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락산(慕洛山)을 다녀와서!
2016년12월18일 일요일 인터넷 카페 "5060아름다운세상"
산행동호회에서 일요산행지로 정한 경기도 의왕시(義旺市)에
소재(所在)한 모락산을 가는데 하두 먼 거리여서 갈랑가
말랑가 망서리다가 차음 가볼 수 있는 산이고 참석회원
분들도 열 분 내외라서 참석하기로 작심하고 오전 8:40분에
집에서 출발 마을버스로 1호선 전철로 가다가 창동역에서
4호선으로 환승하니 만남의 장소인 인덕원역에 도착된
시간이10:35분 동행하며 하루의 행복을 엮어갈 님들을
만나니 반기고 맞이해 주시는 님들이 어서 오라시며
행복의 문을 열어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열 한시가 조금 지나서 인덕원역 6번 출구로 나가 버스를
타고가다가 계원대 인근에 내려서 모락산을 오르는데
6.25전승기념비와 고인돌 유적지가 있고 계유정난 떄
둘째 형인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찬탈에 동참하여
수양이 세조왕에 등극하자 전리품을 하사받으며 영화를
누리며 살다가 죽은 세종의 네째 아들 임영대군의 사당이
있고 나환자들의 정착촌인 "聖 나자로 마을"이있어서
모락산과 주변에 얘깃꺼리가 참 많은 산이여서
하마터면 모락산이 망서리다가 임은 먼 곳이
될 뻔 하였답니다.
산행길 중도에서 돼지 소풍을 가듯 나를 뺀ㅋ 아홉분이
단란한 가족분위기가 풍기는 벌떡주, 쇠주, 탁주잔을 주고
받으니 일배일배부일배(一盃一盃 復一盃)라는 시를 읊으며
마셨다는 이백주(李白酒)가 이리 맛이 좋았을까를 음미하며
나누는 마음 배푸는 마음을 주고 받으니 어지러운 세속이
멀어진 느낌이었답니다.
정상에 올라 안양 의왕의 신흥시가지를 내려다보며 반세기
전과는 너무나 큰 변화에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며
바라보다가 오를 때와는 반대방향인 능안마을로 하산하여
가정집같은 식당에서 뒷풀이를 마치고 나와 의왕시가지를
걷기도 하다가 지하철로 집에돌아오니 저녁 19:15분
이었습니다...들리는 노래는 임영대군과 관련이 있는 곳
강원도 영월군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에 관한
노래임을 양지(諒知)하시기 바랍니다
경기도 의왕시 "모락산(慕洛山)"
경기도 의왕시 오전동과 내손동에 걸쳐 있는 산.
높이는 385m이다. 산 전체가 바위로 되어 있다. 특히 북쪽
사면은 절벽으로 절경을 이루며, 정상 남서쪽 능선은 아기
자기한 암릉을 이루고 있다. 주능선 전망대에 올라서면 서쪽
으로 의왕시와 안양시가 넓게 펼쳐지고 그 너머로 수리산과
관악산이 가깝게 보인다. 북동쪽으로는 청계산
과 백운저수지가 눈에 들어온다.
세종대왕의 네째 아들 임영대군(臨瀛大君)이 매일 이 산에
올라 궁궐이 있는 서울을 향해 "망궐례"를 올려 '서울을 사모
하는 산'이라는 뜻으로 '사모할 모(慕)', '서울이름 락(洛)'으로
하여 '모락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이 산에서 사람들을 몰아 죽여서 산 이름을
'모락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6·25전쟁 당시 이곳에서 북한군을 무찌른 국군 제1사단 15보병
연대의 전승기념비가 있으며 고인돌로 보이는 큰 바위가 남아 있다.
산행은 산 북쪽의 계원조형예술대학 후문 삼림욕장에서 시작하여
보리밥고개에서부터 능선을 탄다. 산행은 대개 2시간 30분이 걸린다.
임영대군묘역 및 사당
소재지: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 31, 산 154-1 지도
2000년 3월 24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었다. 봉분
둘레 1,650cm, 높이 210cm, 비석 높이 200cm, 너비 50cm이다.
세종대왕의 넷째왕자인 임영대군 묘 및 사당은 능안마을 뒤쪽 모락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묘역은 3단이며, 상단에는 봉분과 비석이 있고,
봉분 주변의 호석(護石)은 1981년에 새로 축조한 것으로 동서남북의
모서리에 대나무·꽃·새 등의 무늬를 새겨 놓았다.
봉분 동쪽에 있는 비석에는 앞면에 '조선국왕자임영대군정간공지묘
(朝鮮國王子臨瀛大君貞簡公之墓)', 뒷면에는 '개국533년어돈병월일중건
(開國五三三年於敦病月日重建)'이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중단에는
상석(床石)과 망주석 2개, 장명등이 있다. 상석은 1981년 새로 만든 것으로
140×90×45cm이고, 망주석은 높이 36cm, 너비 43cm로 가운데에 문고리
모양이 양각되어 있다. 장명등에는 사방으로 4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데 숙종
때 세운 것이라 한다. 하단에는 동서 양쪽에 높이 250cm의 문신석인이
있는데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과, 두 손을 모아 쥐고 있는 홀이 선명하다.
묘역에서 동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는 신주가 모셔진 사당이 있는데,
원래 마을에 있었던 것을 약 180년 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1967년
1월에 전면적으로 보수했다. 사당은 팔작지붕으로 된 3칸
건물이며, 짜임새가 있고 균형을 갖추었다.
가운데 방에는 대군의 신주가 모셔져 있고 양쪽 방에는 제기와
제복 등이 보관되어 있다. 음력 정월 21일 낮 12시 제향이 행하여진다.
출처: (두산백과)
성(聖) 나자로 마을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나환자 정착촌.
내용
1945년 광복 후 서울 근교의 유랑 나환자들에 대한 구호 및
의료사업의 필요성을 느낀 메리놀외방전교회 소속의 캐롤
(Carroll,G.) 주교가 1950년 6월부천군 오류동에 성라자로원을
개원하였으나 6·25전쟁의 발발로 그 활동이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전쟁으로 약 8,000명에 달하던 나환자들이 수용소에서
풀려나 극도의 빈곤과 질병에 버려지자, 캐롤 주교는 1951년
시흥에 20만 평의 대지를 구입한 뒤 성라자로원을 다시 개원
하였다. 그러자 서울교구에서는 이경재 신부를 구라사업
(救癩事業) 전임자로 임명하여 성라자로원의 초대 원장으로
부임시켰다.
당시까지 천주교에서는 개별 성당 차원에서 나환자들에 대한
구호사업을 펴고 있다가 이를 계기로 구라사업을 공동으로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고, 그 결과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약 20여
개의 진료소가 개원되고, 이동 진료반을 편성하여 순회 진료를 실시
하였다.더구나 1953년 중국 본토에서 오랫동안 구라사업에 종사하던
메리놀외방전교회 소속의 스위니(Sweeny) 신부의 한국진출로 구라
사업은 단연 활기를 띠게 되었다. 1988년 10월 당시 전국 98개 나환자
정착촌 중 50여개 소가 천주교와 관련을 맺고 있으며 이 가운데 25개소는
천주교회가 직접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고 그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정착촌이 성라자로마을이다.
성라자로마을 역시 개원 초기에는 주로 이동진료를 실시했으나 1962년
부터 정착촌을 마련하고 나환자들을 이곳에 거주하게 하였다. 성라자로
마을은 1967년 수원교구가 서울교구에서 분리됨으로써 수원교구 소속
으로 이관되었다. 1975년 성당을 건립하였고, 1981년에는 설립 30주년을
맞이하여 피정(避靜)의 집을 개설하였다. 현재 성라자로마을에는 나환자
정착촌을 비롯하여 1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병동·진료소·교육관 등 부대
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며, 1971년부터 『마을회보』를 발간하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나병(韓國癩病)의 역사적(歷史的) 고찰(考察)」
(갈승철·유준, 『나학회지』 1권1호, 1960)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막차로 떠난 여자
정진건 작사
백영호 작곡
배 호 노래
막차로 떠나간다 비를 맞으며 간다
깨어진 사랑에 맹세를 밟고 나 홀로 간다
흘러간 사연 가슴 아파도
그 사람 그 님 잊지 못해도
아픔을 달래며 막차로 떠난 여자
*눈물을 삼키며 간다 안개를 마시며 간다
찢어진 마음에 슬픔을 밟고 나 홀로 간다
지나간 추억 가슴 아파도
그 사람 그 님 잊지 못해도
말없이 웃으며 막차로 떠난 여자.
2017-01-03 작성자 청해명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