열매 그득한 숲을 꿈꾸기에
오늘도 지난한 몸짓 쉬지 않고 위로 오릅니다. 더 단단히 뿌리와 몸통을 키우며…
그리고 기다려 봅니다. 이 작은 몸으로 작은 한 귀퉁이의 땅을 풍요롭게 할 그날을... 그리고 하늘 농부의 곳간을 채울 귀한 알곡이 될 그날을...
Did you know?: 사탄이 만들어 놓은 구원의 위조 지폐
사탄이 구상하는 기본 전략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다. 그는 더러운 것은 결코 하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죄를 품고 있는 자를 결코 하늘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우리가 누구에게 순종하는가가 우리의 주인을 결정한다. 바로 그자가 우리의 주인이 된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롬 6:16). 우리는 우리가 순종하는 자의 종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만일 그대가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그대는 하나님의 종이다. 그러나 그대가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중단하면,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그치는 것이다. 사탄의 계획은 그대로 하여금 사탄 자신을 순종하도록 함으로써 그대를 사탄 자신의 종으로 삼는 것이다. 그대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한, 그대가 무엇을 할지라도 사탄은 상관하지 않는다. 그대가 그리스도 교회의 이름으로 무엇을 할지라도, 그대 개인의 마음과 생활에서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있다면, 사탄은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나간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종교적 의식과 활동에 생애를 바쳤지만,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써 사탄의 종이 된 예가 너무나 많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주말마다 빠지지 않고 교회에 다니면서 교회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하지만, 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불법한 생애를 살아감으로써 영생을 잃어버리게 되는 비극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다. 주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행하였지만, 하늘에 들어가기 직전인 세상 끝에 예수께로부터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 한다는 선언을 듣게 되는 장면을 생각해 보았는가? 왜 이런 비극이 생기게 되었는가?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와 같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게 하였는가? 예수께서는 이 성경 절의 바로 앞에서 그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해 두셨다. 그들이 주의 이름을 매우 많이 불렀지만, 그들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의 이름을 크게 부르면서 열심을 내어 일했지만, 그들의 열심과 행위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의 경배를 받으실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기를,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옆으로 제쳐놓고, 인간이 만든 계명과 교리 즉,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순종을 가장 높은 경배 형태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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