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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지정한 국보(國寶)와 보물(寶物)은 총 1,466여 점이 있는데, 그
중에 불교문화재는 900여 점이고, 282점의 국보 가운데에서 불교문화재는
147점이며, 1,184점의 보물 가운데 753여 점이 불교문화재이다.
이런 높은 수치는 바로 한국문화가 불교문화라고밖에 볼 수 없으며, 또
한 지금까지의 불교가 한국문화에 얼마만큼의 큰 비중과 역할을 해 왔는
가를 알 수 있다. 그리하여 한국문화를 이끌고 온 불교가 한국인의 정신
사(精神史)까지 이끌고 왔다는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며 그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문헌은 충렬왕(忠烈王) 때에 쓰인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
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라 할 수 있다. 여기에 고려 중엽에 편찬된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삼국유사》와 비교할 수
있는데, 《삼국유사》는 그 문장이 소박하고 내용이 비현실적이라 할 수
있는 데 비해 사관(史官)에 의해 씌어져서 문장이 정연하고 유창한 정사
인 《삼국사기》에 미치지 못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三國)에 국한되어 있고,
유교적(儒敎的)인 경향과 사대적(事大的)인 관점에서 역사를 기술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삼국유사》는 원시사회에서부터 단군조선·부족국
가·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와 민중의 정신생활까지 광
범위하게 사료(史料)로 남겼고, 비록 야사(野史)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도
민족의 역사를 사실 그대로 기록했다는 점에서 《삼국유사》야말로 진정
으로 가치 있는 사료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실제 현장을 근거로 하여
삼국유사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찾지 않는다면 《유사(遺事)》는 역
시 《유문유사(遺文遺事)》라고 치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그 현실
감 없는 야사적(野史的)인 성격이 더욱 그렇다.
그렇지만 그 시대의 정신사를 이끌어 온 불교, 그리고 그 정신적인 의지
처이자 터전인 가람(伽藍)을 찾다 보면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유사'에
대한 모든 지식들이 다만 단편적인 일부분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
을 것이다. 그러면 가람을 찾는 목적에서 다음과 같이 알아보기로 하겠다.
우선 유사의 흔적과 관련성 여부를 조사하고 가람이 주변에 미쳤던 영향
과 삼국유사 속의 가람으로서 현재 미치는 영향, 그리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유사에 대한 인지도(認知道)를 조사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짧은 시
간을 할애해 그 천오백 년간의 세월속에 간직한 이야기를 찾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끼 낀 돌탑과 부서진 기왓장, 빛 바랜 단
청이 있는 가람 속에서 두근거리는 천여 년의 숨소리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은 한낱 기왓장으로 돌 무더기로 보지 않고 천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
는 마음으로 보지 않고서야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시대적인 상황과
역사적인 사명감을 안고 잉태한 유사에서의 모든 현실들이 다만 유사라는
형식에서 표현되었다는 것을 한 번쯤 그 현장에 직접 가서 숨을 쉬어 봐
야 또한 《삼국유사》를 이해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민족사학의 탄생지 운문사
이른 새벽에 서둘러 도착한 운문사는 발우 준비로 분주하였고, 신심(信心)
이 가득한 학인스님들의 모습을 보니 흐뭇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그
리고 조심스럽게 종무소의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오늘날의 운문사(雲門寺)는 불교교단정화(佛敎敎團淨化) 이후 비구니 금
광(金光) 스님이 초대 주지로 취임한 후로 옛적에 화랑(花郞)들을 배양하
고 선사(禪師)들이 선풍(禪風)을 날리던 곳으로, 1958년에는 비구니전문강
원(比丘尼專門講院)이 개설되었는데 이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비구니
스님들이 수학(修學)하는 전문강원이 되었다. 이렇게 배움의 터가 끊임없
이 이어지는 것은 운문사 남쪽의 가지산이 문필봉(文筆峰)이고 학산 역시
문봉(文峰)인 까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운문사는 산을
등지고 앉은 여러 절들과는 달리 호거산(虎踞山)을 마주 보고 앉아 있는
데 이는 풍수학적으로 많은 작용이 있는 듯하다.
일연(一然) 스님이 생존했던 당시의 고려는 최씨(崔氏) 집정기(執政期)였
으며 30여 년이라는 몽고와의 끈질긴 항쟁으로 국토는 유린되었고 민심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이러한 민족수난기(民族受難期)인 이때
민족의 자주적 의욕으로 민족혼(民族魂)을 일깨워 주고 민족이라는 자주
의식(自主意識)을 심어 주기 위해 일연 선사는 남해 정림사(定林寺)에 계
실 때부터 30여 년이라는 세월 동안 자료를 수집하고 준비해 둔 것을 집
필한 곳이 운문사이며 그리고 집필한 것이 《삼국유사》이다. 이렇듯 삼
국유사는 한순간의 착안(着眼)이 아닌 오랜 세월 동안 준비하여 편찬한
역사서이다.
이러한 삼국유사의 찬술 시기는 충렬왕(忠烈王) 43년(1278), 왕명(王名)으
로 운문사의 주지로 부임하여 운문사에서 국존(國尊)으로 책봉되기까지인
70세에서 76세 사이의 6~7년으로 본다.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에 위치한 경주군 산내면과 경계를 이루는
1,188미터의 운문산(雲門山, 虎踞山) 북쪽 기슭 장군평의 너른 평지에 자
리잡고 있는 운문사는 한 신승(神僧)이 금수동(지금의 북대암 옆)에 들어
가 3년간 수행하다가 오령(五靈)이 숨어 사는 곳임을 알고 절을 짓기 시
작하여 신라 제24대 진흥왕 21년(560)에 창건(創建)된다.
이 때 창건된 절이 중앙에 대작갑사(大鵲岬寺), 동쪽 9천 보(九千步) 지점
에 가슬갑사(嘉瑟岬寺), 남쪽 7리 지점에 천문갑사(天門岬寺), 서쪽 10리
되는 곳에 대비갑사(大悲岬寺), 북쪽 8리 되는 곳에 소보갑사(所寶岬寺)
이렇게 하여 5갑사라 하는데, 진흥왕(眞興王)은 이들 사찰을 국가의 원찰
(願刹)로 삼았다.
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운문사와 삼국유사에 대하여 기술하기로 하겠다.
《삼국유사》 제4권 <원광서학(圓光西學)>에 의하면 원광 국사(圓光國師)
가 중국에서 돌아와 진평왕(眞平王) 22년(600)에 경주(慶州) 황룡사(黃龍
寺)에 있다가 운문사에 3년간 머무르며 중창을 하고, 그 후 가슬갑사(嘉瑟
岬寺)에서 화랑(花郞)인 사릉부 사람 귀산과 취항이 원광 국사에게 세속
오계(世俗五戒)를 받았다. 그러나 5갑사는 삼국통일 이후 폐사(廢寺)가 되
는데 이를 보아서 삼국통일 후 화랑이란 존재는 무의미해졌다고나 할까.
어痔든 간에 5갑사는 정치성이 짙은 것으로 보이며 그리고 오갑사 주변은
화랑들의 훈련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겠다. 지금은 대작갑사(大鵲岬寺)
였던 운문사와 대비갑사(大悲岬寺)인 대비사(大悲寺)만이 남아 있다.
또한 <삼국유사> 제4권 <보양이목(寶壤梨木)> 편에 보양 국사가 중국에
서 돌아올 때 서해(西海)의 용왕(龍王)이 이목(離目)이라는 아들을 딸려
보내며, 본국(本國)으로 돌아가 작갑(鵲岬)에 절을 지으면 호법(護法)하는
어진 군왕이 삼국을 평정(平定)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서기 936년(경순왕
3년) 이곳에 이르르니 절은 보이지 않고 황폐하기가 그지없었다. 까치의
안내로 대작갑사 터를 찾아낸 그는 그곳에 절을 짓고 작갑사(鵲岬寺)라
하였다. 얼마 뒤 태조 26년(943)에 삼국통일을 도운 보양의 공(功)에 대한
보답으로 왕건(王建)이 500결의 토지와 `운문선사(雲門禪師)'라는 사액(賜
額)을 내린다. 이로부터 대작갑사는 운문사라 불리게 되었다. 그 뒤 1105
년 원응 국사(圓應國師)가 다시 중창하고, 조선조 이후에도 수차례의 중창
으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설송 선사(雪松禪師)의 중창시에 세워진 보물 제835호인 정면 3칸, 측면 3
칸의 다포계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인 조선 후기 건물 비로전과 비로전 앞
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이중 기단인 3층석탑이 동과 서로 서 있다. 학인이
었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보았던 것이었는데 탐방을 계기로 읽었던 책에
서 비로전 자리가 행주형(行舟形)이어서 지세(地勢)를 누르기 위한 것이
라 한다.
또한 석굴암 양식의 계승이라 할 수 있는 작압전(鵲鴨殿)에는 석조여래좌
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비록 균형 잡힌 것도 아니고 비례에 있어서도 우수
하다고는 볼 수 없으나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순박함이 깃들여
있다.
그리고 귀부와 이부가 없는 원응국사비(圓應國師碑)는 왕희지체(王喜之 )
의 신수(神受)를 얻었다는 고려 왕조 제일의 명필인 대감국사 탄연(坦然)
이 썼다 하며, 청동항아리 동호, 삼층석탑이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게다가 오백전의 나한상들도 앞으로의 문화재가 될 만큼 수준급이다.
이적(異跡)이나 명물을 말하면 누구나 귀가 솔깃해지는데 여기 운문사의
명물을 들라면 수령(受領)이 400년이 된 천연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된 반
원형(半圓形)의 처진 소나무가 있으며, 일년에 막걸리를 두 차례 받아 먹
는데 그 술기운(?)에서인지 지팡이를 짚고 있지만 아직도 정정함을 과시
하고 있다.
또한 운문사의 이적(異跡)이라 할 수 있는 절 서쪽 산기슭에는 범이 앉아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호거대(虎踞臺)가 있으며 호거산(虎踞山)의 산명
(山名)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그리고 오백전(五百殿) 뒤에 있는 약
야계(若耶溪)는 아무리 날이 가물어도 물이 줄지 않는다고 하며 《삼국유
사》와 관련이 있는 이목소(離目沼)는 절 서남쪽에 있다. 이목소는 보량
국사(寶梁國師)가 중국에서 돌아올 때 서해용궁(西海i宮)에서 데려온 용
왕(龍王)의 아들인 이목(離目)이 살던 곳이라 한다.
옛적에 운문사는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중심 사찰
이었으며, 이곳에 주석하신 일연 선사를 `운문화상(雲門和尙)'이라고 부르
기도 하였는데 스님이 인각사에서 입적하시자 스님의 문인인 운문사 주지
법진 선사(法珍禪師)가 비명(碑銘)을 지어 인각사에 세우고 스님의 행장
을 찬(讚)하여 운문사 동쪽에 행적비를 세웠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원응
국사 신도비와 임진왜란 당시 폐허가 된 운문사를 복구해 놓은 설송대사
비(雪松大師碑)만 현존하고 있다.
이제 우리나라 비구니 수행도량이자 전문강원이라 하면 최고라고 해도 과
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지금의 운문사는 학인스님들의 수행도량으로서
일일부작(一日不作)이면 일일불식(一日不食)이라는 백장(百丈) 스님의 청
규(淸規) 아래 수행(修行)과 경학(經學)을 수지봉행(修持奉行)하며 어린이
포교, 교도소포교 등에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원효성사의 열반지 분황사
《삼국유사》 속에 나오는 가람(伽藍)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가람이 하
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불국사(佛國寺) 말사
(末寺)인 분황사(芬皇寺)이다.
추적추적 비를 맞으며 찾아간 분황사는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21번지
에 위치하며 황룡사지(黃龍寺止)의 북쪽 약 400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
었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아도전(阿道傳)에 의하면 전불시대(前
佛時代)의 가람터라고 전하는 칠처가람(七處伽藍) 중의 하나인 분황사의
위치는 사찰이 세워지기 이전부터 주목받는 곳이었다.
분황사의 창건은 《삼국사기》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권 제5 신라본기(新
羅本紀) 제5 선덕왕조(善德王條)를 보자면 다음과 같다. 선덕여왕 3년인
춘(春) 정월(正月) 634년에 자장 율사(慈藏律師)를 모시기 위해 용궁(i
宮)의 북쪽에 건립하였으며, 여기서 용궁이란 황룡사(皇龍寺) 북쪽의 습지
대가 원래는 연못이었고, 이 연못을 용궁(i宮)이라 하지 않았나 하는 추
측이 있다. 《삼국유사》 권4 의해(義解) 제5 자장정률조(慈藏定律條)편을
보면 당(唐)에서 돌아온 자장 율사를 분황사에 머물게 하였고, 자장 율사
는 이곳에서 신라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상징인 황룡사 9층탑이 건립되는
것을 보았으며, 또한 지금의 국보 제30호인 모전석탑을 건립하였다. 이때
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앞두고 있던 시기로 중앙 집권적 귀족국가의 역량
에 힘입어 많은 불사(佛事)가 이루어졌는데, 특히 신라에 있어서 분황사는
황룡사와 더불어 용궁을 기점으로 남쪽과 북쪽으로 자리잡고 있었으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곳으로 여겨진다.
또한 분황사는 원효성사(元曉聖師)와도 깊은 인연이 있는 곳으로서 원효
성사는 당(唐)나라로 의상(義湘) 스님과 함께 구법(求法)의 길을 가는 도
중인 문무왕(文武王) 1년(661)에 당황성까지 갔다가 해골물을 마시고 깨
친 바가 있어, 당나라로 갈 것을 포기하고 그 뒤 자장 율사 이후 분황사
에 주석하면서 통불교(通佛敎, 元曉宗·海東宗·芬皇宗이라고 한다)를 제
창하고 99부 240여 권에 달하는 많은 저술과 강설(講說)로 불법(佛法)을
폈다. 《삼국유사》 제4권 의해(義解) 원효불기(元曉不 ?편을 보면 원효성
사는 분황사에서 《금강삼매경(金剛三 經)》 《화엄경소(華嚴經蔬)》를
지었으며, 《화엄경소》 제4권 십회향품(十回向品)에 이르러 절필(絶筆)하
였다 한다. 이것은 이론적 저술에서 화엄회향(華嚴回向)의 실천을 위해서
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원효성사는 불교사상을 통합시키고 분황사를 중심으로 정토교(淨
土敎)를 제창하고 법상종(法相宗)의 근본도량(根本道場)으로 만들었다. 그
리고 원효성사는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 6년(636) 3월 30일에 세수
70세로 분황사에서 입적한다. 원효성사가 입적하자 그의 아들 설총이 유
해(遺딪)를 갈아서 생전의 모습을 조성하여 분황사에 봉안(奉安)하고 죽
을 때까지 경도하였다는데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던가, 언젠가는
설총이 절을 하니 동상(銅像)이 홀연히 돌아보아서 `고상(顧像)'이라고 불
리었다 한다.
일연 선사(一然禪師)가 《삼국유사》를 쓰던 고려말(高麗末)에도 그 고
상(顧像)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분황사 법당에는 다만 원효성사의 영정
(影幀)만이 있으며 1950년대에 지용 거사가 그렸다고 한다.
《삼국유사》 제5권 감통(感通) 제7 광덕(廣德)과 엄장(嚴藏)편에도 분황
사와 얽힌 이야기가 있다. 문무왕(文武王, 661~681) 때 광덕(廣德)과 엄장
(嚴藏) 두 스님이 서로 권하여 서방정토(西方淨土)에 가자고 하였다. 광덕
은 분황사 서리(西里)에 숨어 신 삼는 것을 업(業)으로 하여 처자(妻子)와
살았고, 엄장은 남악(南岳)에 암자(庵子)를 짓고 밭을 갈았다.
어느 날 석양(夕陽)에 광덕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서쪽으로 가니 그대
는 잘 있다가 나를 따르라" 하였다. 과연 광덕이 죽었는지라 엄장은 광덕
의 처와 장사를 지내고, 그 처에게 같이 살자고 하였다. 그날 밤 관계하려
하니 광덕의 처(妻)는 "스님의 생각이 동쪽에 있으니 서방(西方)은 미처
알 수 없으리오다" 하였다. 이에 엄장은 부끄러워하며 원효성사에게 달려
가 법(法)을 물으니 법사는 `쟁관법(띨觀法)'을 지어 가르쳤다. 일설에는
광덕의 처(妻)는 분황사의 여비(女婢)였으나, 사실은 관음(觀音)의 19응신
(應身) 중의 하나였다고 전해진다.
유사(遺事) 속의 기도 성취담이라면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 제4
의 <분황사천수대비맹아득안(芬皇寺千手大悲盲兒得眼)>편에 나오는 이야
기가 있는데 경덕왕(景德王) 때 한기리(漢岐理)에 사는 희명(希明)의 아이
가 다섯 살 때 눈이 멀게 되자 분황사 좌전 북쪽벽에 신라의 서성(書聖)
솔거(率居)가 그린 천수관음보살상전(千手觀音菩薩像前)에 나아가서 희명
이 아이를 안고 향가(鄕歌)를 부르기를
무릎을 곧추어 두 손바닥 모아
천수관음 앞에 비옴을 두나이다.
즈믄손 즈믄눈을
하나를 놓아 하나를 더옵기 둘 없는 내라
하나로 그윽히 고쳐질 것이라
아, 아 나에게 끼쳐 주시면
놓되 쓸 자비여 얼마나 큰고
하였다. 이렇게 천수관음보살상(千手觀音菩薩像) 앞에서 도천수대비가(禱
千手大悲歌)를 부르며 빌었더니 아이가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비록 주지스님을 만나뵙지 못하고 제대로 된 인터뷰를 하지는 못했지만
1,500여 년전의 신라의 정신적 귀의처인 분황사를 어찌 빼놓을 수가 있겠
는가?
아직도 하늘은 잔뜩 찌푸린 얼굴이지만 이젠 거의 비가 개여가고 있었다.
분황사 경내로 들어서니 정문 북쪽에 제일 눈에 먼저 띄는 것은 국보 제
30호인 분황사 모전석탑이었다. 석탑은 원래는 9층이었고 신라 삼보(三寶)
의 하나로서 사방 감실좌우에 조각이 되어 있는 높이 1.2미터의 8구의 인
왕상(仁王像)과 사자상(獅子像)이 있다. 이 상(像)들은 선덕여왕(善德女王)
3년인 634년에 분황사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9층이었던 모
전석탑은 왜란(倭亂) 때 많이 훼손되어 지금은 3층밖에 남아 있지 않다.
탑의 형태를 자세히 뜯어보니 탑의 네 모서리에 안치한 서북쪽의 두 마리
사자상은 오랑캐를 막기 위함이었고, 남동쪽의 두 마리 물개는 왜적을 막
기 위해 조성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1915년 수리(修理) 전에 기단 위로
6개가 존재하는 것을 호탑(護塔)의 의미로 현재와 같이 배치하고, 나머지
두 마리는 경주국립박물관(慶州國立博物館) 앞뜰에 보관하고 있다.
현재 탑(塔)의 상태는 일본인들이 1915년 해체 수리한 상태인데, 그 이전
의 사진이 《조선고적도보(朝鮮古跡圖報)》에 있으며 3층으로 지금과 같
은 상태이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규장각(奎章閣)에 소장되어 있는 경주의
옛지도에 보면, 분황사(芬皇寺)가 숲으로 둘러싸인 채 3금당(金堂)과 일주
문(一株門)만이 남아 있는 그림을 확인할 수 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하
여 해체 수리시에 2층 탑신(塔身) 중앙에서 자연석인 화강암을 다듬어 만
든 사리함(舍利函) 속에 각종 옥류(玉類)와 패류(貝類), 금(金)·은제(銀
製)의 바늘, 침통, 가위 등과 함께 숭녕통보(崇寧通寶)·상평오수(常平五
향) 등의 동전이 발견되었는데 바늘, 침통 등을 넣은 것으로 봐서는 선덕
여왕이 내세에는 평범한 여인으로 태어나기를 기원하려는 염원이 숨어 있
음을 알 수 있다. 고전(古錢)들은 고려 중엽 숙종 및 예종조의 것으로 추
정되며, 이때에 개탑(開塔)했을 가능성도 보여 준다.
탑의 북쪽으로 5미터 정도 가니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인 석정(石井)
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하잘것없어 보이는 석정은 실은 《삼국유사》
권2 기이(奇異) 제2 원성대왕조(元聖大王條)에 다음과 같은 정말로 기이
한 설화로 전해 내려온다. 원성왕(元聖王) 11년(795년) 여름에 온 나라가
가뭄이 들어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고 겨우 비가 와 한시름 놓던 왕은
당(唐)나라에서 온 사신(使臣)을 맞이한다. 별 볼일 없이 한 달이나 있던
사신이 서둘러 떠난 후 신라는 때 아닌 서리(署痢)로 곡식들이 얼어붙었
다. 왕(王)이 근심스러워하자 왕앞에 홀연히 두 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중국의 사신이 하서국인(河西局人)과 함께 청지와 동지에 사는 호국룡(護
國i)인 남편들과 분황사 석정(石井)에 사는 용(i)에게 주문(呪文)을 걸
어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잡아 가지고 갔으니 속히 구해 달라는 것이었
다.
신라에 세 호국룡(護國i)이 있는 한 신라가 당나라에 고분고분하게 복종
하지 않을 것이라 보고 사신을 보내 용을 훔치게 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
차린 왕은 군사와 함께 황급히 사관들이 묵고 있는 하양관(河陽觀)에 이
르러 그곳에서 호국룡을 돌려 받아 다시 분황사 우물에 놓아주니 이때부
터 분황사 우물을 `삼룡변어형(三i變魚形)'이라 하였다. 이 우물의 높이
를 보니 대략 70센티미터로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우물틀의 외부
는 8각인데 팔정도(八正道)를 상징하며, 내부는 원형(圓形)으로 원융(圓
融)한 진리를 말하려는 듯하다. 또한 우물 안이 4각형이라는 것은 사성제
(四聖諦)를 뜻한다. 그러나 설화 속에 의도한 것을 가만히 분석해 보니 용
이 변해 물고기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신라가 쇠퇴하고 있음을 시사하
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석정(石井)의 북쪽으로는 약사여래입상(藥師如來立像)을 모신 정면 3칸·
측면 2칸의 보광전(寶光殿)이 서쪽으로 향하여 있었으며, 《삼국유사》 권
3 탑상(塔像) 제4편에 분황사에는 무게 30만 6,700근의 동(銅)으로 만든
신라 최대 불상(佛像)인 `약사여래입상(藥師如來立像)'이 있었으며, 이 불
상은 경덕왕(景德王) 천보(天寶) 14년(756) 을미년(乙未年)에 본피부(本彼
部)에 사는 강고내말(强古乃末)이 주조(鑄造) 봉안(奉安)하였는데, 황룡사
(黃龍寺) 장육존상(丈六尊像)의 9배였다고 한다. 창건 121년 후에 창건 당
시의 3금당(金堂)을 하나로 통합하여 172평 크기의 법당을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 모셔진 약사여래입상은 임진왜란 이후 동(銅)으로 작게 조
성하였으며, 대불(大佛)은 이젠 흔적조차 없다.
그리고 보광전(寶光殿) 정면 서쪽으로 지장전(地藏殿)이 있었으나 경주문
화재연구소(慶州文化財硏究所)의 발굴작업으로 인하여 1991년 12월에 헐
렸다 한다.
분황사 석탑(石塔) 북동편으로는 `화쟁국사비(和등國師碑)'의 대석이 남아
있는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인 이 비(碑)는 고려 숙종(肅宗) 6년
(1101) 8월 계사(癸巳)에 원효성사가 동방(東方)의 성인(聖人)임에도 불구
하고 비기(碑記)와 시호(詩號)도 없어 `대성화쟁국사(大聖和등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유사(有司)로 하여금 주처(住處)에 비석을 세우게 하였는데
분황사에 건립된 비(碑)는 명종대(明宗代)에 이르러서야 평장사(平章事)
한문준(韓文俊)이 지었다 한다. 그 뒤 몽고(蒙古)의 침략과 임진왜란으로
비문(碑文)의 행적을 모르다가 금석학자(金石學者)인 추사 김정희가 비신
(碑身)을 받쳤던 비대에다 `김정희 제기(金正喜 題記)'라고 음각(陰刻) 글
씨를 남겨 오늘날에 전하였다. 이것은 추사가 비신의 내용을 보고 원효성
사의 비(碑)임을 확인하였을 것으로 확인되는데, 비신이 없어진 것은 그
후의 일인 것 같다. 지금도 `화쟁국사비(和등國師碑)'의 비편이 가끔 발견
되고 있다 한다.
1965년 12월에는 분황사 담에서 북쪽으로 30미터 떨어진 우물 속에서 통
일신라시대 것으로 보이는 불두(佛頭), 좌불(坐佛), 보살입상(菩薩立像)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하는데, 이 우물은 원래는 분황사 강당지로 추정
되는 곳이라 한다. 1974년에 한 발굴조사에서는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
像)과 귀면(鬼面) 등 신라·고려시대의 와등이 발견되었고, 1995년 6월에
다시 발굴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출토된 불상들이 모두 목이 잘린
채 우물 속에 있었던 것은 아마도 조선시대 척불(斥佛)의 영향인 듯하며,
심지어 우물조차도 매몰(埋 )하고 경작지로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한때
신라인의 정신적인 의지처였던 분황사를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세월이 바
뀌었다 해도 정치적인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인해 무서우리만큼 가차없
이 베어 버리는 인간의 맹목적인 권력욕과 그리고 그 훼불의 현장이 눈앞
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자장율사의 열반지 적멸보궁 정암사
운문사를 뒤로 하고 삼국유사 속의 가람인 정암사(淨岩寺)로 향하였다. 차
창 밖으로 폐광지와 그 속에서 붉게 자리잡고 있는 교회 건물들을 바라보
며 한때 탄을 캐던 사람들의 애환과 삶의 흔적들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
게 폐허가 된 폐광지를 지나오면 마치 험난한 중생계의 고통스러운 삶에
서 극락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듯한 착각이 드는 정암사 길목에서 어느새
저녁 노을과 함께 공양을 알리는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자장 율사(慈藏律師)의 열반지인 정암사는 또한 부처님의 영원한 열반을
상징하는 진신사리(眞身舍利)가 모셔져 있는 `적멸보궁(寂滅寶宮)'이기도
하다. 적멸보궁에 모셔진 사리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신라
진흥왕(眞興王) 10년(549)이었는데 사리신앙(舍利信仰)과 불교 발전에 결
정적 계기를 마련한 것은 자장 율사였다.
《삼국유사》 제4권 의해(義解)편 자장정률(慈藏定律)을 보면 율사에 대
하여 자세히 서술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진한(辰韓)의 진골(眞骨) 소판(3급 벼슬)인 김무림(金茂林)은 늙도록 아들
이 없자 부인과 함께 삼보에 귀의하고 천부관음탱화(天部觀音撑畵)를 조
성하여 발원하기를 `만일 아들을 낳으면 법해(法海)의 진량(津梁)으로 삼
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낳은 아들이 석존(釋尊)과 한날이라 선종랑(善宗
郞)이라 하였으며, 양친을 일찍 여 선종랑은 출가하여 전원(全院)을 희
사하여 원영사(元寧寺)를 세우고, 홀로 깊고 험한 곳에서 백골관(白骨觀)
을 관(觀)하였다. 조정에서 자장 율사에게 벼슬을 내려도 "내 차라리 하루
동안 계율(戒律)을 지키고 죽을지라도 백년 동안 계율을 어기며 사는 것
을 원치 않는다."라는 굳은 의지를 보였다.
자장 율사는 인평 3년(선덕왕 즉위 3년, 636)에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선덕
왕(善德王) 12년에 귀국하여 나라의 최고 고문인 대국통(大國統)에 임명
되었고, 불교교단의 기강(紀綱)을 바로 세우고자 노력하였으며, 신라에서
자장 율사에게 계(戒)를 받은 이가 10명 중 9명이 되었다고 한다. 자장 율
사는 중국에서 사리(舍利), 불경(佛經), 번당화개(幡幢花蓋) 등 많은 것을
가져왔는데, 이때 자장 율사에 의해 모셔진 사리는 경남 양산 통도사, 설
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영월 사자산 법흥사 그리고 태백산 정암사이
며, 이를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 한다.
이 가운데 자장 율사의 열반지(跡槃地)가 된 정암사(淨岩寺)는 자장 율사
가 말년에 강릉군(지금의 명주)에 수다사(水多寺)를 세우고 그곳에서 머
물렀는데 어느 날 중국 오대산 북대에서 꿈에 본 이승(異僧)이 다시 나타
나 "내일 대송정에서 그대를 만날 것이다" 하였다. 놀라서 일어난 자장
율사는 일찍 송정에 가니 문수보살(文殊菩薩)이 감응하여 와서 "태백산
갈반지에서 다시 만나자" 하고는 자취를 감추었다. 자장 율사는 태백산
탑동에서 하룻밤 자고 사리(舍利)를 모시려 하자 하룻밤새 칡넝쿨이 세
갈래로 뻗어 와 있어 기이하게 여기고 칡넝쿨을 따라갔다. 그런데 그곳에
큰 구렁이가 나무 밑에 서려 있는 것이 아닌가! 율사는 "이곳이 바로 `갈
반지'이다" 하며 갈래사(葛來寺, 지금의 정암사)를 세우니 지금도 인근 마
을 주민들은 정암사를 갈래사라 부른다.
율사는 그곳에서 대성(大聖)을 친견하기를 기다렸는데 이것이 정암사와
자장 율사와의 인연의 시작이며, 그리고 열반지(跡槃地)가 된 사연은 다음
과 같다. 죽은 강아지를 망태기에 메고 거지 차림으로 온 대성문수보살
(大聖文殊菩薩)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자장 율사는 미친 사람으로 생각
하고 만나지 않았다. 그러자 거지는 문수보살로 화(化)하여 말하기를 "돌
아가리라, 돌아가리라, 아상(我相)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으리
요?" 하면서 망태기를 뒤집자 강아지가 푸른 사자보좌로 변하였고, 문수
보살은 그 보좌에 앉아 빛을 발하면서 사라졌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자
장 율사는 급히 따라갔지만, 이미 문수보살은 사라진 뒤였다. 이에 율사는
몸을 던져 목숨을 마치니 이것은 유사(遺事)가 우리에게 자만심(自慢心)
을 경계(境界)하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하겠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 월정사의 말사인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고한리
15번지에 위치한 태백산(太白山) 정암사(淨岩寺)는 본래는 함백산인데 태
백산 줄기에 있다 하여 태백산 정암사라 한다. 정암사의 첫 관문인 일주
문(一柱門)을 들어서면, 왼편으로는 육화정사(六和精寺), 오른편으로 낮은
담장을 꺾어 돌면 범종각(梵種閣)이 보이고, 계류 너머로 적멸보궁이 있
다.
이렇게 정암사는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수마노보탑
과 천연기념물 제73호로 지정된 열목어 서식지로서 유명하다. 열목어는
실제 토종 고기가 아니며, 열목어가 천연기념물이 아닌 남방한계선이라는
서식지가 천연기념물이라 한다. 이 열목어는 북방계의 어종으로 한여름에
도 수온이 섭씨 20도 이하를 유지하는 곳이 아니면 살지 못하고, 물이 얕
으면서도 월동할 수 있는 깊은 소가 있어야 하며, 유속이 완만하고 바닥
에 자갈이 깔리어 산란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이와 같은 조건으로 정
암사 일대는 열목어 서식 요건을 아주 적절하게 갖춘 세계 최남단에 속한
곳이다.
주지스님과 대담을 마친 후 스님과 함께 산 언덕 위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奉安)해 놓은 수마노보탑(水瑪瑙寶塔)으로 향하였다.
수마노보탑은 보물 제410호로 지정되어 있고, 분황사 모전탑과 같은 양식
으로 자장 율사가 당(唐)나라에서 돌아올 때 서해 용왕(龍王)에게 하사받
은 돌로서 마노석(瑪瑙石)을 배에 싣고 동해 울진포를 지나 신력(神力)으
로 갈래산(葛來山)에 비장(秘藏)하여 두었다가 자장 율사가 이 절을 창건
할 때 마노석으로 탑(塔)을 건조하였다 한다. 정암사 주지스님은 이 마노
석은 준보석으로서 지구표면상에는 없는 돌로 지질학자들에 의하면 바다
가 육지로 되었을 때 지각변동으로 생긴 돌로 추정한다고 말씀하셨다. 세
계에서 중국의 어느 한 지역에서만 나는 이 마노석은 바다 밑 3,000미터
이상 들어가야 있기 때문에 용왕이 자장 율사에게 마노석을 주었다는 설
과 일치한다.
또한 수마노보탑은 물길에 따라 마노석을 반입하여 만든 탑이라 하여 `물
수(水)'자를 앞에 붙여 수마노탑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 탑은 전체 높
이 9미터, 상륜 높이 1.7미터인 모전석탑으로 7층석탑인데, 적멸보궁 뒤쪽
의 급경사진 산비탈에 축대를 쌓아 대지를 마련하고 그 위에 모를 죽인
화강석으로 6단을 쌓아 지대석을 마련하고 그 위에 다시 2단의 굄을 마련
하여 탑신부를 받치게 하였다. 탑신을 이룬 모전석은 회록색을 띤 석회암
의 재질을 가진 마노석으로 그 형태가 정제되고 수법이 정교하다. 정암사
수마노탑 안내문에는 고려시대의 양식이라고 되어 있는데, 문화재관리국
에서 잘못 기술하여 이를 시정해 주기를 요구하였다 한다.
1972년에 수마노탑을 보수할 때 문화공보부(文化公報部)에서 탑 아래 암
반 밑에서 사리함을 꺼냈는데 사리함 뚜껑을 여는 순간 방광(放光)하면서
오색찬란한 빛이 수마노탑에까지 비쳤다고 한다. 사리함 안에 있던 것을
사진으로 찍어 놓았는데 자장 율사가 모시고 온 사리 100과, 패엽경, 부처
님의 염주와 부처님 손가락뼈를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수마노탑 밑으로 15미터쯤 내려오다가 오른쪽에서 마노석이 발견
되었고, 수마노탑에서 법당 밑까지 인위적으로 굴이 뚫려 있다고 전해오
는 속설도 있다. 이 수마노탑은 1995년도에 다시 해체 복원했는데 그때는
사리함을 열지 않았다 한다.
자장 율사는 수마노탑을 세우고 금탑과 은탑도 같이 세웠다 한다. 그러나
후세에 중생들의 욕심으로 신심(信心)이 약해진다고 숨겼다고 하는데, 그
렇지만 지금도 기도(祈禱)를 열심히 한 사람에게는 금탑(金塔)과 은탑(銀
塔)이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정암사는 여느 사찰과는 다르게 `지심귀
명례 불타야중 산갈반지, 금탑, 은탑, 수마노탑'이라고 예불(禮佛)한다.
자장 율사가 사리를 수마노보탑에 봉안(奉安)하고 건립한 적멸보궁에는
선덕여왕(善德女王)이 하사(下賜)하였다는 금(金) 가사(袈裟)가 보관되어
있었으나 1975년 11월에 도난 당하였다. 그 금란가사는 많이 훼손되어 있
었으며, 마치 가는 금 철사 같은 것이 얽혀 있었다고 한다. 누런 봉투에
넣어 보궁(寶宮)에다가 보관해 놓은 것을 본 사람들이 많았다는데, 도난당
한 것은 아마도 관리 소홀인 것 같다. 조금만 신경써서 보관하였다면 성
보가 도난당할 리가 없을 텐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주지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강남호림박물관에는 많은 불교유물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대부분이 절 집안에서 유출된 불상이나 불화 등이며, 이것들을 개인이 사
들여 박물관에 전시한 것이라 한다. 그 중에서 부처님 복장에서 나온 유
물도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 불교계가 성보에 대하여 너무 무지하고
소홀히 여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 불교계가 성보
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
관음성지 낙산사
창해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노라면 인간이란 존재가 아주 보잘것없는 데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데,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중생의
고통을 없애 주는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성지(聖地)가 있으니 다름 아닌
관음보살의 발상지인 인도와 인도 남쪽 해안의 보타 낙가산과 티베트의
기지유강 유역인 랏사 그리고 스리랑카 포타란, 중국은 절강성 영파의 보
타산, 만주 보타락사, 일본은 기이(紀伊)의 보타락과 하야(下野)의 닛코(日
光)를 관음(觀音)이 상주(常主)하는 성지로 삼는데, 삼면(三面)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관음성지로서 서해의 강화 보문사, 남해의 금산 보리암 그리
고 여기 양양(襄陽) 낙산사(落山寺)가 있다. 그 중에 관동팔경(關東八景)
에서도 절경으로 꼽는 낙산사는 양양 북쪽 2.5m 지점인 강현면 전진리에
위치해 있으며 설악산 줄기가 대청봉과 관모봉을 거쳐 양양 동해가로 흘
러내려가다가 위쪽에 치솟은 오봉산 안에 자리잡고, 위로는 금강산이 건
너다보이고 아래로는 오대산 산자락이 보이며 설악산 줄기를 이어받은 바
닷가에 자리잡고 있다. 볼에 스치는 설악산의 내음을 느끼며 일주문에 들
어섰다.
낙산사는 신라 고승인 의상(義湘) 스님과 인연이 깊은 절이다. 의상 스님
은 귀족 출신으로 진평왕 47년(625)에 태어났다. 스님은 원효(元曉) 스님
과 함께 당(唐)나라로 유학을 가던 중 원효 스님은 중도에 깨친 바가 있
어 유학을 포기하고, 의상 스님만 당나라로 가서 화엄사상(華嚴思想)을 지
엄 화상(智儼和尙)에게 전수 받고 10년 만에 귀국한다. 그리고 원효 스님
과 함께 불교대중화를 위하여 정토사상(淨土思想)인 미타신앙(彌陀信仰)
을 펼치고, 의상 스님은 중국의 화엄사상을 바탕으로 신라화엄의 종조(宗
祖)가 되고 화엄십찰(華嚴十刹)과 같은 대사찰을 세웠으며, 민중신앙(民衆
信仰)으로서 당시 당에서 유행하던 관음신앙을 도입하여 낙산사에 심어서
본래부터 신라국토가 부처와 인연이 있다는 것을 확인시킨다. 또한 관음
신앙은 화엄경(華嚴經)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데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
品)에 의하면 관음이 28번째 선지식(善知識)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불연
(佛緣) 국토사상(國土思想)을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살펴보
기로 하자.
신라 문성왕 때 당나라에서 새로이 선종을 익힌 방고퇴범일선사(邦苦退梵
日禪師)가 당나라 명주(明州) 개국사(開國寺)에 있을 때였다. 신라 양양
(襄陽) 지방 출신이라는 왼쪽 귀가 없는 스님을 만나고 그리고 신라로 귀
국하였다. 얼마 후 어느 날 꿈에 그가 다시 나타나자 기이(奇異)하게 여겨
찾아간 곳이 낙산(落山) 밑이었다. 마을 아낙의 아들에게서 남쪽 돌다리가
에 금빛 아이와 논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보니 왼쪽 귀가 없는 당나라와
꿈에서 본 스님과 똑같은 돌부처였다. 스님은 곧 돌부처가 정취보살(正趣
菩薩)임을 알고 낙산 위에 불전(佛殿)을 지었다. 정취보살은 화엄경에서
29번째의 선지식(善知識)이며 금강산에서 살며 관음이 있는 곳에까지 와
서 선재동자(善財童子)에게 보살행을 가르쳐준 보살이다. 이는 정취보살이
삼국유사에 그냥 기록된 것이 아니라 낙산사가 관음의 진신이 상주하는
곳임을 입증하는 예로써 나온 설화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낙산사는 원효 스님과도 인연이 있는 가람으로서 그 인연(因緣)은
다음과 같다. 원효 스님은 낙산사의 관음을 친견하기 위해 낙산사로 오는
도중에 관음이 여인의 몸으로 화현(化現)했는데도 미처 알아보지 못했고
낙산사에 와서도 끝내 관음을 친견하지 못했다. 아마도 원효 스님이 낙산
의 관음에게 인기가 없었나 보다. 후에 원효 스님은 우리나라 3대 관음성
지(觀音聖地) 중의 하나인 남해 보리암을 창건하게 된다.
낙산사는 관음성지답게 관음의 이적도 많이 나타났는데 《신증동국여지
승람(新增東國與地勝 )》 제44 불자(佛字) 낙산사(落山寺)에 의하면 1185
년(명종 5)에 병마사 유자량(庾資諒, 1150~1229)이 관음굴에서 예배하였을
때 청조(靑鳥)가 꽃을 물고 날아와 갓 위에 떨어뜨리는 이적이 있었으며,
그렇게도 억불정책(抑佛政策)을 실시하던 조선 왕조의 태조는 봄가을로
낙산사에 사자(使者)를 보내 3일제를 올리도록 했는데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동각잡기(東閣雜記)》에 의하면 이태조(李太祖)의 증조부인 익조
(翼祖)가 40이 넘도록 후사가 없자 부인 최씨와 함께 낙산 관음굴에서 21
일 기도 후 현몽(現夢)을 받고 아들을 낳으니 그가 이태조의 조부(祖父)
였다. 이런 연유로 낙산사는 이씨 왕조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갖게 되었고
오대산을 자주 행차하던 세조는 1466년에 세자(후에 예종)와 함께 낙산사
에 와서 예배를 하는데 어디선가 신비로운 향기가 산과 허공에 자욱하더
니 관세음보살의 머리에서 구슬 한 개가 눈부신 광명을 뿜어내는 것이었
다. 세자도 관음굴에서 기도하던 중 관음상의 이마 위에서 구슬 한 개를
얻고 기이하게 여겨 학열(學悅) 스님에게 퇴락한 절을 고쳐 짓도록 하였
다. 예종은 즉위 원년, 1469년에 새로운 동종을 주조하여 모시도록 하고
노비와 토지를 내렸으며 강력한 억불정책을 취했던 성종도 낙산사만은 예
외여서 즉위하자 교지(敎旨)를 내려 낙산사 주변에 인가(人家)를 짓지 못
하게 하고 주변 바다에서 고기잡이도 금하였다 한다. 낙산사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널리 알려졌으며 중국의 사신이나 고승들도 낙산
사까지 와서 참배하였고,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공양왕 1년(1389)
에 중국 자은종(慈恩宗) 혜진(惠眞) 스님이 낙산사의 성굴(聖窟)을 보고
싶다고 간청했는데도 조정에서 이를 허락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낙산사는 크게 네 곳의 성소(聖所)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원만하여 걸
림 없는 대자대비(大慈大悲)한 행(行)을 하신다 하여 관음보살을 주존으
로 모신 원통보전(圓通寶殿)이 있고, 현판은 근세의 대선사인 경봉(鏡峰)
스님이 쓰셨다 한다. 보전(寶殿) 안의 관음상은 고려 문화의 전성기인 12
세기 전반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의 주지스님은 기림사 부처님과
동일한 지불(紙佛)로 이루어졌다고 하셨다. 관음상은 균형잡힌 몸매에 전
신을 휘감는 영락장식의 의복 표현이 당대 왕비나 공주의 풍모 같은 우아
하고 세련된 기품이 서려 있어 아름답기가 그지없다. 이 관음상은 낙산사
에서 20미터 떨어진 설악산 관모봉 영혈사(靈穴寺)에서 모셔 왔다 한다.
원통보전 주위에는 대숲이 담벽에 기대어 있는데 의상 스님이 관음 친견
당시 쌍죽이 솟아나온 곳에 낙산사를 지었다는 설화 내용을 증명하는 듯
하다. 원통보전 앞에는 복발과 상륜부에서 고려말의 라마계 영향을 볼 수
있는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석탑이 있으며, 이 탑에 낙산의 보물인 두 보
주(寶珠)가 비장되어 있다 한다. 탑에 보주가 있는지 없는지를 의심할 것
이 아니라 있다고 믿는 것이 도의 지름길이라 하는 주지스님의 말씀에 또
한 화엄경의 "믿음은 도(道)의 근본이며 공덕(功德)의 어머니"라는 가르침
을 생각하게끔 하였다.
625 때 유일하게 소실되지 않은 원문(圓門)을 나서면 갖가지 화목(花木)
으로 단장된 중정(中庭)이 있는데 마치 화엄세계(華嚴世界)를 영상(影像)
시킨다. 중정 왼편으로는 종각이 있으며 이 종각(鍾閣)의 종(鍾)은 임진왜
란(壬辰倭亂) 이후로의 동종(銅鍾)으로는 최고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학자들이 평가한다. 종각 곁문을 지나면 아름드리 적송(赤松)이 하늘을 가
린 솔밭길과 사잇길을 돌아서 올라가면 산중턱의 신선봉이 있다.
그곳에는 오늘날 낙산사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해수관음상(海水觀音像)
이 있다. 700여 톤의 돌과 높이 16m인 해수관음상(海水觀音像)은 제작자
가 매일 관음기도를 올리며 5년의 각고(刻苦) 끝에 1977년에 완성하였다
한다. 해수관음상에서 돌길을 돌아 내려가면 11자 높이의 의상 조사 생애
와 업적을 기리는 비(碑)가 있고, 연못을 지나 내려가면 의상대(義湘臺)가
있다. 그 이전에는 만해(卍海) 스님이 세운 누(樓)가 있었는데 1937년 중
창되고 다시 1975년에 세운 것이 지금의 의상대이다. 다음날 원통보전에
서 새벽 예불을 하고 동해 일출을 보기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홍련암으로
향하였다.
홍련암에는 경봉(鏡峰) 스님의 현판과 52cm의 조그만 관음상이 있었으며
홍련암 밑으로는 관음굴이 있는데 관음굴은 높고 좁은 단애에다 험한 파
도가 굴 속을 때려 어지간한 담력이 없이는 굴 안으로 접근하기가 힘들어
보인다.
수많은 세월 동안 국운이 어려우면 낙산사도 같이 고난과 시련이 있었으
며 많은 이적 못지 않게 화재로 인한 손실도 또한 많았다. 그러나 오늘날
의 낙산사(落山寺)는 새로운 모습의 낙산사로 피어나려 한다. 그리하여 불
자들이면 누구나 와서 기도할 수 있는 150여 평 가량의 요사채를 곧 건립
할 예정이며 의상 조사와 관련된 기념관의 건립을 추진중이다. 그리고 해
마다 양양, 고성, 간성, 속초 등 8개 고등학교와 중학교 학생들을 대상으
로 의상백일장(義湘白日場)을 개최하고 있다고 한다.
미륵하생의 염원지 금산사
미륵보살(彌勒菩薩)은 도솔천에 있으면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적하고 56
억 7,000만 년이 지나면 사바세계에 하생(下生)하여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
(成佛)하여 단 3차례의 설법으로 모든 중생을 구원한다는 구체적이자 희
망적인 신앙이다.
미륵보살의 탄생지는 인도(印度)이며 축법호(筑法護)가 최초의 미륵경전
인 《미륵성불경(彌勒成佛經)》을 한역(漢譯)한 때가 서기 300년이기 때
문에 미륵신앙은, 즉 기원전 2세기경에 대승(大乘) 불교인들에 의하여 발
생했을 것으로 본다. 또한 인도 간다라 지방에 미륵상들이 많이 보이므로
인도 서북지방에서 성행했을 것이며 현장법사(玄藏法師)의 《대당서역기
(大唐西域記)》로 인하여 미륵신앙이 서역 지방을 통하여 중국으로 전래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미륵신앙의 기원은 도안(道眼)이다. 그는 반야경(般若經)을 연구하여
북중국(北中國) 불교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서역까지 그의 이름이 널리 알
려졌으며, 문도(門徒) 등과 함께 도솔천에 왕생(往生)할 것을 기원하였다
한다. 그 뒤 미륵신앙은 북위불교(北魏佛敎)를 중심으로 더욱 성행해지는
데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용문석굴(i門石窟)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의 미륵신앙은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초기부터였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수많은 미륵반가상(彌勒半跏像)이 발견되고 고구려, 백제에
의하여 전래된 일본 불교 초기에도 미륵신앙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예로써 《삼국유사》 제3권에 의하면 신라 진지왕(眞智王) 때 흥륜사
(興輪寺)의 진자(眞慈) 스님이 옹천(지금의 공주)의 수원사(水原寺)에 미
륵을 만나러 오는 이야기도 있고, 백제 무왕(武王)은 사자사(獅子寺)에 참
배하러 갔다가 연못에서 미륵삼존(彌勒三尊)이 출현하여 미륵사(彌勒寺)
를 창건했다는 설화가 있다.
미륵신앙은 6세기경 백제 무왕(武王) 때 부여 천도(遷都)와 함께 성황을
이루었고 법왕(法王) 역시 미륵신앙을 국교(國敎)를 삼아서 정치적, 사회
적 기능으로 발전시켰으며 오늘날의 호남 사회(湖南社會)까지도 미륵신앙
(彌勒信仰)이 민중들 속에 남아 있다.
그러면 우리나라 미륵신앙의 대표적인 가람인 금산사(金山寺)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금산사의 역대 고승(高僧)들과 금산사의 옛이야기들을 한번 들
어 보기로 하자.
전북 김제군 금산면 금산리에 위치한 제11교구 본사 모악산(母岳山) 금산
사는 백제 법왕(法王) 1년(599)에 창건하면서부터이다. 금산사의 역대 고
승들을 살펴보건대 《삼국유사》 제4권 제5 <진표전간(眞表傳簡)>과 <관
동풍악발연석기(關東楓岳鉢淵石記)>에 의하면 진표율사(眞表律師)의 아버
지는 진내말(眞乃末)이고 어머니는 길보랑(吉寶女良)이며 성은 정(井)씨라
한다.
여기서 알아둘 것은 성이 정(井)씨라 함은 전주 벽골전 나산촌 대정리 출
신이라는데서 연유한 걸로 말할 수 있다. 내말(乃末)이란 신라가 잔존 백
제 귀족에게 강등(降等) 수여한 관직명이며 아버지 진내말은 은솔의 지위
에 있던 백제의 대표적인 귀족 중의 하나였다. 《송고승전(宋高僧傳)》 권
14 <명률편(明律篇)>에 의하면 진표 율사를 백제국인(百濟國人)으로 표기
한 기록이 있는데, 그만큼 그의 신분 출신이 백제 유민(遺民)을 이끌 만한
배경이 있음을 설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진표 율사는 12세에 부친의 허락을 받고 금산사 순제(順濟, 崇濟) 법사를
찾아간다. 순제 법사는 당(唐)나라 정토종(淨土宗)의 대종장이던 선도(善
導, 613~681) 화상에게서 법(法)을 이어받은 분이며, 진표 율사는 선도 화
상의 가르침을 받아 17년 동안 망신참(亡身黎)이란 고행(苦行)을 통해 미
륵보살(彌勒菩薩)과 지장보살(地藏菩薩)에게 계본(戒本)과 간자(簡子)를
받고 금산사(金山寺)로 돌아와 경덕왕(慶德王)과 왕실의 후원을 받아 금
산사를 창건하고 금산사를 중심으로 하여 당시 백제에서도 손꼽히는 곡창
지대인 김제, 만경 일대 주민들의 망국(亡國)의 한(限)과 신라의 수탈에
절망하는 민심을 구원하기 위해 점찰교법(占察敎法)으로 과거에 지은 죄
업(罪業)을 참회를 통해 업장(業障)을 소멸하면 복락(福樂)을 누릴 수 있
다는 가르침으로 유민들의 호응을 얻는다. 이 점찰법회(占察法會)는 원광
(圓光)에 의해 최초로 들어왔고 진표 율사에 의해 정착하게 된 것이다.
금산사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는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의 외숙(外
叔)인 혜덕 왕사(慧德王師) 소현(昭賢, 1038~1096)에 의해서인데, 스님의
속명은 이씨(李氏)이며 세 누이가 문종의 비(妃)가 되고 그 소생(所生)들
이 순종, 선종, 숙종이 되니 역대 제왕(帝王)의 외숙(外叔)이기도 하다. 스
님은 문종 33년(1079)에 주지로 부임해 와서 고려 법상종(法相宗)을 중흥
시키고 금산사는 선방(禪房), 강원(講院), 율원(律院) 등과 1,000여 명의
대중이 몸담는 8당 711칸이라는 율종사찰(律宗寺刹)인 대가람으로 변신시
킨다.
또한 도생승통(道生僧統)은 고려 문종의 여섯째 아들로서 대각국사 의천
의 친형이며 스님이 출가 의사가 있자 문종은 혜덕 왕사를 맞아들여 수계
득도(受戒得道)하도록 하였고 도생승통은 법주사 주지로 있다가 금산사
주지로 부임한다.
그리고 뇌묵 대사인 처영(處英)은 묘향산(妙香山)의 서산 휴정(西山休靜)
의 선지(禪旨)를 전수받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남의
대찰인 화엄사(華嚴寺), 백양사(白羊寺), 대흥사(大興寺) 등의 승려들을 규
합하여 승병을 일으킨다. 그러나 금산사를 중심으로 승병을 일으킨 보복
으로 왜병들이 금산사를 전소시키고 지금 남아 있는 전각들은 선조 34년
(1601) 수문 대사(守文大師)가 35년간의 세월 동안 중수하여 인조 13년
(1636)에 완성한 것이다.
비록 바쁜 일정으로 인하여 새벽 2시에 금산사에 들어가서 견훤성문(甄
萱城門)을 보지는 못했지만 금산사 입구부터 미륵신앙지답게 미륵불(彌勒
佛)이라고 자처한 견훤이 쌓았다는 견훤성문이라는 `석성문(石城門)'이 있
다. 견훤은 후백제(後百濟)의 왕으로서 《삼국유사》 제2권 기이(奇異) 제
2편에 보면 맏아들 신검(神儉)에 의하여 석 달 동안 금산사에 감금되었다
가 도망친 견훤은 왕건(王建)에게 투항하여 후백제의 몰락을 자처한 인물
이다. 그러나 일설에는 석성문이 왜적을 막기 위함이라고도 한다. 현재는
문짝과 문루는 없으나 문의 형태는 완전하게 남아 있다 한다.
또한 일주문이 불전(佛殿)으로부터 1km 정도 떨어져 있어 그만큼 사찰
의 규모가 크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금강문(金剛門)을 거쳐 약 50m 정
도 떨어진 곳에 화강암으로 조성된 당간지주가 있으며, 돌계단을 오르면
정면으로는 웅장한 대적광전이 눈앞에 펼쳐진다. 인조 3년에 완성된 이
대적광전은 대웅전(大雄殿)대광명전(大光明殿)극락전(極樂殿)약사전(藥師
殿)나한전(羅漢殿) 등 다섯 전각(殿閣)을 통합시켜 놓은 법당이며, 주불
(主佛)인 비로자나불(臻盧遮那佛)을 위시하여 노사나불(盧舍那佛)아미타불
(阿彌陀佛)석가모니불(釋迦毛尼佛)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의 5불과 문수
(文殊)보현(普賢)관세음(觀世音)대세지(大勢智)일광(日光)월광(月光) 6보살
(菩薩)을 모셨으며, 오백나한(五百羅漢)까지 한곳에 모셔 놓은 특이한 구
조로 보물 476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산사 포교부장 스님과의 인터뷰를
마친 후 새벽예불을 참석하였는데 여느 법당과는 달리 대적광전(大寂光
殿)은 전기시설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아 두 개의 촛불을 의지하여 예불을
해야 했다. 그것은 1986년 12월 6일 밤에 문화재관리국의 실측작업(實測
作業) 도중에 발생한 원인 모를 화재를 당한 이유로 사전에 화재를 방지
하기 위하여 전기시설을 하지 않은 듯하다. 지금의 대적광전은 완전히 복
원되어 화재로 인한 손실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이다.
예불을 마친 후 잠시 쉬었다가 날이 밝아오자 사진도 찍을 겸해서 도량
으로 나와보니 새벽에 예불을 모신 대적광전 오른쪽 앞쪽에는 높이
18.9m, 측면 길이 15.45m인 전체가 국보(國寶) 그 자체인 금산사를 대표
할 수 있는 국보 62호 미륵전(彌勒殿)이 있었다. 금산사를 찾는 이들은 금
산사가 미륵도량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무의식적으로 정면의 대적광전보다
는 45도로 꺾어 미륵전부터 찾는다고 한다. 이 미륵전은 진표 율사가 건
립하였으며, 우리나라 유일의 3층 법당이다.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i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
(彌勒殿)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고 모두 미륵불을 모셔 놓은 곳을 의미한
다. 미륵전은 밖으로 보기에는 3층인데 안에는 팔작지붕 다포집에 통층이
며, 미륵전 안에는 옥내 입불로는 동양 최대이며 높이 11.82m인 미륵장육
상(彌勒丈六像)과 양쪽에 협시보살(挾侍菩薩)로 법화림보살(法花林菩薩)과
대묘상보살(大妙相菩薩)을 거느리고 있었다. 원래 미륵장육상은 진표 율사
가 모실 때는 독존(獨存)으로 철불(鐵佛)이었는데 그 철불이라는 근거가
미륵전 지하에 철(鐵)로 된 연화대(蓮花臺)가 있다. 이 연화대를 사람들은
솥뚜껑이라 한다는데 이 연화대는 만지면 영험이 있다 하여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연화대를 만지려고 찾아온다고 한다. 포교부장 스님의 안내로
미륵전 지하로 들어가 보니 컴컴해서 자세히는 못 보았지만 만져 보니 연
화대가 녹이 슬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예전에는 이것도 미륵장육상을 모
셨던 연화대였다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그것은 세월이 흘러서일 것이다.
어디 사람뿐이랴, 일체 만물도 제행무상(諸行無常)인 것을…….
철불이 훼손되자 토불로 다시 모셨다가 1920년 토불인 미륵장육상이 무너
지자 석고불로 모셨다 한다. 지금의 협시보살은 조선시대의 토불로서 세
분 모두 개금(蓋金)되어 있다. 미륵전을 나와 다시 도량으로 나오니 대적
광전과 미륵전 북쪽에는 수계의식(受戒儀式)을 하던 방등계단(方等戒壇)
이라 불리는 독특한 유물이 있었다. 통도사 금강계단과 같은 구조로 계단
중앙에 봉안된 석종형(石鍾形) 사리탑(舍利塔)과 일직선상에 오층석탑이
있고, 사리를 모신 석종의 상륜부 용두(i頭) 장식은 석가모니가 태어났을
때 아홉 마리의 용이 불을 뿜어 목욕시켰다는 설에 착안한 것 같으며, 순
천 송광사 벽암(碧巖) 선사 사리탑이나 선암사 향서당(向西堂) 사리석종
과 같음을 알 수가 있었다. 석종 받침돌 네 모서리에 사자 머리조각은 조
선 후기 왕릉 상석받침인 북석의 나어두(羅魚頭) 문장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1971년 사리탑을 해체 복원할 때 과거불(過去佛)인 정광여래불(淨光
如來佛) 사리 4과와 석가여래(釋迦如來) 사리 3과가 나왔으며 오층석탑은
신라 석탑의 기본형이었으며 견훤이 건립했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1975
년 오층석탑을 해체 복원시 이 탑에서 석가, 정광여래의 사리가 봉안됐다
는 《중수기(重修記)》가 발견되었다. 그래서 이를 계기로 금산사를 적멸
보궁(寂滅寶宮)으로 성역화할 계획으로 지금 한창 불사중이다. 사리탑에서
대적광전으로 내려오니 보물 제23호인 석련대(石蓮臺)가 대적광전 앞에
놓여 있는데 예전의 미륵전이 여기에 있지 않았나 하는 추측이 있다. 높
이 167m, 둘레 10m가 넘는 거대한 규모이고 한 개의 돌로 이루어진 석련
대(石蓮臺)는 견훤의 금산사 중창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설도 있으
나 상대석의 안상이나 현판 등의 조각 수법이 10세기경인 고려 초기의 작
품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도량을 한바퀴 둘러본 후 주지스님과의 인터뷰를 위하여 포교부장 스님의
안내를 받아 주지스님실로 향하였다. 다들 지친 모습으로 주지스님을 찾
아뵈니 주지스님께서는 피로를 깨끗이 씻어 줄 따뜻한 차 한잔과 너그러
운 미소로써 우리를 맞이하셨다. 모악산이 미래불을 상징하는 곳이라 그
런지 근방에 많은 신흥종교가 많이 발생하였으며 특히 증산교의 교주 장
일순은 1900년 스스로 미륵불이라 하며 "나를 보려면 금산사 장육존상을
보아라"는 유언(遺言)을 남기기도 하여 증산교도들은 금산사를 `성지(聖
地)'라고 찾아온다는데 어느 날 전각의 벽화인 심우도(尋牛圖)를 보고 영
가천도(靈駕遷度)에 비유를 해 허탈한 웃음을 금치 못했고 벽화 내용을
사되게 풀이하여 악용(惡用)하는 것이 안타까워 곧 벽화 내용을 수정하려
한다는 주지스님의 말씀에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물을 마
시면 독이 된다"는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이 떠올랐다. 그리고 한때 금
산사는 모악산에서 발생한 신흥 사이비 종교들로 인하여 많은 우여곡절
(迂餘曲折)과 한편으로는 세상에서 금산사 자체를 이상한 시선으로 보아
서 곤혹을 많이 치렀고 시비도 많았으나 1960년 전 총무원장 월주(月珠)
스님의 노력으로 금산사와 모악산 주변이 완전히 정화(淨化)가 되었다 한
다. 예로부터 백제 유민들의 설움과 아픔을 대변해 주고 감싸 안아 주는
정신적인 귀의처이자 고난의 사회변혁기에 변화의 의지를 보여 주는 미륵
불의 약속된 곳 모악산 금산사는 사이비 신흥 종교가 범람하는 원인을 현
종교가 종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다하지 못한 결과이며 인도나 중국의
미륵상생신앙(彌勒上生信仰)인 내세(來世)을 바라는 것이 아닌 현세의 정
토(淨土)를 염원하는 미륵하생신앙(彌勒下生信仰)을 실천하는 것만이 `정
토로 나아가는 길'이라 하여 이제 금산사는 금오(金烏) 스님 이후 폐쇄되
었던 선원(禪院)을 50여 년 만에 복원하여 청정수행도량(淸淨修行道場)으
로서 변모하였고 방등계단(方等戒壇)의 성역화와 더불어 현세 정토의 실
현을 위해 노인 복지관을 인수하여 운영하고 전주에 복지관을 착공하였으
며 일년에 두 차례씩 600여 명의 어린이들이 참가하는 어린이불교학교를
개최하고, 그 외에 중고등학교, 청년회, 일반인들의 수련대회가 매년마다
실시되고 있다 한다. 그리고 미륵십선도(彌勒十善道)와 조계종(曹溪宗) 종
지(宗旨)로서 수행의 실천강령(實踐綱領)으로 삼아 매달 관음제일(觀音祭
日)과 보름날에 사하촌과 전주, 익산, 김제의 신도들을 대상으로 법회와
철야정진을 하고 있다는 말씀을 듣고 마지막 탐방지인 금산사를 나왔다.
"잃은 것은 체력이고 얻은 것은 체험"이라는 모스님의 말에 다들 피곤하
지만 홀가분한 마음이 되어 우리보다 앞서 탐방을 끝낸 서울 동국대 편찬
부팀들이 기다리는 서울로 향하였다.
일연 선사의 입적지 인각사
삼국유사 없이는 우리 민족의 유래인 삶, 풍속, 언어, 문화, 시가, 지명, 전
설, 종교 등을 알 수 없을 만큼 귀중하고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값진 보
고(寶庫)이며, 한국고대사 연구의 근본사료이자 우리 민족문화유산이다.
이와 같은 가치를 가진 우리 민족문화유산인 삼국유사를 탄생시킨 집필
자이신 일연 선사(一然禪師)가 말년(末年)을 보내고 입적한 곳이 인각사
(麟角寺)임을 아는 이들은 참으로 드물다.
일연 선사는 78세인 1283년에 국존(國尊)이 되시고 곧이어 부모공양(父母
供養)을 내세워 1284년에 인각사로 내려오신다. 그리고 충렬왕(忠烈王) 15
년에 세수 84세인 1289년에 입적하신다.
선사에 대하여 좀더 알아보자면 선사는 불교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비
롯하여 모든 학문에 정통하셨으며 팔만대장경 낙성회(落成會)를 주도(主
導)하셨고 고려 후기불교를 크게 중흥시켰으며 우리 역사와 문화을 자주
적 입장에서 연구하여 민족의식을 일깨운 역사가이기도 한 스님은 백여
권이 넘는 저서(著書)가 있으나 오늘날 전해 오는 것은 거의 없고 삼국유
사는 그의 비문(碑文)에서조차 있지 않으면서도 오늘날까지 전해 오고 있
다.
경북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612번에 위치한 제9교구 동화사(桐華寺) 말사
(末寺)인 인각사(麟角寺)는 주변의 산세가 수려하여 곧 명당(明堂)임을 알
수 있다.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한 인각사는 절 앞에 흐르는 중천(中
川)과 기암절벽인 학소대(鶴所臺)가 잘 어우러져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사
람이 그 앞에 서면 시(詩) 한수 저절로 나올 만큼 그 풍광이 절묘하기가
그지없다.
즐겁던 한시절 자취 없이 가 버리고
시름에 묻힌 몸이 덧없이 늙었어라
한끼 밥 짓는 동안 더 기다려 무엇 하리
인간사 꿈결인 줄 내 인제 알았노라
일연 스님 당시의 인각사는 크고 높은 불당(佛堂)을 중심으로 그 앞에 탑
과 좌측에 회랑(回廊)과 우측에 이선당(以善堂)이 있었고 본당(本堂) 뒤에
는 무무당(無無堂)이 있었는데 지금은 퇴락하여 다만 동국대학교에서 2차
로 발굴하여 확인한 대웅전터와 강설루(講說樓)와 몇 채의 당우(堂宇)와
요사채 두 동만이 있었으며, 인각사(麟角寺)에서 입적하시기까지 두 번이
나 구산선문(九山禪門) 문도회(門都會)를 열고 선지(禪指)를 휘날리시던
일연 선사의 자취는 이제 그 어디에도 없고 부도탑(浮屠塔)과 보각국존비
(普覺國尊碑)와 일연시비(一然詩碑)만이 우리를 반겨 주고 있어 세월의
무상(無常)함만을 더해 주고 있을 뿐이다.
옛 대웅전터 뒤에 있는 보각국존비는 중요문화재 보물 제428호로 지정되
어 있으며, 일연 선사가 입적하신 뒤인 1295년(충렬왕 21)에 세워졌는데
인각사에서 준 자료에 의하면 `원정(元貞) 원년인 1295년 충렬왕(忠烈王)
21년 을미 8월 일 문인 사문 죽허(竹虛)는 칙명(勅命)을 받들어 진(陳)나
라 우군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모으고 문인 내원당 겸 주지 통오진정
대사(通奧眞靜大師) 법진(法珍)이 돌을 세우다'라고 씌어 있다. 이 보각국
존비는 문인(門人)인 운문사(雲門寺) 주지 법진 스님이 스님의 행적을 써
서 충렬왕에게 올리고 왕의 영(令)으로 세운 비(碑)이다.
비(碑)는 중국의 서성(書聖)으로 일컬어지는 왕희지(王羲之)의 좋은 체(?
만 골라서 집지(集持)하였기에 중국 사신들이 오면 비를 탁본하는 데 혈
안이 되었고 임진왜란 때에도 왜인들이 비를 탁본한다고 눕히는 등 많은
인위적인 손실을 가했으며 유생(儒生)마저 비(碑)의 글자를 갈아마시면
과거(科擧)에 급제한다 하여 당초 높이 2미터이고 너비는 1미터, 두께 5센
티미터였던 편마암 비신(碑身)이 지금은 그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글자들이 많이 마모(磨耗)된 상태로 남아 있으며, 현재 일연 선사의 비
(碑)는 명부전(冥府殿) 옆 옛 대웅전터 뒤편에서 왼편으로 자리잡고 있다.
학소대(鶴所臺)를 마주 보고 있던 대웅전은 본래부터 643년(선덕여왕 12)
에 원효대사가 창건할 때부터 자리잡고 있었던 곳인지 아니면 일연 선사
가 중창(重創)할 때 새로 지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50여 평이라는 적
지 않은 평수가 당시 일연 선사에 대한 왕실의 지원과 재정상황으로 봐서
는 다시 중창(重創)했을 가능성을 추측할 수 있으며 대웅전의 방향은 북
쪽으로 향해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주지스님은 한용운(韓i雲) 스님이 성
북동의 심우장(尋牛場)을 지을 때 일본인이 싫어서 북쪽을 향해 돌려 지
었듯이 일연 스님도 몽고(蒙古)의 만행(漫行)에 항거하는 뜻으로 대웅전
을 북쪽으로 향하게 하였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나 이것은 추측일 뿐 여
기에 대한 구체적인 학설이나 문헌은 없다. 그러나 대웅전 부처님이 늘
학소대(鶴所臺)를 바라볼 수 있게끔 했었으니 참으로 멋있는 안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연 선사의 부도탑(浮屠塔)은 인각사에서 1킬로미터 떨어진 산자락에
있었는데 1962년도에 모 중령이 흩어져 있던 부도탑을 인각사 경내에 옮
겨 놓은 것 이다. 이 부도탑에 대한 일화는 정조대왕도 선사의 효심에 크
게 감동하였다고 하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생전에 부도탑 자리를 정해 놓지 않고 선사가 열반에 드니 제자들은 `어
디에다 부도탑을 세울 것인가' 고심(苦心)하고 분분(芬芬)하였는데 그때
열반에 드신 선사가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동쪽을 가리키며 `저기가 길지
(吉地)다'라고 하셨다. 제자들이 그곳에 부도탑을 세우니 경내지가 아닌
경외지이며 개울 건너 어머니의 산소와 마주 보이고 인각사와 정삼각형을
이루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길지(吉地)이기에 앞서 어머니에 대한 못
다한 효(孝)를 죽어서라도 하겠다며 경내지를 마다하고 외로운 산자락을
택한 당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부 몰지각한 유생(儒生)이 `길지
(吉地)'라는 소리에 일연 선사의 부도탑을 뽑아내고 자신들의 묘(苗)를 썼
으며 지금도 그 묘가 있다고 한다.
일연 선사 이후 인각사는 조선 중기까지 승속(僧俗)의 발길이 끊이지 않
았다고 하는데 그 뒤의 상황은 알 수 없다 한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민
족사학을 탄생시킨 일연 선사께서 입적한 성지(聖地)인 인각사에 한 차례
수난이 찾아왔었으니 다름 아닌 댐 건설로 인해 수몰 위기에 처하게 되었
던 것이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 지금의 주지스님이신 대원 스님은 `인격
자가 서로 대화가 안 통한다면, 둘 중의 하나가 문제가 있다. 정부에서는
물 문제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인각사의 존재를 잠시 잊었겠지' 라고 생
각하여 물과 인각사의 시각 차이를 좁혀 나가기 위해 건설교통부, 문화체
육부, 국회, P.C통신 등 각계 유명인사와 각 언론 등에 호소문, 일종의 공
문(空文)과 건설교통부에는 인각사를 수몰시키면 안 되는 당위성을 보내
고 거기에 대한 대안으로는 "저수량 3,100만 톤에서 민족사학의 성지인
인각사를 살리는 조건으로 1,000만 톤의 저수량을 잃는 것이 더 값진 것
이 아니겠느냐" 하면서 설득작업에 나섰고 다행히 문화유산을 아끼는 각
계 인사와 여러분들 그리고 언론에 힘입어 스님은 6월 14일 건설교통부
장관과의 최후통첩으로 정식 면담 요청를 하였는데 건설교통부에서는 인
각사가 수몰되는 일이 없을 테니 만난 걸로 가름하자며 6월 14일 장관의
정식 확약이 있는 통지서을 받고 인각사는 수몰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렇게 수몰 위기에서 벗어난 인각사는 오는 8월 10일에 일연 선사가 입
적하신 지 707주기가 되는 날이 된다. 대구에서 `현모회'라는 차 동호인들
이 일연 선사께서 생전에 국수와 차를 좋아하셨다고 하여 10여 년 동안
인각사에 와서 다례제(茶禮祭) 형식으로 공양을 올려 왔는데 2년 전부터
은해사에서 추모제를 주관하였다 한다. 그러나 정작 일연 선사께서 입적
하신 인각사에서는 단 한 번도 추모제를 주관한 적이 없다 하니 주지스님
은 이 일은 인각사가 주관해야 할 일이라며 이번 해부터는 언론 등으로
홍보하여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켜서 인각사에서 선사(禪師)의 추모제를
열 계획이며, 앞으로 일연학연구회(一然學硏究會)도 인각사로 옮기고자 추
진 중이다. 그리고 인각사는 삼국유사를 쓴 일연 선사가 입적한 곳이라는
그 자체가 성지(聖地)이고 민족의 자주성과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기에 충
분한 교육의 장이 될 수 있는 곳이라며 앞으로 인각사의 성역화와 더불어
국민교육의 장이 될 수 있는 인각사가 되도록 불보살(佛菩薩)님 앞에 늘
서원(誓願)하신다는 주지스님의 말씀에 인각사의 앞날에 옛적에 일연 선
사께서 주창하신 민족의 역사의식 그리고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방향
을 다시 한번 제시해 주고 일깨워 주실 제2, 제3의 일연 선사께서 계속
나투시기를 기원(祈願)하며 노을이 지는 학소대와 인각사를 뒤로 하였다.
마치는 글
`삼국유사 속의 가람을 찾아서'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빠듯한 일정, 바쁜
시간 속에서 《유사(遺事)》의 자취를 찾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
니었다.
《삼국유사》의 중요성과 그 가치는 앞에서 논했거니와 유사가 없었다면
이렇게 유사 속의 가람도 찾아 나서지 않았으리라.
우리나라 산하(山河) 속에 자리잡고 있는 가람 그리고 유적인 탑(塔), 비
(碑), 공예(工藝), 불화(佛畵), 전각(殿閣), 석물(石物) 등에서 천여 년이라
는 세월 한가운데에 불교가 민중 속에서 그 시대 속에서 어떠한 역할을
해 왔는가는 짐작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대체로 삼국유사 속의 가람은 호국(護國)과 관음(觀音)과 미륵신앙(彌勒信
仰)을 주종(主從)으로 하여 바탕을 이루고 성립되었으며 민중을 교화하고
불교를 발전시켜 왔다. 왜 이런 사상이 대두되었을까 하는 것은 단 한마
디로 중생의 원(願)하는 바에 따라 적극적으로 가람이 응답하였기에 가능
했던 것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것이 없다.
중생계(衆生界)가 시끄러우면 가람도 시끄러웠고 중생계가 고통스러우면
가람도 고통에 몸부림쳐야 했던 가람은 또한 이러한 때 그 시대 민중의
마음에 구심점(求心點)이 되어 뭉칠 수 있었던 저력(底力)이 가람 안에
있었고 그 가람을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 속에 기록하였던 것이다. 그
러나 지금의 가람은 우리 사회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고 민중 속에 어
떻게 자리잡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그래도 마냥 삼국유사 속의
가람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값지다고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
고 그리고 삼국유사를 야사(野史)라고 단정하고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옛
이야기로 치부하자면 또한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가람은 가람일 뿐 가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어떤 의미도 찾아낼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 속의 가람의 진정한 의도인 민족의 진취
적, 자주적, 능동적인 기상과 역사 의식을 정확히 바라본다면 그 가람 안
에 우리가 있다는 자체가 새로운 의욕과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가 세상에 나온 지 수백여 년이 흘렀다. 이렇게 수많은 시간과
세월 속에서 희로애락(喜怒哀樂)과 생사(生死)를 거듭했던 인연(因緣)과
사연(事緣)들이 가람 안에서 숨쉬고 몸짓하고 있었으며 그리고 다른 한편
으로는 무상(無常)이라는 시간 속에서 가람 안의 삼국유사는 어쩌면 서서
히 잊혀져 가고 그리고 소멸(燒滅)되어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좀더 아쉬웠다고 하는 점은 삼국유사 속의 그 가람 속에 사는 우
리가 가람에 대해 좀더 아끼고 이해하고 그리고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가람마다 나름대로 지금까지 가람이 나아온 방향이 있었으
며 각기 다양한 빛깔들을 지니고 있었다. 가람측에서 이러한 실태를 파악
하여 가람의 역사, 의미 등 가람의 과거, 현재, 미래 등을 제시한 책자나
안내문과 앞으로를 내다보는 관점에서나 불교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사찰
(寺刹)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체계적으로 기록한 것이 구비되어 있더라면
삼국유사 속의 가람으로서 더욱더 가람을 찾는 이들이나 일반인들에게 포
교적인 차원에서도 불교를 새로이 인식하는 계기가 될 것이며 가람을 찾
는 의미가 한층 더 충실할 텐데 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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