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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타임의 모녀
박 완 서
어머니는 스쳐 지나가듯 부엌방으로 사라졌다. 나는 가스불에다 삐삐주전자를 올려놓았다. 삐삐 소리가 나기도 전에 어머니는 옷을 갈아입고 청소기를 끌고 나왔다. 보라색 바탕에 노란 꽃무늬가 있는 어머니의 고무줄바지는 뭉치면 한줌밖에 안 되게 하늘하늘한 천이다. 어머니는 아마 손지갑에다 그걸 숨겨가지고 왔을 것이다. 어머니의 손지갑은 그래서 보통 지갑보다는 크고 핸드백보다는 작다. 간편한 목욕주머니만했다. 파출부 일을 나갈 때는 결코 핸드백 크기의 가방을 들지 않는 어머니였다. 주인한테 의심받을 짓은 안 하는 게 상책이라고 했다. 처음엔 그게 무슨 소린지 몰랐었다. 가방 속에다 깨소금이나 라면봉지 따위를 꿍쳐넣을까봐 노려보는 여우 같은 눈초리와 관계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콩 튀듯 팥 튀듯 분을 못 참았다. 그런 나는 지금 어디 있나. 고작 내 앞에 가로놓인 이 하염없는 슬픔이 그때의 그 순결한 분노의 흔적이란 말인가. 어머니의 바지는 허리 뿐 아니라 가랑이 끝에도 고무줄이 끼여 있다. 어머니는 고무줄을 무릎 밑까지 끌어올려 짤막하고 단단한 종아리를 거침없이 드러내고 청소기를 돌린다. 발도 맨발이다. 일하는 어머니의 뒷모습 중 가장 참아내기 힘든 건 발뒤꿈치이다. 한여름 말고는 어머니의 발뒤꿈치는 늘 갈라져 있다. 깊고 굵은 몇 가닥의 균열이 석탄가루로 메운 것처럼 선명하게 새까만 게 가뜩이나 침울한 내 마음을 잦아들게 한다. 친정은 아직도 방방이 연탄을 가는 집이고, 아버지는 그 집 문간과 문간방을 터서 구멍가게와 연탄가
게를 겸하고 있다. 길이 안 좋은 산동네라 한두 장씩도 팔고, 열 장이 넘으면 아버지가 손수 지게로 배달도 해주는 터여서 평지보다 연탄값이 비쌌다. 구멍가게 물건 중 연탄 이문만큼 쏠쏠한 것도 없다고 대견해하시는 아버지는 그러나 기운 좋아 미장이 일 나갈 때나, 들어앉아 연탄장사 할 때나, 입에 겨우 풀칠할 만큼밖에 돈을 못 벌었다. 그걸 굉장한 일인 양 자랑스러워하는 아버지의 맨발이 어떠했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발뒤꿈치가 어떠했는지까지 잊어버린 건 아니다. 연탄장사 하면서 아버지는 까만 양말밖에 안 신었다. 나일론 양말목의 고무줄이 늘어져 실밥처럼 너덜댈 때까지 신으셨는데, 뒤꿈치에 구멍이 나도 잘 드러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발뒤꿈치는 양말과 같은 빛깔이 었으니까.
단지 숨 쉬고 사는 것도 버거워, 잠시 바깥바람을 쐬려고 나갔다가 무심히 동네 성당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남들이 가는 대로 휩쓸리다보니 성당 안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마침 부활절을 사흘 앞둔 성목요일 미사시간이어서 성당 골목이 그렇게 붐볐던 것이다. 성당 안이 꽉 차 있어서 되레 앞자리에 앉을 수가 있었다. 서 있으려고 했는데 안내하는 사람이 앞쪽으로 인도하더니 맨 앞에서 두 번째 줄에 끼어 앉도록 해주었다. 앞쪽일 뿐 아니라 제대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가운뎃줄이었다. 제대 앞 꽃장식 이 화려 했다. 어려서 산동네 천막교회에 다닌 적은 있어도 성당은 처음이라 모든 예절이 신기했다. 그중에도 신부님이 신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예절은 생전 듣도보도 못 한 거였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일을 기념하기 위한 것일 거라는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영어교과서에서 배운 적이 있는 얘기였다. 애덕이니 겸손이니 하는 영어 단어와 함께 그 페이지에 있던 삽화까지 생각났다. 나는 비록 졸업은 못 했어도 고등학교까지는 다녀본 적이 있었다. 사제가 발을 씻겨줄 신자는 미리 정해져 있었
고, 그분들은 바로 내 앞의 맨 앞줄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다들 남자 노인들이었다. 신부님 이 발을 씻겨주도록 선택받았다는 걸 얼마나 영광스럽고 황공해하는지는 그들의 뒷모습만 봐도 알 수가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정결하고, 풀을 먹인 것처럼 긴장하고 있었다. 품위 있는 은빛 머리카락 한 오라기도 흐트러진데가 없었다. 순백의 제의를 입은 사제가 첫번째 노인 앞에 꿇어앉자 뒤따른 부제가 대야에 물을 대령했다. 나는 엉덩이까지 들고 어깨 너머로 차례차례 양말을 벗는 노인들의 발을 넘겨다보았다. 하나같이 땅을 딛고 다닌 적이 있는 것 같지 않게 가냘프고 정결한 발이었다. 특히 발뒤꿈치는 분가루를 발라놓은 것처럼 새하얗고 보송보송해 보였다. 한줌의 물이 사제의 손길을 통해 노인의 흰 발을 적시고 다음 노인한테로 넘어가면 하얀 수건이 그 거룩한 물기를 닦아냈다. 노인들의 발뒤꿈치가 희어도 너무 희어서 나는 더는 거기 앉아 있기가 싫었다. 장내는 숙연했다. 감격의 눈물을 하얀 미사포 끝으로 찍어내는 할머니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하얀 것들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앞자리에 앉았다는 건 긴 재앙의 예고였다. 실상 그 너무 하얀 발뒤꿈치만 아니었으면 그안의 숙연함에는 감히 거역할 수 없는 황홀경 같은 게 있었다. 잘못 찾아든 집올 뛰쳐나오는 것처럼 무안하고 급한 표정으로 걸어나오기에는 그 통로는 길고도 길었다. 홀로 뭔가를 거스르고 있다는 외로움과 걸어도 걸어도 끝날 것 같지 않은 아득한 거리가 꼭 꿈속 같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머니는 거실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청소기 코드를 뺐다. 소음에 묻혔던 삐삐 소리가 별안간 날카로워졌다.
“엄마, 커피 한잔 하고 하세요.”
나는 가스불을 끄면서 어머니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어머니는 달게 탄 커피를 좋아했다. 일 시키기 전에 커피라도 한 잔 권하면서 일의 순서나 식구들의 식성이나 버릇 같은 걸 얘기해주는 주인을 만나면 일하기도 한결 수월하고 정도 붙는다던 어머니 말이 하필 그때 생각났다. 나는 찻잔이랑 커피통을 다탁에다 주섬주섬 꺼내놓다 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지훈이 낳기 전에 산부인과 병 원에서 배운 복식호흡법은 막상 진통이 시작되자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런데도 난데없이 속이 쓰라려질 때마다 그 짓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노동일에 따르는 애로나 굴욕에 대해서는 도무지 숨기는 게 없었다. 연탄지게 지고 가다 미끄럼판에 넘어지면서 부서진 연탄 속에 얼굴을 처박고 허우적댈 때, 길을 그 모양으로 만든 아새끼들이 낄낄대며 놀리던 말까지 손주새끼 재릉처럼 흉내내던 아버지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양친의, 이런 노동은 무치(無恥)라는 태도에 익숙해져 있을 터였다. 나의 생급스러운 쓰라림은 한 몸 같았던 그들로부터 떨어져나오기 위한 상처의 아픔일까. 아니다. 그들로부터 떨어져나온 지는 이미 오래다. 아픔은커녕 언제 한 식구인 적이 있었더냐 싶게 훨훨 떨어져나왔었다. 지금 쓰라린 건 다시 돌아가 끌어안아야 할 사람들에 대한 혐오감, 아니 도저히 그게 될 것 같지 않은, 그러나 그럴 수밖에 달리 어쩔 수가 없을 것 같은, 되게 복잡한 열패감 때문이었다.
“이 커피잔 참 예쁘자? 아마 영국제 본차이날 거다.”
웬 유식? 웬 안목? 어머니의 적나라한 파출부 티에 다시 한번 복식호흡을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참는다. 어머니는 다리까지 꼬고 앉아 꽃무늬와 커피 맛을 함께 즐기려는 듯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잔을 눈높이까지 들고 감상하면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엄마, 그건 우리 거가 아녜요. 몇 번 말해야 알아들으시겠어요.”
찻잔뿐 아니다. 이 집과 이 집 안에 있는 모든 게 우리와는 상관없는 것들이다. 우리라는 말은 어쩌면 틀린 말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우리라고 말할 때, 비록 어머니를 앞에 놓고 있을지라도 어머니를 포함시킨 건 아니다. 내가 생각이나 말로 우린 어떻게 될까, 우리도 한번 잘살아봐야지, 우리 이번 공일날 롯데월드갈까,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우리집, 우리 저금통장, 우리 강아지, 우리 텔레비전, 우리 냉장고, 우리 전기밥솥 할 때 그 우리 속에는 저절로 나하고 남편과 지훈이가 한 묶음이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런 것들이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들이라 해도 우리에겐 특별하고 살뜰한 것들이었다. 그런 뜻으로 이 집 안에 있는 모든 게 우리 거가 아니란 말은 틀린 말이다. 나하고 상관없는 것들일 뿐, 남편이나 지훈이하고 상관없는 것들은 아니다. 이 집과 집 안의 물건들이 우리 사이에 끼어들면서 우리는 우리가 아니게 되었다.
“고지식하긴, 누가 깜서방 딸 아니 랄까봐.”
어머니는 느닷없이 잘난 척까지 하면서 콧방귀를 뀐다. 기껏 깜서방 마누라인 주제에. 나도 지지 않고 속으로 이렇게 어머니를 경멸한다. 깜서방은 산동네에 파다한 아버지 별명이다. 우린 감씨다. 나는 감일순이고, 살갗이 워낙 까만데다 연탄장수를 하고부터는 눈만 빤작빤작 더욱 새까매진 아버지를 동네 사람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그렇게 불렀다. 조금 대접해준다는 게 고작 깜서방 아저씨 아니면 깜서방 할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남들이 자기를 그렇게 부르는 것에 대해 연탄을 연탄이라고, 라면을 라면이라고 부르는 것만치나 당연하게 여겼다. 연탄을 지고 가는 좁은 골목길에서 아이들이 가로걸리면 야하들아, 깜서방 나가신다, 라고 지게작대기를 휘두르며 호통을 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아버지를 그렇게 부르는 건 처음 들었다. 혹시 내가 잘됐다는 착각이 어머니를 그렇게 우쭐하게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꿈 깨, 엄마.”
어머니를 구박하고 싶은 마음을 참아내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내 목소리가 떨리는 걸 어머니는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서서히 정색을 하면서 나를 찬찬히 뜯어본다.
“너야말로 쓸데없는 걱정으로 마음 졸이지 말고 낯짝 좀 피고 살아, 이것아. 자식한테 줬다 뺏을 부모가 어딨다구, 치마폭에 안겨준 복도 누리질 못하고 조바심을 해쌓냐, 해쌓길. 여자는 뭐니뭐니 해도 그저 받을 복이 있어야 하느니라. 다 네 복이거니 하고 사는가 싶게 살아봐,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겉돌지만 말구. 그리구 지훈이가 누구냐? 김씨 집 장손이야. 딸한테꺼정 이런 집 사줄 만한 집이면 장손을 낳아준 아들 며느리한테 이 정도가 뭐 그리 대수라고. 너가 몰라서 그렇지 너만 못한 사람들도 잘들 산다 너. 사십 평 오십 평에 살면서 파출부 부리고 거들먹거리는 여편네라고 눈이 셋 달린 것도, 코가 둘 달린 것도 아니더라 야. 너라고 이런 집에 살란 법이 왜 없냐. 난 그냥 좋고 대견하기만 하더라, 뭐. 이런 아파트는 별세상인 줄만 알았는데 내 딸네라는 게.”
어머니는 이 집 세간을 쓸고 닦고 어루만질 때처럼 그윽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무쇠라도 녹일 듯한 눈길이다. 이 집에 대한 어머니의 친화력은 놀랍다. 나는 그게 신기하고, 파출부 티만 같아 싫기도 하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청소하고 빨래하고, 싱크대하고 가스레인지 닦고, 베란다는 물청소하고, 유리창은 마른걸레질하는 순서와 솜씨는 물 흐르는 듯 유연하여 어머니의 십 년여의 파출부 경력을 숨길래야 숨길 수가 없다. 그런 어머니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파출부 티하고는 전혀 다른 어머니의 몸짓을 더 힘들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문득문득 나도 모르게 일하는 어머니가 유희를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적이 있다. 파출부 일을 유희처럼 했을 리가 없다. 이 모든 것들이 내 딸의 것이라는 즐거운 착각이 어머니의 노동을 유희처럼 경쾌하고 신나게 만들었으리라. 어머니의 착각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집에 드나들기 시작한 것은 우리가 이사할 때부터였다. 이사래야 몸만 오라는 명령이어서 호텔에 들듯이 달랑 들어왔으니 거들고 말고도 없었지만 지훈이가 퇴원한 직후라 비워놓았던 집을 쓸고 닦을 경황도 없으리라는 게 핑계였다. 이제 지훈이는 유치원에 다시 다닐 만큼 건강해졌건만도 어머니는 일 주일이 멀다 하고 들락거리며 우리집을 쓸고 닦고 애무한다. 파출부 일이 없는 날은 진일도 팔잔지 심심하고 삭신이 쑤셔 나오게 된다지만 그런 날은 집에 밀린 일 때문에 더 바쁘다는 걸 내가 왜 보르겠는가. 나한테 일을 가르쳐주러 온다는 투로 말할 적도 있다. 아무것도 못 가르쳐서 보낸데다 셋방만 살아봐서 큰 아파트 간수를 어떻게 하는지 뭘 알아야지, 라고 중얼거릴 때는 영락없이 못사는 집에서 본데없이 자란 딸을 며느리로 데려온 시어머니처럼 권위까지 부리려 든다. 이건 유리창 닦을 때, 요건 화장실 청소할 때, 저건 하수도에서 냄새가 올라올 때, 그건 기름때 묻은 거 지울 때 쓰는 거라고 이 집 도처에 즐비한 세제를 가지고 유창한 설명을 할 때의 어머니는 또 어찌나 의기양양한지, 어머니를 생전 저렇게 잘난 체하며 살게 할 수만 있다면 못 참을 게 뭐가 있을까 싶은 마음까지 동하려고 한다. 이 집을 우리에게 빌려준 사람들과 나 사이에는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다. 어머니도 그걸 알고 있
을 터이다. 그래서 당신이 그 노릇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머니의 착각은 무식하게스리 범벅 같다. 하도 뒤죽박죽이어서 대책을 세울 수가 없다. 착각이란 워낙 범벅인 것을, 나는 무식의 소치로 돌린다. 유식한 사람의 착각은 산뜻하다고 믿고 있는 것일까.
“지훈이 고모네 이 년만 있으면 돌아와요. 엄마, 제발 착각하지 말아요. 엄마 그러는 거 참 싫어.”
나는 영국제 본차이나 장미무늬 찻잔을 내던지듯이 내려놓으면서 똑바로 어머니를 바라봤다. 울먹이는 소리가 나올까봐 딴 사람처럼 야물딱진 소리를 냈다. 나는 지훈이 고모의 손때 묻은 세간살이에 묻혀살지만 그녀를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지훈이 고모부와 아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생긴 사람들인지 궁금해한 적도 없다. 식구가 부부하고 남매하고 네 식구라는 것도 지훈이 아빠한테 들은 것 같고, 이 집 안에 고스란히 놓고 간 세간살이를 보고 짐작한 것도 같다. 거실과 방방의 벽을 품위 있게 장식한 유화 몇 점은 물론, 먹다 남은 참기름병, 중간을 눌러 쓴 치약 튜브, 삼분의 이나 남은 샴푸병, 냄새가 기가 막히게 좋은 화장비누까지 그냥 남겨놓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사진이나 앨범 같은, 이 집에 몸담고 살던 사람들은 몇 식구였으며 어떻게 생긴 사람들이라는 걸 알아낼 수 있는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에게는 그보다 더한 악랄하고 모욕적인 거부가 없었다. 지훈이 고모부가 미국 지사로 발령나고 나서 비게 된 아파트에 어느 날 우리가 돌연 들어와 살고 있는 거였다. 큰 아파트건 작은 오막살이건 자기 집이 그렇게 별안간 생길 리가 없었다. 나는 자다가라도 이 집이 내 집이라는 편안감을 맛본 적이 없다. 오히려 자다 깼을 때의 의식에는 현실감 이상의 것, 영감 같은 게 있다. 낯선 침대방에서 한밤중에 눈을 뜨고 옆에서 자는 그이와 지훈이의 고른 숨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세 식구가 여행을 떠나와 호텔에 묵고 있는 것처럼 느끼곤 했다. 보통 여행이 아니라 마지막 여행, 왜 있지 않은가? 나처럼 눈물 짜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멜로드라마에 흔하게 나오는, 사랑하면서도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부부나 연인들의 이별의식으로서의 여행, 또는 죽음으로 생을 하직하려고 마음먹은 이들이 이 세상은 아름다웠노라고 말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부려보는 사치로서의 여행같이만 여겨져 하염없이 슬퍼지곤 했다.
지훈이 고모에게 이 아파트를 친정에서 사주었으리라는 어머니의 추측은 아마 맞는 말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전세를 놓아도 억대 가까이 받을 사십오 평짜리 아파트와, 없는 것 없이 갖추고 살던 세간까지 거저로 고스란히 놓고 나가게 할 권한이 친정 부모에게 있었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전화위복이라더니.”
어머니는 생각할수록 신기한 듯 그때 일을 되뇔 때마다 얼굴이 환해지지만 그건 끔찍한 일이었다. 이 아파트로 오기 전에 우리 세 식구는 삼층집 옥상에서 살았다. 일이층은 세를 놓으려고 열 평씩 나누어서 여러 개의 단독세대로 꾸미고, 삼층은 주인의 살림집으로 지은 전형적인 다세대주택이었다. 대단위 아파트가 인접해 있어 생활여건이 좋고, 그 다세대주택 단지를 더는 발전을 못 하도록 그린벨트가 가로막고 있어서 서울시면서도 전원주택 기분이 물씬 나는 동네였다. 그러나 집장수가 일제히 지은 동네 사람들이란 남이 하는 것을 자기네만 못 하면 불안한 심리들을 공통적으로 가진 듯했다. 옥상에 집을 들이는 건 위법인데도 한 집 두 집 그 짓을 하자 너도 나도 옥상에다 방 하나에 부엌이 딸린 방을 지어 세를 놓는 게 유행처럼 번졌다. 우리가 살던 옥상집도 그렇게 해서 생긴 방이었다. 우리집 주인은 셋돈 받아먹는 데 그렇게까지 이골이 난 사람도 아니고, 또 자신의 특별난 취미 때문에 맨 나중까지 옥상을 옥상인 채로 남겨놓고 있었다. 주인의 특별한 취미란 야생화를 기르는 거였다. 그런 동호인 모임의 부회장까지 맡고 있는 퇴직한 공무원이었다. 그는 옥상을 동산처림 꾸미고 거기다 산이나 들에서 나는 풀꽃을 캐다 심고 돌보고 관찰하는 데 한때는 꽤 열중했던 듯하다. 들과 산에서 멋대로 자라던 들풀을 아침저녁 들여다보고, 물을 주었다, 햇볕을 가려주었다, 법석을 떠니까 주눅이 들어 말라비틀어지는 것도 생기고, 야생일 때보다 더 극성스럽게 퍼지는 것도 생겼다. 주인은 차차 야생초를 가꾸는 일을 등한히했지만, 주인의 무관심은 야생의 들풀에게 최상의 가꿈이 되어 옥상을 천연덕스럽게 차지하고 제 세상을 만들었다. 옥상 동산은 마침내 동호인들 사이에 평판이 났고, 그는 욕심 없이 부회장 감투를 사랑하며, 원하는 회원들에게 포기 나누기나 거둔 씨를 나누어주는 걸 낙으로 삼았다. 그러나 부근 땅값이 오르면서 옥상에 방을 들이는 이웃이 늘어나고 사글세값 올려받는 재미도 날로 쏠쏠해진다는 소문은 그토록 욕심 없는 주인에게도 거역할 수 없는 유혹이 되었음직 하다. 동네에서 맨 나중이긴 하지만 결국은 옥상에다 증축을 했고, 마침 눅눅한 지하방을 면하고 싶었던 우리하고 연대가 맞아 거기 세들게 되었다. 우리에겐 꿈같은 행운이었다. 그 동네는 우리가 살던 지하방이 있던 동네하고는 댈 것도 아니게 깨끗하고 고급스러운 동네였지만, 그이가 지훈이 손잡고 그린벨트 지역 내의 논두렁 밭투렁으로 산책 나갈 때마다 지나가는 이웃 동네이기도 했다. 우리도 언제 이런 동네에서 살아보나, 유리창이 깨끗한 삼층집과 넓지는 않아도 집집마다 넝쿨장미와 라일락을 기르는 마당을 눈여겨보면서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그 잘난 지하방 방값을 또 올려달라는 소리를 들은 날, 뿌르르 홧김에 집을 나와 방 난 거 없냐고 들른 동네도, 그래서 그 동네였다. 마침 오늘 나온 옥상방이 있다길래 방값을 물으니까 올려달라기 전의 지하방값하고 같아서 긴가민가하면서도 가슴이 다 콩당거렸다. 그러나 삼층 주인집을 통과해야만 옥상에 올라갈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는 그러면 그렇지 하고는 도로 나오려고 했다. 삼층 문을 따준 주인이 타이르듯이 점잖게 곧 따로 계단을 내줄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옥상에 올라가니까 딴 세상이었다. 공원이나 부잣집 정원처럼 낯설지 않고, 어릴 적에 뛰놀던 그리던 동산에 돌아온 것처럼 기분이 상쾌하고 아늑해졌다. 그러나 그럴 리는 없었다. 나는 비록 변두리이긴 하지만 서울 토박이였다. 그렇담 전생의 기억이었을까. 나를 흔드는 그리움의 끈은 유년 이전에 닿아 있는 것처럼 그윽하고 절절했다. 그이의 소매에 매달려 거기 살고 싶다고 어리광을 부렸다. 지훈이가 다섯 살이 되도록 그이에게 그렇게 마음을 놓아보기는 처음이었다. 나에게 그이는 늘 어려웠다. 스스러운 손님 같았다. 마당에 반해서 정작 살 집은
변변히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마당에 어울리는 집이라는 걸로 만족스러웠다. 들풀들은 저희끼리만 잘 어울리는 게 아니라 나중에 돋아난 무허가 건축까지 저희들 편으로 끌어들여 소박하고도 운치 있는 오두막처럼 만들고 있었다. 그때가 초여름이었던가, 샛노란 마타리와 씀바귀꽃 사이에서 엉겅퀴의 진보라색이 어찌나 도전적이던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가 있다. 실은 그 꽃들의 이름이 그렇다는 건 나중에 그이가 가르쳐줘서 안 거고 그때는 이름도 모를 때였다. 그때까지 내가 자신 있게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들풀은 민들레, 제비꽃, 할미꽃 정도였다. 그건 그이도 마찬가지였다. 그이도 서울 토박이였으니까. 그이가 우리 마당의 꽃 이름을 다 알아낸 건 기회 있을 때마다 주인한테 열심
히 묻고 또 책까지 사서 대조해본 결과고, 그때까지 그이가 확실하게 이름 붙일 수 있는 꽃은 달맞이꽃 단 한 가지였다고 한다. 어떻게 그런 어려운 꽃을 알고 있었을까. 그이가 알고 있었다는 걸로 나는 지금까지도 달맞이꽃이 민들레나 제비꽃보다 격이 높은 꽃이려니 여기고 있다.
이사 온 날 저녁, 달맞이꽃과 함께 맞은 열나흘 달을 어찌 잊으랴. 살림 나 지하방에서 살 때나, 공단에서 자취할 때나 밤하늘의 달은 나에게 있으나마나였다. 추석이나 대보름날 마음먹고 찾아본 적도 있지만, 대개는 잊고 지냈다. 달이 뭬 볼 거 있다고 달구경이란 말이 다 생겼을까,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달은 수은등보다도 신기하지 않았다. 이사한 날은 지하방보다 작은 평수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쓰나엔 별 관심도 없이, 그저 마당의 경관을 해칠까봐 그 걱정만 하느라 항아리나 쓰레기통까지 좁은 부엌 구석으로 처박기에 바빴다. 그래도 저녁밥을 마당에 차릴 생각을 하니 절로 신이 났다. 동산엔 주인이 동호인들하고 모여서 담소를 나늘 때 썼음직한 원탁도 있고 의자도 있었다. 그걸 써도 좋다는 건 우리가 말하기 전에 주인이 먼저 허락해준 거였다. 주인이 좀 불편하더라도 뒤란에 임시로 지어놓은 재래식 변소를 쓰라고 일러줄 때 그 얘기도 했다. 우리는 그때까지 옥상엔 화장실이 딸려 있지 않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다세대주택마다 제각기 수세식 화장실을 갖추고 있어서 그건 우리만을 위해 계단공사 할 때 신축했다고 했다. 우리보다 먼저 신경을 써준 것은 고마운 일이나, 삼층의 옥상이면 고도로 봐서 사층인데 사층에서 지상까지 일보러 내려가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만 보이는 집일망정 옥의 티였다. 그래서 우리가 이사하면서 제일 먼저 새로 장만한 세간도 달덩이만한 요강이었다. 그러나 하얗게 칠한 철제 원탁에 둘러앉아 들풀이 발목을 간질이는 걸 느끼며 저녁을 먹는 운치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저녁 먹고 보리차를 마시는데 그린벨트 쪽 숲 위에서 달이 솟아올랐다. 숲에서 달이 뜨는 건 생전 처음 봐, 그러고 싶은 걸 나는 왠지 참았다. 그이가 딴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아득하고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이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나도 방금 달을 밀어올린 숲이 웅성대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가 있었다. 그 웅성거림은 미세한 바람이 되어 우리가 앉은 옥상의 공기를 소곤소곤 흔들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것이 행복이라는 거 아닐까, 나는 그 시간이 흘러가는 게 아까웠다.
가만, 가만 저 소리 안 들려?
나는 입도 뻥긋 안 했건만 그이는 한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는 시늉을 하면서 청각을 곤두세웠다. 나는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 다만 지훈이의 나스르르한 앞머리가 가볍게 나부끼는 걸 보았다.
아아, 달맞이꽃 터지는 소리였어.
그이가 비로소 긴장에서 해방된 듯 가뿐한 소리를 냈다. 그러나 큰 소리는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이가 손가락질하는 방향에서 달맞이꽃을 다른 꽃들 속에서 식별해낼 만한 소양이 없었다. 그후 우리는 그 옥상에서 일 년을 넘어 살았다. 그 동안 주인은 동호인들한테 야생화를 자랑해야 할 일이나 생기면 모를까, 보통때는 동산에 무관심 했다. 눈독 들이는 주인이 없으니까 풀들은 길길이 자라며 철 따라 잘도 꽃을 피웠다.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연달아 꽃이 필 때마다 그이는 어떡하든지 꽃 이름을 알아내어 나하고 지훈이에게 가르쳐주었다. 식물도감 같은 책을 사다가 사진과 대조해봐도 긴가민가할 때는 일부러 주인을 찾아가 물어보기도 했다. 지훈이한테는 꽃 이름 복습까지 시켰다. 덕택에 나도 꽃에 대한 눈썰미가 생겼다. 이름 없는 꽃으로만 알아온 꽃 이름에 그렇게 열심인 걸 이상해하면 그이는 말했다.
이름을 알고 보면 꽃이 다르게 보이거든.
이름을 알고 보면 어떻게 달라지는 걸까? 나는 아직 그 경지를 모른다. 그러나 그이가 들풀에 유식한 것만은 싫지가 않았다. 그이는 매사에 나보다 유식했다. 그이가 나한테 유식한 체를 안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건 나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무심히 쓰는 외래어나 시사용어 중에도 내가 못 알아듣는 게 많다. 그가 보는 책은 더군다나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 것들뿐이다. 그이는 모르고 있겠지만 나는 줄창 그이의 유식에 추눅들며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이가 들꽃에 유식한 걸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이가 나보다 많이 아는 것 중에서 유일하게 나를 주늑들게 하지 않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이가 들풀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부터 나는 그이와 더불어 할 수 있는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되었다. 그전까지 나는 그이를 죽도록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지금 당장 그이와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만 감지덕지했지, 미래를 꿈꿔보지 못했다. 우리 사이엔 꿈이 없었다. 꿈이 없는 사이가 과연 사랑이었을까? 우리는 장차 어떻게 될까? 또는 어떻게 되었으면, 하는 생각만 하려고 하면 앞에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막막해지곤 했다. 그러나 그이가 옥상의 들풀발만 바라보면 생기가 돈다는 걸 알고부터 그이 하고 같이 어디 가서 농사를 지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잘될 것 같았다. 시골에선 살아본 적도, 친척도 없어서 농사의 구체적인 모습을 떠올릴 재간은 없었다. 검은 흙에 삽을 꽂고 우뚝 선 그이나, 허름한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올리고 도랑물을 첨벙거리며 발을 씻는 그이를 상상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농사짓는 그이 곁엔 내가 있어도 어울릴 것 같은 거였다. 시골 가서 농사나 지을까? 보통 사람에겐 이도 저도 안 됐을 때, 자포자기해서 해보는 상투어가 나에겐 참신한 희망이 되고 있었다. 내가 그이와 평등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거의 유일한 가능성이었다.
내 인생에서 그때처럼 환했던 적은 없었다. 어쩌자고 그리 환했던가. 그 일이 일어나자고 그랬었나보다. 지훈이가 옥상에서 발을 헛디뎌 밑으로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다행히 길바닥이 아니고 이층 창 앞에 돌출한 베란다였다. 마당이 없는 이층에서는 거실 창 앞에다가 베란다를 만들고 잗다란 항아리나 화분 따위를 내놓고 있었다. 그 집에선 마침 아기포대기를 내널고 있었다. 지훈이가 떨어지면서 포대기를 움켜잡았는지, 떨어지는 서슬에 그것도 같이 떨어졌는지, 우리 아이는 포대기에 사뿐히 휩싸여서 울지도 않았다. 마침 이층집 여자가 떨어지는 현장을 보지 않았으면 모르고 있을 뻔했다. 급한 외침에 달려가보니 정신을 잃어서 못 운 거였다. 상처도 없는데 축 늘어져 눈을 뜨지않으니 꼭 죽은 것 같았다. 그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에서 무거운 추가 아래로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곤 한다. 내 가슴속엔 도대체 추가 몇개쯤 달린 걸까? 내려앉아도 내려앉아도 또 내려앉을 게 남아 있으니. 그 추는 내 안에 있으면서도 내 체온과는 무관하다. 무겁고도 차디차서 배창자를 뚫고 지나가는 통로를 선연히 느낄 수가 있다. 그이가 대학교까지 졸업했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도 그렇게 가슴이 내려앉았었다. 대학도 보통 대학이 아니라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이라니 어찌 아니 놀랄 수가 있으랴. 어쩐지 다른 남자하고는 달라 보이더라니. 그때 내 안에선 이미 지훈이가 자라고 있었다. 그이가 다른 남자하고 달라 보이는 걸 나는 연정인 줄 알았지, 설마 위장취업잔 줄은 몰랐다. 그가 먼저 나를 꼬드겼는지 내가 먼저 꼬리를 쳤는지 그것도 분명하지 않다. 그게 그닥 중요한 건 아닐 것이다. 흔한 말로 자석처럼 이끌렸다. 나는 그가 그렇게 많이 배웠다는 걸 알고는 무서워서 도망치려고 했다. 무엇이 잘못됐으며, 장차 이 일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한다는 대책 같은 건 없었다. 그는 도망치는 나를 쫓아다니며, 나는 빨갱이가 아냐, 정말이야, 믿어줘, 제발, 이렇게 말한 걸 보면 나의 두려움에 대해 뭔가 크게 오해하고 있었지 않나 싶다. 하긴 공순이들은 대학생에 약했다. 가짜 대학생에게 속아넘어가 신세를 망치는 수도 흔했으니, 대학 나왔다는 게 흠이 되리라고는 생각 못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도 그이가 나를 무시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는데 나는 그걸 왜 그냥 보아넘겼을까. 무시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기가 지니고 있는 신념에 대한 해명이 고작 나는 빨갱이가 아니다, 일 수가 있었을까? 그이는 자기 생각을 나에게 이해시킬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다.
“평생 무시당하면서 살긴 싫어, 싫어, 싫어.”
나는 이렇게 체머리를 흔들며 대들었다.
“그 문제라면 안심해도 돼. 내가 꿈꾸는 세상은 사람들이 서로 무시하거나 억압하지 않는 세상이니까. 가졌거나 못 가졌거나 배웠거나 못 배웠거나에 따라서 사람 대접이 달라지는 세상은 옳지 못한 세상이야.”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그 소리는 들을수록 마음에 솔깃하니 와 닿았다. 나는 그이 말을 믿고 싶었고, 그이가 말해주지 않은 사실까지도 다 알아버린 것처럼 넘겨짚게 되었다. 그이가 안 말해준 사실이란, 비록 명문 대학까지 나오긴 했어도 사고무친의 가난뱅이일 거라는 거였다. 타고난 신분에 대한 원한이 사무치지 않고서야, 빨갱이는 아니라 해도 빨갱이라고 의심받아 싼 위험한 생각을 할 리가 없으리라는 추측은 여간 그럴듯하지가 않았다. 그이가 다른 남자들하고 다르다는 게 그이한테 끌린 시초였다고 해도, 평생을 같이하려는 사람끼리는 역시 공통점이 필요했다. 그이의 설득이 먹혀들었는지, 내가 스스로 다독거린 결과인지, 나는 맥없이 도망치기를 멈추고 다시 그이에게 급속하게 쏠렸다. 장차 어쩌겠다는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무턱대고 숨기려만 들었던 임신 사실까지도 털어놓았으니까. 그이의 반응은 내가 바라던 것에 훨씬 못 미쳤다. 그러나 기뻐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내가 안 기쁘냐고 다그쳐 물었을 때, 그이는 기쁘다고 말했고,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연속극에서 본 것 같은 환상적인 감동과 흥분은 없었지만, 나는 그 정도로 만족했다. 할 일이 많은 그이가 새롭게 책임에 생각이 미쳤을 때, 심각해지는 건 당연했다. 그이는 나하고 처음 자고 나서도 책임지겠다고 말했었다. 그러고 보니 그이한테 사랑한다는 소리는 들어본 것 같지가 않다. 처음 자기 전에도 그 소리는 안 했다. 자기 전에도 못 들은 소리를 언제 다시 듣겠는가. 그 소리도 못 듣고 몸을 연 것은 내가 너무 헤프게 군 거였을까? 몸이 헤픈 년은 팔자 사나워 싸단 소리는 어머니의 단골 성교육이었다. 지훈이 낳고 백일잔치 할 무렵엔 우리가 제일 궁색할 때였다. 그이는 실업중이었다. 종업원이 오십 명밖에 안 되는 영세한 납품업체에 노조까지 생겼으니 안 망하고 배기냐는 소리는 마치 그이로 인해 회사가 망했단 소리로도 들렸지만 그이는 억울했다. 책임감 강한 그이가 밥줄을 그렇게 함부로 했을 리가 없었다. 밥줄이 끊어지고 이리저리 끌려다니기까지 하고 나서도 별로 기가 죽지 않는 것도 고마웠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백일 차릴 돈도 갖다주었고, 백일날은 그의 친구들이 여럿 와주었다. 다들 대학 동기지만 그들은 이미 버젓한 직업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이가 그들 앞에서 늠름하고, 그들 또한 그이를 조금도 무시하거나 동정하는 투가 아닌 것이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한참 보오얗게 살이 오른 지훈이를 보고 다들 한마디씩 덕담을 했다. 장군감, 대통령감, 재벌감, 금메달감 등등 많이 배운 사람들이 속물스럽기는 더한 것 같았다. 그이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녀석, 볼수록 귀티가 나네그려, 라고 감탄을 했다. 순간 그이의 표정이 반짝 빛나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내 가슴속에서 또 무겁고도 차가운 게 철렁 내려앉았다. 그건 어쩌면 그후에 내려앉은 어떤 추보다도, 심지어는 옥상에서 떨어진 지훈이가 사경을 헤맬 때 내려앉고 또 내려앉은 추보다 더 무거운 추였을 것이다. 그이에 대한 최초의 배신감이었으니까. 그는 나의 쓰라리고 허전한 가슴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손님들이 돌아간 후에도 이애가 정말 귀티가 그렇게 나느냐고 나의 공감을 구하기도 하고, 허어. 그 녀석 귀티가 절절 흐르네 하기도 하고, 아무튼 내가 보기에 그이는 그놈의 귀티를 골백번 반추를 해도 싫지가 않은 눈치였다. 할 때마다 안색은 빛나고 입은 헤벌어졌다. 운동권이 귀티를 그렇게 좋아할 줄을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실업 후에도 그럭저럭 밥은 굶지 않았다. 어디 가서 무슨 짓을 하는지 지훈이에게 비싼 장난감을 사다줄 적도 있었다. 동구권과 소련이 무너졌을 때 나는 자꾸 그이의 눈치가 보였다. 빨갱이는 아니었다고 해도 허탈하고 후회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이가 꿈을 포기하길 바란 건 아니다. 그이의 이상은 아름다웠고, 세상은 아직 그렇게 아름다워지지 않았으므로 그이는 희망을 버려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무식해서 그런지 동구권이나 소련이 그이의 이상은 아니었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그이의 운동은 계속되고 있으려니 했다. 그이는 출판사에 취직을 했다. 선배가 하는 조그만 출판사라고 했다. 돈을 벌어 공부를 더 하고 싶단 소리도 했다. 의논이 아니라 독백이었다.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의 고정수입이 생겼다. 그래도 나는 그이가 잠시 운동을 쉬고 있을 뿐이려니 했다. 아니 쉬고 있는 게 아니라, 그이 안에서 숨 쉬며 그이의 정신을 썩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려니 했다. 나는 그이의 운동권적인 속성에 매달려야만 겨우 그이와의 평등을 유지할 수 있는 게 서글펐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굴욕에의 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골 가서 농사나 지으면 모든 것이 잘될 것 같은 것도 그런 예감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런 우리에게 갑자기 닥친 재난은 오로지 예감으로만 감지할 수 있었던 짙은 안개를 단숨에 걷어주었다.
지훈아, 지훈아, 정신 차려. 눈 좀 떠봐. 오오 하느님 맙소사, 우리 지훈이를 살려주세요. 그렇게 울부짖으며 병원으로 달리는 내 뒤를 지훈이가 떨어진 이층집 아줌마는 물론 이층에 사는 모든 이들이 쏟아져나와 뒤따르고, 야생화를 자랑하는 게 취미인 주인아저씨도 맨 뒤에서 허둥지둥 뒤따라오면서 어느 병원이 용하다고 숨찬 소리를 냈다. 병원 문을 들어서려는데 지훈이는 거짓말처럼 눈을 떴다. 병원 냄새를 맡았는지 주사 맞기 싫다고 또렷한 소리로 말하며 내 가슴을 밀치고 땅에 우뚝 섰다. 여러 사람들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도 이왕 병원 문을 들어선 거니 의사한테 보여야 안심을 할 것 같았다. 그럼, 그럼. 마음씨 좋은 주인아저씨가 제일 먼저 동의를 했다. 늙수그레한 의사는 힘차게 반항하는 아이를 옷 벗기고 구석구석 만져보고 나서 기어코 놀란 데 맞는 주사를 한 대 놔주고서야 우리를 돌려보내주었다. 나 보기엔 과잉 진료였지만 얼마나 다행이냐 말이다. 새로 얻은 자식 같았다. 다들 한마디씩 기적이라고들 했고, 이층집 아줌마는 포대기를 내말린 덕인 줄 알라고 생색을 냈다. 무슨 소리도 다 듣기 좋았다. 주사 기운인지 아이는 그이가 들어오기 전에
깊이 잠들었다. 저녁에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난 그이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아이를 들여다보았다. 마침 그때 아이가 신음 소리를 냈다. 그이가 아이의 이마를 짚었다. 불덩이잖아! 그러면서 아이를 황급히 안아올렸다. 왜 그래요? 그이의 심상치 않은 기색에 나도 따라 일어서면서 의사가 걱정 말랬다고 그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무식하게스리, 그가 그 한마디를 씹어뱉고는 아이를 안고 집을 뛰쳐나가 길고긴 계단을 곤두박질쳐 내렸다. 아이는 내가 낮에 안고 갈 때처럼 다시 축 늘어져 있었다. 나는 가까스로 그이가 붙잡은 택시가 떠나기 전에 탈 수가 있었다. 그는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큰 병원이었고 당직의사가 지훈이를 진찰하는 동안 그이는 어디다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 나서 믿
을 수 없는 일이 계속됐다. 지훈이가 뇌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의 중상이라는 것도 충격이었지만, 그이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이들의 면모는 완전히 나를 까무러치게 했다. 지훈이는 그 으리으리한 병원에서 뇌수술의 최고 권위자한테 수술을 받았고, 간호사가 체크해도 될 용태까지 젊은 의사가 이십사 시간 지켜보아주었고, 특실에 입원을 했다. 모든 것이 특별 대우였다. 그이의 집안 내에서 경영하는 병원이라고 했다. 뇌수술의 권위자는 그이의 백부였다. 그이의 어머니도 수시로 지훈이 용태를 물어왔고, 안심해도 될 만큼 회복이 된 후에는 보러 오기도 했다. 그 품위 있는 노부인은 신속한 특별대우가 어린 목숨을 건졌다고 생색을 내면서도, 그 정도로는 흡족하지 않은 듯 간호사와 젊은 의사들한테 이것저것 불만을 표시했다. 그러나 병원 구성원이건 가족들이건 약속이나 한 듯이 그들의 특별대우에서 나를 철저히 소외시켰다. 나의 소외감은 참담했다. 그들은 나를 없는 것처럼 대했다. 그들 사이에 나는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 혼자 병실을 지키고 있을 때 문병객이 나타날 적도 있었다. 그럴 때 그들은 나를 빤히 바라다보면서도, 어머, 아무도 없네, 하면서 돌아서곤 했다.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천대였다. 그이도 그걸 아는지 거의 병실을 뜨지 않았다. 아마 아이가 수시로 나를 찾지만 않았다면 그이 역시 있는 사람을 안 볼 순 없을 테니 숫제 없애버리려 들었을 것이다. 그이의 친구들이 문병을 올 적도 있었다. 그들 중엔 백일잔치에 낯이 익은 이도 있어서 나를 아주 몰라라 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들 또한 나에게 구원이 돼주진 않았다. 전화위복이지 뭐냐고 그이의 어깨를 치면서 하는 말은 지훈이의 회복만을 의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 또한 그이의 귀가를 다행스러워하고 있었다. 수인사가 끝나면 그이 또한 지훈이가 받은 귀빈 대우를 은근슬쩍 자랑하곤
했다. 지훈이 또한 귀티에 맞는 귀가를 한 셈이었다. 나만 돌아갈 집이 없었다. 지훈이가 퇴원하면서 우리는 곧바로 지훈이 고모네 아파트로 들어왔다. 양말짝도 제대로 꿰신지 못하고 황황히 뛰쳐나온 옥상집을 그후 다시는 가보지 못했다. 책까지 사보며 익힌 풀꽃 이름을 그이는 아직도 기억할까? 지훈이는 새 동네 유치원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런지 한 번도 그 옥상집 얘기를 하는 걸 듣지 못했다. 적응이란 곧 망각이라고 생각하건만 나는 그게 못내 서글펐다. 아직도 달맞이꽃은 달 뜰 무렵에만 필까? 그믐밤에 달맞이꽃이 피는지 안 피는지 못 봐둔 게 대단한 실수처럼 뉘우쳐진다. 그이한테 그걸 물어보고 싶지만 그이는 요새 말 붙이기도 어려울 만큼 무엇엔가 골똘히 팔려 있다. 나는 그런 그가 어디선가 부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못 들은 척해도 나는 그가 그걸 듣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달맞이꽃이 터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그의 귀에 그 소리가 안 들릴 리 없다.
아직 대낮인데 초인종 소리가 났다.
“그이가 벌써 들어오나봐, 엄마, 어서!”
나는 자지러지게 놀라면서 어머니에게 덮어놓고 손짓부터 했다. 내가 어머니에게 어서 하라는 것은 발에다 아무거나 신었으면 하는 거였다. 나는 귀티를 좋아하는 그이에게 어머니의 시커멓게 튼 발뒤꿈치를 보이기가 싫었다. 어머니는 엉겁결에 부엌방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현관문을 따보니 수금 온 요구르트 장수였다.
“나오세요. 누가 엄마더러 숨으랬수.”
나는 지갑을 찾으며 부엌방에다 대고 악을 썼다.
“나도 안다. 친정 식구 자주 드나들면 괜히 시집 식구한테 얕보이는 거.”
“그런 거 없어요, 이 집은. 누가 와야 말이지.”
“차차 드나들게 될 거다. 지훈이가 누군데.”
단순한 어머니는 곧 자신감을 회복하고 청소기를 끌고 안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과일 깎을게 좀더 앉아 계셔요.”
“싫다, 과일은 무슨. 김서방 오기 전에 휘딱 치우고 가련다.”
“이젠 그만 오셔도 돼요. 제가 다 할게요.”
“그러믄 오죽이나 좋겠냐? 열굴이 영 못쓰게 됐어, 이것아. 너도 놀란 가슴에 약 몇 첩 써야 하는 건데 이놈의 집구석은 제 핏줄 귀한 줄만 알았지, 남의 자식 귀한 줄은 통 모르니 내가 신역이라도 덜어주려고 오잖냐.”
과일도 내오기 전에 어머니는 근심스러운 얼굴로 다시 다탁에 앉았다.
“매사가 예전 같지 않고 좀 어렵더라도 꾹 참아, 알았쟈?”
“어려울 게 뭐 있어요. 우리 참견할 사람 아무도 없다니까요.”
“남편 대집 말이다. 김서방만 못한 남자도 사내 코빼기는 여편네를 어렵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벱이다.”
“아버지도 그랬수?”
“소싯적엔 야아, 말도 마라 너, 성남이 큰집에 보냈을 때 생각나지, 너도?”
모녀간엔 통하는 게 있나보다. 나도 그 얘기를 듣고 설던 참이었다. 내 밑으로는 동생이 다섯이나 된다. 연년생으로 막내를 낳았을 적엔 집이 극도로 어려울 때였다. 아버지가 기와일 나갔다가 지붕에서 떨어져 꼼짝 못 하고 누워 있을 때, 큰집에서 와서 들여다보더니 기껏 한다는 소리가 갓난 것을 자식 없는 부잣집에 양자로 보내자는 것이었다. 보낼 자리까지 대충 정해놓고 묻는 것 같았다. 악에 받친 어머니는 좋도록 하라고 갓난 것을 내주었고, 나중에 그걸 안 아버지가 길길이 뛰며 난동을 부리다가 깁스한 다리로 어머니를 냅다 걷어차 갈비뼈를 부러뜨린 일은 동네가 다 아는 사건이었다.
“그때 아버지 말씀대로 도로 뺏어오길 얼마나 잘했냐? 가안 어디로 보나 개천에서 난 용이야. 남 주어버렸으면 어쩔 뻔했냐.”
지금 고등학교 다니는 성남이는 공부를 잘해 그애만은 대학공부 시키는 게 아버지 어머니의 꿈이었다.
“그래도 그애 기르기 좀 어려웠수? 괜히 데려왔다 후회한 적도 있었을걸.”
“후회를 하다니, 얘가 큰일날 소릴 하네. 그애 찾아오고 나서 이날 이때까지 큰집 있는 쪽 하늘은 쳐다보지도 않는 내다. 내줄 때야 산후에 잘 먹질 못했으니 허한 김에 뭐가 씌었드랬나보지만서두.”
“그렇지만 엄마, 성남이 마음도 그럴까? 부잣집에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애블 위해선 그때 주어버린 게 낫지 않을까? 엄만 정말 그런 생각 안 들우?”
“에끼 이년, 어디 가서 그런 싸가지 없는 주둥아리 또 놀렸단 봐라. 에미 애비한테 버림받고 아무리 호의호식해도 그게 살로 가는 줄 아냐? 그건 다 헛거야, 헛거.”
어머니는 터무니없이 당당해져서 발까지 구르고 나서 뿌르르 청소기를 끌고 안방으르 들어갔다. 청소기 소리가 아무리 들들대도 어디선가 나직하고 그윽하게 그이와 지훈이를 불러내는 소리가 있다는 걸 지우진 못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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