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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걸 3 - 클레오파트라 등 전쟁에 참견해 나라를 망하게 한 여성 군주들!
1,2 편에서는 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여성으로 카르타고 디도여왕과 프랑스 잔다르크와 영국의 엘리자베드
여왕 그리고 주나라를 세운 여제로 당나라의 측천무후와 3만 5천 대군을 한반도에 보내 백제를
재건하려고 했던 왜국여왕 스이코와 베트남의 쭝짝 자매에 대해 썼는데 3편은 나라를 망하게 한 여성입니다.
: 전투에서 겁을 먹고 적전 도주한 클레오파트라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계인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여왕으로 그녀가 죽은후 이집트
는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되었으니 헬레니즘 국가의 종말이고.... 그녀의 모국어는
코이네 그리스어 였는데, 이집트어를 배운 유일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군주였다고 합니다.
기원전 51년 부왕 프톨레마이오스가 죽자 클레오파트라는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와 공동
통치를 시작했지만 곧 내전이 벌어졌고,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남매를 화해
시키려 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기원전 47년 나일강 전투에서 카이사르에 패해 죽습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공동 통치자로 선언했지만 아들 카이사리온을 낳은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적인 관계는 유지했고 결국 기원전 44년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암살했고 카이사르도 암살되니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을 프톨레마이오스 15세 공동통치자로 지명합니다.
카이사르 사후 로마 내전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편에 섰는데, 클레오파트라
는 안토니우스와 기원전 41년 타르수스에서 만난 후로 관계를 가졌고.....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제국과 아르메니아 왕국을 침공하는 동안 자금과 군사적 지원을 클레오파트라에 의존합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들 사이 자녀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등 3명을 안토니우스가 동방의
왕으로 선언하니 옥타비아누스와 대립하게 되었고, 기원전 32년에 로마 원로원은
안토니우스의 동맹국들을 로마에서 퇴출시키고 클레오파트라 에게는 선전포고를 합니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함대를 격파한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0년 이집트를 침공하니 안토니우스는 자결했으며,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
가 자신을 전리품으로 로마 개선 행렬에 데려가려한다는 사실을 알자 독으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얘기를 그 전으로 돌리면...... 카이사를를 암살한 원로원 인사들은 동방으로 달아났으니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추격했는데, 옥타비아누스는 브루투스 맞은
편에 자리잡았고 안토니우스는 카시우스 맞은 편에 진을 치니 이른바 필리피 전투 입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군대는 80,000명 보병, 20,000명 기병, 속국왕들이 제공한 보조병을 보유했으며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28개 군단병과 보조병 100,000명과 13,000명의 기병이었는데,
옥타비아누스는 브루투스에게 패해 달아났고, 안토니우스는 카시우스 군을 격파한 후에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이긴 브루투스군 마저 챠부수고 레피두스를 끌어 들여서 3두 정치가 시작됩니다.
승리의 주역 "안토니우스" 는 발칸반도와 소아시아, 시리아등 지중해 동방을 차지했으며, 자신의 세력권
이었던 갈리아에 대한 권리도 인정받았고 옥타비아누스는 히스파니아와 아프리카를 확보했으며
또 이탈리아는 옥타비아누스가 실권을 가졌는데, 이후 갈등이 심화되면서 페루시아 내전이 발발합니다.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는 로마에 남아 안토니우스의 추종자들의 리더 역할을 하며 옥타비아누스
를 견제했으니.... 공화파의 숨통을 끊은 주역도 안토니우스였으며, 옥타비아누스는
대패하는등 제 역할을 못했기 때문에 안토니우스는 동방에 있었음에도, 로마에서도 강력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풀비아의 방해 공작을 참지 못했고, 정략 결혼했던 풀비아의 딸 클로디아 풀크라와 이혼한
뒤에 풀비아가 로마 지도자가 되려 한다고 비난하자..... 풀비아는 아이들과 함께 로마를 빠져나와
이탈리아 내의 안토니우스 추종자들과 연합해서 옥타비아누스와 이탈리아 내에서 전쟁을 하려 들었습니다.
이때 풀비아는 안토니우스의 동생이었던 집정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연합해 6개 군단을 동원하여
대항하니 페루시아 내전인데..... 옥타비아누스는 고전했지만 시민들을 희생시키면서 까지 지지
를 얻었던 군단병들의 도움으로 풀비아와 루키우스를 이탈리아 북부 페루자로 몰아넣는데 성공합니다.
풀비아와 루키우스는 포위된 상황에서도 남편 안토니우스의 지원을 기다리며 저항했지만 안토니우스는
동방에서 클레오파트라에 빠져서 미적대며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으니, 기원전 40년 초,
옥타비아누스는 반란을 진압했는데.... 루키우스는 사면했지만 풀비아는 그리스로 쫓겨난뒤 의문사 합니다.
뒤늦게야 안토니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브린디시를 포위했지만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양측 부하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거부하니, 결국 40년 9월 브린디시 협정을
통해서 두 사람은 표면상 화해했고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누나 옥타비아와 재혼 합니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에 머물며 클레오파트라와 꿈 같은 좋은 시간을 보내고 로마에 적극적 으로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옥타비아누스의 세력은 안토니우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마음만 먹었으면 로마로 진격해 옥타비아누스 정치 생명을 끝장낼 수도 있었습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두 연인은 지중해에 터키남부 타르수스에서 만났으며 그후 터키 서부
이즈미르 남쪽 에페수스 (에베소) 에서도 만나 유적을 둘라보고 항구를 함께 걸었다고 하는데
당시 연인들이 걸었던 항구에서 도시로 향한느 연도에는 세계 최초로 가로등 불을 밝혔다고 합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 부하들중 대부분은 카이사르파인지라 카이사르의 오른팔과 양자가 적대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오히려 폼페이우스와 공화파 잔당을 상대로 옥타비아누스 연합하길 원했으니 안토니우스가
폼페이우스와 손잡고 옥타비아누스를 처리하는 것은 지지 기반 상당 부분을 이탈하게 만들 우려가 있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파르티아 원정에 쓸 2만 군단병 약속을 받았는데 곧 정치 9단 옥타비아누스
에게 뒤통수를 맞았으니.... 기원전 38년 삼두정이 5년 연장된후 안토니우스는 동방에서 파르티아 원정
을 시작하는데, 옥타비아누스가 군단병을 보내주지 않자 클레오파트라 재력의 도움으로 원정군을 편성합니다.
안토니우스는 친파르티아파의 아르메니아 왕을 항복시킨후 파르티아로 남하하였으나 파르티아군은
정면 승부를 받아주지 않았고, 보급선이 길게 늘어난 로마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2개
군단을 공격해 전멸시키니 이때 기병 전력을 맡은 아르메니아 왕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후퇴합니다.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요새의 포위를 시도했으나 파르티아 기병대에 시달려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후퇴하는 과정에서 수만에 달하는 병력을 잃었으며 그뒤 안토니우스
는 아르메니아왕이 도망간 것에 책임을 물으니...... 아르메니아를 공격해서 승리하게 됩니다.
전쟁이 끝난뒤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식의 개선식을 거행했는데, 개선식은 반드시 로마에서
해야 했는데 개선식 자체가 로마에 거주하는 로마의 수호신들에게 바치는 행사이기 때문이었으니 다른
도시에서 거행하는 것은 다른 도시의 신들에게 영광을 바치는 것이라 로마 수호신에 대한 배신행위 였습니다.
또 안토니우스는 제멋대로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시리아 영토를 떼어주고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서 낳은 쌍둥이
에게 동방을 분할해 물려주겠다고 선언하면서, 클레오파트라 7세는 왕중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와
카이사르의 아들인 카이사리온은 왕중왕이며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 적자이자 정당한 후계자라고 선언합니다?
이런 조치를 전해 들은 로마인들은 분노하였으며 옥타비아누스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해
안토니우스를 맹비난하는데.....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주장은
원로원의 인가를 받지 않았으므로 무효라고 선언하고 또한 그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합니다.
이때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누나 옥타비아와 정식으로 결혼한 상태였는데, 일방적으로
이혼을 선언하자 자신의 혈육을 끔찍히 아꼈던 옥타비아누스는 분노하여
불법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는데 그것은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압수해 공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안토니우스를 따르던 그해 집정관들과 원로원의 1/3 은 옥타비아누스 보다는 안토니우스가
더 믿을만하다는 판단을 했는지 로마를 떠났고, 안토니우스가 머물던 동방으로 가자
안토니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로 향해 이탈리아를 상륙하려고 하였고....
옥타비아누스는 저지하려고 하니 아드리아해의 그리스 서쪽에 있는 악티움에서 맞붙게 됩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악티움에 데리고 왔는데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를 버리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안토니우스 병력이 열세가
아니었으니 클레오파트라 7세의 주장은 합리적이지 않았고 싸우지도 않고
본거지로 철수해버리는 것은 기세를 올려줄뿐 아니라.... 그리스를 몽땅 내주는 것입니다.
악티움에서 옥타비아누스를 견제하며 물량 싸움으로 나갔으면 풍부한 동방의 자원에 클레오파트라의
돈 까지 쓸수있는 안토니우스에게 유리하니 안토니우스의 장군들은 격렬하게 반대
했는데,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의견을 받아들여 악티움에서 철수할 생각이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BC 31년 동방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은 육군 10만이고, 수군은 15만에
520척의 대함대로..... 5단층 (노 하나에 노잡이가 5명으로 5줄 ) 갤리선 520척의
대함대 ( 선원과 전투원 15만명 ) 를 편성하였는데 1,600년이나 지난 임진왜란때
일본 세키부네 보다 훨씬 큰 조선의 군함인 판옥선도 노가 한줄 뿐이었는데 무려 5줄 이라니?
안토니우스는 남쪽 그리스 “파트라스” 에 본영을 설치하고 출격해 그리스 서북쪽 “이고멘시아” 로 출전했는데
반면에 옥타비아누스도 육군은 북쪽 해안에 9만을 동원 하였으나, 해군은 5단층 군선 ( 노 하나에 노잡이가
5명 5줄 ) 5척을 포함해 400척 (나머지는 노 3층 군선) 으로 배의 크기도 작았거니와 숫자에서도 열세 였습니다.
전투로 단련된 로마 고참병의 숫자가 많고 전술에 뛰어난 안토니우스에게 부하 무장들은 육전으로 결판을 낼 것을
호소했으나.... 해군력이 우세한 것을 믿는 클레오파트라가 끝내 고집을 관철해 해전이 시작되었던 것인데,
안토니우스군은 5단 갤리선(노가 5층) 등 숫자도 많은데다 동풍마저 부니 초전에 주도권을 잡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아다시피 옥타비아누스의 대승으로 끝나는 것이니.... 궂이 해군 세력이
약세임에도 불구하고 역전승한 이유를 들자면.... 전투에는 약한 옥타비아누스는 뒤로
빠지고 그의 대리인 “아그리파” 장군이 지휘를 하면서 배에 “화기” 를 장착 했다는 것이지요?
또 뱃머리를 날카롭고 견고한 충각 (衝角, Ram) 으로 적선을 들이받아 침몰시키는 작전을 세운 것에
바람을 적절히 이용한 정도이며, 반대편에서 보자면 “클레오파트라” 는 패전 이후의 경우도
대비했으니... 결국 이 한번의 전투에 모든 것을 걸지 못한 “안토니우스의 미련” 이 승부를 갈랐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함께 동방 여러 지역의 도시들을 순례했으니.... 튀르키예의 지중해안
도시들인 남쪽 타르수스 그리고 서쪽 에페소스 (에베소) 에 그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몇년전 4주간의 터키 전국 일주 여행 중에 아니다 거쳐 타르수스 Tarsus 를 방문해서는
사도 바울 (St. Paul) 의 집터 Antik Sehir 와 우물 St Paul Kuyusu. 을
보고 성문 클레오파트라의문 Kleopatra Kapısı (Cleopatra’s Gate) 을 구경했습니다.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가 2천년전에 배로 지중해를 건너 키드누스 강을 거슬러 올라와
타르수스 에서 소아시아와 이집트를 지배했던 안토니우스 를 만나 사랑하게된 것을
기념해 세웠다는데, 한때 킬리키아문, 사도 바울의 문, 매춘부의 문으로도 불렸다고 합니다.
휘황찬란한 장식을 한 거대하고 화려한 배 가 강을 거슬러 올라와서는 구름같이 모여든
군중 앞에서 보석과 진귀한 음식 에, 몸으로 안토니우스 를 사로잡았으니 시민들은
아시아의 행복을 위해 아프로디테 가 디오니소스와 축제 하러 왔다고 수군그렸다고 합니다.
세익스피어 에 의하면 BC 41년 클레오파트라는 보라색 돛에 은으로 된 노를 젓는 배에 황금
을 싣고 금으로 치장한 옷을 입고 큐피드 화살을 배경으로 비스듬히 누운 아프로디테 가
입항해 내릴때는 달콤한 향수냄새 가 진동하니 타르수스는 구경꾼으로 텅 비었다고 합니다.
클레오파트라 는 이집트의 그리스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최후의 여왕으로 카이사르 와
인연을 맺고 왕위에 복위 하였으며 안토니우스 와도 타르수스에서 인연 을 맺어
결혼 하였으니 두 로마의 영웅을 조종 하여 격동기의 왕국을 능란하게 유지해 나갑니다.
그녀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둘째 딸 로 BC 51년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여 이집트를 공동 통치 하다가 왕위에서 쫓겨나자 BC 48년 이집트에
와 있던 카이사르 를 농락하여 인연을 맺고 남편이 카이사르와 전투중에 전사
하자 BC 47년에는 막내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재혼하여 공동 통치 합니다.
카이사르 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낳아 카이사리온 이라 했는데 빈객으로 로마 에 가서
로마제국의 황후 가 되려고 했으나,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에 이집트로 돌아왔으며
BC 37년 옥타비아누스와의 협조가 결렬된 안토니우스는 재차 그녀 앞에 나타나 결혼합니다.
BC 34년 안토니우스는 그녀에게 로마의 전체 속주를 주었으니 격노한 옥타비아누스 와
BC 31년의 악티움 해전 이 벌어지는데 그전에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에페소스 에서 전쟁 준비를 마치자 사모스 섬과 아테네를 돌면서 축제 를 벌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 서부 코린트 만에 있는 해군기지 파트라에 야영지 를 마련한후 북상해
또 다른 해군 기지인 악티움 으로 이동했는데 대규모의 이집트 함대 가
정박하기에 안성맞춤이었으니 옥타비아누스의 도전 을 기다리며 자신에 차 있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의 배가 3단 노선 위주인데 비해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함선은 5단 노선
이 대부분이라 크기에서 비교도 안되고 규모도 컸을 뿐만 아니라.... 잘 훈련된 데서
자신만만했으나 아그리파 가 지휘하는 옥타비아누스 함대 전투선들이 빠른 기동력 을
갖춘데다 뱃머리에 충각 을 장착하였으며 화약 무기 까지 갖춘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지요?
BC 31년 9월 2일 빠른 속도 를 자랑하는 옥타비아누스의 전투선단과 육중한 안토니우스의
선단이 악티움에서 결전 을 벌이니 안토니우스 함대는 재빠르게 움직이면서 공격해오는
옥타비아누스 선단을 당해내지 못하는데 주변의 섬마저 옥타비아누스 함대가 점령 합니다.
포위되면서 군수품 보급을 받을수 없게 된 안토니우스 함대는 힘을 잃기 시작하자 정면으로
옥타비아누스 함대를 돌파하여 포위망을 뚫으려고 했으나 아그리파의 기만전술 에
빠진 안토니우스의 전투 선단은 옥타비아누스의 전투 선단에게 격파 당하기 시작합니다.
전장에서 불길이 솟고 배가 부숴지자 공포에 질려 일개 아녀자로 변해버린 클레오파트라
는 선단을 이끌고 빠져나와 이집트로 향하자 안토니우스도 전투를 포기하고
그녀를 쫓아가니 지휘관이 도망친 함대는 적에게 투항 하기 시작했으며... 육군도
닷새나 안토니우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언덕에서 버티다가 결국에는 항복합니다.
옥타비아누스군이 알렉산드리아 까지 추격해 오자 안토니우스 는 기원전 30년 8월 1일
새벽에 알렉산드리아 항구를 떠나 옥타비아누스 함대를 향해 용감하게 나아갔으나
이집트 함대 는 노를 위로 들어올려 항복했고 안토니우스의 기병대 도 그를
버리고 도주했으며....... 얼마 남지 않은 보병대는 한번 패하자 금세 흩어져 버립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벌린 거짓 연극 에 속아 혼자 목숨을 끊자 이제 38세의
여인은 옥타비아누스를 유혹 하려고 했으나 이미 중년이 다된 그녀의 몸은
옥타비아누스를 녹일 수 없었으니 로마로 끌려가지 않으려면 자결의 길 밖에 없었지요?
클레오파트라 는 단 한번의 공격으로 사람을 죽게 만드는 코브라 로 하여금 자신의 유방을
물게 만들어 자살했다는데, 클레오파트라는 의사와 의논하며 여러 차례 실험을 거듭해
코브라의 독 으로 고통 없이 가장 깨끗하게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클레오파트라 를 물어 죽인 코브라는 하이집트 신 의 상징이었으며 태양신 아몬-라 의
대리자의 표상이었으니 코브라로 하여금 자신을 물어 죽게 한 것은 그녀가
신성과 불멸의 지위 를 획득하여 신의 대열 에 끼여들기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말해집니다.
그녀는 용모와 자태에 있어서 여성적 매력 과 수개 국어를 자유로이 구사하는 외교 수완을
발휘해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두 사람 로마의 영웅을 자유자재로 조종 하여 격동기
이집트 왕국을 능란하게 유지해 나간 능력이 출중한 여왕 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생애는 문학 작품의 좋은 소재로서 예전에는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안토니우스전”과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있으며.....
근세에 와서 쇼의 “시저와 클레오파트라”등이 유명하며 여러차례 영화화 되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악티움 해전의 결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전혀 고려하지 못했으니 그와 클레오파트라는
악티움에서의 패배가 자신들의 붕괴를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던 것으로.... 안토니우스는
동방에서 육군을 모아 옥타비아누스와 대결하면 된다라고 판단 했고, 클레오파트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둘은 악티움 싸움은 패배하라고 내버려 두고 애초 생각대로 알렉산드리아 에서 싸우겠다고
생각하고 몸만 빠져나간 것이었는데..... 하지만 헬레니즘 세계에 대한 파급 효과는 상상 이상
이었으니 로마 세력권 동방 도시들과 주둔 군대, 장교와 시민, 동맹국들은 전혀 생각이 달랐던 것입니다?
이들은 눈치를 보며 두 세력의 전쟁을 주목하고 있었으니 그들에게 이 대결은 자신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 결정해야 할 척도였던 것으로, 과거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대결에서 얻은 교훈이
있어서 더욱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기에, 안토니우스의 계획은 최악의 판단 미스였던 것입니다.
악티움의 결말을 듣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미지근한 태도를 버리고 옥타비아누스 에게 붙는데, 지상전
에서 승부를 결정짓겠다고 계획을 세운 안토니우스에게 치명타 였으니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부하들을 통제하려고 하였으나 로마군이던 동맹군이던 상관없이 안토니우스를 계속 배신하고 탈영합니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도이자 헬레니즘 세계의 중심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점령 하는데,
동족인 로마인과 안토니우스파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클레오파트라 7세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지배를 끝내고 지중해 세계의 평화를 찾아오겠다고 공언했기 때문입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가 자기를 개선식에 데리고 가서 로마 시민들에게 선보인 뒤에
연금을 줘서 살려준다고 해도 치욕이었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체면도
깎아 내리는 것이었으니 그녀는 바구니에 독사를 넣어오도록 해서 손을 집어넣어 자결합니다.
클레오파트라 죽음은 옥타비아누스에게 한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했으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문을 닫았고, 이집트에서 일어날 반란거리를 제거한 것이었기 때문이며
한편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 유언장 대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를 같이 묻어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